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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조용히 조금씩 회복되는 세계
언뜻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이지만 적막과 고요로 가득 차 있는 숲속은 어딘지 오묘하다. 사람이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사람이 보이지 않는 세계. 눈에 보이는 건 동물뿐이다. 개들이 강에서 잡아 올린 물고기들을 서로 먹겠다며 으르렁거린다. 그때 근처에서 상황을 몰래 보고 있던 검은 고양이가 땅에 떨어진 물고기를 낚아채 달아난다. 눈앞에서 먹이를 빼앗긴 개들은 고양이를 뒤쫓기 시작한다. 한바탕 추격전이 벌어질 찰나 숲이 요동친다.
모든 것이 쓸려가고 난 후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재난이 어느 날 우리 앞에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 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라트비아에서 온 영화 ‘플로우’는 대홍수가 세상을 덮친 이후 살아남은 동물들이 등장한다. 호기심은 많지만 매사 경계하는 검은 고양이, 꼬리를 흔들며 반갑게 맞아주는 골든 리트리버, 잡동사니를 쌓아두고 행복해하는 여우원숭이, 모든 일에 관심 없는 듯 보이는 카피바라, 무리에서 쫓겨난 뱀잡이수리까지 대홍수가 아니었다면 접점이 없었을 인연이 모인다.
동물들의 대홍수 생존기 '플로우'
인간의 '말' 없을 뿐 소통은 충분
'흐름'에 몸 맡기고 즐기기만 하면
이미 한 차례 모든 것이 쓸려간 듯한 숲에 다시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고양이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높은 곳을 찾아 헤맨다. 고양이가 보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랐지만 물은 코끝까지 차오르고, 발을 버둥거려 보지만 점점 물속으로 가라앉을 뿐이다. 그때 낡은 배 한 척이 고양이 앞으로 다가온다. 겨우 배에 몸을 실은 고양이는 한숨 돌리지도 못한 채 항해를 시작한다. 얼마 후 비슷한 사정으로 배에 탑승하는 동물들과 만나고 그들 나름 경계하고 날을 세우지만 생사가 걸린 여정 앞에서 서로를 구해주고 또 어느 때는 작은 위로를 보낸다. 서서히 서로에게 스며든다.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고 땅에서는 끝없이 물이 차오를 때 어디선가 나타난 낡은 배는 노아의 방주와 닮아있다. 하지만 이 배가 나타난 이유를 지구 온난화나 종교적인 이유로 볼 수 없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물로 가득 찬 세계에 떠 있는 배 한 척과 거기 타고 있는 동물들의 이미지에는 보다 깊은 고민과 은유가 담겨 있을 뿐이다. 더불어 재난을 그리는 영화라고 해서 파괴만을 다루지 않는다. 무너지고 사라진 자리에서 조용히 조금씩 회복되는 자연의 모습도 담겨져 있다.
또한 ‘플로우’는 대사가 없는 영화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동물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소통하고 교감(말)한다. 동물이 하는 대사를 인간이 알아듣지 못할 뿐이다. 인간의 말을 하는 동물들에 익숙해져 있었던 걸까? 영화가 시작하고 동물들이 ‘말’을 하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영화는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생각임을 깨닫게 만든다. 동물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동물들의 몸짓이나 표정을 통해 그들의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고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동물들의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면 그들 또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 만난 동물들은 서로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하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들은 행동과 표정만으로도 서로를 이해한다.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은 동물이 동물답게 행동할 수 있는 연출에 공을 들였다. 이를 위해 동물들의 이야기를 공부하고, 동물들의 실제 소리를 녹음했다고 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플로우’는 낯선 감각을 일깨울지 모른다. 낯설지만 어색하지 않다. 설명하지 않지만 이해 가능하고, 은유와 비유로 채워졌으나 어렵지 않다. 의미를 찾지 않고 그저 영화의 흐름(flow)에 몸을 맡긴다면 영화가 주는 낯선 감각이 무척 즐거울 것이다. 더불어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3D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 ‘블렌더’를 사용해 만든 영화는 CG가 화려하진 않지만 사실적이다. 특히 동물들의 움직임은 사랑스럽고 자연 풍경은 신비로워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다.
2025-03-26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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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부디 확신을 의심하라
미국의 권위 있는 영화 시상식인 아카데미가 열리는 3월, 한국의 극장가도 소란스럽다. 각 부문 수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된 작품들이 아카데미 특별전, 혹은 기획전이라는 이름을 달고 상영되기 때문이다. 독창적인 작품, 배우들의 눈부신 연기 등을 한 번에 볼 수 있기에 시네필들이 설레는 시즌이 바로 지금이 아닐까 싶다.
올해 아카데미는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아노라’에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등 무려 5관왕을 안긴다. 미국 내 소수자와 비주류 문화를 조명하던 숀 베이커 감독은 ‘아노라’를 통해 다수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작품성에서도 좋은 평가를 얻었다. 특히 성 노동자와 계급 문제를 익숙한 신데렐라 서사와 연결한 점은 숀 베이커이기에 가능한 연출로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아카데미에서 각색상을 받은 에드바르트 베르거 감독의 ‘콘클라베’가 인상적이었다. 로버트 해리스가 2016년 출간한 동명의 장편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배우들의 연기,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설전, 강렬한 음악, 정교한 편집으로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특히 가장 경건하면서도 성스러운 장소에서 드러나는 비밀과 욕망 그리고 반전, 인물들의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확인할 때 이 영화가 왜 추리 스릴러물인지 알 수 있다.
영화는 교황의 서거로 충격에 빠진 ‘로렌스’의 뒷모습을 좇으며 시작한다. 교황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로렌스는 충격을 받지만 그에겐 애도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추기경 단장직을 맡고 있는 그는 차기 교황 선출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열쇠로 문을 잠근 방’을 의미하는 ‘콘클라베(conclave)’는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를 의미한다. 교황 서거 즉시 모든 추기경들은 기존의 직위가 해제되지만, 콘클라베를 지휘해야 하는 추기경 단장만은 그 직이 유지된다. 올곧고 강직한 성품을 지닌 로렌스는 교황 선거권을 지닌 108명의 추기경들을 소집하고,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벌어질 수 있는 모든 문제를 통제하며 선거를 이끈다.
교황이 선출되기 전까지 핸드폰이나 통신 기계를 사용할 수 없기에 추기경들은 외부와 단절된 채 오로지 투표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새 교황의 탄생은 쉽지 않다. 108명의 추기경들이 차기 교황이 되길 원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 내는 방식이기에 따로 후보가 존재하지 않는다. 교황이 되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여 선거 운동도 할 수 없다. 게다가 가장 많은 표를 얻는 후보가 당선되는 것도 아니다. 3분의 2 이상 찬성해야 교황으로 선출될 수 있기에 투표의 향방을 쉽게 점칠 수 없다. 영화는 사흘 동안 6번의 투표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려낸다.
지리멸렬한 투표가 반복되자 가장 성스러운 선거라고 자부하는 ‘콘클라베’에도 음모와 술수가 암약한다. 강경한 개혁파와 최악을 막으려 차선을 선택하는 진영이 갈등하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다. 로렌스는 그 사이에서 여러 전언과 정황을 목도하며 유력 후보들의 비밀을 알게 된다. 누구보다 고귀하고 순결하다고 믿어졌던 그들의 민낯이 드러난다. 이때 추기경들의 욕망은 종교나 정치적 문제로 보이지 않는다. 흠결 없는 인간은 없음을, 혹은 신 앞의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 알려주는 듯하다.
로렌스는 첫 선거를 앞두고 “확신이야말로 통합의 강력한 적이니 의심하라”고 말한다. 확신은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닫게 한다. 갈등과 분열을 멈출 수 있게 하는 건 확신이 아니라 의심하고 의구심을 가질 때이다. 그런 의미로 마지막 투표에서 추기경들이 날 선 경계와 확신을 내려놓으며, 앞선 결과와 전혀 다른 선택을 할 때는 감동적이다. 그것은 동화 같으면서도 혁명적이다. 확신으로 들끓던 문 닫힌 세계에 문이 열리고 새 시대가 들어서는 희망을 본다.
2025-03-1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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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내 안의 진짜 고통과 마주하기
언젠가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간 적이 있다. 누군가의 희생에 슬퍼했고 비극 속에 사라진 누군가를 추모했다. ‘리얼 페인’을 보며 비극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내가 ‘진짜 고통’을 느꼈었던 건지 의심이 들었다. 그러니까 당시를 살지 않았던 내가 사진 몇 장과 교과서에 적힌 지식만으로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제시 아이젠버그 감독의 ‘리얼 페인’은 역사적인 비극과 개인의 고통을 나란히 세우며 진짜 고통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생김새부터 성격, 취향까지 모든 것이 다른 사촌 ‘데이비드’(제시 아이젠버그)와 ‘벤지’(키에란 컬킨)가 오랜만에 만난다. 그들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의 고향 폴란드로 여행을 가라며 돈을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할머니는 죽을 고비를 넘기며 미국으로 건너온 생존자이자 이민자였다. 손주들이 뿌리를 잊지 말라는 숨은 뜻일까. 사촌은 할머니의 유언대로 폴란드로 떠난다. 최종 목적지는 할머니가 살았던 집에 가는 것이지만 그들은 먼저 ‘홀로코스트 투어’를 하기로 결정한다.
데이비드는 벤지와의 여행이 어색할 것이라 생각한다. 한때는 형제처럼 친밀한 사이였지만 데이비드가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벤지와 멀어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두 사람은 할머니의 유언이 아니었다면 마주칠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데이비드는 여행 전부터 초조해 보인다. 가족과 떨어지는 것도 불안한데 약속장소인 공항으로 가는 길까지 막힌다. 게다가 벤지에게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답이 없다. 급하게 공항에 도착한 데이비드는 몇 시간 전부터 도착해 공항에서 놀고 있었다는 벤지를 보며 어처구니없으면서도 한편으론 안심한다. 벤지는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홀로코스트 투어를 중심으로 진행되기에 다소 무겁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리얼 페인’은 지금까지 보았던 홀로코스트 영화와 결이 다르다. 이 영화는 어떻게 하면 비극을 더 참혹하게 보여줄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각자가 어떤 방식으로 비극을 받아들이고 애도할 수 있는지 살핀다. 이는 거침없이 행동하고 말하는 벤지 덕분에 가능하다. 독일군에 맞서 싸운 민중의 동상 앞에서 우리는 조용히 사진을 찍는 것을 의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벤지는 정답이란 없다는 듯 투어의 일원들이 민중이나 독일군이 되어보는 체험을 하게끔 권하고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
사실 어떤 문제든 감정적으로 대하는 벤지를 보는 건 불안하다. 유대인 수용소가 있는 도시로 가는 기차에서는 “80년 전 유대인들은 꼬리 칸에 가축처럼 실렸을 것”이라며 일등석 자리를 박차고 끝 칸으로 이동한다. 벤지는 짧은 시간이나마 그들의 고통을 온전히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는 홀로코스트 투어가 진정한 애도와 공감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데이비드는 그런 벤지가 어디로 튈지 몰라 좌불안석이다. 그러고 보면 데이비드는 ‘우리’와 닮았다. 적당히 자신을 감추고 관계에서도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비극에 관심을 가지지만 그것이 나의 삶과는 연결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리얼 페인’은 불안정한 벤지의 감정을 통해 영화 주제로 나아간다. 벤지는 정보만 나열하는 가이드에게 과거의 공동체와 현재의 우리가 연결되는 투어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당황한 가이드는 유대 전통에 따라 묘비석 위에 돌을 올리는 행위로 이름 모를 누군가를 추모하자고 제안한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를 잠식할 수 없으나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질 수 있다. 홀로코스트를 경유해, 할머니의 집으로, 데이비드와 벤지의 내밀한 이야기로 말이다. 그로 인해 영화는 내 안의 ‘진짜 고통’과 직시할 때 공동체의 고통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2025-02-2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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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장자를 주인공으로 삼지 않는 카메라
장손에게 시집온 외숙모는 일 년에 8번의 제사상을 차린다. 이제는 제사상 정도야 눈 감고도 차린다고 말하지만, 그 일이 만만치 않음을 알고 있다. 그 와중에도 외숙모는 장손이라는 역할을 물려받은 아들이 장가를 가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다. 유산은 물려주지 못할지언정 제사만은 물려줄 수 없다는 외숙모의 의지는 가족 모두가 받아들인 지 오래다. 올해 설 명절을 앞두고 차례상을 차리는 외숙모를 보며 영화 ‘장손’이 떠오른 건 자연스러웠다. 아마도 가부장제에 익숙한 우리에게 이 영화는 결코 낯선 풍경이 아닐 것이다.
‘장손’은 3대에 걸친 대가족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모이면서 시작하는 영화다.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 전을 부치는 여성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푸념과 농담을 늘어놓는다. 집안의 어른인 할머니는 그런 며느리와 딸, 손녀를 보며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며 핀잔을 준다. 그때 집안의 장손 ‘성진’이 도착한다. 장손이 오면서 본격적인 서사가 진행되지만 사실 제삿날 장손이 하는 일은 별로 없다. 장손은 그저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다.
영화는 장손이 아니라 김씨 집안의 여성들을 따른다. 집안 여성들은 제사상을 차리는 것뿐 아니라, 가족이 경영하는 두부 공장의 일도 주도한다. 두부 공장은 집 바로 옆에 있는데 여성들은 공장과 집을 오가면서 가사노동과 집안 경제까지 책임지고 있다. 그러니까 영화의 서사는 장손을 중심으로 한 가부장제의 모순을 담는다고 볼 수 있지만, 카메라는 장자를 주인공으로 삼지 않는다. 카메라가 따르는 적자는 바로 김씨 집안의 여성들이다.
그녀들은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지만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존재들이다. 손녀 ‘미화’는 제사를 일찍 지내자는 말을 전하라며 장손인 동생을 할아버지 방으로 밀어 넣는다. 그런데 가만 보면 그녀들이 말을 할 수 없었던 건 여성들 스스로에 원인이 있다. 할머니는 제사 음식을 만드는 딸과 며느리, 거기다 임신한 미화에게는 에어컨을 틀지 못하게 했지만 성진에게는 손수 에어컨을 틀어준다. 미화에게는 제사 음식을 손도 못 대게 하더니 장손에게는 음식을 허락한다. 집안 남성들은 어떤 말도 할 필요가 없다. 할머니와 엄마가 먼저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미화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지켜보며 자신의 말에 힘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로 인해 성진을 할아버지에게 보내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이는 가부장제에서 미화의 생존 전략일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을 통해 말해지는 존재였음을 알린다. 어쩌면 영화는 시대착오적이라고 할 수 있어 보이지만 단순히 젠더 갈등으로만 풀 수 없다. ‘장손’은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세계 또한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한국 사회의 굵직한 역사를 관통하며 좌절을 배웠고, 평생을 트라우마에 갇힌 채 살아온 인물들이다. 영화는 그들의 아픔 또한 함께 보듬어 안는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가족영화를 만나왔다. 그 중 ‘장손’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가족의 삶을 돌아보고 떠나보낼 줄 아는 시선을 가졌기 때문이다. 영화 속 가족은 한 번의 제사와 한 번의 장례를 치르며 여러 번의 이별을 경험한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여운을 남긴다. 장손을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할아버지가 갈림길에서 잠시 고민하다 어딘가로 향한다. 롱숏으로 비추는 눈 내리는 마을의 전경. 할아버지의 모습이 점처럼 보일 때까지 카메라는 오래 지켜본다. 마치 배웅하듯 할아버지를 떠나보내는 롱숏, 롱테이크다. 오정민 감독은 한 가족사의 이야기를 아련하고 서정적인 방식으로 풀어낸다. 여름에서 가을로, 겨울로 넘어가면서 계절을 담아내고, 가족사에 얽힌 이야기는 미스터리한 연출로 긴장감을 부여한다. 그로 인해 가족의 역사를 감히 함부로 재단할 수 없게 만든다.
2025-02-1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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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왜 우리는, 우리에게 총을 겨누어야 할까?
분열의 시대다. 좌우만 남았다. 두 개로 쪼개진 세계를 지배하는 건 폭력이다. 폭력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건 폐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파괴된 세계에 ‘사람’은 없다. 미국에 내전이 일어났다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시빌 워: 분열의 시대’를 허구라고 할 수 없어 보인다. 이 세계는 여전히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신념이나 이념의 차이로 불거진 갈등 앞에서 누구 하나 물러설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헌정을 파괴한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 연방정부에 반발해, 미국의 19개 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며 최악의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를 다룬다. 특히 영화에서는 캘리포니아주와 텍사스주를 주축으로 한 막강한 전투력을 지닌 서부군과 힘을 잃은 연방정부군의 격렬한 대립에 초점을 둔다. 오프닝은 긴장한 대통령이 카메라 앞에서 연설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대통령은 미국 시민 ‘모두’에게 말하지 않는다.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시민은 적으로 규정하고, 조속히 미국의 시민으로 돌아오기를 촉구한다. 도시는 이미 무장한 군인들과 탱크에 점령당했지만, 대통령은 마치 그런 현실을 보지 못하는 듯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창밖으로 폭격을 맞은 건물이 화염에 휩싸여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다.
영화에서는 내전이 일어나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통령 편에 선 정부군과 대립하는 반정부군, 살기 위해 물을 달라고 소리치는 시민들의 혼란한 상황만을 조명한다. 이때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모습을 어떠한 감정도 없이 바라보는 종군기자들이 등장한다. 베테랑 사진기자 ‘리’와 취재기자 ‘조엘’, 은퇴를 고려하는 노년의 기자 ‘새미’는 대통령을 인터뷰하기 위해 백악관이 있는 워싱턴으로 향한다. 그리고 ‘리’를 롤 모델로 삼고 있는 신입 ‘제시’까지 합류하며 1379㎞의 여정이 시작된다.
로드무비의 형식을 띠고 있는 영화는 기자의 시선으로 디스토피아 미국을 그린다. 길거리에는 주검들이 넘쳐나고, 언제 폭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시민들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혼란한 가운데 리는 냉철히 상황을 판단하고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찍는 것이 마치 자신의 사명이라도 되는 듯 행동한다. 리는 기자의 역할이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때 영화는 의도적으로 기자들이 보다 좋은 컷을 위해 판단을 내려놓고 그저 ‘찍’는 것처럼, 군인 또한 정의를 위해 총을 드는 것이 아니라 나와 반대되는 쪽을 무차별적으로 ‘쏘’는 것임을 알린다.
이는 앨릭스 갈런드 감독의 의도이다. 어떤 가치관을 내세우기보다는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으로 분열의 시대를 보여준다. 그로 인해 영화에서는 전쟁영화의 스펙터클함은 찾아볼 수 없다. 군인이 총을 쏘아 누구를 맞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잔인한 순간을 전달하려 애쓴다. 특히 대통령을 찾아 백악관으로 들어가는 장면에 이르면 실제 전쟁터에 던져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무엇을 위해 왜 우리는, 우리에게 총을 겨누어야 하는 것인지, 국가란 무엇이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무능력한 국가에 분노하고, 소통이 단절된 상황에서 무엇도 할 수 없어 무기력해진다. 지난해 12월 3일 대통령의 계엄령 이후, 국민들이 겪은 공포와 그 이후에 벌어지고 있는 수없는 갈등과 균열을 생각한다면 영화 속 현실을 허구라고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세계는 점점 진화하고 있는데 민주주의는 퇴행한다. 증오와 분노는 더욱 심화한다. 정치적 분열이 어디까지 흘러갈 수 있는지 그리는 ‘시빌워: 분열의 시대’는 어떤 것도 질문하지 않는 기자의 눈을 따르지만, 영화를 본 우리는 눈을 감을 수 없다. 분열의 시대에 고통받는 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2025-01-15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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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내가 '나'라는 괴물을 낳는다
더 근사하고 완벽한 나를 꿈꾸는 건 누구의 욕망일까?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극단적으로 나를 훼손하는 주인공이 여기 있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파국으로 향하는 종착지임을 알지만 멈출 수 없다. 이미 맛본 과즙이 너무나 달콤하기 때문이다. 코랄리 파르쟈 감독의 ‘서브스턴스’는 욕망이 나를 잠식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잔인하게 일깨우는 영화다.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였던 ‘엘리자베스’(데미 무어)는 현재 TV 에어로빅 쇼 진행자로 카메라 앞에 서고 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과거와 달리 초라한 모습이다. 게다가 50번째 생일을 맞이한 그녀는 에어로빅 진행마저 그만둬야 하는 위기에 처한다. 프로듀서가 나이 든 엘리자베스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며 ‘어리고 섹시한’ 여성을 찾는 데 혈안이기 때문이다. 충격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엘리자베스는 자기 얼굴이 걸려 있던 도로 간판이 철거되는 모습을 넋 놓고 보다 교통사고까지 당한다. 자동차가 박살 날 정도의 큰 사고였지만 거짓말같이 한 군데도 다치지 않은 엘리자베스. 한바탕 눈물을 쏟고 병원을 나선 그녀는 코트 주머니에 든 정체 모를 USB를 발견한다.
7일 동안 젊은 몸을 얻을 수 있는 약물 서브스턴스의 정보를 알게 된 엘리자베스는 주저하지 않는다. 젊음을 가질 수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듯 약물을 투입한다. 영화는 약에 대한 과학적 근거나 논리를 제시하지 않는다. 마치 허무맹랑한 설정이 영화를 지탱하는 동력이라도 되는 듯 무섭게 몰아칠 뿐이다. 그때 엘리자베스의 몸에서 새로운 자아, 아름답고 젊은 ‘수’(마가렛 퀄리)가 태어난다. 영화는 처음부터 엘리자베스의 몸에서 탄생한 수가 엘리자베스와 같은 인물임을 잊지 말라고 주지시킨다.
수는 엘리자베스가 갖고 싶은 젊음이며 못다 이룬 청춘이다. 그런데 ‘나’의 욕망을 반영해, 또 다른 자아를 얻었음에도, 엘리자베스는 이전보다 더 큰 상실감을 느낀다. 7일은 엘리자베스, 7일은 수로 살아간다는 서브스턴스의 규칙만 잘 지키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겠지만, 균형을 유지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특히 일주일 동안 젊고 매력적인 수가 이룩한 것들을 확인할 때면 엘리자베스는 비참해질 뿐이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수가 자신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질투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엘리자베스의 상실감을 거울을 보는 장면을 통해 전달한다. 탄력 잃은 엉덩이와 뱃살을 바라보며 그녀가 제 몸을 혐오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만든다. 그런데 그녀가 비참한 이유는 나이듦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젊음만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나이 든 자신이 문제적 인간이 된다. 이유 없이 해고당해도 그저 받아들여야 하며, 더 이상 상품이 되지 못하는 몸은 불신의 이유가 된다. 젊음을 되찾은 ‘수’가 자신을 모욕한 방송국으로 다시 갈 수 있었던 이유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사실 엘리자베스의 몸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지만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타인의 평가뿐이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서브스턴스’는 이상한 영화다. 비논리적이고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음에도 점점 그 상황에 수긍하게 된다. 그리고 엘리자베스가 그토록 집착하던 아름다움이 비단 그녀 개인에게 국한된 문제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우리 사회의 아름다움에 대한 강요, 여성의 외모를 소모품처럼 소비하는 미디어, 아름다움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허상이 엘리자베스와 수를 ‘괴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영화의 엔딩에 가까워질수록 끔찍함의 강도가 높아진다. 괴물이 되어버린 ‘엘리자베스’는 악몽으로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악몽은 잔인하면서도 슬프다. 영화의 장르가 왜 바디 호러물인지 납득이 간다.
2025-01-01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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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지는 삶에 익숙해지지 않기
스포츠 영화를 보는 이유는 반전과 짜릿함, 감동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주인공의 의지와 열정, 불꽃 튀는 경쟁으로 이어지는 스포츠 영화의 구조는 비슷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럴까? 스포츠 영화 중에 대중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은 많지 않다. 배우의 연기력은 기본이고, 실제 운동선수 같은 실력과 함께 속도감과 리듬감을 표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스포츠 영화 제작에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스포츠와 드라마의 균형도 맞춰야 하니 어려운 일일 것이다.
스포츠를 소재로 한 한국영화 중 성공한 작품을 꼽자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국가대표’(2009) 정도다. 그렇다고 스포츠 영화가 제작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비교적 최근작으로 서윤복 선수와 손기정 감독이 1947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이룬 감동적인 승리를 스크린에 옮긴 ‘1947 보스톤’이 있으며, 천만 감독 이병헌의 후속작으로 기대를 모았던 ‘드림’도 홈리스들의 축구 경기를 다룬 스포츠물로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신파(감동)와 스포츠 사이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장항준 감독의 ‘리바운드’는 2012년 전국 고교농구대회에서 최약체로 평가받던 농구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농구 경기 장면을 컷분할 없이 롱테이크로 담아내며 현장의 생생함을 전달하고 있으나 이 영화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지난주 또 한 편의 스포츠 영화가 개봉했다. 한국 최초로 배구를 소재로 한 영화 ‘1승’은 탄탄한 시나리오로 정평이 난 신연식 감독과 뛰어난 연기력을 자랑하는 배우 송강호의 만남으로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물론 ‘1승’도 전형적인 스포츠 문법을 따른다는 점에서 그다지 새롭지는 않다. 결속력이 부족한 팀과 비전을 잃은 감독이 일치단결하여 감동을 자아내는 과정은 어쩐지 익숙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스포츠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승리’에 목적이 있지 않다.
영화는 이겨본 적 없는 감독과 이길 생각이 전혀 없는 괴짜 구단주, 이기는 법을 모르는 선수들까지 승리의 가능성이 1%도 없는 프로 여자배구단 ‘핑크스톰’의 여정을 그린다. 배구단 핑크스톰은 에이스 선수 성유라의 이적으로 해체 위기에 직면한다. 이때 재벌3세가 배구단을 인수하면서 우진에게 감독을 제안한다. 우진은 한때 실력 있는 선수였지만, 감독으로서는 10% 이하의 승률로 퇴출과 파면, 파산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별 볼일 없는 운동인이다. 그런 그에게 감독직이 오자 우진은 이상하다. 게다가 구단주는 시즌 중에 딱 한 번만 이기면 된다는 조건을 걸자 불안할 정도다.
인생이 고달픈 우진은 자신의 앞날에 이보다 더 매력적인 제안이 주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게다가 1승만 하면 되니 부담도 없다. 대충 감독을 맡다가 이직을 하려는 우진은 시즌이 시작하자마자 전패로 끝날 수도 있음을 자각한다. 지는데 익숙한 선수들이나 의욕 없는 감독에게 1승은 말처럼 쉽지 않다. ‘1승’은 배구 경기 특유의 긴장감과 속도감을 통해 관객의 시선을 끌지만, 다른 한편으로 스포츠를 금전적 가치로 환산해서 바라보고 있어 흥미롭다. 지금까지 스포츠를 땀이나 열정으로 정의 내렸다면, 이 영화는 지는 것마저 하나의 콘텐츠로 판매되는 상황을 그린다.
영화는 스포츠 영화답게 배구 게임에 공을 들인다. 특히 시즌 마지막 핑크스톰 게임은 실제 경기장에 있는 것 같이 생생하다. 하지만 영화가 진짜 말하고 싶은 바는 배구가 아니다. 영화는 모두가 욕망하는 1등이 아니라, 1승을 원한다. 승리 아니면 실패라는 공식에서 벗어나 간절한 1승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그로 인해 패배와 좌절에 익숙해지지 않아야 한다고 독려한다. 거기에 스포츠와 유머는 덤이다.
2024-12-18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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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마녀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마녀는 판타지 영화에만 나타나는 존재가 아니다. 그녀들을 ‘마녀’라고 지목하고, 사냥을 해야 종교 제도가 유지된다고 생각했던 시대는 분명 존재했다. 실제로 ‘마녀’ 담론은 중세 유럽을 휩쓸었고 갖가지 말도 안 되는 명목으로 마녀사냥이 자행되었다. 영화 ‘위키드’는 사악한 서쪽 마녀의 죽음 소식을 알리며 시작한다. 날개가 달린 기이한 원숭이들이 날아다니는 이상한 나라, 평온하고 아름다운 도시의 사람들은 마녀의 죽음에 기뻐한다.
영화는 죽은 마녀가 누구인지 알려주기 위해 과거로 돌아간다. 마녀는 초록 피부를 가진 ‘엘파바’(신시아 에리보)다. 사람들은 나와 다른 그녀를 훔쳐보느라 바쁘다. 엘파바는 그런 시선이 낯설지 않다는 듯 행동하지만 상처받지 않을 리 만무하다. 그녀는 남과 다르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외면당했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차별받았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도 잊은 채 스스로의 존재를 숨기기에만 급급했던 그녀는 걷지 못하는 여동생을 돌보기 위해 입학한 대학교에서 비로소 꿈을 꾸기 시작한다. 오즈의 마법과 현실이 교차하는 학교에서 엘파바의 능력을 알아봐 준 이는 총장 ‘모리블’(양자경)이다.
이 학교에는 또 다른 마녀가 있다. ‘글린다’(아리아나 그란데)는 엘파바와 모든 것이 다르다. 아름다운 외모와 상냥한 성격으로 주변을 챙기는 글린다는 모두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다. 하지만 천사 같아 보였던 글린다는 자신이 원하는 바는 어떻게든 가지고 마는 성격이다. 글린다는 모리블을 스승으로 둔 엘파바를 질투하여 그녀를 따돌리는 주동자가 된다. 영화 초반부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남과 달라 외톨이가 되는 엘파바와 겉과 속 마음이 다른 글린다의 관계에 집중한다. 어쩌다 룸메이트까지 된 두 사람은 불편한 동거를 이어가며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던 두 사람은 우연한 사건으로 서로의 결핍을 확인한다. 모리블에게 마법을 배우고 싶었던 글린다와 약간의 관심이 필요했던 엘파바는 서로를 채워주는 유일한 존재가 되어 우정을 나눈다. 두 사람의 우정과 연대에 감동을 받을 즈음, 불현듯 영화는 우정 이야기가 아니라 마녀의 탄생을 알리는 영화임을 상기한다. 엘파바를 각성시키는 사람은 오즈의 최고 마법사이다. 마법사와 만나게 된 엘바파는 기대감에 들뜬다. 난생처음으로 자신을 증명할 기회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가슴 뛰는 여정을 함께하는 친구도 글린다이다.
엘파바를 향한 차별과 편견, 그리고 엘파바와 글린다의 갈등과 우정을 그린 ‘위키드’는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전개를 보여준다. 이때 인물 중심의 영화라고 볼 수 있지만 영화를 특별하게 하는 건 인물이 아니다.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영화답게 춤과 음악이 빠지지 않는데, 특히 뮤지컬 넘버를 그대로 살린 점이 영화의 매력이다. 또한 ‘위키드’는 원작 뮤지컬의 스토리를 충실하게 따르면서도 환상적인 마법 세계의 재현, 즉 판타지 장르를 강조하고 있어 영화만의 매력을 더한다.
분명 ‘위키드’는 볼거리가 풍성한 영화이다. 그러나 영화 속 현실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초록 피부로 태어난 엘파바가 살아가는 현실은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마녀는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혐오의 대상이 되어 결국 사회로부터 배제당한다. 영화에서 마녀사냥이 있기 전 동물들을 먼저 탄압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적’을 만들어야 사회를 통치할 수 있다는 믿음은 폭력과 희생을 정당화한다. 권력자들은 오즈의 찬란함과 신비함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자신들과 다르거나 약한 자들,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적으로 규정했다. 그리하여 엘파바는 마녀가 되었다. 물론 그녀가 마녀가 된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지만 말이다.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그녀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 보인다. 마녀로의 삶을 선택한 엘파바가 무엇을 증명할지 2편이 기대된다.
2024-12-04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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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자유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진 검투사 ‘막시무스’(러셀 크로우)의 모습이 생생하다. 열광과 광기의 콜로세움, 역동적인 액션과 인물들 간의 들끓는 파토스까지 2000년 개봉한 ‘글래디에이터’는 놀라운 영화였다. 그로부터 2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글래디에이터 Ⅱ’가 개봉했다. 1편에 이어 2편도 직접 연출한 감독 리들리 스콧은 전편보다 더 화려하고 웅장한 스케일로 고대 로마 시대를 완벽히 재현하며 왕의 귀환을 알렸다.
‘글래디에이터’ 1편이 전쟁 영웅에서 노예로 전락한 ‘막시무스’가 황제 ‘코모두스’의 폭정 아래 신음하는 로마와 자신의 명예를 찾는 여정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2편은 그로부터 2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시작한다.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누마디아 왕국의 실질적인 지휘자 ‘하노’(폴 메스칼)는 정복자 로마군에 맞서지만 압도적인 화력과 병사를 가진 로마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결국 ‘하노’는 이 전쟁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포로가 되어 로마로 끌려온다. 고대 로마 시대로 단숨에 진입하는 이 오프닝은 ‘하노’에서 ‘루시우스’라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찾아가는 여정의 첫걸음이기도 하다.
리들리 스콧 감독 '글래디에이터 Ⅱ'
정국 혼란 속에서 만들어지는 영웅
검투, 살라미스 해전 장면 인상적
하노는 어린 시절 ‘루시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고귀한 존재였지만 황권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로마 바깥을 떠돌았다. 아내를 만나 누마디아 왕국에 정착했지만 노예가 되어 로마로 돌아온 하노의 인생은 영웅의 일생과 닮아있다. 하노는 지금의 로마가 자신이 알고 있던 그 로마가 아님을 눈치챈다. 로마 제국은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통합하며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폭군 카라칼라·게타 쌍둥이 황제 통치 하에 안에서부터 썩어가고 있다. 그 와중에 발톱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는, 검투사들의 주인 ‘마크리누스’(덴젤 워싱턴)는 ‘하노’를 이용해 황권을 차지하고자 한다. 폭압적인 지도자로 사회가 안에서부터 무너질 때, 오히려 권력의 권위는 추락하고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각축하게 되는 것이다.
아들이 아닌 로마를 잘 통치할 수 있는 이에게 권력을 계승하고자 했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꿈꾸던 로마는 무너졌다. 권력을 잡은 그의 아들 ‘코모두스’는 광기에 사로잡혔고, 뒤이은 쌍둥이 황제들 역시 시민들의 자유를 짓밟고 자신의 허영과 쾌락을 채우는데 바쁘다. 시민에게 자유가 없다면 로마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말로 로마의 미래를 꿈꿨던 황제는 과거의 인물이 되었지만, 그의 질문은 현재에도 유용하다. 지도자의 자질을 가지지 못한 자가 나라를 다스렸을 때 고통받는 건 과거에도 현재에도 시민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콜로세움에서의 결투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만큼 콜로세움이 중요 공간으로 등장한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욕망을 위해, 우매한 시민들의 감각을 마비시키기 위해 콜로세움은 화려한 혈투를 제공하지만 정작 콜로세움은 시민을 각성시키고 영웅을 만들어내는 장이다. 콜로세움에서의 혈투 끝에 하노는 자신이 누구인지 각성하며 비로소 로마의 꿈을 이룰 ‘루시우스’가 된다. 그 유명한 “권력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이 어떤 왕이 될 것인지 선언하는 말이다. 열광과 광기 사이에서 결투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결국 무능력한 황제의 권위에 맞선다. 자유를 잃은 시민은 왕을 저버리고 광기 어린 폭도로 변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사실 ‘글래티에이터’ 2편의 서사는 진부한 면이 있다. 하지만 2세기 로마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세트장과 마지막 전투 ‘살라미스 해전’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마치 당시 콜로세움 안에 있는 듯한 착시감이 들 정도다. “그 당시 로마의 냄새가 날 정도로 고증에 공을 들였다”는 노장 리들리 스콧 감독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영화를 보는 즉시 수긍할 것이다.
2024-11-2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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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흔하면서도 흔하지 않은, 보통의 가족
‘보통의 가족’은 네덜란드의 국민 작가로 불리는 헤르만 코흐의 소설 ‘더 디너’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다. 이미 전 세계에서 4번이나 영화화된 작품이기에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익숙한 서사와 연출에도 영화가 끝난 뒤 곱씹게 되는 매력이 있다. 영화 속 일이 내게도 벌어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지금까지 지켜온 신념을 한순간에 내던질 수 있을까? 영화는 내가 그들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되묻는다.
‘8월의 크리스마스’, ‘외출’, ‘봄날은 간다’ 등으로 한국형 멜로 영화를 다시 썼다고 평가받는 허진호 감독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장르로 돌아왔다. 그의 역사영화 ‘천문: 하늘에 묻다’나 ‘덕혜옹주’와도 또 다른 결이다. 허진호 감독은 전작들에서 미장센을 통해 영화적 감성을 보여주었다면 ‘보통의 가족’에서는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는 우리 사회의 병폐를 꼬집는다. 앞선 영화들과 달리 메시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인물들의 감정을 내밀하게 포착하는 점에선 역시나 허진호의 영화답다.
‘보통의 가족’은 누군가의 보복운전으로 한 아이의 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어린 딸은 혼수상태에 빠지는 사고를 보여주는 데서 시작한다. 재완, 재규 형제는 이 충격적인 사고와 깊숙이 연결되면서 이후 자신들의 신념이 충돌하는 것을 확인한다. 재완은 돈만 많이 준다면 살인자의 변호도 마다하지 않는 변호사이며, 동생 재규는 윤리와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소아과 의사이다. 형제는 이 사건의 변호인과 주치의가 되면서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한다. 또한 형제는 직업윤리에 맞게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사건을 대한다.
전처와 사별 후 지수와 결혼해 늦둥이를 낳아 키우는 재완과 치매에 걸린 노모를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는 연경을 아내로 둔 재규는 사소한 갈등은 있지만 행복해 보인다. 두 가족은 주기적으로 만나 밥을 먹는 등 우애도 나쁘지 않다. 물론 이 우애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님은 금세 밝혀진다. 원작의 제목이 ‘더 디너’이니만큼 영화에서도 식사 자리는 매우 중요하다. 밥을 먹는 횟수가 쌓일수록 가족의 민낯도 함께 드러나기 때문이다. 처음 식사 자리에서는 보통의 가족과 다름없이 화목해 보이지만, 이내 이들이 만난 이유가 치매에 걸린 노모를 요양원에 보내기 위해서였음이 밝혀진다. 불편한 침묵과 위선의 얼굴, 가식의 말들이 오고 가지만 그들은 세련된 매너와 우아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다음 저녁 식사는 재완의 집에서 이루어진다. 그들은 잘 차려진 식탁 앞에 앉았지만 아무도 수저를 들지 않는다. 그들이 저녁 식사를 가장해 은밀히 만난 이유는 자식들이 일으킨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서다. 그토록 이성적이었던 부모는 자식의 문제 앞에서 신념이나 윤리의식을 내던진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밥을 먹기 위해 만났지만 신경전을 벌이느라 밥 한술 뜨지 못한다. 가족 내에서 겉돌지만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지수만 밥을 먹을 뿐이다. 밥을 먹는 듯 보이지만 재완과 재규, 연경은 그럴듯한 말로 타인의 인생을 평가하고 자신의 가치관을 주장하기 바쁘다.
그러다 뉴스에서나 볼 법한 사건이 자신들의 문제가 되었을 때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아내의 모습을 보였던 연경은 아들의 범죄를 숨기기에 급급하다. 이성이 사라진 자리에는 감정만 남고, 위선을 떨쳐낸 모습에는 패악만 남는다. 그리고 마지막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모든 것이 폭발한다. ‘보통의 가족’은 제한된 공간에서 인물들이 연기하기에 자칫 지루할 수도 있으나 대화와 표정만으로도 역동적인 풍경을 만든다. 더불어 예상치 못한 사건과 마주했을 때 얼마나 쉽게 자신의 신념을 놓아버릴 수 있는지 깊이 파고든다. 우리는 과연 겉과 속이 다른 이 형제를 마냥 비난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본다.
2024-11-0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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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반려 애니메이션의 성취
인간과 자연, 인간과 기계 등을 다룬 애니메이션은 ‘반려’를 주로 이야기한다. 여기서의 핵심은 ‘동종’이 아니라 ‘이종’이 함께하는 삶이다. 애니메이션 속에서 인간이 빠져 있더라도, 인간과 다른 생명체의 공존을 이야기하는 작품도 많다. 최근 개봉한 ‘와일드 로봇’은 로봇과 동물이 동반자가 된다는 설정으로 다른 반려 애니메이션과 차별점을 둔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하늘에서 상자가 떨어진다. 상자 속에는 로봇 ‘로줌 유닛 7134’(로즈)가 들어 있다. 무인도에 불시착한 로즈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동물들만 있는 야생의 섬에서 로봇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게다가 무인도에서 로즈가 부서지지 않고 버티는 건 힘겨워 보인다. 다행히 로즈에게는 환경에 적응하고 행동을 모방할 수 있는 프로그래밍이 탑재되어 있다. 이내 동물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들의 모습을 모방하며 동물들 곁으로 다가가지만 생김새가 다른 로봇에게 곁을 내어줄 리 만무하다.
무인도가 목적지가 아니었음을 감지한 로즈는 본사로 귀환을 시도하지만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는다. 이를 지켜보던 동물들은 급기야 로즈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자신과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고, 함께 사는 일은 쉽지 않다. 로즈는 어쩔 수 없이 쫓기는 신세가 되고 조용했던 무인도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다. 이때 로즈는 우연히 기러기 둥지에 홀로 남겨진 알을 발견하고, 그 알을 훔치려는 여우 ‘핑크’가 합세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알을 깨고 나온 기러기 ‘브라이트빌’은 눈을 떠 처음으로 본 로즈를 엄마로 여기며 따른다. 하지만 로즈에게 빌은 도움을 줘야 할 대상일 뿐이다. 겨울이 오면 남쪽으로 떠나는 기러기들의 습성에 따라 빌도 무리들과 떠나야 하나, 작고 약하게 태어난 빌은 하늘을 나는 것은 고사하고 물에 뜨는 것도 어렵다. 방대한 지식을 가진 로봇 ‘로즈’와 무인도를 잘 아는 여우 ‘핑크’는 기러기 ‘빌’을 위해 작전을 세운다.
함께 어울려 살 수 없는 로봇과 기러기, 여우는 함께한 시간이 길어지면서 관계도 변화한다. 특히 로즈는 빌이 길을 잃을까 혹여 다치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이다. 기계적으로 빌을 대하던 로즈가 달라진 것이다. 로봇인 로즈가 엄마를 학습했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로즈의 행동을 학습의 결과로 보기에는 의구심이 든다. 빌을 보살피고 보호하는 것은 진심에서 우러난 행동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로즈를 빌도 의심 없이 엄마로 여긴다. 기러기 빌을 잡아먹으려고 했던 핑크도 빌의 자립을 응원하는데 마치 가족처럼 보인다.
이제 로즈를 감정이 없는 로봇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로즈는 이별을 슬퍼하고 사랑하는 이를 지켜야 함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느끼기 때문이다. 이는 로즈가 인간화되었다기보다는 시스템의 오류나 사랑이라는 마음이 새롭게 입력된 것이라 보는 게 적절해 보인다. 물론 그 이유를 애니메이션은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 섞일 수 없다고 믿었던 존재가 서로의 반려가 되고 변화한다는 점에 의미를 두면 어떨까 싶다.
로즈의 변화는 새로운 공동체를 꿈꿀 수 있게 하며 누구와도 연대할 수 있음을 알린다. 여우, 게, 비버, 곰, 사슴 등 한자리에 모일 수 없는 동물들이 싸움을 멈추고 혹독한 추위를 함께 견뎌내는 장면에서는 인류애마저 느껴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고 동물을 소유하려 하는 원흉이 누구인지 떠오르게 한다. ‘와일드 로봇’에는 인간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데 말이다.
2024-10-23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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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네가 너인 게 어떻게 약점일 수 있어?
최근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연이어 개봉하고 있다. 김혜진의 ‘딸에 대하여’,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와 ‘댓글부대’,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까지 모두 소설이 원작인 작품이다. 게다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더 개봉된다고 하는데, 이는 단순히 문자를 영화로 옮기는 것이라 치부할 수 없다. 소설 원작 영화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어 관객들에게 공감을 끌어낸다. 또한 이들 영화를 보면 원작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오는 것이 아니라, 감독의 연출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과 영화가 서로 다른 매체임을 인식하게 한다.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 중 단편 ‘재희’를 이언희 감독이 영화화했다. 소설에서 영화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다양한 에피소드가 추가되며 한편의 청춘물이 완성되었는데 감독의 연출력이 특히 눈에 띈다. 이언희 감독은 데뷔작 ‘…ing’(2003)를 통해 감성적인 로맨스를, ‘미씽: 사라진 여자’(2016)에서 미스터리를 통해 여성 서사를, ‘탐정: 리턴즈’(2018)에서는 추리와 코미디까지 장르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다양한 시도를 선보였다. 그리고 그는 20여 년이 지나 ‘대도시의 사랑법’으로 다시 ‘사랑’을 말한다. ‘...ing’에서 그렸던 차분하고 서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불완전해서 불안한 그러나 자유로운 청춘들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다.
영화는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스무살, 누구의 눈치도 보는 법이 없는 자유로운 영혼의 재희(김고은)와 세상과 거리 두는 법에 익숙한 흥수(노상현)는 우연한 계기로 한집에 살게 된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두 사람은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가십의 대상이 된다. 이후 둘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의 삶에 지지를 보내며 13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낸다. 이때 남녀가 한 공간에 산다고 하면 사랑 이야기겠거니 생각하겠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진부한 전개를 따르지 않는다.
이 영화는 여타의 청춘 로맨스물처럼 보이지만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차별과 편견을 말한다. 성소수자 흥수는 자신의 성 정체성이 밝혀지는 것이 두려워 있는 듯 없는 듯 학교생활을 하고, 잘 놀고 잘 표현하는 재희의 자유분방함은 함부로 손가락질해도 되는 존재로 취급당하기 일쑤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아주지 않는 사회에서 재희와 흥수는 주눅이 들지만, 함께 있기에 고통을 견딜 수 있어 보인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재희와 흥수의 우정을 그리는 동시에 그들 각각의 사랑에도 집중한다. 흥수는 누구를 만나도 깊이 사랑하려 들지 않는다. 혹여나 사람들이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될까 봐 언제나 상대와 거리를 두며 일회적인 사랑을 한다. 헤어져도 상처받지 않은 척, 쿨한 척 돌아선다. 반면에 재희는 매번 진실한 사랑을 찾아 헤매지만, 사랑은 험난하기만 하다. 특히 재희는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취향도 바꿀 정도로 사랑에 헌신적이지만, 그 사랑 때문에 폭력 앞에 놓인다. 사랑 때문에 울고 웃는 두 사람의 모습은 미숙한 사랑으로 한 번쯤 울고 웃었던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에 상처받았을 때 나의 곁에서, 나와 함께 있어 주었던 어떤 상대를 떠올리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퀴어를 소재로 한 영화는 무겁고 어두울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대도시의 사랑법’은 가볍고 경쾌한 연출로 유쾌하게 관람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폭력들을 가볍게 지나칠 수 없다. 영화 속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데이트 폭력 등은 현실에서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흥수와 재희가 당하는 폭력은 분명 다른 층위이지만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폭력은 내가 겪을 수도 혹은 내가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2024-10-0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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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오늘이 불행한 청춘들에게
퇴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출근이야?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다. 떠지지 않는 눈을 반쯤 뜨고 어제 입었던 옷을 대충 걸쳐 입고 집을 나선다. 마을버스 열두 정거장을 지나 지하철 1호선을 탔다가 다시 2호선에 올라 강남 사무실까지 장장 2시간이 걸린 출근길이다. 출근을 했을 뿐인데 치열한 전투를 한 차례 치른 패잔병 같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피곤하다. 벌써 집에 가고 싶다.
출퇴근이 힘들어도, 적성에 맞지 않은 일을 해도 ‘계나’는 참는다.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나기 위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재개발 아파트에 들어갈 희망에 부푼 엄마는 계나가 모아둔 3000만 원을 빌려 달란다. 계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그냥 아파트 평수를 줄여 가자며 엄마의 부탁을 흘려듣는다. 그러니까 계나는 어디서 살든 무슨 일을 하든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참을 수 없는 건 오늘 내가 먹을 점심 메뉴 하나 마음대로 고르지 못하는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오늘을 희생하는 것이 견딜 수 없다.
‘한국이 싫어서’의 주인공 계나는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풍족하진 않지만 자신을 사랑해주는 가족이 있고, 오래 사귄 애인이 원하던 직장에 취업했고, 좋아하는 일은 아니지만 꼬박꼬박 월급 나오는 회사도 다닌다. 겉보기엔 그럴듯한 삶이지만 계나는 답답하다. 행복하지 않다. 불행해서 한국을 떠나겠다고 꾸준히 말한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계나는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홀로 뉴질랜드로 떠난다.
장강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한국이 싫어서’는 소설 내용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장건재 감독의 연출 스타일을 살린다. 일상의 소소한 사건들이 계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녀를 둘러싼 주변 상황을 둘러보게끔 한다. 특히 계나의 뉴질랜드의 생활과 한국에서의 일상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장면은 단순히 두 삶을 비교하는 방식이 아니라서 좋다. 뉴질랜드에서 계나는 한국에서만큼 치열하게 산다.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며 부족한 영어와 인종차별까지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더 많다. 그럼에도 계나는 편안해 보인다. 이 지점에서 계나가 한국에서 왜 그토록 힘들었는지 알 수 있다.
영화 제목에서만 노골적으로 ‘한국이 싫다’고 할 뿐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은유적으로 이를 알리고 있는데 계나는 자신이 맹수들에게 잡아먹히는 작고 약한 ‘톰슨가젤’ 같단다. 치열한 경쟁과 약육강식이 당연시되는 한국에서 맹수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즉 계나에게 한국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더 많이 일해야 하고, 누군가와의 경쟁을 통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나라다. 계나가 보기에 한국은 불확실한 내일을 위해 오늘을 견뎌야 하는 ‘헬조선’이다.
한국을 떠나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던 계나는 미련 없이 한국을 떠났다. 그런데 영화에는 열심히 살다 보면 기회란 주어지는 것이니 떠나지 말라는 옛 남친, 한국을 떠나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여동생도 있다. 그들은 떠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소설 원작에는 없지만 뉴질랜드에 정착한 유학원장 가족의 모습은 의미심장하다. 타국에 안정적으로 정착한 이 가족은 행복해야 하지만 무언가 불안한 기색을 내비친다.
그들은 여기가 아니어서 떠났지만, 거기도 정답이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그런 의미로 이 영화에서 여러 번 반복하는 ‘한국이 싫어서’는 진짜 한국을 의미하는 것 같지 않다. 무한 경쟁 시대를 비판하는 동시에 내일을 위해 오늘을 저당 잡힌 청춘들에게 여러 선택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혹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롭게 시작해도 괜찮다고 청춘들을 위로하는 것 같다.
2024-09-2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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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나의 일이 될 수 있는 너의 이야기
김혜진 소설의 ‘딸에 대하여’가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대감도 있었지만 걱정이 먼저였다. 엄마의 목소리가 전면에 드러나는 일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을 영상 언어로 구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랑 감독은 침묵과 여백, 인물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것만으로도 문자와 영상이 다름을 알린다. 원작의 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영상 언어를 완성한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엄마의 집에 딸이 찾아온다. 이사를 해야 하니 돈을 빌려달라는 딸의 요청에 엄마는 대출을 알아보지만 돈을 빌리기 쉽지 않다. 결국 딸은 7년간 사귄 동성 연인을 데리고 엄마의 집으로 들어온다. 눈에 보이지 않을 땐 그런대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집에서 내 딸과 함께 있는 딸의 여자친구를 보는 일은 참을 수 없다. 딸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게 소원인 엄마는 “내 딸이 그럴 리 없다”며 현실을 부정해 보지만 바뀌는 건 없다. 엄마는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을 삼킨다. 아직 엄마는 딸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
엄마는 딸이 집으로 들어온 후부터 치매에 걸린 노인 ‘제희’를 돌보는 데 몰두한다. 병에 걸린 노인을 돌보는 일은 가족이라도 하기 힘든 일이지만, 엄마는 남인 제희를 헌신적으로 보살핀다. 제희는 젊은 날 한국계 입양아들을 지원하며 평생을 타인을 위해 살았던 인물이다. 그녀의 이름을 딴 재단이 설립될 정도로 존경받는 삶을 살았지만, 늙음과 병이 찾아온 제희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현재 제희는 세상에서 빠르게 잊혀지는 중이며 요양원의 골칫거리로 여겨진다.
엄마는 병든 제희에게서 딸의 미래를 보았다. 딸이 제희처럼 가족 없이 홀로 지낼까 봐 무섭다.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사랑을 하는 딸이 모두에게 외면당할까 봐 두렵다. 엄마가 제 몸이 부서져도 상관없다는 듯 제희를 돌보는 이유는 딸이 홀로 곤궁하게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또한 가족이 아니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음을 엄마는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제희를 존경하는 마음과 딸이 그리 살지 않기를 바라는 엄마의 양가적 감정이 영화를 통해 전달한다. 딸을 바라보는 얼굴, 한숨, 침묵, 편히 잠들지 못하는 시간은 엄마의 복잡함을 드러낸다. 결국 엄마는 꾹꾹 눌러두었던 말을 딸의 여자친구에게 건넨다.
대학 강사인 딸은 사회가 만들어놓은 기준을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는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모녀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그런데 서로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 엄마와 딸은 무척 닮았음을 알 수 있다. 생김새나 행동을 뜻하는 게 아니다. 딸은 동료 강사의 부당한 해고에 앞장서 항의하며 대학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엄마는 왜 남의 일에 앞장서냐며 타박하자, 딸은 동료가 겪은 일이 언제든 나의 일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엄마도 제희가 겪고 있는 일이 남의 일이 아님을 알고 있다. 다른 듯 닮은 두 사람은 언제든 내 일이 될 수 있는 남의 일에 침묵하지 않는다.
이처럼 영화는 타인을 위한 삶이 자신을 지키는 것임을 말한다. 엄마와 딸은 속한 세계도 사는 방식도 다르지만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로 인해 영화 말미에 엄마와 제희, 딸과 딸의 여자친구가 한 공간에서 가족의 시간을 보내는 장면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상기시킨다. 더불어 이들을 통해 생물학적 혈연에 기반하지 않는 느슨한 가족공동체를 꿈꿀 수 있게 한다. ‘딸에 대하여’는 엄마의 시선으로 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보인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영화는 훨씬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무연고 노인, 돌봄노동, 나이듦과 젊음, 성 소수자의 이야기까지 딸과 엄마의 이야기를 거쳐 우리에게 온다. 이 이야기가 언제든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잘 짜여진 쇼트를 통해 전한다.
2024-09-11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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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희망 없는 시대, 행복을 꿈꾸다
‘행복의 나라’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영화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관통한다는 점에서 ‘서울의 봄’과 닮아있지만, 사건의 최전선에서 물리적 충돌과 시시각각 변하는 정세를 긴박하게 좇는 ‘서울의 봄’과는 달리 일종의 후방-법정에서 일어난 ‘쪽지재판’을 사건화한다는 점에서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영화는 10·26 대통령 암살 사건 발생 이후 수사, 기소, 심리, 사형 구형까지 단 54일이 걸린 재판 과정을 그린다.
이때 추창민 감독은 54일 동안의 재판 과정을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기보다는, 비극적 시대 속 개인을 포착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로 인해 영화는 사건이 중심이 되기보다는 인물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주목하면서 사건 자체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공백을 메우기 위해 허구적 인물을 동원한다. 그러고 보면 감독은 역사 속 작은 틈새를 찾아 그 자리에 상상력으로 채우는데 일가견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광해군의 15일간의 행적이 빠져 있는 것에 착안해 만든 ‘광해, 왕이 된 남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이번 영화도 실제 있었던 정치 재판을 주 내용으로 삼으며 역사와 허구 그 사이를 교묘히 오간다.
영화 오프닝은 궁정동 대통령 안전 가옥에서 시작한다. 이때 카메라는 암살당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총알을 장전하는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관 ‘박태주’(이선균)의 모습을 포커싱한다. “오늘 해치운다”는 명령을 전해 받은 비서관들은 초조해 보인다. 바로 이날 대통령 암살 사건이 일어나고 곧이어 사건에 연루된 이들이 검거되며 재판에 넘겨진다. 이때 유일한 군인 신분으로 단심제가 적용된 박태주의 변호를 맡는 인물이 ‘정인후’(조정석)다.
영화는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던 군인 박태주, 사형선고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인후, 권력을 장악한 합수단장 ‘전상두’(유재명), 이 세 인물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영화 속 대부분은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데, 허구적 인물인 정인후의 경우 가장 극적으로 변화하는 인물이다. 정인후가 박태주의 변호인이 된 것은 정의나 신념 때문이 아니다. 그에게 재판은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게 아니라, 이기고 지느냐의 싸움”일 뿐이었다. 그런 정인후가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박태주와 전상두를 만나면서 변화하고 성장한다.
그런데 정인후의 성장은 꼭 긍정적이지만 않아 보인다. 정인후는 박태주의 사형선고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권력의 중심인 ‘전상두’ 앞에서 매번 좌절감을 맛보기 때문이다. 정인후와 군 검찰단 검사는 박태주의 행동을 두고 ‘내란의 사전 공모인지, 위압에 의한 명령 복종인지’를 두고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인다. 박태주에게 유리한 증인을 세우고, 자료를 찾아내지만 전상두는 ‘쪽지’ 하나로 모든 것을 무화시킨다. 재판을 감청하고, 재판부를 좌지우지하며, 일이 자신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폭력으로 해결하는 모습에서 정인후는 분노를 버리고 타협을 배우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그는 소위 말하는 좋은 변호사로 성장하지만, 희망 없는 시대에 ‘좋은’ 변호사는 무력하다.
‘행복의 나라’는 단순히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흘러가는 영화가 아니다. 엄혹했던 시대임에도 선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 무엇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알려주려 애쓴다. 물론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신파적인 장면들을 배치하거나, 정인후의 극적인 감정 변화가 영화에 몰입하는 방해 요소로 작동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군인 박태주를 연기한 고 이선균의 처연하고도 묵직한 연기와 그의 작은 미소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행복의 나라’는 충분히 의미 있는 영화이다.
2024-08-28 [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