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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재난 앞에서
가까운 미래, 일본의 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유타’와 ‘코우’는 인생의 절반을 함께 보낸 친구다. 교내 음악 연구 동아리를 만들 정도로 음악을 좋아하는 두 사람은 늘 붙어 다니며 소소한 사고나 장난을 치며 무료한 일상을 보낸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해도 함께라면 두렵지 않던 둘의 관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아직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유타와 달리 코우는 일본 사회의 부조리한 시스템을 알게 되면서 두 사람의 생각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모든 교과과정을 이수하고 이제 졸업식만 남은 교실의 풍경은 나른하다. 대학 발표를 기다리거나, 취업을 생각하는 등 아이들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고민하거나 결정을 끝낸 상황이다.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은 미래, 아이들은 불확실 속에서 위태롭지만 한편으로는 자유로워 보인다. 이런 아이들의 모습은 영화 ‘해피엔드’의 오프닝 시퀀스에서도 잘 포착된다. 소동을 일으키고 도망가는 아이들의 모습, 그 옆으로 빨간 점멸등이 꺼질 듯 말 듯 깜박인다. 언제 꺼질지 몰라 불안하기 짝이 없는 불빛이지만 어쩐지 지켜보고 싶은 빛이다.
영화는 유타와 코우, 그들이 속해 있는 음악 동아리 친구인 야타, 밍, 톰과의 우정을 통해 진행되고 있기에 학원청춘물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히 우정이나 관계의 변화로 설명할 수 없다. 이는 오프닝 이후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테크노 음악을 듣기 위해 클럽을 찾은 아이들은 교복을 입고서 당당히 출입을 요구한다. 미성년자는 출입할 수 없다고 해도 포기하지 않는 아이들은 관계자 전용 구역으로 몰래 들어가 음악을 듣는다. 하지만 유타와 코우가 음악을 듣는 시간은 짧다. 불법 단속을 나온 경찰에게 붙잡히고 말기 때문이다.
경찰은 일본인인 유타에게는 집으로 귀가하라며 훈방 처리하지만, 재일조선인인 코우에게는 체류 허가서를 요구한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일본에 살았음에도 여전히 일본의 국민이 될 수 없는 코우는 매 순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유령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이는 비단 코우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만 출신이지만 중국어를 못하는 밍과 졸업 후 미국인 아버지가 있는 미국으로 가려는 톰도 차별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네오 소라 감독의 ‘해피엔드’는 아이들의 시선에서 차별과 혐오, 폭력의 세계로 외연을 확장한다. 특히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유타와 코우가 교장의 슈퍼카를 망가뜨리는 장난을 치자, 분노한 교장은 학생들의 안전을 명목으로 AI 감시 시스템을 도입한다. AI는 교내 곳곳을 훑으며 교칙을 위반한 학생들에게 벌점을 부여한다. 처음엔 AI를 재미있는 놀이쯤으로 생각하던 아이들은 대학 입시에 영향을 미치는 벌점을 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검열하기에 이른다. 코우도 국가 장학금 수령을 박탈당할까 봐 불안하다.
기술 발전이 삶의 편리함을 가져왔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삶을 과연 행복하게 하는지 묻게 하는 장면에 이르면 이 영화가 그리는 세계가 우정이 아니라 재난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상에서 갑작스레 일어나는 지진, AI 감시하에 통제와 검열이라는 재난, 차별과 혐오를 키우는 사회적 재난까지 연이어 터진다. 이 재난 앞에서 인간은 저항하거나 투항하거나 몸을 숨긴다. 아이들도 AI 감시 시스템이라는 재난을 마주하며 투쟁하거나 침묵한다.
영화는 터질 듯 터지지 않는 재난 앞에서 그 어떤 해결책도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이 재난이 아이들의 세계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알린다. 졸업식을 마친 아이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길을 향해 걸어간다. 드디어 육교 앞에 선 유타와 코우는 헤어짐이 아쉬워 머뭇거리고, 지키지 못할 말을 늘어놓지만 돌아보지는 않는다. 꺼질 듯 꺼지지 않는 점멸등처럼 약한 빛을 내며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그들의 해피엔딩을 꿈꿔본다.
2025-05-21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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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인간다움을 위한 처절하면서도 처연한 행위
구병모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파과’는 60대 여성 킬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킬러물이라 하면 남성들의 전유물이었고, 그것도 젊고 잘생긴 배우의 몫이었다. 민규동 감독은 뻔한 고전 서사를 담백하면서도 흡입력 있게 풀어낸다. 특히 나이나 성별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여성 킬러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영화는 한 여자가 킬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데서 시작한다. 온몸에 멍이 든 소녀가 위태롭게 걷고 있다. 소녀를 보고도 무심히 지나치는 차들 사이로 남자 ‘류’의 차가 멈춘다. 소녀는 어딘지 비밀스러운 남자와 그의 아내가 있는 집으로 가고, 난생처음 가족의 사랑을 느끼나 그 행복은 짧다.
소녀는 살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살아남기 위해 킬러 ‘손톱’이 된다. 소녀의 삶에는 어둠과 죽음만 있을 뿐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이때 소녀 곁에 남은 단 한 사람의 죽음은 소녀를 완전히 무너지게 만든다. 소녀는 스승이자 은인이 준 이름 손톱을 버리고, 스스로 부여한 이름 ‘조각’(爪角)으로 다시 태어난다. 손톱이 인간으로 살고자 가진 이름이라면, 조각은 인간으로 살기를 체념한 이름이다. 조각은 미래도 희망도 꿈꾸지 않는다. 철저한 고립과 외로움을 선택한 그는 아무도 곁에 두지 않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지만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조각이 몸담고 있는 조직 ‘신성방역’은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의 죽음을 의뢰받고 처리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40여 년 동안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던 레전드 킬러가 바로 조각이다. 그러나 이제 조각은 늙었고 몸에 문제까지 생기면서 퇴물로 취급당한다. 모두가 그의 은퇴를 바라지만 조각은 떠날 마음이 없다. 킬러의 자질을 갖춘 그는 빠르고 증거를 남기지 않으며 냉철하다. 특히 그는 인간이 가지는 두려움이나 분노, 슬픔 등의 감정이 없다. 오래 함께 일한 동료의 뒤처리를 자신이 맡는 것으로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불필요한 감정을 낭비하지 않는다. 감정을 배제한 채 살아가는 조각은 마치 기계 같다. 하지만 그에게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감정을 깊숙이 눌려두고 있을 뿐이다. 감정을 내보일 때가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숱한 죽음들 속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을 봉인해두던 조각이 변한다. 가족도 친구도 만들지 않았던 조각이 죽어가는 개 한 마리를 살리고 그 개를 집으로 데려오면서부터다. 그 무엇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그가 변한 이유가 퇴물 취급을 받기 때문인지, 몸에 탈이 생겼기 때문인지, 조직을 떠나야 한다는 불안감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 한 번도 하지 않았을 연민 혹은 동정의 감정으로 조각의 일상이 뒤틀린다는 것이다.
흠집 난 과실(破果) 또는 여자 나이 16세(破瓜)를 일컫는 영화 제목 ‘파과’는 조각의 생애를 뜻한다. 평범한 10대 시절을 보낼 수 없었던 소녀는 상처받고 고통받으며 어른이 되었고, 흠집 난 인간으로 살았다. 영화는 파과를 의미하는 조각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교차해서 보여주며, 그가 살아남기 위해 한 선택과 행동에 집중한다. 그리고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생의 마지막 순간, 삶의 의미를 찾고 인간다움을 회복하기 위한 처절함을 그린다.
이 영화에서 조각을 연기한 배우 이혜영을 빼놓을 수 없다. 기억해보면 이혜영은 누군가의 엄마나 아내를 연기해도 누군가의 그 무엇으로 남지 않는 연기를 펼쳤다. 온전히 자신만의 서사를 쓰며, 특유의 카리스마와 고혹적인 목소리로 스크린을 채웠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면 배우가 아니라 그가 연기한 캐릭터만이 기억된다. ‘당신 얼굴 앞에서’의 무료한 듯 지적인 얼굴, ‘피도 눈물도 없이’의 강렬함, ‘파과’의 지친 듯한 무표정까지 모두 그이지만 매번 다른 얼굴로 자신을 지우는 이혜영의 연기는 주목할 만하다.
2025-05-0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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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사람, 밥 딜런
한 편의 시(詩)가 노래가 된다. 아름다운 문장들이 기타 소리에 맞춰 높이 멀리 날아올라 나에게로 온다. 노래가 얼마나 강렬하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지 우리는 밥 딜런을 통해 보았다. 세상과 불화하는 듯한 표정. 아무렇게나 내뱉는 듯한 무심한 말들은 한 시대와 만나 예술이 된다. 1961년, 스무 살이 된 밥 딜런은 자신의 음악적 우상인 ‘우디 거스리’를 만나기 위해 미네소타를 떠나 뉴욕에 입성한다. 희귀 유전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그를 위해 밥 딜런이 수줍게 노래한다.
‘컴플리트 언노운’은 밥 딜런의 전기 영화다. 슈퍼스타인 그의 이야기와 노래를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밥 딜런의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면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그의 노래가 아득해지고, 어느새 그는 잘 모르는 사람이 되어 멀리 달아난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의 음악적 행보와 그가 만났던 사람들, 그의 감정들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흘러가는 것을 확인한다. 그러다 결국 밥 딜런이라는 인물이 내가 아는 그가 맞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린다. ‘Like a Rolling Stone’의 가사이면서 영화 제목이기도 한 ‘컴플리트 언노운’처럼 밥 딜런은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사람’임을 확인한다.
뉴욕에 도착한 밥 딜런은 노래하기 위해 클럽을 전전한다. 드디어 그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기 시작하자 객석이 고요해진다. 기존의 음악들과는 다른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시적인 음악은 슈퍼스타의 탄생을 예감케 한다. 평단과 대중이 열광한다. 이때 밥 딜런의 노래 실력만으로 그를 평가할 수 없다. 당시는 대중문화의 격변기였다. 시대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으며 선두에는 청년들과 대중문화가 있었다. 청년들은 기성세대와의 작별을 고하는 동시에 세상의 변화를 욕망했고, 미술, 음악, 영화 등의 대중문화는 저항적 기조를 담아낸다. 정치적으로는 핵전쟁 공포와 베트남전으로 촉발된 반전 운동, 인권 문제, 페미니즘 논의로 관심이 확장된다. 밥 딜런은 인권운동에 참여하고 사회참여적 음악을 발매하는 등 그 누구보다 시대와 깊이 조우한다. 그러면서도 “괴로운 시대, 사랑할 사람을 찾으라고” 열창한다.
영화 ‘컴플리트 언노운’은 밥 딜런의 20대 초반 시절을 조명한다. 그러니까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밥 딜런이 음악을 시작하는 시기부터 음악적 변화를 꾀하는 1965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공연까지를 다룬다. 지금까지 한 인물의 삶을 조명하는 영화들은 대체로 인물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대비하며, 그의 업적을 알리는 데 공을 들였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젊은 날의 밥 딜런의 모습, 음악을 향한 고민과 변화, 그와 관계를 맺었던 인물에 중심에 두며 갈등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그린다. 이때 밥 딜런을 노래하게 한 인물이 우디 거스리였다면, 음악적 성장에는 포크송 가수로 유명한 피트 시거와 조안 바에즈가 있다. 밥 딜런의 뮤즈인 첫사랑 실비는 그에게 음악적 영감을 준다. 밥 딜런이 만나고 관계 맺은 사람들 덕분에 그의 음악 또한 빛날 수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음유시인, 음악적 실험을 멈추지 않았던 밥 딜런의 이야기는 영화의 오프닝과 같이 우디 거스리를 만나고 헤어지는 것으로 끝난다. 이 엔딩은 우디 거스리를 통해 시작된 하나의 시간이 끝나고, 인생 2막이 시작됨을 알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밥 딜런을 연기한 배우에 있다. 티모시 샬라메는 밥 딜런이 되기 위해 무려 5년 동안 준비했을 정도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다. 특유의 게슴츠레한 눈빛은 밥 딜런 그 자체이며, 읊조리고 숨을 삼키는 듯한 창법, 기타 연주와 노래는 모두 그가 직접 소화하고 있음에도 이질감이 들지 않는다. 마치 밥 딜런의 젊은 날과 마주하는 것 같다.
2025-04-23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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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새로운 챕터를 시작한 브리짓
로맨틱 코미디를 보는 이유는 하나다.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영화에선 그토록 달콤하고 쉬운 연애가 현실에선 여간 어렵기에 우리는 영화를 보며 꿈꾼다. 그 사랑이 나에게도 찾아오기를 그리고 영화 속 사랑이 그 속에서나마 영원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운명처럼 찾아온 사랑 앞에서 좌충우돌하다 결국은 해피엔딩을 맞는 전형적인 로맨틱 영화의 구조를 따른다. 그런데 ‘브리짓’은 기존 로맨틱 코미디 주인공들과 다르다. 사랑에 성공하고 막이 내린 줄 알았는데, 그런 영원한 사랑은 없단다.
브리짓은 완벽한 남성과의 연애를 꿈꾸지만, 마냥 동화 속 왕자님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여성이 아니다. 사랑을 찾아 헤매고, 썸을 타는 남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다이어트를 선언했다가 매번 실패하며 나이에 맞지 않게 덜렁거리고 자주 실수한다. 푼수같이 구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내 이야기 같고 어느 땐 우리 옆집 언니같이 친숙해서 사랑스럽다.
완벽하게 행복한 이야기로 끝을 맺은 줄 알았던 브리짓이 돌아왔다. 그녀를 처음 만난 날로부터 무려 24년이 흘렀고, 전작(브리짓 존스의 베이비)으로부터 9년이 지났다. 브리짓을 연기한 르네 젤위거도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만큼 후속작 소식은 놀랍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뉴 챕터’는 여전히 현실 속에 살아 숨 쉬는 브리짓의 이야기를 그린다. 1편에서 3편까지 브리짓은 마크 다아시(콜린 퍼스)와 싸우고, 헤어지고 사랑하기 바빴기에 이번 작품에서는 그와 결혼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브리짓은 ‘혼자’ 남겨졌다.
남편 마크를 불의의 사고로 잃고 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는 브리짓은 여전한 듯 보이지만 어쩐지 낯선 얼굴이다. 과거 잠옷 바람으로 노래하던 그녀는, 이제 잠옷 바람으로 두 아이의 아침을 챙기고 등굣길을 마중한다. 아이들의 엄마로 충만한 삶을 사는 듯 보이지만 그녀는 외롭다. 남편이 떠난 지 4년이 지났지만, 남편이 보고 싶다거나 외롭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 없다. 그녀에게는 보살펴야 할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척, 그리움과 외로움을 꾹꾹 눌러 담아도 그 상실감은 지워지지 않는다.
브리짓은 나름 아이들을 위해 애쓴다고 하지만 집안 꼴이 말이 아니다.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머리는 헝클어진 채 잠옷 바람으로 동네를 헤집고 다니는 브리짓은 자신마저 놓아버린 듯 보인다. 바로 그때 그녀 앞에 두 남자가 나타난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시리즈는 역시 ‘사랑’을 빼놓을 수 없다. 이번에도 브리짓은 연하남과 과학 교사와의 관계를 통해 사랑의 의미를 발견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 앞으로 나아간다. 그 와중에 브리짓의 푼수 끼는 여전하다. 젊어 보이려 입술에 필러를 맞았다가 부작용으로 웃음을 주거나, 데이트 중에 실수를 연발하는 모습은 나이가 들어도 역시 브리짓이다.
더불어 이번 시리즈에는 깊이를 더한다. 남편을 잊지 못하는 브리짓과 아직 아빠를 잊고 싶지 않은 아이들의 에피소드는 영화의 연륜을 느낄 수 있다. 어찌 보면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마크에게 편지를 쓰는 브리짓이나 아빠의 생일을 맞아 풍선에 카드를 날려 보내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이기에 가능한 감동이다.
우리는 브리짓의 연애와 이별, 결혼과 출산을 지켜보았다. 브리짓의 나이 듦과 아픔을 느꼈기에 자연스레 공감할 수 있는 슬픔이고 감동이다. 이는 전작의 주인공이었던 마크를 잊지 못하는 관객들 또한 그를 추억할 수 있게 만든다. ‘마크’의 존재를 지우지 않고 영화 내내 느낄 수 있게 한 연출은 섬세하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챕터에 접어든 브리짓의 이야기가 지금 여기에서 멈추질 않길 바란다.
2025-04-0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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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조용히 조금씩 회복되는 세계
언뜻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이지만 적막과 고요로 가득 차 있는 숲속은 어딘지 오묘하다. 사람이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사람이 보이지 않는 세계. 눈에 보이는 건 동물뿐이다. 개들이 강에서 잡아 올린 물고기들을 서로 먹겠다며 으르렁거린다. 그때 근처에서 상황을 몰래 보고 있던 검은 고양이가 땅에 떨어진 물고기를 낚아채 달아난다. 눈앞에서 먹이를 빼앗긴 개들은 고양이를 뒤쫓기 시작한다. 한바탕 추격전이 벌어질 찰나 숲이 요동친다.
모든 것이 쓸려가고 난 후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재난이 어느 날 우리 앞에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 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라트비아에서 온 영화 ‘플로우’는 대홍수가 세상을 덮친 이후 살아남은 동물들이 등장한다. 호기심은 많지만 매사 경계하는 검은 고양이, 꼬리를 흔들며 반갑게 맞아주는 골든 리트리버, 잡동사니를 쌓아두고 행복해하는 여우원숭이, 모든 일에 관심 없는 듯 보이는 카피바라, 무리에서 쫓겨난 뱀잡이수리까지 대홍수가 아니었다면 접점이 없었을 인연이 모인다.
동물들의 대홍수 생존기 '플로우'
인간의 '말' 없을 뿐 소통은 충분
'흐름'에 몸 맡기고 즐기기만 하면
이미 한 차례 모든 것이 쓸려간 듯한 숲에 다시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고양이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높은 곳을 찾아 헤맨다. 고양이가 보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랐지만 물은 코끝까지 차오르고, 발을 버둥거려 보지만 점점 물속으로 가라앉을 뿐이다. 그때 낡은 배 한 척이 고양이 앞으로 다가온다. 겨우 배에 몸을 실은 고양이는 한숨 돌리지도 못한 채 항해를 시작한다. 얼마 후 비슷한 사정으로 배에 탑승하는 동물들과 만나고 그들 나름 경계하고 날을 세우지만 생사가 걸린 여정 앞에서 서로를 구해주고 또 어느 때는 작은 위로를 보낸다. 서서히 서로에게 스며든다.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고 땅에서는 끝없이 물이 차오를 때 어디선가 나타난 낡은 배는 노아의 방주와 닮아있다. 하지만 이 배가 나타난 이유를 지구 온난화나 종교적인 이유로 볼 수 없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물로 가득 찬 세계에 떠 있는 배 한 척과 거기 타고 있는 동물들의 이미지에는 보다 깊은 고민과 은유가 담겨 있을 뿐이다. 더불어 재난을 그리는 영화라고 해서 파괴만을 다루지 않는다. 무너지고 사라진 자리에서 조용히 조금씩 회복되는 자연의 모습도 담겨져 있다.
또한 ‘플로우’는 대사가 없는 영화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동물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소통하고 교감(말)한다. 동물이 하는 대사를 인간이 알아듣지 못할 뿐이다. 인간의 말을 하는 동물들에 익숙해져 있었던 걸까? 영화가 시작하고 동물들이 ‘말’을 하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영화는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생각임을 깨닫게 만든다. 동물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동물들의 몸짓이나 표정을 통해 그들의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고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동물들의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면 그들 또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 만난 동물들은 서로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하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들은 행동과 표정만으로도 서로를 이해한다.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은 동물이 동물답게 행동할 수 있는 연출에 공을 들였다. 이를 위해 동물들의 이야기를 공부하고, 동물들의 실제 소리를 녹음했다고 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플로우’는 낯선 감각을 일깨울지 모른다. 낯설지만 어색하지 않다. 설명하지 않지만 이해 가능하고, 은유와 비유로 채워졌으나 어렵지 않다. 의미를 찾지 않고 그저 영화의 흐름(flow)에 몸을 맡긴다면 영화가 주는 낯선 감각이 무척 즐거울 것이다. 더불어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3D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 ‘블렌더’를 사용해 만든 영화는 CG가 화려하진 않지만 사실적이다. 특히 동물들의 움직임은 사랑스럽고 자연 풍경은 신비로워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다.
2025-03-26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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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부디 확신을 의심하라
미국의 권위 있는 영화 시상식인 아카데미가 열리는 3월, 한국의 극장가도 소란스럽다. 각 부문 수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된 작품들이 아카데미 특별전, 혹은 기획전이라는 이름을 달고 상영되기 때문이다. 독창적인 작품, 배우들의 눈부신 연기 등을 한 번에 볼 수 있기에 시네필들이 설레는 시즌이 바로 지금이 아닐까 싶다.
올해 아카데미는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아노라’에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등 무려 5관왕을 안긴다. 미국 내 소수자와 비주류 문화를 조명하던 숀 베이커 감독은 ‘아노라’를 통해 다수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작품성에서도 좋은 평가를 얻었다. 특히 성 노동자와 계급 문제를 익숙한 신데렐라 서사와 연결한 점은 숀 베이커이기에 가능한 연출로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아카데미에서 각색상을 받은 에드바르트 베르거 감독의 ‘콘클라베’가 인상적이었다. 로버트 해리스가 2016년 출간한 동명의 장편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배우들의 연기,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설전, 강렬한 음악, 정교한 편집으로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특히 가장 경건하면서도 성스러운 장소에서 드러나는 비밀과 욕망 그리고 반전, 인물들의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확인할 때 이 영화가 왜 추리 스릴러물인지 알 수 있다.
영화는 교황의 서거로 충격에 빠진 ‘로렌스’의 뒷모습을 좇으며 시작한다. 교황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로렌스는 충격을 받지만 그에겐 애도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추기경 단장직을 맡고 있는 그는 차기 교황 선출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열쇠로 문을 잠근 방’을 의미하는 ‘콘클라베(conclave)’는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를 의미한다. 교황 서거 즉시 모든 추기경들은 기존의 직위가 해제되지만, 콘클라베를 지휘해야 하는 추기경 단장만은 그 직이 유지된다. 올곧고 강직한 성품을 지닌 로렌스는 교황 선거권을 지닌 108명의 추기경들을 소집하고,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벌어질 수 있는 모든 문제를 통제하며 선거를 이끈다.
교황이 선출되기 전까지 핸드폰이나 통신 기계를 사용할 수 없기에 추기경들은 외부와 단절된 채 오로지 투표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새 교황의 탄생은 쉽지 않다. 108명의 추기경들이 차기 교황이 되길 원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 내는 방식이기에 따로 후보가 존재하지 않는다. 교황이 되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여 선거 운동도 할 수 없다. 게다가 가장 많은 표를 얻는 후보가 당선되는 것도 아니다. 3분의 2 이상 찬성해야 교황으로 선출될 수 있기에 투표의 향방을 쉽게 점칠 수 없다. 영화는 사흘 동안 6번의 투표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려낸다.
지리멸렬한 투표가 반복되자 가장 성스러운 선거라고 자부하는 ‘콘클라베’에도 음모와 술수가 암약한다. 강경한 개혁파와 최악을 막으려 차선을 선택하는 진영이 갈등하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다. 로렌스는 그 사이에서 여러 전언과 정황을 목도하며 유력 후보들의 비밀을 알게 된다. 누구보다 고귀하고 순결하다고 믿어졌던 그들의 민낯이 드러난다. 이때 추기경들의 욕망은 종교나 정치적 문제로 보이지 않는다. 흠결 없는 인간은 없음을, 혹은 신 앞의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 알려주는 듯하다.
로렌스는 첫 선거를 앞두고 “확신이야말로 통합의 강력한 적이니 의심하라”고 말한다. 확신은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닫게 한다. 갈등과 분열을 멈출 수 있게 하는 건 확신이 아니라 의심하고 의구심을 가질 때이다. 그런 의미로 마지막 투표에서 추기경들이 날 선 경계와 확신을 내려놓으며, 앞선 결과와 전혀 다른 선택을 할 때는 감동적이다. 그것은 동화 같으면서도 혁명적이다. 확신으로 들끓던 문 닫힌 세계에 문이 열리고 새 시대가 들어서는 희망을 본다.
2025-03-1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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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내 안의 진짜 고통과 마주하기
언젠가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간 적이 있다. 누군가의 희생에 슬퍼했고 비극 속에 사라진 누군가를 추모했다. ‘리얼 페인’을 보며 비극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내가 ‘진짜 고통’을 느꼈었던 건지 의심이 들었다. 그러니까 당시를 살지 않았던 내가 사진 몇 장과 교과서에 적힌 지식만으로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제시 아이젠버그 감독의 ‘리얼 페인’은 역사적인 비극과 개인의 고통을 나란히 세우며 진짜 고통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생김새부터 성격, 취향까지 모든 것이 다른 사촌 ‘데이비드’(제시 아이젠버그)와 ‘벤지’(키에란 컬킨)가 오랜만에 만난다. 그들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의 고향 폴란드로 여행을 가라며 돈을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할머니는 죽을 고비를 넘기며 미국으로 건너온 생존자이자 이민자였다. 손주들이 뿌리를 잊지 말라는 숨은 뜻일까. 사촌은 할머니의 유언대로 폴란드로 떠난다. 최종 목적지는 할머니가 살았던 집에 가는 것이지만 그들은 먼저 ‘홀로코스트 투어’를 하기로 결정한다.
데이비드는 벤지와의 여행이 어색할 것이라 생각한다. 한때는 형제처럼 친밀한 사이였지만 데이비드가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벤지와 멀어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두 사람은 할머니의 유언이 아니었다면 마주칠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데이비드는 여행 전부터 초조해 보인다. 가족과 떨어지는 것도 불안한데 약속장소인 공항으로 가는 길까지 막힌다. 게다가 벤지에게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답이 없다. 급하게 공항에 도착한 데이비드는 몇 시간 전부터 도착해 공항에서 놀고 있었다는 벤지를 보며 어처구니없으면서도 한편으론 안심한다. 벤지는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홀로코스트 투어를 중심으로 진행되기에 다소 무겁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리얼 페인’은 지금까지 보았던 홀로코스트 영화와 결이 다르다. 이 영화는 어떻게 하면 비극을 더 참혹하게 보여줄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각자가 어떤 방식으로 비극을 받아들이고 애도할 수 있는지 살핀다. 이는 거침없이 행동하고 말하는 벤지 덕분에 가능하다. 독일군에 맞서 싸운 민중의 동상 앞에서 우리는 조용히 사진을 찍는 것을 의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벤지는 정답이란 없다는 듯 투어의 일원들이 민중이나 독일군이 되어보는 체험을 하게끔 권하고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
사실 어떤 문제든 감정적으로 대하는 벤지를 보는 건 불안하다. 유대인 수용소가 있는 도시로 가는 기차에서는 “80년 전 유대인들은 꼬리 칸에 가축처럼 실렸을 것”이라며 일등석 자리를 박차고 끝 칸으로 이동한다. 벤지는 짧은 시간이나마 그들의 고통을 온전히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는 홀로코스트 투어가 진정한 애도와 공감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데이비드는 그런 벤지가 어디로 튈지 몰라 좌불안석이다. 그러고 보면 데이비드는 ‘우리’와 닮았다. 적당히 자신을 감추고 관계에서도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비극에 관심을 가지지만 그것이 나의 삶과는 연결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리얼 페인’은 불안정한 벤지의 감정을 통해 영화 주제로 나아간다. 벤지는 정보만 나열하는 가이드에게 과거의 공동체와 현재의 우리가 연결되는 투어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당황한 가이드는 유대 전통에 따라 묘비석 위에 돌을 올리는 행위로 이름 모를 누군가를 추모하자고 제안한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를 잠식할 수 없으나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질 수 있다. 홀로코스트를 경유해, 할머니의 집으로, 데이비드와 벤지의 내밀한 이야기로 말이다. 그로 인해 영화는 내 안의 ‘진짜 고통’과 직시할 때 공동체의 고통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2025-02-2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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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장자를 주인공으로 삼지 않는 카메라
장손에게 시집온 외숙모는 일 년에 8번의 제사상을 차린다. 이제는 제사상 정도야 눈 감고도 차린다고 말하지만, 그 일이 만만치 않음을 알고 있다. 그 와중에도 외숙모는 장손이라는 역할을 물려받은 아들이 장가를 가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다. 유산은 물려주지 못할지언정 제사만은 물려줄 수 없다는 외숙모의 의지는 가족 모두가 받아들인 지 오래다. 올해 설 명절을 앞두고 차례상을 차리는 외숙모를 보며 영화 ‘장손’이 떠오른 건 자연스러웠다. 아마도 가부장제에 익숙한 우리에게 이 영화는 결코 낯선 풍경이 아닐 것이다.
‘장손’은 3대에 걸친 대가족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모이면서 시작하는 영화다.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 전을 부치는 여성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푸념과 농담을 늘어놓는다. 집안의 어른인 할머니는 그런 며느리와 딸, 손녀를 보며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며 핀잔을 준다. 그때 집안의 장손 ‘성진’이 도착한다. 장손이 오면서 본격적인 서사가 진행되지만 사실 제삿날 장손이 하는 일은 별로 없다. 장손은 그저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다.
영화는 장손이 아니라 김씨 집안의 여성들을 따른다. 집안 여성들은 제사상을 차리는 것뿐 아니라, 가족이 경영하는 두부 공장의 일도 주도한다. 두부 공장은 집 바로 옆에 있는데 여성들은 공장과 집을 오가면서 가사노동과 집안 경제까지 책임지고 있다. 그러니까 영화의 서사는 장손을 중심으로 한 가부장제의 모순을 담는다고 볼 수 있지만, 카메라는 장자를 주인공으로 삼지 않는다. 카메라가 따르는 적자는 바로 김씨 집안의 여성들이다.
그녀들은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지만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존재들이다. 손녀 ‘미화’는 제사를 일찍 지내자는 말을 전하라며 장손인 동생을 할아버지 방으로 밀어 넣는다. 그런데 가만 보면 그녀들이 말을 할 수 없었던 건 여성들 스스로에 원인이 있다. 할머니는 제사 음식을 만드는 딸과 며느리, 거기다 임신한 미화에게는 에어컨을 틀지 못하게 했지만 성진에게는 손수 에어컨을 틀어준다. 미화에게는 제사 음식을 손도 못 대게 하더니 장손에게는 음식을 허락한다. 집안 남성들은 어떤 말도 할 필요가 없다. 할머니와 엄마가 먼저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미화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지켜보며 자신의 말에 힘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로 인해 성진을 할아버지에게 보내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이는 가부장제에서 미화의 생존 전략일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을 통해 말해지는 존재였음을 알린다. 어쩌면 영화는 시대착오적이라고 할 수 있어 보이지만 단순히 젠더 갈등으로만 풀 수 없다. ‘장손’은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세계 또한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한국 사회의 굵직한 역사를 관통하며 좌절을 배웠고, 평생을 트라우마에 갇힌 채 살아온 인물들이다. 영화는 그들의 아픔 또한 함께 보듬어 안는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가족영화를 만나왔다. 그 중 ‘장손’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가족의 삶을 돌아보고 떠나보낼 줄 아는 시선을 가졌기 때문이다. 영화 속 가족은 한 번의 제사와 한 번의 장례를 치르며 여러 번의 이별을 경험한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여운을 남긴다. 장손을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할아버지가 갈림길에서 잠시 고민하다 어딘가로 향한다. 롱숏으로 비추는 눈 내리는 마을의 전경. 할아버지의 모습이 점처럼 보일 때까지 카메라는 오래 지켜본다. 마치 배웅하듯 할아버지를 떠나보내는 롱숏, 롱테이크다. 오정민 감독은 한 가족사의 이야기를 아련하고 서정적인 방식으로 풀어낸다. 여름에서 가을로, 겨울로 넘어가면서 계절을 담아내고, 가족사에 얽힌 이야기는 미스터리한 연출로 긴장감을 부여한다. 그로 인해 가족의 역사를 감히 함부로 재단할 수 없게 만든다.
2025-02-1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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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왜 우리는, 우리에게 총을 겨누어야 할까?
분열의 시대다. 좌우만 남았다. 두 개로 쪼개진 세계를 지배하는 건 폭력이다. 폭력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건 폐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파괴된 세계에 ‘사람’은 없다. 미국에 내전이 일어났다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시빌 워: 분열의 시대’를 허구라고 할 수 없어 보인다. 이 세계는 여전히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신념이나 이념의 차이로 불거진 갈등 앞에서 누구 하나 물러설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헌정을 파괴한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 연방정부에 반발해, 미국의 19개 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며 최악의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를 다룬다. 특히 영화에서는 캘리포니아주와 텍사스주를 주축으로 한 막강한 전투력을 지닌 서부군과 힘을 잃은 연방정부군의 격렬한 대립에 초점을 둔다. 오프닝은 긴장한 대통령이 카메라 앞에서 연설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대통령은 미국 시민 ‘모두’에게 말하지 않는다.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시민은 적으로 규정하고, 조속히 미국의 시민으로 돌아오기를 촉구한다. 도시는 이미 무장한 군인들과 탱크에 점령당했지만, 대통령은 마치 그런 현실을 보지 못하는 듯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창밖으로 폭격을 맞은 건물이 화염에 휩싸여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다.
영화에서는 내전이 일어나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통령 편에 선 정부군과 대립하는 반정부군, 살기 위해 물을 달라고 소리치는 시민들의 혼란한 상황만을 조명한다. 이때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모습을 어떠한 감정도 없이 바라보는 종군기자들이 등장한다. 베테랑 사진기자 ‘리’와 취재기자 ‘조엘’, 은퇴를 고려하는 노년의 기자 ‘새미’는 대통령을 인터뷰하기 위해 백악관이 있는 워싱턴으로 향한다. 그리고 ‘리’를 롤 모델로 삼고 있는 신입 ‘제시’까지 합류하며 1379㎞의 여정이 시작된다.
로드무비의 형식을 띠고 있는 영화는 기자의 시선으로 디스토피아 미국을 그린다. 길거리에는 주검들이 넘쳐나고, 언제 폭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시민들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혼란한 가운데 리는 냉철히 상황을 판단하고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찍는 것이 마치 자신의 사명이라도 되는 듯 행동한다. 리는 기자의 역할이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때 영화는 의도적으로 기자들이 보다 좋은 컷을 위해 판단을 내려놓고 그저 ‘찍’는 것처럼, 군인 또한 정의를 위해 총을 드는 것이 아니라 나와 반대되는 쪽을 무차별적으로 ‘쏘’는 것임을 알린다.
이는 앨릭스 갈런드 감독의 의도이다. 어떤 가치관을 내세우기보다는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으로 분열의 시대를 보여준다. 그로 인해 영화에서는 전쟁영화의 스펙터클함은 찾아볼 수 없다. 군인이 총을 쏘아 누구를 맞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잔인한 순간을 전달하려 애쓴다. 특히 대통령을 찾아 백악관으로 들어가는 장면에 이르면 실제 전쟁터에 던져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무엇을 위해 왜 우리는, 우리에게 총을 겨누어야 하는 것인지, 국가란 무엇이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무능력한 국가에 분노하고, 소통이 단절된 상황에서 무엇도 할 수 없어 무기력해진다. 지난해 12월 3일 대통령의 계엄령 이후, 국민들이 겪은 공포와 그 이후에 벌어지고 있는 수없는 갈등과 균열을 생각한다면 영화 속 현실을 허구라고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세계는 점점 진화하고 있는데 민주주의는 퇴행한다. 증오와 분노는 더욱 심화한다. 정치적 분열이 어디까지 흘러갈 수 있는지 그리는 ‘시빌워: 분열의 시대’는 어떤 것도 질문하지 않는 기자의 눈을 따르지만, 영화를 본 우리는 눈을 감을 수 없다. 분열의 시대에 고통받는 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2025-01-15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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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내가 '나'라는 괴물을 낳는다
더 근사하고 완벽한 나를 꿈꾸는 건 누구의 욕망일까?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극단적으로 나를 훼손하는 주인공이 여기 있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파국으로 향하는 종착지임을 알지만 멈출 수 없다. 이미 맛본 과즙이 너무나 달콤하기 때문이다. 코랄리 파르쟈 감독의 ‘서브스턴스’는 욕망이 나를 잠식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잔인하게 일깨우는 영화다.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였던 ‘엘리자베스’(데미 무어)는 현재 TV 에어로빅 쇼 진행자로 카메라 앞에 서고 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과거와 달리 초라한 모습이다. 게다가 50번째 생일을 맞이한 그녀는 에어로빅 진행마저 그만둬야 하는 위기에 처한다. 프로듀서가 나이 든 엘리자베스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며 ‘어리고 섹시한’ 여성을 찾는 데 혈안이기 때문이다. 충격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엘리자베스는 자기 얼굴이 걸려 있던 도로 간판이 철거되는 모습을 넋 놓고 보다 교통사고까지 당한다. 자동차가 박살 날 정도의 큰 사고였지만 거짓말같이 한 군데도 다치지 않은 엘리자베스. 한바탕 눈물을 쏟고 병원을 나선 그녀는 코트 주머니에 든 정체 모를 USB를 발견한다.
7일 동안 젊은 몸을 얻을 수 있는 약물 서브스턴스의 정보를 알게 된 엘리자베스는 주저하지 않는다. 젊음을 가질 수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듯 약물을 투입한다. 영화는 약에 대한 과학적 근거나 논리를 제시하지 않는다. 마치 허무맹랑한 설정이 영화를 지탱하는 동력이라도 되는 듯 무섭게 몰아칠 뿐이다. 그때 엘리자베스의 몸에서 새로운 자아, 아름답고 젊은 ‘수’(마가렛 퀄리)가 태어난다. 영화는 처음부터 엘리자베스의 몸에서 탄생한 수가 엘리자베스와 같은 인물임을 잊지 말라고 주지시킨다.
수는 엘리자베스가 갖고 싶은 젊음이며 못다 이룬 청춘이다. 그런데 ‘나’의 욕망을 반영해, 또 다른 자아를 얻었음에도, 엘리자베스는 이전보다 더 큰 상실감을 느낀다. 7일은 엘리자베스, 7일은 수로 살아간다는 서브스턴스의 규칙만 잘 지키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겠지만, 균형을 유지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특히 일주일 동안 젊고 매력적인 수가 이룩한 것들을 확인할 때면 엘리자베스는 비참해질 뿐이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수가 자신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질투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엘리자베스의 상실감을 거울을 보는 장면을 통해 전달한다. 탄력 잃은 엉덩이와 뱃살을 바라보며 그녀가 제 몸을 혐오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만든다. 그런데 그녀가 비참한 이유는 나이듦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젊음만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나이 든 자신이 문제적 인간이 된다. 이유 없이 해고당해도 그저 받아들여야 하며, 더 이상 상품이 되지 못하는 몸은 불신의 이유가 된다. 젊음을 되찾은 ‘수’가 자신을 모욕한 방송국으로 다시 갈 수 있었던 이유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사실 엘리자베스의 몸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지만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타인의 평가뿐이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서브스턴스’는 이상한 영화다. 비논리적이고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음에도 점점 그 상황에 수긍하게 된다. 그리고 엘리자베스가 그토록 집착하던 아름다움이 비단 그녀 개인에게 국한된 문제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우리 사회의 아름다움에 대한 강요, 여성의 외모를 소모품처럼 소비하는 미디어, 아름다움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허상이 엘리자베스와 수를 ‘괴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영화의 엔딩에 가까워질수록 끔찍함의 강도가 높아진다. 괴물이 되어버린 ‘엘리자베스’는 악몽으로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악몽은 잔인하면서도 슬프다. 영화의 장르가 왜 바디 호러물인지 납득이 간다.
2025-01-01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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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지는 삶에 익숙해지지 않기
스포츠 영화를 보는 이유는 반전과 짜릿함, 감동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주인공의 의지와 열정, 불꽃 튀는 경쟁으로 이어지는 스포츠 영화의 구조는 비슷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럴까? 스포츠 영화 중에 대중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은 많지 않다. 배우의 연기력은 기본이고, 실제 운동선수 같은 실력과 함께 속도감과 리듬감을 표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스포츠 영화 제작에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스포츠와 드라마의 균형도 맞춰야 하니 어려운 일일 것이다.
스포츠를 소재로 한 한국영화 중 성공한 작품을 꼽자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국가대표’(2009) 정도다. 그렇다고 스포츠 영화가 제작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비교적 최근작으로 서윤복 선수와 손기정 감독이 1947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이룬 감동적인 승리를 스크린에 옮긴 ‘1947 보스톤’이 있으며, 천만 감독 이병헌의 후속작으로 기대를 모았던 ‘드림’도 홈리스들의 축구 경기를 다룬 스포츠물로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신파(감동)와 스포츠 사이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장항준 감독의 ‘리바운드’는 2012년 전국 고교농구대회에서 최약체로 평가받던 농구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농구 경기 장면을 컷분할 없이 롱테이크로 담아내며 현장의 생생함을 전달하고 있으나 이 영화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지난주 또 한 편의 스포츠 영화가 개봉했다. 한국 최초로 배구를 소재로 한 영화 ‘1승’은 탄탄한 시나리오로 정평이 난 신연식 감독과 뛰어난 연기력을 자랑하는 배우 송강호의 만남으로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물론 ‘1승’도 전형적인 스포츠 문법을 따른다는 점에서 그다지 새롭지는 않다. 결속력이 부족한 팀과 비전을 잃은 감독이 일치단결하여 감동을 자아내는 과정은 어쩐지 익숙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스포츠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승리’에 목적이 있지 않다.
영화는 이겨본 적 없는 감독과 이길 생각이 전혀 없는 괴짜 구단주, 이기는 법을 모르는 선수들까지 승리의 가능성이 1%도 없는 프로 여자배구단 ‘핑크스톰’의 여정을 그린다. 배구단 핑크스톰은 에이스 선수 성유라의 이적으로 해체 위기에 직면한다. 이때 재벌3세가 배구단을 인수하면서 우진에게 감독을 제안한다. 우진은 한때 실력 있는 선수였지만, 감독으로서는 10% 이하의 승률로 퇴출과 파면, 파산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별 볼일 없는 운동인이다. 그런 그에게 감독직이 오자 우진은 이상하다. 게다가 구단주는 시즌 중에 딱 한 번만 이기면 된다는 조건을 걸자 불안할 정도다.
인생이 고달픈 우진은 자신의 앞날에 이보다 더 매력적인 제안이 주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게다가 1승만 하면 되니 부담도 없다. 대충 감독을 맡다가 이직을 하려는 우진은 시즌이 시작하자마자 전패로 끝날 수도 있음을 자각한다. 지는데 익숙한 선수들이나 의욕 없는 감독에게 1승은 말처럼 쉽지 않다. ‘1승’은 배구 경기 특유의 긴장감과 속도감을 통해 관객의 시선을 끌지만, 다른 한편으로 스포츠를 금전적 가치로 환산해서 바라보고 있어 흥미롭다. 지금까지 스포츠를 땀이나 열정으로 정의 내렸다면, 이 영화는 지는 것마저 하나의 콘텐츠로 판매되는 상황을 그린다.
영화는 스포츠 영화답게 배구 게임에 공을 들인다. 특히 시즌 마지막 핑크스톰 게임은 실제 경기장에 있는 것 같이 생생하다. 하지만 영화가 진짜 말하고 싶은 바는 배구가 아니다. 영화는 모두가 욕망하는 1등이 아니라, 1승을 원한다. 승리 아니면 실패라는 공식에서 벗어나 간절한 1승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그로 인해 패배와 좌절에 익숙해지지 않아야 한다고 독려한다. 거기에 스포츠와 유머는 덤이다.
2024-12-18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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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마녀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마녀는 판타지 영화에만 나타나는 존재가 아니다. 그녀들을 ‘마녀’라고 지목하고, 사냥을 해야 종교 제도가 유지된다고 생각했던 시대는 분명 존재했다. 실제로 ‘마녀’ 담론은 중세 유럽을 휩쓸었고 갖가지 말도 안 되는 명목으로 마녀사냥이 자행되었다. 영화 ‘위키드’는 사악한 서쪽 마녀의 죽음 소식을 알리며 시작한다. 날개가 달린 기이한 원숭이들이 날아다니는 이상한 나라, 평온하고 아름다운 도시의 사람들은 마녀의 죽음에 기뻐한다.
영화는 죽은 마녀가 누구인지 알려주기 위해 과거로 돌아간다. 마녀는 초록 피부를 가진 ‘엘파바’(신시아 에리보)다. 사람들은 나와 다른 그녀를 훔쳐보느라 바쁘다. 엘파바는 그런 시선이 낯설지 않다는 듯 행동하지만 상처받지 않을 리 만무하다. 그녀는 남과 다르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외면당했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차별받았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도 잊은 채 스스로의 존재를 숨기기에만 급급했던 그녀는 걷지 못하는 여동생을 돌보기 위해 입학한 대학교에서 비로소 꿈을 꾸기 시작한다. 오즈의 마법과 현실이 교차하는 학교에서 엘파바의 능력을 알아봐 준 이는 총장 ‘모리블’(양자경)이다.
이 학교에는 또 다른 마녀가 있다. ‘글린다’(아리아나 그란데)는 엘파바와 모든 것이 다르다. 아름다운 외모와 상냥한 성격으로 주변을 챙기는 글린다는 모두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다. 하지만 천사 같아 보였던 글린다는 자신이 원하는 바는 어떻게든 가지고 마는 성격이다. 글린다는 모리블을 스승으로 둔 엘파바를 질투하여 그녀를 따돌리는 주동자가 된다. 영화 초반부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남과 달라 외톨이가 되는 엘파바와 겉과 속 마음이 다른 글린다의 관계에 집중한다. 어쩌다 룸메이트까지 된 두 사람은 불편한 동거를 이어가며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던 두 사람은 우연한 사건으로 서로의 결핍을 확인한다. 모리블에게 마법을 배우고 싶었던 글린다와 약간의 관심이 필요했던 엘파바는 서로를 채워주는 유일한 존재가 되어 우정을 나눈다. 두 사람의 우정과 연대에 감동을 받을 즈음, 불현듯 영화는 우정 이야기가 아니라 마녀의 탄생을 알리는 영화임을 상기한다. 엘파바를 각성시키는 사람은 오즈의 최고 마법사이다. 마법사와 만나게 된 엘바파는 기대감에 들뜬다. 난생처음으로 자신을 증명할 기회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가슴 뛰는 여정을 함께하는 친구도 글린다이다.
엘파바를 향한 차별과 편견, 그리고 엘파바와 글린다의 갈등과 우정을 그린 ‘위키드’는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전개를 보여준다. 이때 인물 중심의 영화라고 볼 수 있지만 영화를 특별하게 하는 건 인물이 아니다.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영화답게 춤과 음악이 빠지지 않는데, 특히 뮤지컬 넘버를 그대로 살린 점이 영화의 매력이다. 또한 ‘위키드’는 원작 뮤지컬의 스토리를 충실하게 따르면서도 환상적인 마법 세계의 재현, 즉 판타지 장르를 강조하고 있어 영화만의 매력을 더한다.
분명 ‘위키드’는 볼거리가 풍성한 영화이다. 그러나 영화 속 현실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초록 피부로 태어난 엘파바가 살아가는 현실은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마녀는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혐오의 대상이 되어 결국 사회로부터 배제당한다. 영화에서 마녀사냥이 있기 전 동물들을 먼저 탄압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적’을 만들어야 사회를 통치할 수 있다는 믿음은 폭력과 희생을 정당화한다. 권력자들은 오즈의 찬란함과 신비함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자신들과 다르거나 약한 자들,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적으로 규정했다. 그리하여 엘파바는 마녀가 되었다. 물론 그녀가 마녀가 된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지만 말이다.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그녀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 보인다. 마녀로의 삶을 선택한 엘파바가 무엇을 증명할지 2편이 기대된다.
2024-12-04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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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자유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진 검투사 ‘막시무스’(러셀 크로우)의 모습이 생생하다. 열광과 광기의 콜로세움, 역동적인 액션과 인물들 간의 들끓는 파토스까지 2000년 개봉한 ‘글래디에이터’는 놀라운 영화였다. 그로부터 2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글래디에이터 Ⅱ’가 개봉했다. 1편에 이어 2편도 직접 연출한 감독 리들리 스콧은 전편보다 더 화려하고 웅장한 스케일로 고대 로마 시대를 완벽히 재현하며 왕의 귀환을 알렸다.
‘글래디에이터’ 1편이 전쟁 영웅에서 노예로 전락한 ‘막시무스’가 황제 ‘코모두스’의 폭정 아래 신음하는 로마와 자신의 명예를 찾는 여정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2편은 그로부터 2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시작한다.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누마디아 왕국의 실질적인 지휘자 ‘하노’(폴 메스칼)는 정복자 로마군에 맞서지만 압도적인 화력과 병사를 가진 로마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결국 ‘하노’는 이 전쟁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포로가 되어 로마로 끌려온다. 고대 로마 시대로 단숨에 진입하는 이 오프닝은 ‘하노’에서 ‘루시우스’라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찾아가는 여정의 첫걸음이기도 하다.
리들리 스콧 감독 '글래디에이터 Ⅱ'
정국 혼란 속에서 만들어지는 영웅
검투, 살라미스 해전 장면 인상적
하노는 어린 시절 ‘루시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고귀한 존재였지만 황권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로마 바깥을 떠돌았다. 아내를 만나 누마디아 왕국에 정착했지만 노예가 되어 로마로 돌아온 하노의 인생은 영웅의 일생과 닮아있다. 하노는 지금의 로마가 자신이 알고 있던 그 로마가 아님을 눈치챈다. 로마 제국은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통합하며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폭군 카라칼라·게타 쌍둥이 황제 통치 하에 안에서부터 썩어가고 있다. 그 와중에 발톱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는, 검투사들의 주인 ‘마크리누스’(덴젤 워싱턴)는 ‘하노’를 이용해 황권을 차지하고자 한다. 폭압적인 지도자로 사회가 안에서부터 무너질 때, 오히려 권력의 권위는 추락하고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각축하게 되는 것이다.
아들이 아닌 로마를 잘 통치할 수 있는 이에게 권력을 계승하고자 했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꿈꾸던 로마는 무너졌다. 권력을 잡은 그의 아들 ‘코모두스’는 광기에 사로잡혔고, 뒤이은 쌍둥이 황제들 역시 시민들의 자유를 짓밟고 자신의 허영과 쾌락을 채우는데 바쁘다. 시민에게 자유가 없다면 로마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말로 로마의 미래를 꿈꿨던 황제는 과거의 인물이 되었지만, 그의 질문은 현재에도 유용하다. 지도자의 자질을 가지지 못한 자가 나라를 다스렸을 때 고통받는 건 과거에도 현재에도 시민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콜로세움에서의 결투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만큼 콜로세움이 중요 공간으로 등장한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욕망을 위해, 우매한 시민들의 감각을 마비시키기 위해 콜로세움은 화려한 혈투를 제공하지만 정작 콜로세움은 시민을 각성시키고 영웅을 만들어내는 장이다. 콜로세움에서의 혈투 끝에 하노는 자신이 누구인지 각성하며 비로소 로마의 꿈을 이룰 ‘루시우스’가 된다. 그 유명한 “권력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이 어떤 왕이 될 것인지 선언하는 말이다. 열광과 광기 사이에서 결투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결국 무능력한 황제의 권위에 맞선다. 자유를 잃은 시민은 왕을 저버리고 광기 어린 폭도로 변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사실 ‘글래티에이터’ 2편의 서사는 진부한 면이 있다. 하지만 2세기 로마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세트장과 마지막 전투 ‘살라미스 해전’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마치 당시 콜로세움 안에 있는 듯한 착시감이 들 정도다. “그 당시 로마의 냄새가 날 정도로 고증에 공을 들였다”는 노장 리들리 스콧 감독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영화를 보는 즉시 수긍할 것이다.
2024-11-2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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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흔하면서도 흔하지 않은, 보통의 가족
‘보통의 가족’은 네덜란드의 국민 작가로 불리는 헤르만 코흐의 소설 ‘더 디너’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다. 이미 전 세계에서 4번이나 영화화된 작품이기에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익숙한 서사와 연출에도 영화가 끝난 뒤 곱씹게 되는 매력이 있다. 영화 속 일이 내게도 벌어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지금까지 지켜온 신념을 한순간에 내던질 수 있을까? 영화는 내가 그들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되묻는다.
‘8월의 크리스마스’, ‘외출’, ‘봄날은 간다’ 등으로 한국형 멜로 영화를 다시 썼다고 평가받는 허진호 감독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장르로 돌아왔다. 그의 역사영화 ‘천문: 하늘에 묻다’나 ‘덕혜옹주’와도 또 다른 결이다. 허진호 감독은 전작들에서 미장센을 통해 영화적 감성을 보여주었다면 ‘보통의 가족’에서는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는 우리 사회의 병폐를 꼬집는다. 앞선 영화들과 달리 메시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인물들의 감정을 내밀하게 포착하는 점에선 역시나 허진호의 영화답다.
‘보통의 가족’은 누군가의 보복운전으로 한 아이의 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어린 딸은 혼수상태에 빠지는 사고를 보여주는 데서 시작한다. 재완, 재규 형제는 이 충격적인 사고와 깊숙이 연결되면서 이후 자신들의 신념이 충돌하는 것을 확인한다. 재완은 돈만 많이 준다면 살인자의 변호도 마다하지 않는 변호사이며, 동생 재규는 윤리와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소아과 의사이다. 형제는 이 사건의 변호인과 주치의가 되면서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한다. 또한 형제는 직업윤리에 맞게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사건을 대한다.
전처와 사별 후 지수와 결혼해 늦둥이를 낳아 키우는 재완과 치매에 걸린 노모를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는 연경을 아내로 둔 재규는 사소한 갈등은 있지만 행복해 보인다. 두 가족은 주기적으로 만나 밥을 먹는 등 우애도 나쁘지 않다. 물론 이 우애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님은 금세 밝혀진다. 원작의 제목이 ‘더 디너’이니만큼 영화에서도 식사 자리는 매우 중요하다. 밥을 먹는 횟수가 쌓일수록 가족의 민낯도 함께 드러나기 때문이다. 처음 식사 자리에서는 보통의 가족과 다름없이 화목해 보이지만, 이내 이들이 만난 이유가 치매에 걸린 노모를 요양원에 보내기 위해서였음이 밝혀진다. 불편한 침묵과 위선의 얼굴, 가식의 말들이 오고 가지만 그들은 세련된 매너와 우아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다음 저녁 식사는 재완의 집에서 이루어진다. 그들은 잘 차려진 식탁 앞에 앉았지만 아무도 수저를 들지 않는다. 그들이 저녁 식사를 가장해 은밀히 만난 이유는 자식들이 일으킨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서다. 그토록 이성적이었던 부모는 자식의 문제 앞에서 신념이나 윤리의식을 내던진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밥을 먹기 위해 만났지만 신경전을 벌이느라 밥 한술 뜨지 못한다. 가족 내에서 겉돌지만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지수만 밥을 먹을 뿐이다. 밥을 먹는 듯 보이지만 재완과 재규, 연경은 그럴듯한 말로 타인의 인생을 평가하고 자신의 가치관을 주장하기 바쁘다.
그러다 뉴스에서나 볼 법한 사건이 자신들의 문제가 되었을 때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아내의 모습을 보였던 연경은 아들의 범죄를 숨기기에 급급하다. 이성이 사라진 자리에는 감정만 남고, 위선을 떨쳐낸 모습에는 패악만 남는다. 그리고 마지막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모든 것이 폭발한다. ‘보통의 가족’은 제한된 공간에서 인물들이 연기하기에 자칫 지루할 수도 있으나 대화와 표정만으로도 역동적인 풍경을 만든다. 더불어 예상치 못한 사건과 마주했을 때 얼마나 쉽게 자신의 신념을 놓아버릴 수 있는지 깊이 파고든다. 우리는 과연 겉과 속이 다른 이 형제를 마냥 비난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본다.
2024-11-0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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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반려 애니메이션의 성취
인간과 자연, 인간과 기계 등을 다룬 애니메이션은 ‘반려’를 주로 이야기한다. 여기서의 핵심은 ‘동종’이 아니라 ‘이종’이 함께하는 삶이다. 애니메이션 속에서 인간이 빠져 있더라도, 인간과 다른 생명체의 공존을 이야기하는 작품도 많다. 최근 개봉한 ‘와일드 로봇’은 로봇과 동물이 동반자가 된다는 설정으로 다른 반려 애니메이션과 차별점을 둔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하늘에서 상자가 떨어진다. 상자 속에는 로봇 ‘로줌 유닛 7134’(로즈)가 들어 있다. 무인도에 불시착한 로즈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동물들만 있는 야생의 섬에서 로봇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게다가 무인도에서 로즈가 부서지지 않고 버티는 건 힘겨워 보인다. 다행히 로즈에게는 환경에 적응하고 행동을 모방할 수 있는 프로그래밍이 탑재되어 있다. 이내 동물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들의 모습을 모방하며 동물들 곁으로 다가가지만 생김새가 다른 로봇에게 곁을 내어줄 리 만무하다.
무인도가 목적지가 아니었음을 감지한 로즈는 본사로 귀환을 시도하지만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는다. 이를 지켜보던 동물들은 급기야 로즈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자신과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고, 함께 사는 일은 쉽지 않다. 로즈는 어쩔 수 없이 쫓기는 신세가 되고 조용했던 무인도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다. 이때 로즈는 우연히 기러기 둥지에 홀로 남겨진 알을 발견하고, 그 알을 훔치려는 여우 ‘핑크’가 합세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알을 깨고 나온 기러기 ‘브라이트빌’은 눈을 떠 처음으로 본 로즈를 엄마로 여기며 따른다. 하지만 로즈에게 빌은 도움을 줘야 할 대상일 뿐이다. 겨울이 오면 남쪽으로 떠나는 기러기들의 습성에 따라 빌도 무리들과 떠나야 하나, 작고 약하게 태어난 빌은 하늘을 나는 것은 고사하고 물에 뜨는 것도 어렵다. 방대한 지식을 가진 로봇 ‘로즈’와 무인도를 잘 아는 여우 ‘핑크’는 기러기 ‘빌’을 위해 작전을 세운다.
함께 어울려 살 수 없는 로봇과 기러기, 여우는 함께한 시간이 길어지면서 관계도 변화한다. 특히 로즈는 빌이 길을 잃을까 혹여 다치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이다. 기계적으로 빌을 대하던 로즈가 달라진 것이다. 로봇인 로즈가 엄마를 학습했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로즈의 행동을 학습의 결과로 보기에는 의구심이 든다. 빌을 보살피고 보호하는 것은 진심에서 우러난 행동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로즈를 빌도 의심 없이 엄마로 여긴다. 기러기 빌을 잡아먹으려고 했던 핑크도 빌의 자립을 응원하는데 마치 가족처럼 보인다.
이제 로즈를 감정이 없는 로봇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로즈는 이별을 슬퍼하고 사랑하는 이를 지켜야 함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느끼기 때문이다. 이는 로즈가 인간화되었다기보다는 시스템의 오류나 사랑이라는 마음이 새롭게 입력된 것이라 보는 게 적절해 보인다. 물론 그 이유를 애니메이션은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 섞일 수 없다고 믿었던 존재가 서로의 반려가 되고 변화한다는 점에 의미를 두면 어떨까 싶다.
로즈의 변화는 새로운 공동체를 꿈꿀 수 있게 하며 누구와도 연대할 수 있음을 알린다. 여우, 게, 비버, 곰, 사슴 등 한자리에 모일 수 없는 동물들이 싸움을 멈추고 혹독한 추위를 함께 견뎌내는 장면에서는 인류애마저 느껴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고 동물을 소유하려 하는 원흉이 누구인지 떠오르게 한다. ‘와일드 로봇’에는 인간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데 말이다.
2024-10-23 [17: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