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카르도 보필의 공동주택 '라 무랄라 로하' [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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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르도 보필의 공동주택 '라 무랄라 로하'. 이상훈 제공 리카르도 보필의 공동주택 '라 무랄라 로하'. 이상훈 제공
'라 무랄라 로하'의 기하학적인 파사드. 이상훈 제공 '라 무랄라 로하'의 기하학적인 파사드. 이상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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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동부 지중해 연안, 알리칸테주 칼페(Calpe)의 해안가 절벽 위 짙은 분홍색의 추상적 조형물. 멀리서 보면 고대의 성채 같고, 가까이서 보면 다소 비현실적인 영화 속 세트장을 닮았다. 20세기 포스트모던을 대표하는 스페인 건축가 리카르도 보필(Ricardo Bofill)이 1970년대에 설계한 ‘라 무랄라 로하’(La Muralla Roja), 직역하면 ‘붉은 벽’이라는 뜻의 공동주택이다.

라 무랄라 로하는 보필이 젊은 시절부터 탐구 해온 ‘기하학적 질서’와 ‘유토피아적 공동체’라는 두 방향성이 하나로 결합한 사례다. 무엇보다도 그는 북아프리카 지역의 전통 건축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는데, 좁은 골목과 계단, 테라스가 복잡하게 얽힌 카스바(Kasbah)의 조직 방식에서 공동체의 단서를 읽어냈다. 보필은 이 평면적 조직을 입체적 퍼즐처럼 재구성해, 서로 교차하는 계단과 통로, 갑자기 열리는 테라스가 이어지는 미로와도 같은 공간을 만들어냈다. 이런 구성은 사용자를 끊임없이 이동하게 하고, 시선과 빛을 방향에 따라 다르게 경험하게 하며, 마치 건물 자체가 탐험 대상이 되도록 만들었다.

그렇지만 건물의 가장 인상적인 특징은 단연 색채다. 외벽을 감싸는 강렬한 적색과 내부로 들어갈수록 점차 파랑과 보라색으로 변화하는 팔레트는 주변 풍경과 대조를 이루면서도, 지중해의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보필은 색채를 장식 이상의 환경적 장치로 사용했다. 동선의 변화에 따라 색이 달라지면서 사용자는 방향 감각을 조정하고, 동시에 심리적 리듬을 느낀다. 절벽 위 햇빛의 각도에 따라 색은 시시각각 달라지고, 그림자는 벽의 단면을 다시 조각해낸다. ‘오징어 게임’의 이색적인 세트장이 이 공동주택을 모티브로 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인상적인 외형에 따른 화제성에 앞서 건축가는 당시 스페인에서 증가하던 휴양지 개발의 소비적 패턴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획일화된 아파트와 리조트가 해안선을 차지 해가는 흐름 속에서 그는 지역성을 건축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다. 그래서 라 무랄라 로하는 기능적으로는 50여 세대가 사는 공동주택이지만, 동시에 주변 개발과 다른 문법을 보여주는 실험 공간이었다. 즉, 그는 단순히 눈에 띄는 건물을 만들려 한 것이 아니라, 공동생활의 구조와 인간의 이동 방식, 주거의 상징성까지 질문하려 했던 것이다.

오징어 게임의 무대가 연상되는 계단. 이상훈 제공 오징어 게임의 무대가 연상되는 계단. 이상훈 제공
지중해안 칼페에 위치한 라 무랄라 로하. 이상훈 제공 지중해안 칼페에 위치한 라 무랄라 로하. 이상훈 제공
핑크 빛 색채를 띤 ‘라 무랄라 로하’. 이상훈 제공 핑크 빛 색채를 띤 ‘라 무랄라 로하’. 이상훈 제공
중정에서 공동주택으로 오르는 진입 계단. 이상훈 제공 중정에서 공동주택으로 오르는 진입 계단. 이상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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