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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반구대암각화가 어디 울산만의 유산인가
“시장님은 2022년 당선인 시절 ‘문화재청이 전향적으로 안 나선다면 암각화 문제에서 발을 빼겠다. 암각화 보존 안 된다고 울산이 어떻게 되는 거 아니다’고 하셨는데 협상용으로 이해하면 되겠죠?”-더불어민주당 김성회 의원
“(세계유산 등재와 관련해) 지금까지 울산시가 문화재청에 구걸하듯 했습니다. (문화재청이) 여러 조건을 걸어서 ‘수위 낮춰라. 보존 계획 세워라’ 했는데… 문화재청에서 거꾸로 ‘우리가 등재할테니 너희들 물이 부족하다면 물을 확보해주겠다’ 이렇게 나와야 할 부분을 (중략) 업무 분장 확실히 하자는 겁니다.”-김두겸 울산시장
지난달 21일 울산시 국정감사에서 ‘자맥질 국보’ 반구대암각화가 도마 위에 올랐다. 7분간 이어진 문답에서 문화재청과 울산시의 불협화음이 튀어나왔다. 물길에 차오르는 침적물 같은 두 기관의 오랜 앙금이 김 시장 언성에서 느껴졌다.
반구대암각화는 올해 초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 등재 신청서를 냈다. 국가유산청(옛 문화재청)이 ‘직권’으로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린 지 14년 만이다. 근데 이제 와 업무분장이라니. 무슨 말일까. 세계유산 등재는 굳이 약칭 세계유산법을 거론하지 않아도 국가유산청을 컨트롤타워로 지자체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반구대암각화가 사연댐 상류에서 60년 가까이 물고문을 당하는 상황에서다. 반구대 암각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각계각층의 지난한 노력을 김 시장이 모를 리 없다.
김 시장의 본심은 암각화 보존과 직결된 물 문제 해결에 있다. 반구대암각화 보존을 위해 식수원인 사연댐 수위를 조절할 수문 설치 작업은 속도를 내고 있으나, 맑은 물(9만t) 부족에 대한 정부 해법은 턱 없이 모자라고 그것마저 지지부진하다. 당연히 울산 입장에선 국가유산청이 남의 집 제사보듯 감 놔라, 배 놔라 한다는 불만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국보 반구대암각화가 어디 울산만의 유산인가. 정부가 국가적 과제라는 인식을 갖고 한층 진일보한 해법을 명확하게 제시해야 한다. 물 문제 사슬에 속한 지자체들이 더는 딴소리를 못 하도록. 암각화 보존과 맑은 물 공급은 순서의 문제도, 양자택일의 문제도 아니다. 둘 다 필요하다.
울산시 역시 국가유산청과 정부를 상대로 물 문제 해결을 강하게 지속해서 요구해야 한다. 자칫 울산시마저 방기한다는 인상을 준다면 이는 암각화 보존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다. “(피감기관) 업무보고에 반구대암각화에 대한 언급이 없어 아쉽다”는 김성회 의원 말은 민선 8기 들어 엑스트라로 전락한 반구대암각화의 곤궁한 처지를 일깨운다. 김 시장이 2022년 7월 취임 후 지금까지 한 40여 차례 기자회견 중 반구대암각화를 우대한 기억이 없다. 내년도 시정 향방을 가늠하는 울산시 예산안 발표에서도 이렇다 할 암각화 사업은 언급하지 않았다. 관심이 사그라든 탓인지 반구대암각화 방문객 수는 2022년 5만 4286명에서 지난해 4만 8223명, 올해는 3분기까지 4만 4850명으로 매년 줄고 있다.
반구대암각화는 “세계사적으로, 포경사적으로 의미가 매우 크다.” 김 시장은 박사학위 논문 ‘우리나라 고래산업의 현황과 과제-울산광역시의 사례를 중심으로(2013)’에서 반구대암각화를 자세하게 소개한다. 울산 장생포를 고래문화특구로 키운 김 시장의 정치 자산도 그 뿌리를 들여다보면 반구대암각화에서 자양분을 얻는다. 반구대암각화 보존과 세계유산 등재는 산업도시에서 나아가 문화도시 울산으로 가는 중대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2024-11-18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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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9개월이 지났다
지난 2월 정부가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발표했다. 9개월이 지났다. 전공의는 돌아오지 않았다. 교수는 개원가로 떠났다. 의대생은 수업을 거부했다. 그 사이 내년도 의대생을 뽑는 수능은 내일모레로 다가왔다. 재수생에 직장인들까지 의대 입시에 몰린다고 한다. 정작 의사국가고시 응시도 줄어 내년에 의사 배출은 급감할 전망이다. 의사를 늘리자고 시작했는데 의사는 없고 의사가 되려는 사람만 미어터진다.
필수 의료와 지역 의료를 살리겠다는 명분도 현장에서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부산 지역 수련 대학병원 전체의 하반기 전공의 지원자는 다섯 손가락도 채우지 못했다. 연간 2만 건이 넘게 수술을 하는 흉부외과에는 전국에 10여 명의 전공의만 남았다. 지난 9월에는 경남 거제의 50대 급성 복막염 환자가 수술실과 응급실 병원을 찾지 못해 ‘뺑뺑이’를 돌다가 7시간 만에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숨진 사건이 있었다.
중증 환자와 가족들의 두려움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김윤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최근 국정감사에서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중환자실에 입원한 환자의 사망률을 분석해 초과 사망자가 1700여 명이라고 밝혔다. 전공의 이탈로 시작된 의료 공백이 방치되지 않았다면 막거나 미룰 수 있었을 죽음의 숫자다. 대부분 심부전과 쇼크, 뇌 손상이나 암 환자 등 중증 환자의 진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들이다.
의정 갈등이 봉합되더라도 그 여파는 사회에 장기적인 영향을 남길 수 있다. 울산의대 박인숙 명예교수는 최근 페이스북에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이 촉발한 의료재앙 개념도’를 공개했다. 전공의 이탈, 의대생 동맹휴학으로 시작된 도미노가 의사 교육과 의료의 질을 저하시키고, 더 나아가 국가재정의 악화와 이공계 몰락, 지방 붕괴 가속화 등으로 연쇄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는 우려가 기우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의정 갈등 국면에서 의사라는 직역은 법정단체 지도부의 막말과 환자를 볼모 삼는 집단 이기주의로 민낯을 보였다. 그러나 책임을 따지자면 정부 몫이 더 무겁다. 막스 베버는 정치가 열정과 균형 감각을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뚫는 작업이라고 했다. 지금의 혼란은 역대급 균형 감각이 필요한 난제를 열정만 앞세워 송판 격파하듯 밀어붙인 결과다. 정부는 독단적이고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11일 정부와 의료계는 의대 증원 사태 이후 처음으로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전공의 없이 출발한 여·의·정 협의체는 연내 의미 있는 결과를 내고 국민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줄 수 있게 노력하겠다고 했다. 전공의들은 여전히 내년도 의대 증원 백지화를 주장하고 있다. 수능 다음 날인 15일에는 제적 위기에 놓인 전국 의대생들이 처음으로 총회를 갖는다.
의료 개혁은 정부의 핵심 정책인 4대 개혁 중에서도 1번이다. 시급한 과제인 이유는 국민의 생명과 건강에 직결된 문제라서다. 처음에는 국민적 지지도 받았다. 9개월이 지났다. 아직도 “과거 정권이 선거 때문에 하지 못한 일”, “어떤 저항이 있어도 반드시 완수할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면 거듭 외치는 ‘민생’이나 ‘개혁’의 메아리도 공허할 수밖에 없다.
2024-11-1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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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롯데 자이언츠를 위한 백가쟁명
지난달 28일 광주에서 KIA 타이거즈의 승리로 올해 한국시리즈가 막을 내렸다. 2017년 이후 7년 만에 정상을 탈환한 KIA는 한국 프로야구 통산 12번째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쌓았다. 같은 달 30일 미국 프로야구(MLB)의 한국시리즈 격인 월드시리즈에서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가 뉴욕에서 축배를 들었다. 다저스는 4년 만에 MLB 챔피언에 올랐으며, 1955년 이후 모두 8번 미국 야구를 호령했다. 기뻐하는 KIA와 다저스 선수들을 보며 남의 집 잔치에 기웃거리는 듯한 심경이었다.
부산 사직구장에 전시된 롯데 자이언츠의 1984년과 1992년 우승 트로피 수는 올해에도 변함이 없다. 사실 롯데 팬들은 우승 트로피를 하나 더 추가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포스트시즌에만 진출했어도 우승에 버금갈 정도로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롯데의 7년 연속 가을야구 진출 실패라는 ‘난세’가 여전하자 천하의 롯데 팬들은 개탄했다. 이들은 저마다 올 시즌 롯데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각자의 해결책을 내놓고 있다. 이쯤 되면 롯데를 위한 백가쟁명에 견줄 만하다.
부산 시민들이 롯데를 논할 때 보여주는 지식과 열정은 전문가 못지않다. 한 기관의 홍보 업무를 담당하는 A는 롯데 경기 분석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아 매번 기자에게 자신의 견해를 알리곤 한다. 그의 메시지를 읽다 보면 절로 감탄이 나온다. 그의 핵심 주장은 ‘1·2군 전력 불균형론’이다. 롯데의 선수층이 얇다 보니 주전이 부상을 입을 때마다 대체 자원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1군이 안주할 수 없도록 2군과의 주전 경쟁도 치열하게 전개돼 팀 전력을 끌어올려야 하는데, 이 또한 여의치 않다는 게 A의 판단이다.
기자의 고교 동창인 B는 올해 롯데의 가을야구 진출 가능성이 점점 희미해졌음에도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롯데의 ‘찐팬’이다. 뿐만 아니라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도 롯데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을 자주 과시하곤 했다. 그는 롯데의 정규리그 7위 마무리에 대해 ‘봄데 실패론’을 주장했다. 보통 봄에 무서운 기세를 보였던 롯데가 올해는 개막 직후 4연패에 빠졌고, 3~4월에 치른 30경기에서 꼴찌로 추락한 점을 지적한 것이다. B는 이 기간 동안 선발진의 불안정한 투구와 일부 선수들의 부상이 중위권 도약을 어렵게 했다고 분석했다.
흥미롭게도 A와 B는 공통적으로 ‘자유계약(FA) 폭망론’을 거론했다. 롯데가 2년 전 거액을 들여 FA로 영입한 노진혁, 유강남, 한현희의 부진이 롯데로서는 뼈아팠다는 게 그들의 일치된 견해다. A와 B는 또 2025년 FA 자격을 얻는 롯데 투수 김원중과 구승민에 대해 롯데가 무리해서 붙잡을 필요가 없다는, 이른바 ‘FA 선긋기론’도 펼쳤다. 이 두 선수가 롯데에 잔류한다면 좋은 일이지만, 막대한 비용을 치러야 한다면 오히려 손해라는 주장이다.
A와 B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기자가 들은 롯데의 올 시즌 분석을 모두 소개하자면 지면이 부족할 지경이다. 〈부산일보〉 롯데 담당 기자로서, 이렇게 백가쟁명식 의견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균형 잡힌 기사를 쓰는 일은 쉽지 않다. 자칫하면 섣부른 글로 비웃음을 피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 같은 현상은 롯데에 대한 팬들의 열망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롯데의 성적이 아무리 부진하더라도 팬들의 관심이 여전하니 롯데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팬들의 애정이 차디차게 식었던 2000년대 초반, 롯데의 암흑기를 돌이켜 보면 더욱 그렇다.
2024-11-04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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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피란 세대 유산' 부산 빈집, 이젠 비움의 공간으로
얼마 전 어릴 적 살던 곳으로 추억 여행을 떠났다. 유년 시절은 물론 학창 시절 대부분을 보냈던 곳이었던 만큼 발길이 닿는 곳마다 옛 추억이 아련했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법한 좁은 도로를 두고 양옆엔 지은 지 50년은 족히 된 듯한 4~5층짜리 집들이 건물 사이에 조금의 공간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듯 비집고 들어가 있었다. 구획 정리가 된 좁은 필지마다 들어선 건물은 하나같이 길쭉한 사각형이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빈집들은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집 앞에는 노인들이 나와 자리를 펴고 한적함을 달랬다.
기자가 살았던 마을은 부산의 대표적인 정책 이주 지역이었다. 마을을 떠났던 20여 년 전과 비교해보면, 놀이터가 사라지고 도로가 생긴 것 외에는 달라진 게 없었다. 그새 도시철도가 뚫렸고,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되기도 했다. 아파트 건립 사업이 추진되다 사업성 등을 이유로 중단됐다는 소식도 들렸다. 하지만 그렇게 다시 그곳의 시간은 멈췄다.
최근 부산의 빈집 문제를 기획 취재해 보도했다. 이 같은 개인적 경험의 발로이기도 했지만, 원도심과 정책 이주지를 중심으로 심각한 빈집 문제에 직면한 부산의 현실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빈집 문제를 취재하면서 느낀 점은 빈집 문제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골든 타임을 정부와 부산시가 이미 놓쳐버렸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제 겨우 인구 소멸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인 빈집 문제에 대해선 빈집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허가 빈집은 제외하는 등 제대로 된 통계도 갖고 있지 않았다. 실태 파악이 제대로 돼 있지 않다 보니 빈집 문제 대응에 필요한 예산도, 대책도 턱없이 부족했다. 재정난에 시달리는 부산의 일선 지자체들은 급증하는 빈집에 속수무책이다.
부산의 빈집 문제는 우리 근현대사와 떼어놓고 얘기할 수 없다. 한국전쟁과 피란 등 굴곡진 역사를 짊어진 부산은 구릉지와 산복도로 주변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인구가 몰려들며 주거지가 형성됐다. 이는 현재 인구 소멸에 따라 빈집 문제로 부메랑이 돼 돌아오고 있다. 부산은 이러한 특수성으로 전국에서 빈집 문제가 가장 심각한 대도시가 됐다. 정부가 부산을 ‘빈집 특별재난구역’으로 지정하거나, 관련 특별법을 만들어 대응해야 한다는 한 전문가의 메시지에 정부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선제 대응의 골든 타임을 놓쳤다고 해서 마냥 두고 볼 순 없는 일이다. 급증하는 빈집이 ‘쓰나미급’ 폐해를 가져오며 부산의 도시 성장에 아킬레스건이 될 날이 머지않았기 때문이다.
빈집 문제는 난제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미래 세대를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다. 문제 해결을 위한 시작은 어찌보면 간단하다. 짧은 기간 무계획적이고 급속하게 응축됐던 역사의 공간을 이제 하나둘 비워 나가는 것이다. 인구 소멸로 더 이상 사람이 들어와 살 수 없다면, 지형이 가파르고 기반 시설이 열악해 사업성이 부족하거나 개발이 힘든 곳이라면, 빈집을 공원으로, 녹지로, 마당으로, 때론 길로 비워 나가야 한다. 한 도시재생 전문가가 오랜 시간과 경험에서 얻은 답도 그랬다. “빈집을 리모델링하기도 하고 철거해서 다양한 시설도 만들어봤지만, 결국은 누군가가 다시 들어와서 살아야 의미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2024-10-28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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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채식주의자가 불편한 사람들
왜 사람들은 흑백요리사에 열광할까? 그 이면에는 약자인 ‘흑수저’가 강자인 ‘백수저’를 이길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자리하고 있다. 흔히 ‘언더독’이라 불리는 실력 있는 무명 요리사들이 기존 사회에서 인정받는 금수저 요리사들을 이기는 이야기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서사이다.
이 스토리는 ‘다윗과 골리앗’의 서사와 매우 유사하다. 다윗과 골리앗은 전형적인 흑수저 스토리로, 인류사 최고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다. 3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끊임없이 대중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약자인 다윗이 거인 병사이자 최고 강자인 골리앗을 물리친다는 점이다. 골리앗은 사회 질서, 규범 그리고 권력을 대변하는 캐릭터이다. 다윗이라는 개인이 사회의 구조적 압박과 불합리한 규범에 도전하고 그것을 무너뜨리는 상징적인 이야기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흑백요리사와 같은 이야기에서 단순한 ‘언더독의 승리’를 넘어, 기득권에 대한 도전을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개인이 태어날 때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질서, 규범 그리고 제도는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을까? 여기에 대한 힌트를 찾는다면 미셀 푸코가 가장 가까이 있을 것이다. 푸코는 사람들이 의심 없이 따르는 규범이 실제로는 ‘권력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다윗은 우리에게 묻는다. ‘개인은 사회 구조의 부속품으로서 비판 없이 따라야만 하는가’라고.
얼마 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대표작인 ‘채식주의자’ 역시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와 유사한 맥락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사회적 규범과 억압된 가치관을 거부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찾으려는 약자의 투쟁을 그린다.
주인공 영혜는 한국 사회의 전통적인 가부장제와 가족 중심의 규범에 저항하며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으로 삶의 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그녀의 선택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폭력적으로 거부당한다. 그럼에도 영혜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회의 압박을 뚫고 나아간다. 이는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이면서, 동시에 개인의 목소리를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열광케한 설국열차나 오징어게임 같은 작품도 다윗과 골리앗 서사와 맞닿아 있다.
이 모든 이야기는 ‘도전’보다는 ‘변화’의 의미를 담고 있다. 변화는 ‘기존 사회의 전복’이 아니라 ‘좀 더 나은 사회로의 성장’을 의미한다. 흑수저의 열정과 도전은 기존 기득권이 지배하는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가능성을 보여주며, 사람들은 그 점에 공감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저항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사회가 소수의 의견이나 새로운 가치를 외면하거나 억압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채식주의자 등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이 익숙한 가치관과 질서를 벗어나기를 두려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시대가 AI(인공지능)로 변해가고 있는데 여전히 4비트 컴퓨터를 고집하는 것처럼 말이다.
개인이 기존 질서에 맞서는 것은 너무 힘들다. 사실 자기만의 생각을 고수하고 기존 질서를 따르는 것이 가장 쉽다. 자신과 다른 시선을 놓고 고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공동체 속에서 살고 있다. 다양한 생각과 시선이 존재하는 공동체 속에서, 기존의 권력과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시선을 함께 바라보는 노력이야말로 자유가 아닐까.
2024-10-21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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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어민의 눈물, 언제까지 남의 일일까?
“올해가 당신이 경험하는 가장 시원한 여름이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 소속 과학자 피터 칼무스가 지난해 SNS를 통해 전 세계인들에게 알린 섬뜩한 경고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한술 더 떠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 시대는 끝났다. 지구 열대화(global boiling) 시대가 도래했다”고 단언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올여름 한국을 비롯한 지구촌 곳곳은 지금껏 경험한 적 없는 불볕더위에 허덕였다. ‘역대급 폭염’ 기사는 이제 일상이 됐다. 바다는 아예 펄펄 끓었다. 해양수산부는 지난 7월 24일 올해 첫 고수온 특보를 발령한 이후 이달 2일 해제했다. 지속 기간은 무려 71일로 2017년 고수온 특보 체계가 만들어진 이후 가장 길었다.
30도를 웃도는 고수온에 어민은 역대 최악의 여름을 보냈다. 해수부 자료를 보면 지난 7월부터 이달 초까지 접수된 양식 어류 폐사 피해 신고 규모는 4850만여 마리다. 이 중 절반이 넘는 2672만 3000여 마리가 경남 앞바다에서 떼죽음했다. 여기에 멍게 4777줄, 미더덕 614줄, 피조개 374ha, 전복 60만 6000여 마리가 고수온에 녹아 내렸다. 현재까지 집계된 피해액은 594억 원 상당으로, 역대 최악이라던 지난해(1466만여 마리, 207억 원) 갑절 수준이다.
특히 멍게는 통영과 거제 앞바다에 있는 양식장 800여ha 대부분이 ‘궤멸 수준’이다. 남해안 멍게는 국내산 멍게 유통량의 70%가량을 차지한다. 통상 여름을 지나면 10~20% 정도 폐사하는데, 올해는 생존율이 10%에도 못 미칠 전망이다.
굴도 유탄을 맞았다. 굴은 딱딱한 껍데기가 알맹이를 보호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수온 변화에 둔감하다. 올해는 긴 장마로 육지에 있던 각종 영양분이 바다로 다량 유입돼 성장 환경은 더 좋아 작황이 나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다. 일부 해역에서 ‘산소부족물덩어리’(빈산소수괴) 피해로 추정되는 폐사가 일부 확인됐지만 평년보다 심한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딴판이었다. 경남 전체 굴 양식장 3분의 1에 해당하는 1130ha가 직격탄을 맞았다. 평균 폐사율은 60%, 심한 곳은 90%를 웃돈다. 두 달 넘게 이어진 고수온에다 빈산소수괴까지 덮치면서 뒤늦게 폐사를 유발했다는 게 어민들 판단이다.
어선업 역시 예외가 아니다. 대형기선저인망수협이 내년 감척사업 수요를 조사했더니 소속 어선 136척 중 절반이 넘는 74척이 참여를 희망했다. 2년 전과 작년 수요 조사에선 각각 6척, 15척에 불과했다. 최근 인건비, 유류비 등 고정비용이 치솟아 가뜩이나 경영난이 심화하는 가운데 고수온 후유증에 생산성마저 곤두박질치자 결국 백기를 들었다.
수온 1도 변화는 육상 기온 5도 이상에 맞먹을 만큼 해양 생물에겐 치명적인 충격이다. 올여름 폭염은 올겨울 역대급 한파의 예고편일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당장 피해는 어민들이 떠안겠지만 다음은 누가 될지, 또 얼마나 심각할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언제까지 남 일일순 없다는 얘기다. 진정 올여름이 가장 시원하다면 앞으로 마주할 여름은 어떨지 상상하는 것조차 아찔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 하나 정도는 고민해야겠다.
2024-10-14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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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벤치는 권리다
누군가 스웨덴에 1년간 살며 뭐가 가장 좋았냐고 물어오면, 기자는 망설임 없이 ‘벤치’라고 답한다. 해질녘이면 매일 다른 빛 조합으로 오로라 못지 않은 영롱함을 빛내던 하늘도, 폐를 뚫어낼 듯한 깨끗한 공기도, 맑은 물도 벤치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
언젠가 스톡홀름에서 경치 좋은 곳을 발견하고는 ‘아, 잠시 앉아 풍경을 만끽하고 싶다’는 생각에 두리번거렸는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눈 앞에 벤치가 놓여 있었다. 이 경험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감탄을 자아내는 풍경 뒤로는 편안한 등받이가 있는 벤치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 같았으면 틀림없이 좋은 경치를 만끽하기 위한 자릿값을 내러 카페나 식당에 들어갔어야 할 상황이었다.
기자는 반복된 경험을 통해 스웨덴의 ‘벤치’를 권리로 이해했다. 좋은 풍광과 자연 자원은 누구든 누려야 할 공공의 자산인 만큼, 주요 스폿(spot)에는 카페가 아닌 벤치가 있었다. 자연은, 그리고 경관은 모두의 것이기 때문에 경관을 누리기 위해 자릿값을 내야 할 필요가 없었다.
벤치는 시민들의 당연한 권리였다. 나아가 도심 곳곳, 심지어는 쇼핑몰과 백화점 등에도 곳곳에 벤치가 있어 누구든 돈을 내지 않고도 쉬어갈 수 있었다. 벤치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나 혼자 나와 햇볕을 쫴야 하는 사람,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이들을 어딘가로 숨어들지 않게 했다.
공원 벤치에서는 생일 파티나 피크닉 파티도 자주 열렸다. 공원 벤치와 나무 사이에 가랜드와 풍선을 달고 피자 3~4판을 사오면 파티 준비가 끝이 났다. 강가, 해변가 벤치는 수영을 즐기는 이들의 공짜 휴식처였다. 벤치는 거의 모든 장소에 넉넉하게 있었다.
땅 가진 사람, 아파트 가진 사람이 멋진 풍광을 독점하는 게 당연시되는, 경관의 사유화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부산에 살다 보니 ‘작지만 공적인 시설물’ 벤치가 더욱 그리워진다.
다행히 이기대 앞 아파트 허가 과정의 문제점을 짚으며, 또 아파트 계획이 철회되는 과정을 보며 부산 시민이 경관을 공공의 자산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인상을 깊이 받았다. 그동안 부산의 해안가 경관은 아파트와 빌딩에 점령 당하며 개인의 부동산 가치를 올려주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우리가 이 경관을 독점하기 위해 이만한 돈을 주고 샀으니, 너네도 그에 상응하는 돈을 내야 해”에 개인은 저항할 수 없었다. 경관 또한 돈 있는 이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 시민들은 경관을 누릴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경관을 가리는 건물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영국 내셔널 트러스트가 보존 가치가 높은 해안선을 사 모은다는 얘기가 더 이상 먼 나라 얘기로 들리지 않는다.
경관은 시각적 요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산의 경관은 부산 사람의 삶과 문화, 역사가 응축된 집합물로,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자산이다. 또한 앞으로 부산의 경쟁력과 관광의 가치는 경관에서 판가름이 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산의 가장 경치 좋은 곳에도 가장 높은 빌딩이 아닌, 가장 낮은 시설물 벤치가 세워지길 바라본다.
2024-10-07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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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부산은 왜 '빌바오'가 될 수 없을까
전쟁에 관심이 많은 아이 덕분에 ‘전쟁의 아픔과 기억’이라는 테마로 최근 베를린과 바르샤바, 크라쿠프 등을 다녀왔다. 도시의 역사성과 건축물의 상징성은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특히 뇌리에 맴돈 것은 ‘빌바오 효과’였다. 랜드마크 건축물이 해당 지역의 경쟁력을 견인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1980년대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다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을 세우면서 세계적인 관광지로 변모한 스페인 북부도시 빌바오에서 유래됐다. 빌바오 효과를 두고 말들이 많지만, 뛰어난 디자인의 건축물이 지역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분명 크다. 2001년 완공된 독일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은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등과 함께 통일 이후 베를린의 파급력을 높이는 선두 주자 역할을 하고 있다. 빌바오 효과는 아니더라도 관광객을 불러모으며 지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는 건축물들은 폴란드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폴란드 크라쿠프의 바벨성을 중심으로 한 구시가지와 현대 건축물의 조화는 관광객 재방문의 일등 공신이었다.
부산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부산의 랜드마크 건축물이 뭐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을 내놓을 수 없다. 후보들은 꽤 있지만 대부분 공사 중이거나 논의 단계 또는 논란의 중심에 머문 탓이다.
‘글로벌 허브도시’ 부산의 핵심으로 꼽히는 부산항 북항이 대표적이다.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십수년째 기대만 모으고 있다. 주요 시설 중 하나인 오페라하우스는 설계 공법 적정성 논란 등으로 1년여 간 건설이 멈췄다가 우여곡절 끝에 지난 5월 공사가 재개됐다. 공사 지연과 사업비 증액에 대한 책임 규명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1단계 사업에서 가장 규모가 큰 랜드마크 부지(11만 3286㎡)는 나대지로 남아 이름값을 못하고 있다. 지역 상공계에선 2029년 개항을 목표로 하는 가덕신공항과 연계해 쇼핑과 관광, 마이스를 아우른 북항 복합리조트 유치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 제정 움직임이 가속화하고 ‘카지노=사행 산업’이라는 인식이 점차 옅어지면서 북항 복합리조트 재추진 움직임에 힘이 실리고 있다. 산업 재편 차원에서 설득력 있는 해법이지만 반대 여론을 의식한 소극적인 행정으로 가야 할 길은 멀다.
남구 이기대 일대 프랑스 미술관 퐁피두 센터 분관 유치도 화두다. 막대한 유치·운영 비용부담 우려와 문화클러스터 구축 필요성이 팽팽하게 맞선다. 이번엔 시민 여론을 제대로 수렴하지 않은 밀어붙이기 행정으로 여기저기서 논란이다.
단순 건축물에 머무는 랜드마크는 도시의 생명력에 별 도움이 안 된다. 도시의 잠재력을 끌어올리고 산업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도시 경쟁력을 강화하는 중심에 서야 한다. 빌바오시가 구겐하임 미술관 유치로 도시를 탈바꿈하는 데 성공한 것은 도시 산업 재편의 큰 그림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자금 조달 및 운영 등에 대한 촘촘한 세부 계획과 수십년에 걸친 지역 연계 개발, 민간 협력도 뒷받침됐다.
거대 복합리조트를 중심으로 금융까지 거머쥐면서 빌바오 효과의 대표 주자로 등극한 싱가포르의 사례는 결코 남 얘기가 아니다. 부산의 산업구조를 바꾸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복합리조트와 같은 건축물이 랜드마크인 부산항 북항에 들어서면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부산만의 모습을 세계인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을 것이다. 시민들은 물론 주요 경제 주체들의 요구를 적극 반영한 랜드마크 구축은 부산의 전환점이 되기 충분하다. ‘부산 효과’라는 용어가 탄생할지 누가 알겠는가.
2024-09-30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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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부산 '성장 동력' 인천이 선점한다
최근 통계청이 지역소득통계를 개편한 결과 2022년에 인천이 부산의 지역내총생산(GRDP, 실질 기준)을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내총소득(GRNI)에서는 2021년 인천이 부산을 추월했다. 인천은 수도권 확장에 따른 신도시 개발과 인천공항을 앞세운 물류(운수·창고업) 호황, 초대형 복합리조트 유치 효과까지 누리는 모습이다. 이 가운데 물류와 복합리조트 등은 부산과 직접 경쟁하는 분야여서 향후 두 도시의 경제력 격차가 더 커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통계청이 발표한 ‘지역소득통계 2020년 기준년 개편 결과’에 따르면 부산은 2022년 GRDP 증가율(전년 대비)이 2.6%였으나 개편 후 1.7%로 떨어졌다. 반면 인천은 개편 전 6.0%에서 개편 후 6.8%로 GRDP 증가율이 상승했다. 인천의 2022년 GRDP 증가율은 전국 최고치다. 통계 개편 후 기준으로 부산의 GRDP는 2021년 100조 원으로 인천(99조 원)에 앞섰다. 그러나 2022년에는 부산 GRDP가 102조 원으로 인천(106조 원)에 뒤졌다.
2022년 부산과 인천의 GRDP 증가율을 가른 핵심 요인은 건설업 경기였다. 부산은 건설업 GRDP가 전년 대비 10.6% 감소한 반면 인천은 7.3% 증가했다. 제조업 GRDP에서 부산에 10조 원 이상 앞선 인천은 서비스업에서도 격차를 좁히고 있다. 2021년 13조 원 규모였던 두 도시의 서비스업 GRDP 격차는 2022년 10조 원으로 줄었다. 인천은 특히 물류와 관광 등 인프라가 확대되고 있어 향후 서비스업 생산이 상승세를 이어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물류의 경우 인천은 2022년 운수·창고업 GRDP가 전년 대비 무려 41%나 증가했다. 인천공항을 중심으로 ‘물류센터’ 투자가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물류 관련 산업이 호황을 맞은 결과다.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합병 효과도 인천에 집중될 전망이다. 대한항공은 지난 5월 인천시와 영종하늘도시 특별계획구역 33만㎡에 대한항공 본사를 유치하고 대규모 주거·문화시설 등을 조성하는 프로젝트의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인천에는 ‘외국인 전용 카지노’를 갖춘 복합리조트가 연이어 개장해 관광 경쟁력도 높아졌다. 특히 올해 영종도에 개장한 미국계 자본의 인스파이어 리조트는 총 7조 원 이상이 투입되는 초대형 복합리조트다. 특히 인스파이어 리조트에는 국내 최대 규모(전용영업장 면적 1만 4372㎡) 외국인 전용 카지노가 들어섰다. 인천의 카지노(파라다이스시티, 인스파이어) 전용면적은 2만 3098.8㎡로 부산 카지노(세븐럭카지노 부산롯데점, 파라다이스카지노 부산지점, 3067.39㎡)의 7.5배다.
부산이 성장동력으로 추진하는 공항 기반 물류 산업 성장, 복합리조트 기반 서비스 산업 성장이 이미 인천에서 현실화되고 있다. 부산과 대비되는 인천의 성장에 대해선 ‘수도권 집중화’의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가 수도권 팽창을 허용하면서 물류와 서비스업 핵심 기능이 수도권 지자체로 몰린 결과라는 분석이다. 결국 부산이 물류 도시의 위상을 회복하고 복합리조트 등으로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선 규제완화와 특별법 제정 등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2024-09-23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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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테러 경각심과 우리사회의 병폐
‘쾅!’ 8월 19일 오후 3시 울산공항 대합실에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사람이 죽고 다쳤다.” 신고를 받은 경찰, 소방관들이 화재 진압과 인명 구조에 나섰다. 긴박한 상황을 인지한 국정원과 유관기관이 대테러합동조사에 착수했다.
공항 밖에선 드론 여러 대가 공중을 활보하며 패닉에 빠진 시민들에게 독가스를 뿌렸다. 울산화학재난합동방제센터 탐지 결과 독일 나치가 유대인 학살에 사용한 살인 도구, ‘염소가스’였다. 특수 제독차량이 투입됐고, 경찰은 정부 비상령 중 최고 단계인 갑호비상을 건의했다. 한쪽에선 테러범들이 인질을 잡고 경찰과 대치했다. 당국의 위기협상팀이 고심 끝에 협상 결렬을 결심한 순간, 경찰특공대가 들이닥치며 테러범을 일거에 진압했다. 오후 3시 45분 상황 종료.
스릴러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련의 장면은 실제 상황을 가정한 경찰청 주관 ‘제1회 국내 테러사건대책본부 훈련’에서 연출한 모습이다. 테러범을 잡기 위해 헬기에서 패스트로프로 하강하는 경찰특공대도 멋지지만, 훈련의 요체는 국가 핵심 기관들이 만들어내는 ‘협업 시스템’에 있다. 경찰과 소방, 국정원 등 11개 기관 367명이 각자 역할에 충실하며 빈틈없는 대비 태세를 구축하는 것이다.
경찰이 울산의 한 작은 공항을 낙점해 대테러훈련의 새 이정표를 세운 건 우연이 아니다. 훈련을 자청한 울산 경찰의 적극적 의지가 주효했는데, 무엇보다 원전과 공단 등 국가 중요시설이 즐비해 테러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울산의 장소성이 깊이 고려됐다고 본다.
‘우리나라는 과연 테러로부터 안전한가.’ 이번 훈련을 보고 자연스레 떠오른 물음이다. 국가정보원이 올해 4월 발간한 ‘2023년 테러정세와 2024년 전망’에 따르면 국내에서 테러단체가 개입한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으나, 국내 거주 외국인들의 테러단체 지원 사례가 지속 적발됐다. 과도하게 불안해할 필요는 없지만, 마냥 안심할 처지도 아니라는 얘기다.
2023년 울산의 한 복지시설에서 발생한 대만발 독극물 의심 소포 사건은 전국을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으며 테러 공포에 취약한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들춰냈다. 전국적으로 관공서나 학교를 대상으로 테러 예고 메일이 발견돼 한바탕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주변에선 ‘에이 설마…’ ‘그러면 그렇지’ 하고 넘어가기 일쑤다.
테러는 이런 안이한 틈을 비집고 들어가 일상의 평온을 파괴하고 공포와 불안을 심는다. 최근 독일 축제현장에서 3명의 목숨을 앗아간 극단주의 이슬람세력의 묻지마 테러가 대표적이다. 미국 9·11의 악몽이 어김없이 생각나는 요즘 그저 남의 나라 얘기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경찰 대테러 훈련에서 규정한 ‘가상의 적’, 그 실체는 무엇일까. 남쪽으로 오물 풍선을 날려 보내는 북한일까. 극단주의 무장단체일까. 혹시, 우리 내부의 편견과 혐오, 차별로 점철된 고질적 병폐가 있는 건 아닐까. 편가르기식 진영 논리는 각종 정치 테러로 이어지며 위험 수위를 넘어선 지 오래다. 빠른 속도로 악화하는 경제적 불평등은 어떤가. 젠더 갈등, 노사 갈등, 최근의 의정 갈등까지…. 갈등공화국의 어두운 그림자는 곳곳에 깔려 있다. 무더위에 열린 대테러훈련이 잠자던 경각심을 깨우고 우리 사회 양극화를 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2024-09-0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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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이것이 왜 국가 재난이 아닌가?
어떤 뉴스는 읽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 딥페이크 성착취 텔레그램방이 개설됐다는 전국 대학과 중고등학교의 위치가 한반도 지도를 촘촘히 채울 때, 드러나는 ‘지인 능욕’ 텔레그램방 규모가 22만 명, 40만 명 식으로 불어날 때, 불법 합성 성착취물을 만들고 공유한 가해자들이 수사 기관을 비웃고 급기야 관련 기사를 쓴 기자를 ‘능욕’하는 방까지 개설될 때 분노와 참담함에 차라리 눈을 돌리고 싶었다.
딥페이크 집단 성범죄 사건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 온라인 공간에서 무리를 이루어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한 불법 콘텐츠를 돌려보는 디지털 성범죄의 역사는 인터넷의 역사와 시간대가 크게 다르지 않다. ‘○○ 비디오’가 있었고, 소라넷이 있었고,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있었다. 대부분 가해자와 피해자가 뚜렷하게 성별로 구분되는 젠더 범죄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 기술의 위력이다. 합성 기술의 보급으로 누구나 사진 한 장으로 가상의 성착취물을 손쉽게 만들고, 그것을 추적이 힘든 암호 화폐로 사고팔 수 있다. 텔레그램의 강력한 보안 기술은 성인 인증이나 개인 정보 공개도, 적발의 두려움도 없이 불법 콘텐츠에 무제한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일상 사진이나 프로필 사진만으로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것 또한 무한히 연결되는 소셜미디어의 등장 때문이다.
딥페이크 집단 성범죄를 부추긴 게 기술만은 아니다. 과거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소극적인 수사와 가벼운 처벌, 부실한 대책이 이번 사건을 배양했다. 사건의 시발점인 서울대 딥페이크 사건도 피해자가 직접 나서서 노력한 끝에 수사와 기소를 이끌어냈다. 소라넷도 n번방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2년 전 법무부 디지털성범죄 TF는 갑자기 해체됐고, 당시 이미 구체화된 대책은 서랍 속에 묻혔다.
더 근원에는 여성 혐오와 성차별이 있다.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는 사회라면 여성을 ‘능욕’하는 콘텐츠가 적어도 10대들의 놀이 문화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성평등이 국가적 의제였다면 외신이 이번 사건을 두고 “만연한 성희롱 문화 속에서 기술 발전이 디지털 성범죄의 폭발적 증가를 불러왔다”고 분석할 때 국내 정치인의 일성이 “과잉 규제가 우려된다”, “급발진 젠더 팔이, 그만할 때도 됐다”일 수도 없을 것이다.
딥페이크 집단 성범죄 사건은 징후가 아니라 무수한 경고음을 방치한 끝에 10대들까지 파고든 파국이다. 더 두려운 것은 이것이 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온라인에서 세를 키운 여성 혐오는 이미 현실의 여성 대상 폭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변의 지인이나 동료에 의해 성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은 사회에 대한 신뢰의 근간을 허문다. 그 결말은 공동체의 실패고 국가의 위기다.
“동료 시민에 대한 집단적 모욕과 멸시가 용인되고 학습되는 사회는 존속할 수 있는가? 존속해도 되는가? 이는 국가 위기 상태이다.” 한국여성민우회의 성명이다. “국가적 재난 상황임을 선포하고 시급히 대안을 마련하라.” n번방 사건을 처음 공론화한 박지현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촉구다. 필요한 것은 국가의 의지다. 늦었지만 더 늦어서는 안 된다.
2024-09-02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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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그라이너의 눈물과 국가
지난 11일(현지시간) 폐막된 2024 파리 올림픽에서 미국은 16년 만에 중국에 1위를 자리를 뺏길 뻔 했다. 올림픽 마지막 날 열린 농구 여자부 결승에서 미국이 프랑스를 67-66, 단 1점 차로 금메달을 따면서 종합 1위를 지켰다. 성조기가 가장 높이 올라가고 미국 국가가 연주될 때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한 선수가 있었다. 바로 브리트니 그라이너였다.
2020년 미국에서 조지 플로이드 사태로 촉발된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의 소용돌이 속에 그라이너가 보여준 태도는 올림픽 시상대의 모습과는 판이하다. 그라이너는 경기 전 미국 국가가 울릴 때 항의의 표시로 무릎을 꿇었다. 심지어 그는 2020년 7월 지역언론 애리조나 리퍼블릭과의 인터뷰에서도 “솔직히 우리 시즌 동안 국가를 연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말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라이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기자는 그라이너의 경기를 직접 본 적이 있다. 지난해 8월 10일 미국여자프로농구(WNBA) 피닉스 머큐리와 코네티컷 선의 대결을 관람했다. 홈팀 머큐리의 응원이 메아리친 피닉스 풋프린트 센터의 열기는 피닉스의 폭염보다 더 뜨거웠다. 머큐리 공격의 핵은 역시 2m 6㎝의 장신 센터 그라이너였다. 그는 이날 21득점을 기록하고 리바운드 10개를 잡아냈다. 경기 내내 펄펄 뛴 그라이너 덕분에 머큐리는 선을 90-84로 물리쳤다.
그라이너의 활약이 특별히 돋보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는 10개월 동안 러시아에서 구금된 뒤 2022년 12월에 풀려나 친정 머큐리로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라이너는 오프시즌 중 지난 2022년 2월 러시아 리그서 활동하다 대마초를 소지한 혐의로 체포돼 징역 9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의료용 대마초를 실수로 짐에 넣은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수개월간 그라이너를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러시아와 협상을 벌였다. 결국 양국은 미국에 수감돼 있던 러시아 출신 ‘죽음의 무기상’ 빅토르 부트와 그라이너를 맞바꾸는 것으로 합의했다. 자국민을 데려오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길 수 있겠으나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부트는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인물이었으며 2029년에 미국 감옥에서 석방될 예정이었다.
그라이너의 귀국 관련 백악관에서 이뤄진 백브리핑 때 한 기자는 날카로운 질문을 한다. “부트의 악명을 고려했을 때, 다른 정부들이 ‘우리도 미국인 중 한 명을 잡으면, 우리 쪽의 더 큰 인물을 되찾을 수 있겠네?’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어떻게 방지할 수 있나요?”
미국 관료는 기자에게 되물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브리트니 그라이너와 같은 사람이 허위 절차를 거쳐서, 러시아 교도소의 끔찍한 상황 속에 9년을 보내도록 강요받는 것이 어떻게 용납될 수 있을까요?”
미국 여자 농구팀의 올림픽 시상식에 대해 워싱턴포스트는 ‘그라이너의 눈물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는 칼럼을 게재했다. 칼럼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그들의 상징으로 오용하는 성조기를 그의 어깨에도 걸칠 수 있다. 흑인을 재산처럼 소유했던 변호사가 쓴 미국 국가는 그라이너의 노래이기도 하다”고 썼다. 그라이너의 눈물이 정말 모든 것을 말해줬다. 정부가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제 역할을 다했을 때 국기와 국가를 외면했던 사람의 마음마저도 움직일 수 있음을 말이다. 그리고 그라이너는 올림픽 금메달로 미국에 보답했다.
2024-08-26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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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박형준 시장께 드리는 질문
일본 후지산 아파트 얘기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아이에스동서(주)의 이기대 아파트 건립의 문제점을 짚는 보도를 시작한 후 최근까지도 기자에게 가장 많이 전달된 뉴스입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일본의 한 건설사가 완공을 코앞에 두고 다 지은 아파트를 철거합니다. 이 아파트는 후지산을 가리고 조망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건설 초기부터 주민들과 갈등을 빚었던 건물입니다. 4층 이하로 줄이라는 반발이 있었지만 건설사 측은 애초 11층으로 계획했던 건물을 10층으로 낮춰 건설을 강행했습니다.
하지만 후지산 경관을 해친다는 우려가 계속되자 건설사 측은 결국 다 지어 놓은 아파트를 철거하기로 했습니다. 100억 대의 손해를 감수하고도 철거를 결정한 이유는 부정적 여론으로 회사 이미지가 실추되는 것이 더 큰 손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 선례 덕에, 앞으로 일본에서는 경관을 훼손하는 건물은 쉽사리 짓기 힘들 겁니다. 이 뉴스는 무분별한 부동산 개발에 경종을 울린 사례로,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반대로 부산은, 나쁜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습니다. 욕망을 포장해 폭력적으로 박아 올린 엘시티와 해운대 달맞이 능선을 깔아뭉갠 아파트, 이번엔 보란 듯이 턱밑에서 이기대를 정면으로 가리는 아파트라뇨. 업자들은 과거의 경험으로 부산시민을 기만하는 노하우를 축적해가고 있지만, 부산시민들에게는 나쁜 경험들만 쌓여가고 있습니다.
‘이 좋은 풍광은 땅 가진 우리 거야, 아파트 가진 우리 거야. 보고 싶으면 돈 주고 사서 봐.’ 나머지 부산시민을 2등 시민으로 만드는 이 같은 나쁜 경험들이 축적되면서 부산을 향한 자조는 늘어갑니다. 부산에 남아도는 게 아파트인데, 지을 데가 없어 이기대 앞 자투리땅까지 아파트냐, 해도해도 너무한다 소리가 봇물 터지듯 나옵니다. 쇠락해가는 도시를 보여주는 징조라는 자조 섞인 얘기도 나오고 심지어 부산을 떠나고 싶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내가 안 되면 내 자녀만이라도 부산을 떠나보내겠다 합니다. 언제까지 부산시민을 이렇게 2등 시민으로 만드실 건가요.
이기대 코앞에 만일 아파트가 지어진다면, 박형준 시장 때 허가 난 아파트라는 꼬리표가 내내 붙어 다닐 겁니다. 물론 “누가 저걸 허가해줬느냐”는 원망이 나올 때마다 오은택 남구청장의 이름도 빠지지 않겠지요.
보도 초창기부터 부산시장께 묻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질문지를 보내라 하셨죠. 이제야 질문지를 보냅니다. 시장님이 공원 일몰제 위기에 놓인 사유지까지 사들여 이기대를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예술공원으로 만들겠다 했을 때 많은 이들이 박수를 보냈습니다. 부산시민이 아끼고 사랑하는 이기대의 가치를 부산시장도 알고 있고, 시민들과 같은 마음이구나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이기대 예술공원 코앞에 얼토당토 않은 아파트 건립 계획이 수립되고, 공무원들은 지구단위계획 의제설정과 경관심의 프리패스라는 무리수까지 둬가며 원래 용적률을 넘어선 최대 용적률 아파트의 길을 터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장님은 왜 침묵하십니까.
부산시민은 공무원을 투표로 선출하지 않았습니다. 부산시민이 선출한 것은 부산시장입니다. 마땅히 부산시민의 입장을 대변하셔야 합니다.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2024-08-19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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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길들여지는 개인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소환한다. ‘1984’는 개인이 거대 시스템인 ‘빅브라더’에 잠식돼 자율성을 잃고 길들여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오늘날 개인은 또 다른 ‘빅브라더’에 의해 길들여져 가고 있다.
지난달 영국 사회가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 괴한이 어린이 댄스교실에 침입해 세 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슬람 이민자의 소행’이란 정보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빠르게 확산됐다. 이 짤막한 문장으로 촉발된 폭동은 전국으로 삽시간에 번졌다. 그러나 정보가 확산된 지 몇 시간 만에 ‘가짜뉴스’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폭동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고, 1주일 넘게 이어졌다. 진실이 밝혀졌음에도 폭동은 왜 중단되지 않았을까?
그 이면에는 ‘확증편향’ 현상이 있다고 전문가는 분석했다. 확증편향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심리이다. 영국 폭동 가담자들에게 정보의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이 믿고 싶었던 정보인 게 중요할 뿐이다. 이슬람 이민자에 대한 자신들의 적대감을 정당화할 정보였기에 믿고 행동했던 것이다.
확증편향을 부추기는 원인 중 하나가 ‘알고리즘’이라는 거대 시스템이다. 알고리즘은 현대 사회의 또 다른 ‘빅브라더’이다. 과거에는 관습, 권력 등이 개인을 옥죄는 시스템이었으나 최근에는 포털, 소셜미디어 등 온라인 플랫폼의 알고리즘이 더 위험하다. 알고리즘은 진화를 거듭해 개인의 관심사와 선호도에 맞춰 정보를 제공한다. 이는 개인이 이미 알고 있거나 동의하는 정보만 접하게 된다는 얘기이다. 개인은 다른 관점이나 반대 의견을 접할 기회가 줄어들어, 점점 자신의 생각만 더욱 강화시킨다. 알고리즘은 개인을 ‘외눈박이’로 만든다.
이미 곳곳에서 이러한 폐해가 나타나고 있다. 알고리즘이 제공한 달콤한 정보에 취한 나머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상대 진영에 대한 적대감을 키운다. 실제로 미국 극우 집단은 ‘지난 대선이 조작됐다’는 가짜뉴스에 의회를 점거했고, 브라질 극우 세력도 선거 부정 주장에 대통령궁으로 쳐들어가기도 했다. ‘우리만 대안이고 옳다’라고 믿고 세력화하면 결국 ‘나쁜’ 집단 사고가 공동체를 갉아먹는다.
한국도 위험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실시한 ‘2023 사회갈등과 사회통합 실태조사’에서 국민 10명 중 6명은 ‘정치 성향이 다르면 연애나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정치적, 이념적 갈등이 우리의 삶 깊숙이 파고들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문빠’, ‘개딸’, 극우 보수단체로 이어지는 팬덤 정치의 폐해는 이미 도를 넘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뜻과 다른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서는 좌표를 찍어 공격을 서슴지 않는다.
알고리즘은 인공지능(AI)과 함께 갈수록 정교하게 진화할 것이다. 결국 개인이 깨어 있지 않으면 알고리즘, 극단 정치 구조 등 거대 시스템의 부속품이나 노예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조지 오웰은 1984에서 개인은 자유를 위해 끊임없이 저항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니체도 140여 년 전 '초인’을 역설했다. 개인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삶을 스스로 창조하고 새 가치를 만들어가자고. 개인은 지금 거대 알고리즘 시스템의 틀에 맞서 자유를 위해 저항해야 할 시점이다.
2024-08-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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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콩가루 거제시의회, 민의는 안중에 없나
경남 거제시의회가 어수선하다. 후반기 원 구성을 둘러싼 여야 간 극한 대치로 한 달 넘게 파행하더니 이젠 당내 집안싸움으로 사분오열하는 모양새다.
발단은 2년 전 ‘합의’다. 2022년 7월 1일 임기를 시작한 제9대 거제시의회는 전반기 의장단 선출을 놓고 출발부터 파열음을 냈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의석을 ‘8 대 8’로 양분한 탓이다. 이는 1991년 지방의회 출범 이후 처음이다. 의장 자리를 놓고 20일 넘게 갑론을박하던 여야는 여론의 따가운 눈총에 뒤늦게 접점을 찾았다. 양측 협상단은 ‘보도자료’를 통해 ‘전반기엔 여당이 의장과 운영위원장, 행정복지위원장을 맡고 후반기엔 야당이 의장과 상임위원장 2석을 맡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후반기를 앞두고 여당이 말을 바꿨다. 앞서 불미스러운 사건·사고에 연루된 여야 의원 2명이 탈당해 무소속이 된 상황에 합의대로 한다면 이들 2명의 권리를 박탈하게 된다는 핑계로 합의를 파기했다.
발끈한 야당은 약속 이행을 촉구하며 의사일정 전면 보이콧을 선언하고 장외투쟁에 돌입했다. 설상가상 당시 여당 의원들이 전·후반기 의장 독식을 위한 ‘이면 합의서’를 작성한 사실이 〈부산일보〉 보도를 통해 드러나면서 논쟁은 가열됐다.
이후 의장단 선출을 위한 임시회 본회의는 개의 직후 정회, 속개, 산회를 거듭하며 공전했다. 민주당 의원과 민주당 출신 무소속 김두호 의원 불참으로 ‘의결 정족수’에 미치지 못한 탓이다. 표결을 위해선 재적의원 과반인 9명 이상이 출석해야 한다. 국민의힘과 국민의힘 출신 무소속 양태석 의원을 합쳐도 1명이 부족했다.
팽팽하던 힘의 균형은 야권 균열로 깨졌다. 민주당과 거리를 두던 김두호 의원이 지난달 31일 오후 속개된 제9차 본회의에 전격 출석하면서 정족수가 채워졌다. 이 자리에서 4선인 국민의힘 신금자 의원이 의장에, 김두호 의원이 부의장에 당선됐다.
민주당은 “의회 민주주의를 파괴한 야만적인 폭거”라며 반발했다. 국민의힘과 손잡은 김두호 의원에겐 ‘배신자’ 낙인을 찍었다. 그러면서 “의장, 부의장을 사퇴하고 원점에서 다시 협상하지 않으면 민주당 시의원 전원은 모든 의사 일정을 거부하고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경고했다.
여당 분위기도 심상찮다. 시의회는 지난 1일과 2일 소관 상임위 배정과 위원장 선출을 위한 제10차, 11차 본회의를 소집했지만 이번엔 ‘의사 정족수’ 미달로 자동 산회했다. 의사 진행을 위해선 최소 6명이 필요한데 이틀 모두 국민의힘 신금자·김동수·김영규, 무소속 김두호·양태석 의원만 배석했다. 여당인 윤부원, 김선민, 정명희, 조대용 의원은 청가를 내고 불참했다. 이를 두고 앞선 의장 선거 앙금에다 상임위원장 배분을 놓고 여당도 내홍에 빠진 것 아니냐는 추측과 함께 의회 정상화를 기약할 수 없게 된 것 아니냐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경남 18개 시군을 통틀어 여태 후반기 원 구성을 하지 못한 곳은 거제가 유일하다. 볼썽사나운 감투싸움을 바라보는 시민 시선이 고울 리 없다. 단언컨대, 민의를 저버린 이번 사태를 시민과 역사는 냉정히 기억하고 평가할 것이다.
2024-08-05 [17: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