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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작원관 300 용사
1592년 4월(음력 기준)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본격적인 전투 첫날인 4월 14일 부산진성이 함락된 데 이어 이튿날인 4월 15일 다대진성과 동래성마저 왜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은 경남 양산 황산잔도를 거쳐 한양을 향해 거침없이 진격했다. 그런데 밀양시 삼랑진읍 작원관에 다다른 왜군은 예상치 못한 거센 저항에 직면한다.
밀양 작원관은 조선 시대 서울에서 부산을 잇는 영남대로에 자리잡고 있었다. 경북 문경 조령관과 함께 2대 관문으로 불렸다. 작원관 일대의 길은 작원잔도로 불렸는데 왜군은 한양 진격을 위해 당시 가장 빠른 이 길을 선택했다. 작원관은 고려 시대부터 왜적의 침공을 방어하던 곳으로 고려 고종 때 지어졌다. 한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다른 한쪽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솟아있어 천혜의 요새로 불렸다. 평상시엔 영남대로와 나루를 통해 드나드는 사람들과 화물을 검문했고, 유사시엔 군사요충지 기능을 했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와 양산 함락 소식을 접한 박진 밀양 부사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작원관을 결사항전지로 선택했다. 4월 17일 시작된 작원관 전투로 300여 명의 군사와 백성들이 산화했다. 이들은 자신들을 희생하면서 왜군의 발을 3~4일 동안 묶었다. 이후 왜군은 5월 3일 한양을 점령했는데 만약 ‘작원관 300 용사’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피란 여유가 더욱 줄어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작원관 전투에 대한 고증 등 학계 연구는 여전히 미미하다. 〈선조실록〉 등도 간략한 기술에 그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한 이준영 작가가 ‘작원관 300 용사’를 주제로 〈임란, 삼백 감꽃〉(좋은땅)이라는 장편소설을 최근 선보였다. 전국시대 숱한 내전을 치르며 단련된 왜군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박진 부사와 군사, 백성들의 모습을 세세하게 그려낸다. 작가는 온몸을 던져 나라와 이웃과 가족을 구하려던 이들의 활약상을 상상 속에서라도 재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작원관 용사들에 바치는 헌사인 셈이다.
임란 때 소실된 작원관은 전쟁 뒤 복구됐지만 1902년 경부선 철도 부설 공사를 하면서 작원잔도가 파괴된 데 이어 1936년 낙동강 대홍수로 멸실됐다. 이후 1995년 원래 위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작원관 관문인 한남문 등을 복원했다. 작원잔도 일원은 현재 낙동강 자전거길과 산책로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
2025-12-0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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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이름 또 바꾸나
미국 재무부(Department of the Treasury). 경제정책 수립, 세금 징수, 금융기관 규제, 정부 재정관리 등을 하는 미국의 핵심 행정부처다. 미국 의회가 1789년 설립했다. 236년간 지금까지 한번도 이름이 바뀐 적이 없다.
우리나라 기획재정부는 내년 1월 2일부터 기획예산처와 재정경제부로 분리된다. 우리나라는 처음에 국가 재정을 담당하는 부처로 재무부를 설립했다가 재정경제원→재정경제부→기획재정부로 바뀌었다. 이번에 또 바뀐다.
환경부는 지난 10월 1일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 분야를 이관받으면서 기후에너지환경부로 바뀌었다. 이에 산업통상자원부는 산업통상부로 변경됐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농림부로 부르는 부처의 정확한 이름은 농림축산식품부이며 줄임말은 농식품부다. 통계청은 1990년 통계청으로 공식 출범 후 이번에 국가데이터처로 변경됐다.
새 조직, 새 사람이 등장하면 원하는 바를 실행하기 위해 ‘조직개편’이라는 것을 한다. 특정 조직을 다른 곳에 이관시키고, 신설 조직을 만들기도 한다. 필요성도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 있나’ 하는 여론도 많다.
명칭 변경은 신중해야 하지 않나 싶다. 사람들이 새로운 이름에 익숙해지기까지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문교부가 교육과 문화 기능으로 분리된 때는 1990년이다. 당시 교육부가 출범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도 많은 사람들이 문교부라고 불렀다. 교육부도 교육인적자원부→교육과학기술부→교육부로 바뀌었다. 앞으로 통계청이 국가데이터처로 사람들이 알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이름에 모든 기능을 다 넣는 것도 문제다. 예를 들어 국토부 산하 공공기관 중 한국해외인프라도시개발지원공사라는 곳이 있다. 국토부 출입기자 중에서도 이 이름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냥 ‘해외개발공사’나 ‘해외인프라개발공사’ 정도면 됐을 일이다. 주택도시보증공사도 주택보증공사로 간단하게 했으면 국민들이 더 이해하기 쉬웠을 일이다.
정부 부처의 소비자는 일반 국민이다. 국민 입장에서 이름이 자꾸 바뀌면 어떤 곳이 어떤 일을 하는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조직을 이관시키고 신설 조직을 만드는 것은 때론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간판 명칭은 그대로 두고, 조직 내에서 변화를 주면 된다.
2025-12-0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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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국립공원도 '미국 우선'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은 미국의 옐로스톤으로 ‘황금빛 돌덩이’라는 뜻이다. 깊은 협곡이 산을 깎아내 노출된 토양이 미네랄 성분에 의해 변색해 그 이름이 붙었다. 전체 면적은 9000㎢에 달하며 와이오밍, 몬태나, 아이다호 등 3개 주에 걸쳐 있다. 옐로스톤은 수십만 년 전 화산 폭발로 이루어진 화산 고원지대이며, ‘살아 있는 지질 교과서’로 불린다. 마그마가 지표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어서 뜨거운 수증기와 물보라를 분출하는 간헐천 등 다채로운 자연현상이 나타난다.
미국은 국립공원 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나라다. 1872년 옐로스톤을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했고, 1916년 전담 연방 기관인 국립공원관리청(NPS)을 만들었다. 방문자 센터를 건립하고, 공원 순찰과 야생동물 보호 등을 도맡는 전담 직원인 ‘파크 레인저’를 두고 탐방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국립공원 433곳의 총면적은 344만㎢로 한반도 면적 15배에 해당한다. 지난해 연간 국립공원 방문객은 3억 명에 달한다. 미국의 국립공원 제도는 ‘지구의 핵심 자연을 수호한 인류의 가장 훌륭한 아이디어’로 평가받는다. 야구, 코카콜라와 함께 미국이 전 세계에 전파한 3대 수출품으로 자리매김한다.
내년 1월부터 미국 국립공원을 찾는 외국인 방문객은 내국인보다 훨씬 높은 입장료를 내야 한다. 미 내무부는 지난달 25일(현지시간) 국립공원을 1년 동안 무제한 방문할 수 있는 ‘비거주자 연간 이용권’ 가격을 기존 80달러(약 11만 7000원)에서 250달러(약 36만 7000원)로 3배 이상 인상한다고 밝혔다. 또 방문객이 가장 많은 11개 국립공원의 경우, 연간 이용권이 없는 비거주자는 기본 입장료에 100달러를 추가로 내야 한다. 11개 국립공원은 옐로스톤, 아카디아, 브라이스캐니언, 에버글레이즈, 글레이셔, 그랜드캐니언, 그랜드티턴, 로키마운틴, 세쿼이아 & 킹스캐니언, 요세미티, 자이언 등이다. 주요 공휴일에 시행해 온 무료입장도 시민권자와 영주권자에만 적용한다. 외국인 방문객으로부터 비싸게 받은 입장료는 공원 관리와 유지에 사용된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집권 뒤 관세·취업·유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며 외국인에게 불이익을 주는 정책을 도입해 왔다. 이제는 관광 분야까지 외국인을 겨냥한 장벽을 세운 셈이다. 외국인 방문객이 많은 일부 국립공원은 벌써 지역 경제 타격을 우려한다. 갈수록 높아지는 ‘트럼프 장벽’이 미국에 도움이 될지, 부메랑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2025-11-30 [1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