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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해변의 전문가
한 장씩 파도를 받아본다
파도 속에 무엇이 들어있나
일간지처럼 성실하게 배달되는 슬픔
슬픔을 후벼파고 나면
산문처럼 밀려오는 것들
잠시 동안
눈을 감았는데 생겨나는 노을
어디든 번져나간다
사람들은 해변으로 와서
웃고 떠든다
웃고 떠드는 것만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다
그들은 슬픔을 위로할 줄 아는 전문가
해안선이 뒤엉킨다
오래 슬픔에 붙들려 슬퍼하다 보니
슬픔도 내 몸에 살고 있는 장기(臟器)라는 생각
속수무책
날마다 나에게 슬픔을 갖다 바치는 것들
슬픔도 무엇도 괜찮다
모래톱에
사람들이 벗어두고 간
발목이 쌓인다
혹시라도 남아있는 슬픔을 모두 벗어두고 가는
전문가들
시집 〈고독한 건물〉 (2025) 중에서
슬픔이란 감정은 우리를 힘들고 고통스럽게 하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감정이기도 합니다.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과 겸손함을 배우고, 인생의 소중한 가치나 관계를 일깨우며,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슬픔은 억눌러야 할 대상이 아니라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허락해줘야 할 감정입니다. 자기반성의 시간으로 우릴 안내하는 슬픔에 귀를 기울이고, 보듬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해변을 찾아온 사람들은 자신의 슬픔을 들여다볼 줄 아는 전문가, 웃고 떠드는 듯 보여도 실은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전문가들인 것입니다. 삶에서 무언가가 결핍되었다는 신호가 오면 바닷가를 찾아가 보는 것도 좋은 치유책이 될 것 같습니다. 신정민 시인
2025-10-21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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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음력 8월
짙은 숲과 푸른 강을 섞으면 이런 감정이 들까
애기 주먹만 한 아픔이 돋는다
쓸개 같은 구멍 숭숭 난 허파 같은
맨 살갗 아래로 파고드는 바람
갈 사람들 다 가고
고봉으로 담긴 밥과 탕국과 노르스름한 부침개가 남았다
말 한마디, 주름진 손, 웃을 때 도드라지는 송곳니, 미안하다, 아니요 보고 싶어요
잘못은 왜 뒤늦게 오는가
쓸개처럼 허파처럼 서러워 막 울고 싶다
지나가는 아무나 끌어안고 잘못했어요 빌고 싶다
울지도 빌지도 못하는 이 마음을 두고 빙빙 도는데
쇠북 같은 게슴한 달이 뜨네
시집 〈소리들〉 (2023) 중에서
음력 8월은 가을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달이라 하여 중추(仲秋), 달빛이 고울 때라 하여 가월(佳月)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논밭의 작품들을 수확하느라 바쁘기도 하지만, 풍요와 여유를 갖게 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특히 음력 8월에는 가장 큰 보름달을 맞이하며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추석 명절이 있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처럼 맛있는 음식 차려놓고 밤낮을 즐겁게 놀 듯 한평생 지내고 싶다는 뜻입니다만, 그 좋은 시절도 하나 둘 떠나고 남은 뒷자리는 울 수도 없게 적적합니다.
아무나 끌어안고 잘못했다 빌고 싶은 회한을 어쩌지 못해 눈물 너머의 달빛만 바라보게 됩니다. 보고 싶은 얼굴들, 뒤늦게 찾아온 잘못이 주먹만한 아픔으로 맺힙니다. 신정민 시인
2025-10-14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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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길 위에서 1
길 가던 고슴도치가
밤송이를 만나서 말했다
이봐 그딴 가시 좀 치워주지 그래
길 가는 데 방해가 되는구먼
밤송이는 말이 없고
그 옆에서 밤껍질을 갉작이고 있던
다람쥐가 말했다
너도 그 곤두세운 가시 좀 치워보지 그래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해보게
고슴도치가 지나가고
다람쥐도 사라지고
길 위엔 알맹이 없는 밤송이만 남았다
지나가는 바람에 밤송이가
중얼거리는 말이 새어 나왔다
내가 스스로 익어 벌어지기 전까진
내 몸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던 것들이
시집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2024) 중에서
거리 어느 한 귀퉁이에 군밤장수 리어카가 등장하는 가을이 왔습니다. 부드러운 속살을 가진 밤들은 가시로 무장한 껍질을 벗겨낸 것이었지요.
이 시는 한 편의 동화를 보는 듯합니다만 시의 말미에 있는 밤송이의 일침에 통쾌하기도 하고, 마음 어딘가를 찔린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내가 가진 가시는 모르고 남의 가시만 탓했던 일들이 많았을테니까요.
산짐승들의 귀한 양식. 맛있는 건 벌레가 벌써 알고 먹기 시작한 밤. 한겨울 비상식량으로 묻어둔 밤송이가 봄이면 싹을 틔울지도 모를 일, 언젠가 한그루 밤나무가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허약체질에 좋다는 밤. 다이어트에 좋다는 밤. 성장발육에 좋다는 밤. 어릴 적 성묘 가는 길에 밤나무가 떨어뜨린 밤을 줍곤 했는데 지금은 추억 속의 일입니다. 신정민 시인
2025-09-3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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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살아있는 것은 아름답다
하늘을 훨훨 나는 솔개가 아름답고
꾸불텅꾸불텅 땅을 기는 굼벵이가 아름답다
날렵하게 초원을 달리는 사슴이 아름답고
손수레에 매달려 힘겹게 비탈길을 올라가는
늙은이가 아름답다
돋는 해를 향해 활짝 옷을 벗는 나팔꽃이 아름답고
햇빛이 싫어 굴속에 숨죽이는 박쥐가 아름답다
붉은 노을 동무해 지는 해가 아름답다
아직 살아있어, 오직 살아있어 아름답다
머지않아 가마득히 사라질 것이어서 더 아름답다
살아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시집 〈살아있는 것은 아름답다〉 (2025) 중에서
살아있는 것은 아름답다. 아직 살아있고, 오직 살아있어 더 아름답고, 다 아름답다! 평생 가난했고 자주 병고에 시달렸던 노시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봅니다.
나도 살아있는 것만으로 아름다운 사람이겠구나. 따듯한 위안에 눈시울부터 뜨거워집니다.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어서 더 아름답다는 선언은 또 왜 그렇게 비장한지요.
지난해 타계한 시인의 유고시집에는 작고 소외된 존재들에 대한 한결같은 연민들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힘들고 지친 우리에게, 이 고단한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우리에게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보라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세상 모든 것은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당부의 말씀. 사라지고 잊히는 것이 두려운 우리에게 남겨주신 유언,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신정민 시인
2025-09-23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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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생의 무게-최휘웅 (1944~)
이때까지 살아온 인생의 무게는 얼마쯤일까?
솜털처럼 가벼운 그런 중량이었기를 바란다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길인데
철 같은 무게를 품고 살았다면 헛된 일이지
그때 너와 헤어지면서 비수를 꽂았다면
그 또한 철부지의 가난한 퍼포먼스였을 뿐이야
그때는 그게 그렇게 억울해서 죽고 싶었는데
그것조차도 저울에 달면 하찮은 무게에 불과하지
한때의 희망과 한때의 절망도 시간 위에서는
투명한 깃털처럼 부유하지 부유하다 떨어지지
새처럼 가볍게 날지 못한다 하더라도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구름처럼
바람에 날리며 떨어지는 꽃잎처럼
무한한 가벼움에 내 마지막 생을 얹고 싶어
시집 〈꿈의 방정식〉 (2024) 중에서
불행은 쉽고 행복은 힘겹다는 말이 있습니다. 살면서 마음을 비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구름처럼 꽃잎처럼 생이 가볍기를 바라는 시인의 회한 앞에서 나는 어떠한가, 하고 서성이게 됩니다.
왜 내 삶의 무게는 이렇게 무거운가. 그러나 누구에게나 내려놓고 싶은 짐이 있을 것입니다. 희망과 절망은 같은 무게. 그래서 매일 매일 잘 살았는지 반성하고 용서하고 다짐하게 됩니다.
내 생의 무게는 내가 결정하는 것. 주어진 삶의 무게를 내 몸처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삶의 무게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지 않을런지요.
거부할 수 없는 상실의 체험 속에서 실존의 가치는 더 드러나겠지만 부드럽고 너그러워진 감정들만이 그 짐의 무게를 줄일 줄 아는 힘이 아닐런지요. 신정민 시인
2025-09-16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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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을숙도 벽화
연으로 날아올라
철새의 눈높이로 날아올라
아득한 희망의 부표로 떨어져 내리는
강과 바다의 의식
흘러온 날들의 묶음만큼 갈대밭이 자라고
자라온 갈대밭 머리 위로
잘 말린 햇살이 탄주하는 가을
마침내 물이 뿌리를 나누어 주는 곳
실한 강의 씨를 바다에 털어 넣고
손사래 치며 흘러온 시간의 끈을 풀어
완주한 강의 흐름 위로 노을이 걸리며
강바닥을 두드리는 물의 득음
세상은 이렇게 어울리는 것이라고
풀숲에 숨죽이던 바람이 걸어 나와
물비늘을 쓰다듬는 강의 수화
거대한 강의 한 생애를 거는
을숙도 벽화
시집 〈푸른 힘을 당기다〉 (2021) 중에서
강은 바다가 되기 위해 흐르는 걸까요. 하구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강은 사연 많은 생을 살아온 누군가인 것만 같고 하구는 그들이 닿고 싶었던 종착지인 것만 같습니다. 수고했노라 품어주는 넓은 가슴 같은 바다. 그렇게 민물과 짠물이 만나 주고받는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시인의 말처럼 세상은 그렇게 어울리는 것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하굿둑이 생기면서 갈대밭과 습지가 예전만 못하지만 탐방로 주변에는 아직도 칠게나 엽낭게들이 모래구슬을 밀어올리는 생태계의 현장을 보여줍니다. 태풍이 오면 옮겨지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모래톱 사이에서, 다음 비행을 위해 잠시 쉬어가는 철새들 사이에서 넓적부리도요를 찾던 을숙도의 가을. 바다에 이르러 자신의 이름을 버린다는 강처럼 자연이 되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신정민 시인
2025-09-09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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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장고개
한 잔 술로 위로받은 저녁, 장바구니 틈에 끼어 장고개 넘는다. 자유시장 입구에서 남구 3번 마을버스 타고 조방 앞 지나 문현 교차로에서 오른쪽 돌면 좁고 꼬불꼬불한 곱창 골목. 내가 걸어온 과거보다 복잡한 통로. 그걸 돌아 우여곡절 끝에 출구 찾으면 이번엔 가파른 고갯길! 아무리 애써도 단숨에 넘을 수 없는 아슬아슬한 장고개…… 한 잔 술에 의지해 그 고개 간신히 넘는다
세상 길 가도 가도 아슬한 고개. 어둠 속에 허위 허위 장고개 넘다 보면 마을버스 털털거리듯 나도 숨이 차다. 사막 건너는 낙타처럼 나도 외롭다. 그래도 바람 맞서려 제 7부두 저쪽, 저녁 바다 불빛 보고 이를 악문다
시집 〈쪽배〉 (2021) 중에서
부산은 지형상 산이 많아 고개가 많습니다. 지금은 도시화, 평탄화로 인해 사라진 고갯길들이 많지만 장에 갔다 돌아오는 사람들이 식구들을 위한 꾸러미를 들고 오르던 추억의 고개입니다.
부산에는 장고개가 여럿 있는데요. 정식으로 장고개라 부르는 곳은 문현동과 우암동 사이에 있는 고갯길, 감만동과 우암동 주민들이 부산진시장으로 가기 위해 지나다니는 길이라 합니다.
좁고 구불구불한 고갯길은 넘고 또 넘어도 평탄치 못한 인생길에 비유되곤 하는데요. 삶의 오르막 내리막 길, 숨이 차도록 걷다 보면 외롭기만 한 어딘가에 닿게 되기도 하는 고개입니다.
어스름 저녁 저쪽, 부두에서 빛나고 있는 불빛 보며 세상 풍파에 당당히 맞서고 싶은 시인의 애수가 쓸쓸하게 다가옵니다. 신정민 시인
2025-09-02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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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여름의 저녁은 수국의 빛으로 어두워지기에
수국이 비를 몰고 온다
이마를 짚어보고 수국 앞으로 간다 슬픔이 아닌 비를 몰고 왔기에 몸은 없고 감각이 없었다
밤의 진불암, 머리맡의 빗소리에 방문을 열면 큰 수국이 후두둑 푸른 빛을 내뿜었다
수국이 비를 내리게 한다고 믿은 적 있다
누군가 알아보지 못할까봐 그 사랑은 자주 색깔을 바꾸었다 아나벨 로사리오 블루스카이 인더레인
수국이라는 나라에서 부쳐 온 등기우편은 얼룩진 날짜 속 어디쯤을 떠돌고 있는지
진심을 다른 마음으로 숨기고 수국은 자꾸 피어났다 장마는 그치지 않는다
여름의 저녁은 수국의 빛으로 어두워지기에 마음이 단순해졌다
시집 〈초록의 어두운 부분〉 (2024) 중에서
수국은 한여름, 주로 장마철에 피는 꽃인데요. 물을 엄청 좋아한답니다. 토양에 따라 변하는 꽃 색깔 때문인지 변덕, 변심이란 꽃말도 있고 그와 달리 진실한 사랑이란 꽃말도 있는데요. 먼 곳에서 온 등기우편이 어딘가 떠돌고 있을 거란 문장이 거기서 온 것만 같습니다.
비는 자연현상이기에 앞서 사랑이나 너그러움 같은 고귀한 감정을 드러내 주는 어떤 믿음, 그래서 수국이 슬픔 아닌 비를 몰고 온다는 시인의 말에 공감해봅니다.
세상 모든 꽃들은 집착을 떠난 진불암의 것. 진심을 숨기고 드러나는 시를 닮은 듯합니다. 미스 사오리, 미카의 물떼새 같은 특이한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하는 수국. 작은 꽃 하나하나가 모여 풍성하고 둥글게 뭉쳐진 꽃
송이가 이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신정민 시인
2025-08-2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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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숙등역
만덕고개 헐레벌떡 숨 고르다 지나쳤다. 있으면서도 없는 곳, 안개가 사람들만 잡아먹곤 한다는 굴다리 주위에는 흘러 고인 시간이 윤슬 되어 역류의 방식으로만 합류했다지. 나 한 번도 그곳이 있었으리라곤 생각 못했네. 만덕 지나 덕천 구포로만 고여 들었을 뿐, 어느 한갓진 뒷골목 밤길을 걷는 내 손을 꼭 잡은 어머니 신발 뒤축의 경사가 서녘으로 기울어 붉게 문드러지던 8월의 오후,
“인자 쫌만 걸으면 우리집잉께, 쩌그 식당에 들러 칼국수나 먹고 가자.”며 철퍼덕 주저앉아 낙동강 놀을 더듬던 눈길이 정물처럼 붙박힌 미궁 속에서 나 한때 머무른다네, 숙등의 지도는 안개만이 앞장서는 날이 잦았고, 때로는 갈퀴처럼 덜미를 쓰다듬는다네
시집 〈새들반점〉 (2022) 중에서
집으로 가는 중입니다. 숙등이 있고, 숙등역이 있습니다. 지나쳤지만 늘 있었던 곳. 우리에겐 가보지 못한 곳, 벌써 잊어버린 곳이 얼마나 많은지요.
낯선 곳에서 밀려오는 기억의 역류, 그리운 어머니를 마술처럼 만납니다. 인간의 기억은 동기나 욕구에 따라 왜곡되기도 한다는데요. 힘들고 지친 걸음 끝에 문득 만나고 싶은 목소리는 간절함이 아닐런지요.
기억과 상상의 연대, 되돌아오는 시간들. 혼자 걷는 밤의 뒷골목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머니와 함께 저녁노을 속에 서 있는 시인이 내 일처럼 쓸쓸해집니다.
흘러 고인 시간들이 모여있는 곳, 한치앞도 보여주지 않으려는 안개속에서 아슬아슬한 생의 뒷덜미를 쓸어주는 손길을 느낍니다.
신정민 시인
2025-08-1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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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으나
허연 이불이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침대 위에
아무렇지 않게 엎드려 있던 형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으나
한 눈으로 누구의 전화인가를 확인한 형은
더이상 전화가 울리지 않도록
버튼 한 번 누르고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가 왔으나
전화를 받지 않은 형은
전화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전화가 끊어진 전화를 붙들고
전화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형은
받지도 않은 전화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시집 〈종종〉(2025) 중에서
핸드폰이 현대인의 신체 일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사소통, 업무 수단, 카메라, 쇼핑, 음악 감상, 카드 대체 등 생활 전반에 편리함의 혁신을 가져온 기기이지만, 인간의 삶이 이 스마트 폰과 함께 더욱 스마트해지고 있는지는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생활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핸드폰, 손에서 놓을 수 없는 핸드폰의 부정적 단면을 이 시는 보여줍니다.
심각해지고 있는 사회성 저하, 주의력 결핍 그리고 우울증과 같은 감정 조절 능력을 떨어뜨린다는 핸드폰. 건강한 삶을 위해 오프라인 일상과 대인관계에 집중해보는 건 어떨까 생각하게 하는 시편입니다. 신정민 시인
2025-08-12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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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행복합니다
상황은 사소합니다 시지프스가 바위를 잠시 내려놓고 땀을 식히는 중입니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행복은 날아갈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개별적인 시지프스, 삶의 의미를 음미하느라 행복합니다 지금 돌에서 잠시 벗어난 시간입니다 떨어진 돌을 잡으러 가는 시간이 아니라 산에 올려놓은 돌이 잠시 산에 머무는 시간입니다
시지프스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무의미하기보다 과일이 익어가는 기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크는 기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돌을 내려놓고 저쪽에서 오는 중이고 더 먼 저쪽으로 가는 사이 비어 있는 곳에서 행복합니다 돌을 초과하여 돌보다 커져서 천천히 걷고 있습니다
-시집 〈분자적 새〉(2024) 중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 그 어떤 희망도 느낄 수 없을 때 우린 시지프스의 운명을 떠올립니다. 쉬지 않고 굴려야 하는 생활의 쳇바퀴. 프랑스의 작가 까뮈는 노동자들의 운명이 시지프스 못지않게 부조리하며, 이 부조리를 해결할 방법은 희망이 아니라 반항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반항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생활을 외면하지 않고, 도피하지 않고, 부딪치는 용기입니다.
이런 적극적인 태도만이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있는 힘을 갖게 해준다 합니다. 시인 역시 잠시 주어진 상황들을 내려놓고 흐르는 땀을 식히는 동안 자신의 삶을 들여다봅니다. 아이가 크고 과일이 익는 의미 있는 시간, 그것으로 행복하다 합니다. 불행의 반은 행복! 이른 새벽 물건을 배달하는 택배 아저씨가 땀을 뻘뻘 흘리며 계단을 뛰어오르는 모습에서 건강한 힘이 보입니다. 신정민 시인
2025-08-05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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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녹(綠)의 미학
녹은 쓸쓸함의 색깔
염분 섞인 바람처럼 모든 것을 갉아먹는다
세상을 또박또박 걷던 내 발자국 소리가
어느 날 삐거덕 기우뚱해진 것도
녹 때문이다
내 몸과 마음에 슨 쓸쓸함이
자꾸만 커지는 그 쓸쓸함이
나를 조금씩 갉아먹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된 건물에 스며드는 비처럼
아무리 굳센 내면으로도 감출 수 없는 나이처럼
녹은 쓸쓸함의 색깔
흐르는 시간의 사랑 제때 받지 못해
창백하게 굳어버린 공기
시집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2022) 중에서
쓸쓸하지 않은 삶이 어디 있겠는지요. 그러나 미학은 아름다움의 본질을 연구하는 것. 그래서 시인의 쓸쓸함은 살아있음이 만들어준 아름다운 녹임을 노래합니다.
그 어떤 감정보다 무서운 쓸쓸함.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쓸 줄 알아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이 질병을 치료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쓸쓸함이라는 녹을 닦아낼 수 있는 연마제는 사랑뿐. 일상적인 대인 관계 안에서 인생을 배우는 것,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자신을 닦아가는 건 어떨까요.
삶의 모든 것을 부식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순 없겠지만, 녹이 슨 철제 조형물이 주는 멋스러움처럼 쓸쓸한 마음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벗처럼 동행해 본다면 그 또한 아름다움을 완성해가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신정민 시인
2025-07-29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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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장마
내 머리칼에 젖은 비
어깨에서 허리께로 줄달음치는 비
맥없이 늘어진 손바닥에도
억수로 비가 내리지 않느냐,
비여,
나를 사랑해다오
저녁이라 하긴 어둠 이슥한
심야라 하긴 무슨 빛 감도는
이 한밤의 골목어귀를
온몸에 비를 맞으며 내가 가지 않느냐,
비여,
나를 용서해다오
시집 〈천상병 전집〉 (2007) 중에서
생이 아름다운 소풍이었다던 고 천상병 시인이 서른한 살이던 1961년에 발표한 시입니다.
피할 수 없게 내리는 비, 온몸을 젖게 한 비, 평생을 가난하게 살게 한 비에게 시인은 사랑과 용서를 청합니다.
1967년 동백림사건, 다가오고 있는 시련 앞에서 미리 써둔 수난 고백 같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이 죄인이 된 시인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요. 용서를 하는 것과 용서를 받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어려울까요.
순수한 인간의 내면 속으로 걷고 있는 고독, 세상사의 온갖 번거로움을 군더더기 없이 걸러낸 서정이 애절하기만 합니다.
예보를 무색하게 만들며 쏟아지는 빗속을 걷다 보면 맥없이 늘어진, 그러나 사랑과 용서를 남기고 떠나는 시인의 뒷모습을 만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정민 시인
2025-07-2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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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모르는 게 아는 것이다
아는 척하기는 쉽지만
알기는 어렵다
모르기는 쉽지만
모르는 척하기 어렵다
아는 척하지 않는 것이
모르는 척하는 것이다
모르는 척하다 보면
비로소 모르게 되고
정녕 모르다 보면
마침내 알기에 이르나니
고로 모르는 게
아는 것이다
시집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 (2024) 중에서
논어 위정편에 보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앎’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공자의 수제자인 자로가 사람들에게 스승 노릇을 하면서 잘못 인도하는 것을 보고 한 말입니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희망과 기회가 있다 합니다.
모르는 게 약이란 말도 있고, 아는 것이 힘이다는 말도 있는데요. 알아야 행할 수 있고, 알아야 이겨낼 수 있고, 알아야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겠지만 아는 것과 아는 척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를 망가뜨리는 건 무지가 아니라 자만입니다.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현명함이겠지요.
보조용언 ‘척’은 그럴 듯 하게 꾸며낸 거짓입니다. 안다고 여겼던 것들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신정민 시인
2025-07-1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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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해운대 밤 풍경
길을 잃은 아이는 나보다 먼 곳을 보는 사람 캄캄한 곳에서 환한 은하수를 관측하는 사람, 아이 하나가 울면서 해운대 백사장을 헤매고 있다. 사내인지, 계집애인지, 큰 울음소리는 성별마저 지워버린다. 울음은 사람을 만드는 성분이다. 비법이라고 할까. 저렇게 쉬지 않고 울다가 목이 쉬어서 목소리를 잃고 방향을 잃고 모르는 이를 따라가 버리면 큰일이다. 미아보호소에 데려다줄까. 파출소는 문을 닫았는데, 파도에 쓸려온 모래톱이 우주의 풍경 같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분명 집에 있었는데, 해운대 밤 풍경 속에 나는 누워 있네. 길 잃은 아이는 울음이 창조한 풍선. 어떤 사람에게서 반송된 편지 같은 것. 미아, 떨어지는 별처럼 나도 그곳에 있었다
시집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2017) 중에서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길을 잃는다는 건 인생의 필연적인 한 부분일지도 모릅니다. 이 시는 실존적 위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기가 더 먼 곳을 보게 하고, 어둠 속에서 방향을 찾게 합니다.
가슴에 더이상 별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 행복이 뭔지 질문하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길을 잃은 사람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디에 있는지 자신을 극복하려는 자는 삶의 의미를 질문하는 자입니다. 미아가 발생한 해운대. 아이의 울음을 헤아리는 동안 시인 역시 길을 잃어버린 아이가 됩니다. 아니 그 아이가 시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린 모두 미아의 감정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울음이 사람을 만드는 성분이라 하니 나는 언제 울었는가, 무엇 때문에 울었는가 생각해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5-07-08 [1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