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코스피 7300P 돌파, 물가 상승·실물 괴리 우려도 커져
코스피가 6000P 고지에 오른 지 2개월여 만에 꿈의 7000P를 돌파했다. 6일 코스피는 7384.56P로 장을 마감하며 한국 자본시장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반도체 투톱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급등세가 지수 상승을 견인한 덕분이다. 하지만 경이적인 신기록 이면에서 울리고 있는 경고음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증시 랠리가 곧바로 실물 경제 회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가가 꿈틀대고, 금리는 상승 압박을 받고 있다. 수출 대기업 중심의 증시 호황이 국민 다수의 체감 경기와 괴리가 반복되고 있다. 코스피 7000P 돌파를 기뻐하되 경제의 기초 체력과 위기 대응 능력을 점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한국은행이 공개적으로 금리 인상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한은은 당초 성장 둔화를 걱정했지만 1분기 성장률이 예상치를 크게 웃도는 1.7%를 기록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분석이다. 반도체 호황과 수출 회복이 성장률을 끌어올리고 있지만 동시에 물가 자극 요인도 커지고 있다는 판단이다. 국제 유가 불안까지 겹치면서 인플레이션 방어 수단이 필요한 상황에 이르렀다. 정부와 지자체의 고유가 지원금도 시중에 풀려 우려를 키운다. 증시 과열과 빚투 확산이 동반되고, 유동성이 위험 자산에 몰려 자산시장 거품과 가계부채 부담을 키울 가능성을 제때 차단하는 정책 수단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4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6%로 1년 9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점도 유의할 대목이다. 호르무즈 사태로 석유류 가격이 20% 넘게 급등한 탓이다. 최고가격제와 유류세 인하가 없었다면 상승률은 3% 후반까지 치솟았을 수 있다. 유가 상승은 항공료와 외식비, 생활서비스 가격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증시는 뜨겁지만, 서민들의 장바구니는 무거워지고 있다. 게다가 내수 침체는 길어지고 자영업 폐업은 늘고 있다. 청년층 취업난과 가계부채 부담도 해소되지 않았다. 체감 경기는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 증시만 치솟아서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기약할 수 없다. 시장 왜곡을 막기 위해서는 실물 경제 정상화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환호와 낙관이 아니라 냉정과 균형감이다. 코스피 7000P 돌파로 한국 경제가 새로운 심리적·상징적 고지에 올라선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딛고 선 현실은 공급망 불확실성, 고물가, 고환율 등의 불안 요인이 적지 않다. 반도체 호황이라는 강한 상승 동력을 얻었지만 동시에 극복해야 할 구조적 과제도 분명해졌다. 실물 기반 없는 자산 가격 급등은 큰 부작용을 동반한 조정 국면으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 정부와 금융당국은 자본시장 과열을 경계하면서 물가 안정과 실물 경제 회복에 집중해야 한다. 국민 다수가 체감하는 경기 회복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코스피 7000P 시대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사설] 선거 쟁점된 '공소 취소 특검' 지역 이슈 집어삼킨다
‘공소 취소 특검’을 둘러싼 논란이 6·3 지방선거판을 집어삼킬 기세다. 박형준 부산시장 후보를 비롯한 국민의힘 영남권 5개 시도지사 후보들은 6일 울산시청에서 이른바 공소 취소 특검법안을 일제히 규탄했다. 이 법안에는 대장동·위례신도시 개발 비리 등 이재명 대통령 관련 8개 사건이 수사 대상에 포함돼 있다. 또 당선 이후 중단된 재판의 공소를 취소할 권한이 담겼다. 후보들은 이를 사법 쿠데타라는 강도 높은 표현까지 동원하며 비판했다. 특히 박 후보는 “대통령이 자신의 죄를 삭제하는 삭죄 특검법”이라며 비판 수위를 높였다. 지방 행정을 책임질 후보들이 지역 현안이 아닌 사법 이슈로 공동 대응에 나선 것은 이례적이다. 이날 김두겸 울산시장 후보는 “대통령이 임명한 특검이 대통령 재판을 취소하는 것은 삼권분립 위반”이라고 비판했고, 이철우 경북도지사 후보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더라도 반드시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힘 후보들은 해당 특검법을 헌법 질서 훼손이자 권력의 사법 개입으로 규정하며 강경 대응에 나선 것이다. 국힘에선 앞서 서울시장 후보를 비롯해 9명 후보가 ‘공소 취소 특검’ 대열에 합류한 바 있다. 이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도 여야는 ‘범죄 수사’와 ‘대통령 무죄 세탁’이라는 표현을 주고받으며 충돌했다. 특검법 공방이 지선과 정치권 전반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는 형국이다. 법조계의 문제 제기도 이어졌다. 대한법학교수회는 이날 성명에서 “특검에 공소 취소권을 부여하는 것은 법치주의와 권력분립을 훼손하는 독소 조항”이라고 밝혔다. 특히 진행 중인 재판을 중단시키는 것은 사법권을 침해하고 법원의 최종 판단 권한을 박탈하는 행위라는 지적이다. 정치권 공방이 헌법 질서 논쟁으로 번지는 양상이라 하겠다. 주목할 대목은 특검 이슈가 지선을 앞두고 정치 연대로 확장되는 흐름이다. 국힘은 물론 개혁신당 인사들까지 비판에 가세하며 보수 야권의 공동 대응 움직임도 가시화되고 있다. 부산에서는 개혁신당 후보가 공세에 동참하며 국힘과 연대를 제안할 정도다. 특검법이 지역 선거 구도 재편의 변수로까지 작용하는 셈이다. 결국 이번 특검 논란은 지선의 본질을 흐리고 선거 성격까지 바꾸고 있다. 지역 경제와 민생 정책 경쟁은 밀려나고 특검과 중앙 정치가 선거판을 지배하는 형국이다. 울산 공동 기자회견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향후 특검법 논쟁은 국회 입법 과정과 대통령의 대응, 선거 결과와 맞물려 더 큰 파장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지선은 본래 지역의 삶과 정책을 겨루는 자리다. 하지만 이번 선거는 중앙 정치와 사법 리스크가 전면에 부상하며 의미가 훼손되고 있다. 이번 사태의 발단은 명확하다. 논란을 촉발하고 선거판을 흔든 책임은 여당에 더 있다.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선거를 특검 논쟁으로 덮은 책임을 무겁게 느껴야 한다.
[사설] HMM 상당수 인력 서울 잔류 버티기, 반쪽 이전 안 될 일
국내 최대 국적 해운선사인 HMM 노사가 부산 이전에 전격 합의했지만, 자칫 ‘반쪽 이전’에 그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노조와 사측이 900여 명의 서울 인력 상당수가 잔류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30일 열린 노사 합의 발표 행사에서도 최원혁 대표이사는 “영업과 금융 부문 직원은 본사가 부산으로 옮기더라도 지점 형태로 서울에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정성철 육상노조 위원장도 “언제든지 기본 합의가 지켜지지 않고 조합원이 불이익을 받거나 문제가 생길 경우, 단체행동권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했다. 노사 입장을 보면 핵심 인력이 빠진 채 본사만 이전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 수밖에 없다. 노조는 특히 HMM 본사 이전이 거론된 이후 이러한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해 왔다. 정성철 노조 위원장은 지난달 7일 최원혁 대표이사를 부당노동행위로 고용노동부에 고소하면서 “서울 본사 인력의 상당수가 잔류하면, 상징적 차원의 본점 부산 이전은 논의할 수 있다”고 했다. 2024년 4월 부산상공회의소 양재생 회장과 간담회를 가진 전정근 당시 HMM 해원노조 위원장은 “해외 영업을 하는 국제본부와 국내 사업을 관할하는 국내본부로 분할한 뒤, 국내본부와 자회사가 입주하는 사옥을 북항에 건설하면 본사 이전이 가능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노조의 입장 변화가 전혀 없는 셈이다. HMM 노사는 지난해 하반기 이후 본사 이전과 관련해 극한 대립을 반복해 왔다. 육상노조는 노동위원회 조정 신청, 대표이사 고소에 이어 파업까지 예고하며 거센 반발을 이어왔다. 이런 가운데 노사가 구체적인 이전 조건 없이 대승적 차원의 합의를 갑자기 도출한 배경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는 상황이다. 지난달 30일 서명식 질의응답에서도 합의 배경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사의 본사 부산 이전 합의가 오는 8일 열리는 임시 주주총회에 대한 사전 합의 성격이 강하다는 절하된 평가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노사는 이제부터라도 부산 이전이 국가 발전과 균형성장을 위한 대승적 결단이라는 진정성을 보여줘야 한다. 세계 8위 국적 해운선사인 HMM의 부산 본사 이전은 해운·항만·금융·정책 기능이 결합한 해양산업 생태계가 집적하는 효과를 지닌다. 앞서 부산에 본사를 옮긴 SK해운, 에이치라인해운과 시너지를 내고 일자리 창출에도 큰 도움이 된다. 이를 실현하려면 단순히 주소지만 옮기는 ‘무늬만 지방 이전’에 그쳐서는 안 될 일이다. 실질적인 기능과 핵심 인력이 서울에 남지 않고 부산으로 와야 이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반쪽 이전에만 머문다면 언제든지 정치적 상황에 따른 변수에 쉽게 흔들릴 수 있다. 당연히 해양수도 부산의 완성도 요원할 것이다. HMM 노사가 이전 기관의 책임감을 갖고 전향적인 입장 변화를 보였으면 한다.
어머니날? 어버이날!
1920년대 대한독립청년단을 결성해 항일 무장투쟁 활동을 벌이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른 이가 있다. 조신성 애국지사가 그 주인공이다. 조 지사는 이후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진명여학교에서 교장으로 민족교육에도 진력한다. 근우회와 여성실업장려회 활동을 통해 마련한 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해방을 맞았다. 이후 1945년 북한에서 월남한 뒤 대한부인회 부총재를 역임했고 1953년 5월 부산에서 80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조 지사의 장례일은 5월 8일로 잡혔고 장례식에 모인 대한부인회 회원들은 조 지사를 기리며 그날을 어머니날로 정했다.어버이날이 5월 8일이 된 것은 조신성 지사의 장례일이 어머니날이 되면서였다. 정부는 대한부인회가 어머니날로 부르던 날을 6·25전쟁 이후인 1956년 국가기념일로 정했고 그 17년 뒤에는 어버이날로 바꿨다. 어머니날이 어버이날로 바뀐 것은 “왜 아버지날은 없느냐”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됐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현행 노인복지법 제6조에는 ‘부모에 대한 효 사상을 앙양하기 위하여 매년 5월 8일을 어버이날로 한다’고 규정돼 있을 정도이니 어버이날이 기리는 대상은 부모를 넘어 조부모까지 확대됐다고나 할까.이처럼 부모를 비롯해 조부모까지 함께 기념하는 대한민국 어버이날과는 달리 외국은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을 별도로 기념해 온 게 대세였다. 미국은 1910년대부터 매년 5월 둘째 일요일을 어머니날로, 6월 셋째 일요일을 아버지날로 정해 기념해 왔다. 7월 넷째 일요일을 어버이날로 부르고 있으나 최근에서야 생긴 기념일이다. 일본도 미국처럼 5월 둘째 일요일을 어머니날로, 6월 셋째 일요일을 아버지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어버이날은 국가기념일이지만 법정 공휴일은 아니다. 이 때문에 어린이날이 공휴일인 만큼 부모와 조부모를 기리는 날도 공휴일로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2010년대부터 본격화한 여론을 등에 업고 국회에서는 그동안 어버이날 공휴일 지정 관련 법안만 14회 이상 발의됐다. 하지만 공휴일 과다로 인한 각종 사회적 부담과 포퓰리즘 논란으로 법안은 흐지부지돼 왔다.또 다시 어버이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어버이날이 공휴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쉬워하기보다는 이번 주말까지를 ‘가족 주간’으로 정해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의 의미를 함께 되새기는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논설주간/상무이사
강윤경
수석논설위원
김승일
논설위원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데스크 칼럼] 은쪽이 남매
후배들을 보며 기자 초년병 때를 떠올린다. 몸도 마음도 혹독하게 담금질했던 시절. 가장 힘들었던 건 이른 새벽 출근도, 비리 사건 취재도, 어려운 기사 쓰기도 아니었다. 바로 ‘땟거리’라 부르는 기삿거리 찾기였다. 걱정을 덜어준 건 ‘현장’이다. 동행취재 혹은 현장르포 형식을 빌려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직접 체험하며 기사로 풀어냈다. 2009년 봄, 택시 기본요금 인상으로 수입이 반토막 난 현실을 알아보기 위해 조수석에 동승해 기사님과 손님들 얘기를 들었다. 장마철에는 아파트 수해 현장을 찾아 진흙투성이 지하주차장 복구 작업에 동참했다. 그해 여름 끝자락엔 119구조대의 24시를 동행취재한 기획기사도 기억에 남는다. 주변에서 “고생했다”며 칭찬을 건넸지만, 고백건대 전혀 고생스럽지 않았다. 기회만 된다면 ‘현장체험 전문기자’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장은 흥미진진했고, 보람도 컸다. 기자라면 현장 취재가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변명, 아니 해명하자면 요즘 후배들은 게을러서가 아니라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해 현장을 찾지 못한다. 하루를 오전 오후로 쪼개, 여러 건 기사를 써야 하는 기자들에게 현장 취재는 후순위로 밀리기 일쑤다. 경찰과 소방의 보고서를 참고해 전화로 추가 취재를 하다 보면 기사 마감이 코앞이다. 방송 기자는 정반대 고충이 있다. ‘그림’을 확보하기 위해 현장을 누비는 반면, 모자란 취재는 타 언론사 기사를 참고하곤 한다. 신문쟁이로서 방송계를 언급할 수 있는 건 방송뉴스를 제작해 본 경험이 있어서다. 종편채널에 부산지역 뉴스를 공급하는 역할을 1년 동안 맡아, 여느 방송 기자처럼 다양한 사건사고 현장을 다녔다. 변사 사건 현장에 남아 있던 시신 부패 흔적, 북극곰 축제를 취재하며 겨울 바다에 뛰어들었던 경험 등은 현장의 중요성을 더욱 일깨우는 기억으로 각인돼 있다. 돌이켜 보면 현장에 대한 관심은 기자로 첫발을 내딛기 한참 전부터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 같다. 학창 시절 기사를 읽거나 방송뉴스를 볼 때면 현장감 있는 소식에 더 눈길이 갔다. 각종 보고서나 통계자료가 나열된 기사를 접하면, 숫자 너머 현장의 목소리가 궁금했다. AI 시대에 레거시 미디어, 신문·방송의 미래는 있을까. 있다면 기자의 역할은 무엇일까. 끊임없는 자문 끝에 찾은 한가지 해답 역시 ‘현장’이다. 사람 대 사람으로 직접 얼굴을 맞대 묻고 답하며, 생생한 이야기를 길어 올리는 일만큼은 AI가 대체할 수 없는 사람 기자의 몫이다. 올 들어 유튜브 채널 운영을 다시 맡게 되면서 이 해답을 업무에 적용하고 있다. 〈부산일보TV〉를 눈여겨본 구독자라면 최근 변화를 눈치챘을 것이다. 생방송·생중계를 비롯해 현장르포 성격의 콘텐츠가 늘었다. 최근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심르포’라는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주요 전통시장을 찾아 상인들의 입을 통해 지역 민심을 들어보자는 취지다. 지방선거와 함께 국회의원 보궐선거까지 치르는 부산 북구 구포시장 일대는 전국구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시장 구석구석을 돌며 진행된 전재수 전 의원의 감사 인사와 하정우 전 AI수석의 첫 방문을 비롯해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와 박민식 전 장관이 마주친 구포초등학교 현장도 찾아 민심을 들었다. 관련 콘텐츠 조회수를 다 합하면 100만 회가 훌쩍 넘는다. 이에 더해 한 전 대표의 단독인터뷰는 일부러 만덕2동 전셋집이 있는 아파트단지에서 야외 생중계로 진행했다. 현장감과 호기심을 동시에 만족시키려는 의도였는데, 역시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이 같은 시도를 할 수 있는 건 사람 기자 덕분이다. 지난봄 TV방송국으로 발령 난 이은철·변은샘 두 기자가 일당백으로 뛰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름의 가운데 글자가 똑같아, 금쪽이 못지않게 소중한 ‘은쪽이’라 여기고 있다. 기자실 책상과 전화 취재가 익숙했을 후배들이 요즘 현장의 중요성을 자주 입에 올린다. 의견을 반영해 애초 4부작으로 기획한 ‘민심르포’를 확대 편성했다. 부산시장 후보들의 선거운동 무대 뒤편도 궁금한 세계다. 가능하다면 전재수·박형준 후보의 하루 일정을 따라다니며 생생한 장면을 전해보려 한다. 얼마나 날것의 현장이 담길지는 ‘은쪽이 남매’의 활약에 달렸다. 민주주의 축제가 끝나고 나면 어디서 땟거리를 찾아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기자는 기록하는 사람이기에, 결국 ‘기승전현장’이라 믿는다. 부산과 부울경을 넘어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이 되는 현안, 전국에 울림을 주는 지역 이슈를 찾아 부지런히 돌아다닐 것이다. 지역민의 눈과 귀, 독자의 입과 손발이 되겠다는 다짐을 담은 〈부산일보TV〉를 한번 믿고 지켜봐 주시라. 그러니 부디... ‘좋댓구알’!
[중앙로365] 지방선거, 부산 디지털 금융의 청사진을 묻다
얼마 전 세계 8위 해운사 HMM이 부산으로 본사를 이전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해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에 이어 한국 해운 산업의 상징과도 같은 민간 기업까지 부산에 둥지를 트는 셈이다. 정부 부처와 대형 민간 기업이 차례로 내려오면서, 부산은 단순한 항만 도시를 넘어 ‘해양 금융의 수도’로 도약할 수 있는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그러나 이 발판이 진짜 성장으로 이어지려면 항만과 해운이라는 실물 자산을 ‘디지털 금융의 언어’로 다시 짜는 작업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필자는 지난 3월 본 지면을 통해 부산이 가진 해운·물류 인프라가 RWA(실물자산 토큰화)와 결합할 때 만들어 낼 새로운 금융 모델을 제안한 바 있다. 선박의 소유권과 용선료 수익권을 토큰화해 일반 투자자에게 개방하는 ‘선박 RWA’, 가덕신공항의 운영권 일부를 시민 참여형 디지털 펀드로 조달하는 ‘인프라 RWA’가 그 골자였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지금, 해수부와 HMM의 부산 이전이라는 거대한 모멘텀이 만들어지면서, 그 제안은 더 이상 미래의 청사진이 아니라 실행 가능한 정책 의제로 바라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작 부산의 정책 시계는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발표되는 후보들의 공약을 살펴보면, 부동산·교통·복지 등 전통적인 의제는 빼곡히 채워져 있지만, ‘디지털 금융 도시 부산’을 어떻게 구체화할지에 대한 실질적인 청사진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된 지 수년이 지났고, 디지털 자산 시장은 이미 제도권 금융의 본류로 진입하고 있는 시점에서 부산은 여전히 이 변화의 무게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 차원의 입법 또한 사정이 녹록지 않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규율할 디지털자산기본법은 발행 주체와 지분율을 둘러싼 이견 속에 표류를 거듭하고 있고 지방선거 국면에 접어들면 그 우선순위는 더욱 뒤로 밀릴 가능성이 크다. 그 사이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결제·송금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중앙의 입법이 늦어진다고 해서 지방이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이유는 없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부산이 ‘제도의 실험장’을 자처하며 한 걸음 앞서 나가야 할 시점이다. 이미 글로벌 해양·금융 도시들은 디지털 자산을 도시 경쟁력의 핵심 축으로 삼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싱가포르는 통화청(MAS) 주도의 ‘프로젝트 가디언(Project Guardian)’을 통해 채권·펀드·외환의 토큰화 실증을 정부 보증 아래 진행 중이고, 두바이는 별도의 가상자산규제청(VARA)을 설립해 토큰화 자산의 발행과 유통을 일원화된 체계로 관리하고 있다. 홍콩 또한 디지털 자산 ETF와 스테이블코인 라이선스 제도를 정비하며 아시아 디지털 자산 허브 자리를 노리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도시 단위에서 명확한 정책 방향을 가지고 자산 토큰화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점에 부산에서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검토해 보기를 희망한다. 첫째, 부산 차원의 ‘디지털 자산 규제 샌드박스 2.0’이다. 기존 블록체인 특구가 기술 실증에 초점을 맞췄다면, 새 단계는 금융과 자산의 실증으로 그 범위를 넓혀야 한다. 선박·항만·물류 자산을 기초로 한 RWA 발행과 유통, 원화 스테이블코인 결제 실험, 디지털 자산 커스터디 인프라 구축이 부산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빠르게 검증될 수 있도록, 지자체가 중앙 부처와의 가교 역할을 적극적으로 자임해야 한다. 둘째, ‘부산형 시민 참여 인프라 펀드’의 제도화다. 가덕신공항, 북항 재개발, 항만 배후 단지와 같은 대형 사업의 일부 지분을 토큰화해 부산 시민이 소액으로 보유하고 운영 수익을 배당받는 구조다. 자본 조달과 시민 참여, 그리고 사회적 합의를 한꺼번에 풀어내는 ‘부산만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셋째, 디지털 금융 인재 생태계의 본격적인 구축이다. 디지털 금융 혹은 블록체인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정규 과정에 편입시키고, 지역 대학·연구기관·기업·금융권을 잇는 상설 플랫폼으로 확장해야 한다. 사람이 모이지 않는 도시에 자본은 머물지 않는다. 디지털 금융은 부산이 오래 짊어져 온 구조적 과제, 즉 수도권 자본 의존, 청년 인구 유출, 산업 고도화 지연 등을 정면으로 풀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렛대가 될 수 있다. 항만과 조선이 20세기 부산을 만들었다면, 그 위에 얹히는 디지털 금융이 21세기 부산을 다시 만들 수 있다. 다만 이는 시장과 의회가 의지를 갖고 일관되게 끌어가야 가능한 일이다. 디지털 금융 도시 부산의 청사진을 분명히 제시하는 후보, 그리고 그 청사진을 끝까지 검증하는 시민. 이 두 주체가 만나는 자리에서 비로소 부산의 다음 10년이 시작될 것이다.
[김필남의 영화세상] 무너지는 세계에서 버티는 법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패션이라는 화려한 갑옷을 입고, 전쟁터 같은 사회를 누비는 여성들의 초상을 그려내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쉴 새 없이 등장하는 명품 브랜드와 세련된 스타일링은 보는 이들의 감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누군가는 소비 지향적인 판타지를 그린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아찔한 킬힐 소리 뒤에 숨겨진 땀방울을 목격하며, 화려한 외양 너머 존재하는 이면을 그려냈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2006년 개봉한 영화에서는 사회초년생 ‘앤디’(앤 해서웨이)가 패션 매거진 ‘런웨이’ 편집장 ‘미란다’(메릴 스트립)의 비서로 입사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렸다. 까다로운 상사와 어수룩한 신입, 패션을 중심으로 한 볼거리는 가볍게 소비되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앤디의 미숙함, 완벽해 보이지만 언제든 자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미란다의 불안을 교차시키면서 20~30대 여성들에게 깊은 공감을 얻었다. 가히 신드롬을 일으켰던 영화 속 그들. 가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했던 그들이 20년 만에 돌아왔다. 2편은 20년 전 런웨이를 떠났던 앤디가 탐사보도 기자로 저널리즘 상을 수상하면서 문을 연다. 그러나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 앤디는 문자 한 통으로 해고를 통보받는다. 회사 전체가 구조조정에 들어간 탓이다. 시상대 위에서 트로피를 쥔 채 실직자가 되는 이 아이러니한 장면은, 영화가 응시하는 2026년의 현실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성실하게 축적해온 시간과 성취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경험, 그 불안은 특정 직종을 넘어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공통된 감각에 가까워 보인다. 또한 2편이 전작과는 다른 이야기로 전개될 것임을 예상케 한다. 먼저 영화가 포착하는 또 하나의 축은 권력의 이동이다. 과거 미란다의 비서였던 ‘에밀리’는 현재 럭셔리 브랜드의 임원이 되어 협상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다. 상사의 눈치를 살피던 위치에 있던 인물이 이제는 런웨이의 생사를 좌우하는 위치에 선 것이다. 갑과 을이 뒤바뀐 이 장면은 시간이 만들어내는 위계의 재편과 냉정한 속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와 맞물려 2편은 화려한 외양에 머물지 않고,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저널리즘의 생존을 다룬다. “치실로 써도 될 만큼” 얇아진 잡지의 두께, 하이패션 브랜드들의 광고가 아니면 매체도 존재하지 못하는 현실, 편집장의 직관보다 알고리즘이 우선하는 환경에서 가치 있는 기사는 의미가 없다. 미란다와 앤디 또한 아름다움과 조회 수 사이에서 헤맨다. 그들에게 패션은 예술이나 철학이 아닌, 데이터에 의해 재단되는 숫자에 불과해진 것이다. 영화는 ‘악마’로 불리던 미란다도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음을 알린다. 한때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그의 권위적인 태도는 이제 문제적 행위로 읽힌다. 사무실에 들어서며 코트를 비서에게 던지던 과거와 달리, 끙끙거리면서 스스로 옷을 정리한다. 부하 직원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내던 모습도 볼 수 없다. 강화된 HR 규정은 그 아무리 미란다라고 해도 비껴갈 수 없다. 그런데 이 장면은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묘하게 씁쓸하다. 영원할 것처럼 보였던 권력은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과연 사라진 것인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현실 상황을 그려내는 듯 보이지만 이를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다. 레거시 미디어의 생존이라는 현실적 고민이 판타지로 치환되는 순간, 공들여 쌓아 올린 질문의 무게는 힘을 잃고 만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자본의 논리나 선의로 덮어버리는 방식인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무너지는 기준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미란다와 앤디를 통해 말한다. 시대의 흐름을 인정하면서도 악착같이 살아남을 방법을 강구하는 그들의 모습은 여전히 사랑스럽다.
[김종기의 미술 미학 이야기] 헌법에 새겨야 할 이름 - 기억은 어떻게 국가의 형식이 되는가
부마와 5·18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질문이다. 국가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헌법에 새길 것인가?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울려 퍼진 ‘유신 철폐, 독재 타도’의 함성은 단순한 시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두려움을 넘어선 시민의 각성이었고, 자크 랑시에르의 말처럼 권력에 의해 가려지고 말해지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감각의 전환이었다. 부마민주항쟁은 유신체제를 종식하는 거대한 불꽃이 되었고, 그 불꽃은 80년 5·18 민주화운동과 87년 6·10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헌법은 모든 법 위에 서서 국가의 근본 가치와 국가권력의 정당성과 한계를 규정하는 최고 규범이다. 또한 헌법전문은 그 정당성이 어떤 역사와 희생 위에서 세워졌는지를 드러내는 정신적 선언이며, 국민이 공유하는 기억의 형식이다.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비워두는가에 따라, 국가는 다른 얼굴을 갖게 된다. 부마민주항쟁은 ‘군부독재’를 실질적으로 무너뜨린 최초의 시민 항쟁이었다. 5·18 민주화운동은 국가 폭력 앞에서 인간의 존엄이 어떻게 지켜지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두 사건은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이자, 그 윤리적 기준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여전히 헌법전문 밖에 머물러 있다. 이 공백은 단순한 누락이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 서사의 단절이며, 국가 기억의 불균형이다. 홍성담의 판화는 그 공백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검은 선으로 깊게 파인 화면 속에서, 광주의 거리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하나의 살아 있는 장면으로 솟아오른다. 불길과 연기, 무너진 차량, 그리고 무엇보다 화면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몸짓, 이 이미지는 어떤 특정한 순간을 재현한다기보다, 국가 폭력과 시민의 저항이 충돌하던 감각의 총체를 우리 앞에 다시 펼쳐 놓는다. 판화 속 인물들은 공포 속에서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이들은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말하듯,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통의 감각과 행동을 통해 연대 속에서 하나의 주체로 형성되는 ‘다중’이다. 이 다중은 공통의 분노와 존엄의 감각을 통해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되었다. 홍성담의 이미지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역사적 주체가 형성되는 순간을 시각적으로 구성한다. 우리는 최근 두 번의 대통령 탄핵을 경험했다. 2016년의 ‘촛불 항쟁’과 2024-25년의 ‘빛의 혁명’은 국민주권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경험은 헌법이 아직 완결된 기억의 구조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제 국회와 국민은 이 역사적 공백에 응답해야 한다. 헌법전문은 법이 아니라 기억이다. 부마와 5·18을 (그리고 추후 6·10항쟁까지) 헌법전문에 새겨 그 기억을 완성하는 것, 이야말로 이 시대가 감당해야 할 헌정사적 책임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현재의 과제다. 미술평론가·철학박사
[시간은 거꾸로 간다] 행복한 노년과 지역사회
필자는 1997년 노인생활과학연구소를 개소하고 거의 10년 동안 국내외 석학들을 매년 부산에 초청해 강연을 개최했다. 그들이 먼저 준비하고 경험한 해외 국가들의 미래 노인 정책 사례를 듣는 것은 중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강연에서 얘기했던 미래가 이제는 현재가 됐다.강연에서 노인정책과 서비스는 그 당시 강조되었던 것들이 우리 사회에 현실화되고 있다. 노인 복지서비스의 변화 유형은 여러 나라에서 매우 유사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노년을 지역사회에서 보내자’는 개념은 20세기 중반 유럽과 미국, 일부 아시아 국가에서 시작됐다. 노인돌봄을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로 변화시키는 가장 큰 이유는 효율적인 비용은 물론 독립적 생활, 존엄, 사회적 관계를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영국은 1989년 정부 백서에 국민을 위한 돌봄이 정책화됐고, 미국은 노인을 위한 사회적 지지망과 자연발생적 노인공동체를 중요하게 다뤘다. 덴마크나 노르웨이는 공동 주거 개념을 지역사회에서 심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건강한 노년, 활기찬 노년, 통합돌봄은 초고령사회의 핵심 정책이 되고 있다. 한국 역시 지역사회복지, 지역간호, 사회적 관계망 등 삶의 중심에 지역사회의 중요성을 두었다. 그러나 노년 중심이라기보다는 생애 전반을 대상으로 했다. 노인인구가 증가하면서 가족의 돌봄 부담 해소를 목적으로 2008년 장기요양보험 제도 속에 재가 서비스, 주야간 보호시설, 방문간호, 방문목욕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집에 거주하는 등급자에 국한된 서비스이다. 지역사회 돌봄은 2018년 병원, 시설이 아닌 자택, 지역사회에서 생활하면서 필요한 서비스를 통합적으로 제공받는 지역사회 돌봄이 시범사업으로 운영됐다. 서비스 범위를 주거지원), 보건의료, 요양 돌봄, 독립생활지원으로 정했다. 2022년에 사업은 더 확산됐고 2026년 올해 통합돌봄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의료수가의 현실화, 지방재정 연계 강화, 사회적 서비스 확보 방안 등의 과제가 남아있어 보인다. 지속가능한 통합돌봄이 안착되기 위해서는 지역자원의 활용과 효율성을 높여야 할 것이다. 노인의 욕구 사정을 통한 촘촘한 돌봄 계획을 바탕으로 재택의료, 방문간호, 사회서비스 등이 불평등 없이 제공돼야 할 것이다. 지역을 구성하는 사람은 항상 변화하고 노인 역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삶의 질에 대한 욕구의 관점이 변화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행복한 노년을 위해서는 지역사회의 역할이 더욱 강조돼야 한다. 건강할 때는 예방과 사회참여를 이끌 수 있어야 하고, 병약할 때는 돌봄과 지원이 연속성에서 균형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의료보건 복지가 협력하는 시스템이 구축돼야만 행복한 노년은 지켜질 수 있다.
[기고]정량 평가의 시대는 끝났다
얼마 전 편입학 서류를 검토할 기회가 있었다. 지원자들의 학점은 하나같이 4.5에 가까웠고, 지원 동기와 학업 계획서는 마치 같은 틀에서 찍어낸 듯 구성과 문체가 엇비슷했다. 어딘가 매끄럽지만, 어딘가 공허한 그 문장들 앞에서, 나는 우리가 사람을 평가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AI가 다듬어준 문서를 평가하고 있는 것인지 끝내 확신하지 못한 채 서류를 덮었다. AI 기술이 일상과 업무 현장을 빠르게 재편하고 있다. 법률 문서 작성, 의학적 진단 보조, 코드 작성, 논문 초안까지 AI가 수행하는 시대에, 많은 직장인의 실질적인 업무는 AI가 생산한 결과물을 검토하고 판단하는 일로 옮겨가고 있다. 지적 노동의 무게중심이 ‘생산’에서 ‘판단’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 변화는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 우리가 사람을 평가하는 방식은 과연 사람을 평가하고 있는가. 대학 현장은 이 질문의 현실성을 잘 보여준다. 지난해 서울 소재 어느 대학에서는 600명 규모 중간고사에서 AI를 활용한 대규모 부정행위 정황이 적발됐고, 수강생 익명 투표에서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AI로 시험을 쳤다’고 답했다. 대학생 대상 설문에서도 10명 중 7명이 AI를 활용한다고 답했으며, 일부는 “AI 탐지에 걸리지 않게 만들어 달라”고 지시한 뒤 과제를 제출한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그 결과물에 매긴 점수가 과연 학생의 무엇을 측정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정량의 세계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다. 수능은 객관식 수치로 모든 것을 가르고, 취업 시장에서는 어학 성적과 학점이 서류 통과의 열쇠다. 교수의 역량은 논문 편수와 피인용 지수로, 교사의 역량은 학생 성취도 수치로 환산된다. 정성 평가를 도입했다는 대학기관평가나 교원업적평가조차 실상은 항목별 배점과 등급 기준표로 정교하게 수치화 된다. 형식은 바뀌었지만, 평가의 철학은 바뀌지 않은 셈이다. 그렇다면 정성 평가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는 오랫동안 하나의 준거가 되어 왔다. 단순히 주관식이라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학생이 하나의 철학적 명제 앞에서 스스로 사유하고 논증하는 과정 자체를 평가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최근 주목받는 포트폴리오 평가나 프로젝트 기반 학습도 같은 맥락이다. 정해진 답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찾아내는가가 아니라, 불확실한 문제 앞에서 어떻게 사고하고, 협력하고, 의미를 만들어내는가를 본다. 이것이야말로 AI가 대신할 수 없는, 그리고 AI 시대에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인간의 역량이다. 여기서 한 가지 역설이 생긴다. 정성 평가의 필요성을 가장 강하게 제기하는 것이 바로 AI라는 사실이다. AI가 점수를 만들어내는 시대에 점수는 더 이상 사람의 것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AI의 등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이제 인간을 인간답게 평가하라는 요청일 수 있다. AI가 흉내 낼 수 없는 것, 즉 맥락을 읽는 감각,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공감, 윤리적 판단의 무게를 감당하는 책임감, 그것을 평가의 중심에 놓아야 할 때가 왔다. 정성 평가가 뿌리내리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전문가 집단과 제도적 기관에 대한 신뢰, 즉 사회적 자본을 충분히 축적하지 못했다. 입시 비리, 채용 청탁, 논문 표절. 공정해야 할 평가의 자리에서 반복된 이 사건들은 “사람이 개입하면 부정이 생긴다”는 집단적 학습을 사회 깊숙이 새겨 놓았고, 그 불신이 우리를 정량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왔다. 수능이 바칼로레아식 논술 체제로 전환되지 못하는 것도 이 구조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정성 평가로의 전환은 평가 방식만의 문제가 아니라, 무너진 신뢰를 복원하는 사회적 과제와 맞닿아 있다. 그 첫걸음은 외부에서 강제될 수 없다. 교수, 교사, 의사, 법조인 등 전문가 집단 스스로가 엄격한 윤리 기준을 세우고 자정의 선례를 쌓아가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평가자가 신뢰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정성 평가는 공정성의 대안이 아니라 또 다른 특권의 통로로 전락할 뿐이다. AI가 점수를 대신 만들어주는 시대에, 점수로 사람을 가르는 일은 이미 시효를 다했다. 정량 평가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우리가 묻지 않으면 안 될 질문은 단 하나다. 그 이후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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