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동북아 안보·경제 질서 급변, 한일 협력 중요성 커진다
19일 경북 안동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은 양국의 셔틀외교가 친교의 복원을 뛰어넘어 급변하는 안보·경제 질서에 공동 대응하는 전략적 협력 관계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날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서로의 고향을 방문하며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동북아 안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공동 대응책을 모색했다. 그 배경에는 중동 사태로 촉발된 에너지 공급망 불안과 북·중·러 결속,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 강화가 있다. 이 사활적 과제 앞에 한국과 일본은 동병상련의 입장에 처한 이웃이다. 이날 두 정상이 다짐한 안보와 경제 협력의 약속은 선언에 그쳐서는 안 되고 실천과 성과로 이어져야 한다. 그간 한일 양국은 자유로운 통상 질서와 북한의 비핵화를 핵심으로 한 동북아 안보를 위해 협력했다. 이번 안동 회담을 통해 양국의 의제가 에너지 안보로 확장됐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이날 이재명 대통령은 언론 발표에서 “액화천연가스(LNG)·원유의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면서 비축 정보의 공유와 소통도 강조했다. 이어 다카이치 총리는 원유의 공동 비축과 스와프 거래까지 제시했다. 양국이 중동산 원유와 원자재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중동 전쟁 장기화에 공동 대응을 선언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작지 않다. 한일 양국은 호르무즈 해협 리스크에 적극 대응하고 글로벌 공급망 불안을 최소화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하지만 한일 양국 앞에 난제가 쌓이고 있고 해결 과정은 순탄치 않다. 북한은 핵 능력을 고도화하고 있고, 러시아 지원 파병 이후 친러 행보를 가속하고 있다. 미중 스몰딜 이후 대만을 상대로 한 중국의 군사적 위협도 커지고 있다. 이 와중에 미국은 동아시아 안보 책임을 약화하는 언행으로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대만을 마치 협상 카드처럼 취급하는 발언으로 한국과 일본 등 인접 지역 동맹국의 우려를 자초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번영을 이룬 한국과 일본이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셔틀외교가 연 협력의 기회를 실질적 성과로 이어 가려는 노력이 양국 모두에 요구된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는 적지 않은 부침이 있었지만, 세계 질서 격변기를 맞아 안보와 경제 현안을 공동 대응 체제로 묶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만 역사 갈등을 이유로 일본이 소재 수출을 규제하며 보복한 것이 불과 7년 전 일이다. 일본의 과거사 왜곡과 책임 회피로 형성된 국민적 반감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정부는 일본의 책임 있는 자세를 지속적으로 촉구해야 한다. 또 에너지 협력 등이 국내 산업과 소비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투명하게 설명하고 이해와 협조를 구해야 한다. 이웃과의 협력은 필요하지만, 원칙 없는 교류는 오래가지 못한다. 안동 회담은 상호 필요성 확인에 그치지 않고 신뢰를 행동으로 증명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사설] 후계자 없는 부산 기업, 산업 승계 전방위 지원 주목
부산 지역 제조업 경영자의 고령화가 가속화되는 가운데 기업 승계를 하지 않는 2세들도 많아지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실시한 ‘2024 중소기업 가업승계 실태조사’에서 부산의 60세 이상 제조업 대표자의 비율은 36%로 전국에서 가장 높았다. 자본시장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후계자가 없는 부산 지역 기업은 4만 449개로 지역 전체 중소기업의 27.9%를 차지했다. 중소기업 고령화와 후계자 부재 문제가 심화하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부산시, 부산상공회의소 등이 지난 18일 ‘부산 중소기업의 지속 경영을 위한 M&A(인수합병) 활성화 지원 업무협약’을 했다. 지역 기업의 안정적인 세대교체와 산업구조 전환을 위한 민관의 전방위 지원이 주목된다. 이번 협약의 취지는 후계자가 없어 승계에 어려움을 겪는 지역 중소기업의 M&A를 활성화하기 위해 총 200억 원 규모 정책자금을 조성해 인수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다. 부산시는 2.0% 이차보전을 지원하고, 부산상공회의소는 부산중소벤처기업청과 함께 수요 기업 발굴과 홍보를 맡는다. 기보는 M&A 유형별 특화 보증상품을, BNK부산은행은 10억 원 특별 출연과 우대금리를 제공한다. M&A는 친족 승계가 여의치 않은 중소기업이 경영을 이어갈 수 있는 대안 중 하나로 꼽힌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지난해 12월 ‘M&A를 통한 중소기업 승계 활성화 기반 조성 방안’을 발표하고, 제3자 승계 시장 활성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이유다. 지역 제조업체 대표들의 자녀들이 가업 승계를 하지 않는 이유는 업종 전망이 불투명하거나 각종 규제와 구인난, 세금 문제 등 해결 과제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2세들이 승계를 기피하면 기업을 매각하거나 폐업할 수밖에 없다. 기업 승계가 해결되지 않으면 고용 충격, 지역경제 위축 등 연쇄적인 파급 효과가 확산할 수 있다. 특히 기술력을 갖춘 기업이 승계 문제에 발목이 잡히면 파장은 더욱 크다. 경영자의 창업정신, 경영과 기술 노하우 등 무형자산이 함께 사라지고 기업 성장도 정체될 우려가 있다. 기업 승계는 단순한 재산 이전이 아니라 산업 생태계와 고용을 유지하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부산에는 중견·중소기업이 많은데 이들 기업 영속성은 지역의 미래와 직결된다. 기업 승계가 원활하게 이뤄져야 고용과 투자를 통해 일자리, 기술, 세수가 유지·확대된다. 민관이 이번에 구축한 협력체계를 바탕으로 지역 기업의 승계 공백을 완화하고 유망 기업 발굴, 금융 지원, 성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중소기업의 원활한 승계를 지원하기 위한 ‘기업 승계 특별법안’을 여야가 발의한 상태다. 기업의 지속성과 일자리 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의 필요성에 정치권도 공감한 것이다. 기존의 가업 승계 중심 제도에서 벗어나 인수합병, 전문경영인 승계까지 포괄하는 기업 승계로 정책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때다.
[사설] 가덕신공항이 항공 물류 거점 돼야 트라이포트 완성된다
남부권 대표 공항이 될 가덕신공항을 진정한 수요자 중심 공항으로 만들기 위한 발걸음이 분주하다. 그 발걸음은 현재 인천국제공항이 독점하고 있는 항공 물류 시장에 내는 도전장이 시발점이 될 듯하다. 이 같은 도전은 가덕신공항에서 육상과 항만, 항공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복합 운송체계를 마련하겠다는 트라이포트 전략에도 부합하는 움직임이다. 부산시가 팔을 걷고 나선 이번 도전은 단순히 새로 생기는 신공항 하나의 전략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특정 공항에 집중된 국내 항공 물류의 취약점을 극복하고 국가 전체의 물류 시스템을 재편할 수 있을 진정한 물류 허브 구축에 대한 기대감까지 높이고 있다. 〈부산일보〉 보도에 따르면 부산시는 가덕신공항 항공물류 거점 구축 실행계획 수립을 위한 용역을 이달 시작했다. 시청 발주 용역으로는 이례적으로 긴 기간인 18개월로 잡힌 해당 용역은 단순한 공항 인프라 개발이 목표가 아니다. 한 해 국내 항공 수출입 화물 291만 톤 중 99%가 넘는 물량인 288만 톤을 인천국제공항이 처리하는 항공물류 시장 재편을 위한 실행 전략 수립이 목표다. 현재 김해국제공항이 처리하는 항공화물은 연간 1만2000톤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 같은 항공물류 독점구조를 방치한다면 가덕신공항이 개항을 하더라도 동남권 관문공항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다는 게 시의 판단이다. 시는 일단 가덕신공항 개항 시점에 맞춰 동남권 항공 물류 수요부터 파악한다는 방침이다. 동남권에서 항공편을 통해 화물을 옮길 인프라가 부족해 마지못해 인천을 이용하는 수요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역 기업 입장에서는 물류비 부담이 크고 시간 손실도 상당할 것인 만큼 이는 타당한 시도다. 이와 함께 유사시 발생할 수 있는 극단적 인천국제공항 항공 화물 집중의 폐해를 지적하고 안전을 담보할 물류체계 분산의 이점을 내세우는 전략도 병행할 듯하다. 항공 물류의 대부분이 반도체·전자부품·전자상거래·바이오 등 고부가가치 화물인 점을 감안하면 화주들에게 상당히 어필할 수 있을 논리로 보인다. 이번 용역은 활주로나 터미널 등 공급 인프라 중심이던 가덕신공항 관련 논의가 화주나 물류기업 등 수요자 중심 전략으로 전환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시도들이 인천국제공항의 항공 물류 처리 물량을 빼돌리는 수준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점이다. 제로섬 게임에 가까운 접근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에 새 물동량 창출과 함께 국가 전체 물류 병목 현상을 선제적으로 푼다는 목표로 접근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항만-항공 환적 인프라 등 트라이포트 인프라 구축도 서둘러야 한다. 그래야 가덕신공항을 항공 물류 거점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트라이포트 완성을 위한 마지막 방점이 될 수 있다.
한타바이러스
인류는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동물 매개 바이러스의 위력을 절감했다. 코로나19는 박쥐가 갖고 있던 바이러스가 중간 숙주인 야생동물을 거쳐 인간에게 감염된 경우다.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도 박쥐 바이러스가 각각 사향고양이와 낙타를 통해 확산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런데 이번엔 설치류를 매개로 한 한타바이러스 감염병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한타바이러스는 쥐, 들쥐 등 설치류의 침과 소변, 배설물 등을 통해 전파된다. 주로 설치류 배설물이 건조된 뒤 부서지며 공기 중에 확산한 바이러스를 인간이 흡입하는 방식으로 감염된다. 고 이호왕 고려대 명예교수(1928~2022)가 한탄강 유역에 사는 등줄쥐를 조사하는 과정에 세계 최초로 발견, 국제 공인을 받았다. 유럽·아시아에서는 주로 신장에 영향을 주는 신증후군출혈열(HFRS) 발병이 잦고, 미주 등 나머지 지역에서는 폐와 심장, 호흡기 손상을 동반하는 한타바이러스 폐증후군(HPS)이 많은 편이다. 이번에 대규모 감염 우려를 높인 바이러스는 HPS를 유발하는 안데스 변종 바이러스로 분류된다. 밀접 접촉을 통해 사람 간에도 전파할 수 있다고 보고된 바이러스이기도 하다.최근 23개국 승객·승무원 150명을 태운 네덜란드 국적 크루즈선에서 안데스 변종 바이러스에 감염된 네덜란드 부부와 독일인 1명 등 3명이 숨지면서 한타바이러스 감염 문제가 본격 부각됐다. 이후 미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접촉자 추적과 격리에 나섰으며, 미국에서는 최소 18명의 탑승객이 귀국 후 격리·모니터링 대상에 포함됐다. 이런 와중에 지난 18일(현지시간) 미국 콜로라도에서 성인 한 명이 한타바이러스에 감염돼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사망자는 네덜란드 크루즈선과 접점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보건당국을 더욱 긴장시키고 있다.문제는 다음 달 11일부터 미국·캐나다·멕시코 등 3개국 16개 도시에서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이 개최된다는 점이다. 동시다발적인 대규모 이동이 불가피한 월드컵을 계기로 한타바이러스가 광범위하게 확산될 우려가 높아진 것이다. 우리 정부도 안데스 변종 바이러스 등 개최지 감염병에 대한 주의를 당부한 상황이다. 한타바이러스는 상업성이 낮다는 등의 이유로 아직까지 백신이나 치료제가 없다. 주변 환경 청결 유지, 철저한 손 위생 관리, 쥐 서식 환경 차단 등 세계보건기구가 권고한 예방 수칙을 준수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논설주간/상무이사
강윤경
수석논설위원
김승일
논설위원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강윤경 칼럼] 반도체 돈벼락과 분배의 정의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성 주위를 파서 만든 구덩이를 해자(垓字·moat)라고 한다. 효과적 방어를 위해 해자에 물을 채워 못으로 만드는 게 일반적이었다. 경주 월성이나 중국 자금성, 중세 유럽의 성곽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건축 양식이다. 중국 신화통신이 최근 베이징에서 진행된 미중 정상회담에 앞서 “이번에는 해자를 더 깊이 팠다”라며 “미국이 일방적으로 중국의 양보를 요구했던 9년 전 트럼프의 방중과는 다를 것”이라고 시진핑의 철통방어를 예고하기도 했다. 해자를 경제적 은유로 소환한 건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이사회 의장이었다. 1980년대 발표한 버크셔해서웨이 연례보고서에서 기업의 장기적 성장 가치 척도로 ‘경제적 해자’를 제시한 것이다. 경쟁사로부터 기업을 보호해 주는 높은 진입 장벽과 확고한 구조적 경쟁 우위를 일컫는다. 해자가 넓고 깊을수록 시장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지속적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이 가치를 앞세운 그의 투자 철학이었다. 세계를 지배하는 글로벌 초격차 기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경제적 해자다. 단순히 성능 좋은 GPU를 만드는 것을 넘어서 CUDA라는 독점적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구축한 엔비디아, 프리미엄 하드웨어와 iOS 생태계로 고객들을 락인(Lock-in)시킨 애플, 닷컴 버블의 파도를 물류 제국으로 바꾼 아마존 같은 기업이 이에 해당한다. 글로벌 시장에서 ‘퍼스트 무버’가 되지 못해 ‘패스트 팔로어’ 전략으로 만년 2위에 머물렀던 우리 기업에도 기회가 왔다. 인공지능(AI) 호황에 따른 반도체 슈퍼 사이클 덕이다. 삼성전자의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이 57조 2000억 원에 이르렀다. 애플과 엔비디아에 이어 글로벌 톱 3다. 올해 영업이익이 300조 원에 이르고 내년에는 세계 1위에 등극할 것이라는 들뜬 전망도 나온다. 반도체 슈퍼 사이클을 공유하는 SK하이닉스의 1분기 영업이익도 37조 6000억 원을 기록했다. 한마디로 ‘돈벼락’이다. 반도체 돈벼락은 두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경제에도 다시 못 올 기회다. 중동전쟁에 따른 공급망 위기에도 국내 주식시장이 고공 행진을 이어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법인세를 포함해 각종 세금으로 나라의 곳간이 쌓이고 국민연금의 주식 평가이익까지 감안하면 ‘국가적 횡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재명 정부의 높은 국정 지지도도 따지고 보면 반도체 슈퍼 사이클에 기댄 측면이 적지 않다. 이제 우리에게 찾아온 이 국가적 횡재를 어떻게 구조적이고 지속 가능한 시스템으로 전환하느냐가 중요한데 돈벼락 분배를 놓고 싸움판부터 벌어졌다. 삼성전자 노조가 영업이익의 N% 성과급 제도화를 요구하며 파업 투쟁에 나선 것이다. 기업 이익에 따른 성과급 요구는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이고 절대적 액수를 따질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업의 지속 가능한 경쟁력과 사회적 책임이 전제다. N%의 성과급을 제도화하려면 손실이 발생했을 때의 임금 삭감이나 해고의 제도화도 감수해야 한다. 국민은 더 이상 삼성 노조의 파업을 노동 약자의 생존권 투쟁으로 보지 않는다. 삼성전자가 1분기 엄청난 영업이익을 거뒀다고 하나 그 자체로 글로벌 초격차 기업에 올라섰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위기론이 비등했던 게 불과 1년 전이다. 냉정히 말하면 지금의 반전은 기술혁신의 결과물이라기보다 초호황에 따른 영향이 크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실적의 초격차를 구조적 초격차로 만들어 내는 일이다. 돈 잔치를 벌일 때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반도체 사업을 둘러싼 글로벌 경쟁이 더 살벌해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단순히 슈퍼 사이클의 수혜자가 아니라 업황과 무관하게 경쟁 우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해자를 확보할 기회로 삼아야 마땅하다. 물론 반도체 기업 경쟁력의 핵심이 인재에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적절한 성과 보상이 뒤따라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동안 잉여의 공정한 분배에 대한 사회적 숙의가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단순히 현금 보상만이 아니라 회사의 성장과 노동자가 함께 갈 수 있는 주식 보상 등 다양한 방식의 성과 공유 시스템의 제도화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다만 이게 판을 엎으면서까지 할 일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오늘날의 삼성전자가 노사의 힘만으로 글로벌 기업 반열에 올라섰다고 할 수 없다. 국가의 정책적 지원이 있었고 수많은 하청업체와 노동자의 노력이 함께했다. 모처럼 찾아온 반도체 슈퍼 사이클로 삼성전자의 글로벌 초격차 기업 등극과 국가 경제 선순환에 대한 국민적 기대도 큰 상황이다. 노사가 사회적 책임과 연대의식을 갖고 미래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경제적 해자 확대에 힘을 쏟아야 가능한 일이다.
[김대래의 메타경제] 초국적 기업도 국적이 있다
부산근현대역사관은 과거 대표적인 식민지 수탈기관이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있었던 자리이다. 해방 이후 미국에서 사용하다가 한국으로 넘어온 뒤 역사관으로 재탄생하였다. 그 동양척식회사는 원래 이민회사로 출발하였는데, 일본사람들을 한반도에 많이 이주시켜 조선의 완벽한 일본화를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국인의 반발에 부딪쳐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이민 대신 농업 및 금융회사로 탈바꿈하였다. 국책회사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이후 당초의 사업에서 벗어나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해외에도 많은 투자를 하였다. 그 결과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동남아는 물론 남미까지 자회사를 가진 거대한 다국적 기업으로 군림하였다. 여러나라에 걸쳐 사업을 하는 다국적 기업은 물론 17~18세기 영국과 네덜란드가 식민지 개척에 나섰을 때 앞장섰던 동인도회사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기업들을 굳이 다국적 기업으로 강조하지 않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다국적 기업들과 결정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 차이는 다름 아닌 본사에 의한 일사불란한 통제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다른 나라에 진출한 기업들은 거의 본사의 통제를 받지 않았으며 별개의 기업처럼 행동했다. 그러다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면서 세계에 흩어져 있는 자회사들은 본사의 지휘 아래 완벽히 통제되기에 이른다. 게다가 상당한 수의 다국적 기업 매출액은 어지간한 나라의 총생산 규모보다 커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계무역의 약 3분의 1 이상이 이러한 다국적 기업들의 내부 거래로 이루어지면서 세계무역의 행태도 바뀌고 있다. 이렇게 커진 다국적 기업들이 워낙 많은 나라에서 영업을 하다 보니 국적을 아예 넘어서는 것으로 인식하는 일도 잦아졌다. 1970년대 유엔 산하에 초국적 기업 센터가 만들어지고, 1978년부터는 다국적 기업 대신 초국적 기업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 그러한 예이다. 더 나아가 아예 무국적 기업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일부에서 나왔다. 그러나 경제학적 해석은 달랐다. 초국적 기업은 정말로 국적을 넘어서는가 하는 논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쪽의 손을 들었다. 국적을 넘어선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외면적인 것일 뿐 결코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국가를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세계에서 영업을 하려면 기업 차원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 많은데 이런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특정한 국가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다. 특히 힘있는 국가에 의지하는 것이 기업에게는 큰 힘이 되기 때문에 결코 기업들도 국적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 해 수천만 명의 개인정보를 유출시킨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는 쿠팡이 사태 발생 이후 보이고 있는 행태가 초국적 기업에 관한 오래된 논쟁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한국 정부의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으로부터 정치적인 메시지들이 지속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쿠팡에 대한 조사를 기업에 대한 억압과 차별로 포장한 압박이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가 국내법에 따라 정당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미국 의회 의원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집단적인 의견을 보내기도 한다. 많은 우리 국민들은 쿠팡이 미국에 상장을 하였지만 국적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한국기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큰 사건이 터지자 쿠팡은 자신의 국적이 어디인가를 명확히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미국 국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걸 넘어 적극적으로 어필하고 있다. 경제학에서 꾸준히 논란이 되어 온 초국적 기업의 국적 문제는 이번의 쿠팡 사태로 인해 또 하나의 실증적 사례를 축적하게 되었다. 나아가 쿠팡의 정보 유출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더욱 불편해 했던 것이 있다. 그것은 특히 한국이 잘 갖추고 있는 사회자본에 의해 쿠팡이 성장했는데 그에 대한 쿠팡의 배반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다. 쿠팡의 성장 아이콘이었던 새벽 배송은 아파트 어디에나 던져놓아도 분실 위험이 없는 한국적 신뢰 위에서 가능한 방법이었다. 이런 신뢰 자본 위에서 성장한 쿠팡이 회원들의 신뢰를 져버린 데 대해 이용자들은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 분노까지 느끼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으로부터의 지속적인 압박 메시지 또한 그냥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쿠팡이 적지 않은 금액을 미국에 후원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쿠팡이 한국에 어떤 형태로 환원하고 있는지 이용자들은 별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도 불편한 기억의 근원이 되고 있다.
[데스크 칼럼] 뜨거운 재보선 냉담한 지선의 결과
세 사람이 얼마 전 tvN ‘유퀴즈’ 프로그램에 나온 이덕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덕화는 칠십 대인데도 여전히 멋이 있었다. 다들 한 번씩 따라 했던 ‘트라이’ 광고에 나왔을 때와 비교해도 크게 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덕화는 자신을 젊게 보이게 만드는 한 제품의 광고 모델을 수십 년째 이어오고 있다고 했다. 때가 선거철인 만큼 이야기가 갑자기 부산 북갑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한동훈으로 튀었다. 한 사람이 “한동훈이 부산에 뼈를 묻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부산을 알리는 광고 모델이라도 해주면 좋겠다”라고 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한동훈과 맞붙는 후보가 누구냐”라고 물었다. 국민의힘 후보는 결정되기 전이어서 하정우라고 말해줬다. “영화배우 하정우?”라고 다시 묻기에 ‘하GPT’라고 답하니 그제야 알아듣는가 싶었다. 그다음 말이 걸작이었다. “우리 동네(동래구)에도 이번에 선거해?”라고 묻는 게 아닌가.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라고 했다. 그는 이번 지방선거가 심하게 주객전도되었다고 깨우쳐 주는 스승이었다. 고작 2년짜리 국회의원 재보선에 가려 지방선거 의제와 후보가 잘 보이지 않는다. 평택을 국회의원을 뽑는 재선거가 이번 전국 선거에서 경쟁이 가장 치열하다. 민주당 김용남·국민의힘 유의동·조국혁신당 조국·진보당 김재연·자유와혁신 황교안 후보가 출마해 그야말로 용쟁호투의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러니 평택 국회의원 후보는 훤히 꿰고 있어도 평택 시장에 누가 나왔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1400만 명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경기도지사 선거조차 평택을에 가려 별 관심을 못 받고 있다. 뜨거운 부산 북갑 국회의원 보궐선거 때문에 부산시장이나 교육감 선거까지도 시들하게 비치고 있다. 이번 지방선거에는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해 함께 치러지는 국회의원 보선 지역이 모두 5곳이나 된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축제인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지는 전국 14곳의 국회의원 재보선은 주인공을 들러리로 전락시키는 심한 ‘민폐 하객’인 셈이다. 지난달 전남 순천 송광사에 갔다가 삼청교 중심에서 여의주를 문 용머리 돌을 만났는데 이름이 ‘공복’이었다. ‘용생구자(龍生九子)’, 용의 아홉 자식 중에 물을 좋아하는 ‘공복’이 다리가 무너지지 않게 지켜주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사실 개천에서 용이 나도 여의주를 물고 승천해 버리면 용만 좋지, 개천은 뭐가 좋나 싶다. ‘용꿈’이 나쁘다기보다 지역에는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공복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많은 문제가 서울 집중 때문에 생겨났다. 모든 권력이 중앙정부에 집중되면 지역이 무시되기 쉽다. 지방선거는 중앙 권력을 지방으로 나누어 지역 스스로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치른다. 지역 권력을 감시하고 지난 4년간의 행정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이기도 하다. 지방선거의 주인공은 지방이다. 지금처럼 국회의원 재보선이 지방선거의 이슈를 잡아먹으면 풀뿌리 민주주의가 흔들리게 된다. 유권자들이 국회의원 재보선에만 관심이 쏠려 우리 동네 구청장·시의원·구의원 후보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 후보는 후보대로 답답해서 아우성이다. 힘들게 쌓아 올린 한국 민주주의가 개인의 정치적 체급 올리기 때문에 흔들려서야 안 될 일이다. 걱정되는 지점이 또 하나 있다. 이번에 선출되는 구청장이나 광역의원들이 중간에 사퇴하고 2028년에 치러질 총선에 나설 때 말릴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다. 특히나 구청장은 지역 조직·생활 민원·예산을 직접 다루기 때문에 국회의원 후보로 성장하기 좋은 자리다. 총선에 한번 나왔던 사람이 구청장이 되어 인지도가 높아지면 다시 국회의원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 쉽다. 이번 재보선처럼 국회의원 사퇴하고 광역단체장 나가는 건 놔두면서 기초단체장들이 총선 못 나가게 막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선출직 공무원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사직할 권리가 인정된다. 하지만 법적으로 자유롭다고 해도 정치적으로는 유권자와의 약속 위반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임기 도중에 그만두면 추진하던 사업이나 정책의 연속성이 끊어지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중도 사퇴로 인해 발생하는 재보궐선거 비용도 전액 세금으로 충당된다. 앞으로는 외국처럼 ‘중도 사퇴 시 일정 기간 출마 제한’이나 ‘사퇴 시 선거비용 부담’ 같은 예방 장치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보름 앞으로 다가온 이번 지선에서도 후보들은 임기를 끝까지 채운다고 약속하고, 늦었지만 공약에도 집어넣어야 한다. 유권자에 대해 책임지는 정치를 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지방선거의 주인공은 지방이다.
[노트북 단상] 판결문, 무너진 삶을 일으켜 세우는 첫 문장
“결코 여러분이 부족해서 이런 피해를 당한 것이 아닙니다.” 2024년 1월 피해자 229명을 양산한 부산의 180억 원대 전세사기 사건 선고 직후. 부산지법 동부지원 형사1단독 박주영 부장판사는 준비해 온 종이를 꺼내 피해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시 그는 검찰 구형량인 징역 13년보다 더 무거운 징역 15년의 법정 최고형을 선고했다. 이후 그해 말 해당 판결은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됐다. 지난달 부산에서는 또 다른 전세사기 사건에서 중형 선고가 나왔다. 부산지법은 무자본으로 빌라를 지어 전세사기를 벌인 혐의로 기소된 건축설계사무소 대표 A 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하고 피해자 2명에게 4억 원에 가까운 배상을 명령했다. A 씨는 지난 2018년 연제구에 18가구 규모의 빌라를 준공한 후, 보증금을 돌려줄 능력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3년 5개월 동안 12건의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며 총 11억 원의 보증금을 가로챈 혐의를 받는다. 전세사기는 단순한 재산 범죄를 넘어선다. 특히 사회 초년생과 청년층이 집중적으로 피해를 입는다는 점에서, 삶의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는 사회적 재난에 가깝다. 몇 년 전 부동산 가격 폭등 속에서 확산한 무리한 갭투자와 부실한 임대시장 관리, 허술한 제도는 전국에서 수많은 피해자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정작 법정에 선 피해자들이 가장 자주 느끼는 감정 중 하나는 의외로 ‘소외감’이다. 재판은 엄격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고 판결문은 법리 중심으로 작성된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의 고통은 때로 ‘피해 금액’과 ‘양형 사유’ 몇 줄로 압축된다. 법정은 공정해야 하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건조해지기 쉽다. 이유가 있다. 실제 법조 기자가 접하는 다수의 판결문은 정형화된 문장 구조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판사 개인의 고민이나 문제의식이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다. 사건이 과도하게 몰린 현실 속에서 형사재판 역시 점점 처리 중심으로 흘러간다. 법관들 또한 수십 건의 사건을 소화해야 하는 환경 속에서 기계적인 판단으로 기울기 쉬운 구조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오히려 박 부장판사의 판결이 주목받았던 것은 단순히 형량 때문만은 아니었다. 피해자들을 향해 “여러분 잘못이 아니다”라고 직접 말한 장면은, 사법부가 피해자의 삶과 감정을 어디까지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특정 판사 개인의 ‘따뜻함’을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왜 피해자의 고통을 언급하는 판결문이 특별하게 받아들여지는지, 왜 인간적 언어가 담긴 재판이 드물게 느껴지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자는 과거 박 부장판사를 직접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인상적이었던 건 의외로 그의 경계심이었다. 그는 “따뜻한 법관처럼만 비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형사사법절차는 어디까지나 엄격하고 공정해야 하며, 판사는 감정보다 법리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 말은 오히려 중요한 균형점을 보여준다. 사법부의 역할은 무조건적인 공감이나 감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법정은 냉정해야 하고 판결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다만 전세사기처럼 삶의 존엄마저 무너뜨리는 구조적 재난 앞에서는, 피해자를 단순한 사건 기록 속 객체로만 남겨두지 않으려는 사법부의 고민 역시 필요하다. 사법부가 보여줘야 할 것은 단지 엄한 형벌만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 판결문은 사건의 끝이 아니라, 무너진 삶을 다시 붙잡기 시작하는 첫 문장일 수도 있다.
[2030 칼럼] 약점을 품어 가능성으로
바쁜 도시에 살다 보면 절로 몸에 배는 암묵적인 규칙 같은 것이 있다. 그중 하나는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에서 한 줄 서기이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위해 좌측을 비워두는 것은 어느새 도시의 공중도덕으로 자리 잡혔다.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는 서울에서 일을 시작한 후, 나도 그 속도에 물들었다. 하지만 안전을 고려할 때 한 줄 서기는 권장되는 행동은 아니다. 지하철 역사에도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걷지 마시오.” 부산으로 돌아와 지하철역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다 그 옆에 커다랗게 놓인 현수막을 발견하고는 미소가 지어졌다. “눈치 보지 말고 두 줄로 서세요.” 에스컬레이터 양쪽으로는 발자국이 두 개씩 그려져 있기도 했다. 다리가 불편한 사람은 한 줄로 비켜서기 어렵다. 아이 손을 잡은 부모도 에스컬레이터 한쪽을 비워두려면 오히려 더 불편한 자리에 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지하철에 올라타니 이번에는 각 전동차의 맨 앞과 뒤에 있는 교통약자석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탄 부산 지하철 1호선에는 교통약자석이 4개씩 마주 보게 자리가 마련돼 있었다. 서울에서 보던 것보다 넉넉한 규모였다. 고령 인구가 많은 부산의 형편을 고려한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뿌듯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5월 가정의달 연휴를 맞아 오랜만에 할머니를 모시고 동네의 유명 카페를 찾은 날이었다. 1층에서 함께 빵을 고르고 2층 카페에 오르려던 찰나, 어려움에 맞닥뜨렸다.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게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는 한 손으로 난간을, 다른 한 손으로 내 손을 꽉 잡고 2층까지 올라야 했다. 체구도 작고 몸도 가벼운 분인데, 계단을 오르는 내내 손에서 힘이 빠지지 않았다. 나도 진이 빠질 정도였다. 2층은 연휴를 즐기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여럿 보였다. “서울과 달리 부산에는 멋진 곳에도 어르신들이 많아서 보기 좋다”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지만, 이내 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오르내렸을 계단이 떠올랐다. 고층도 아니고 고작 2층뿐이지만, 휠체어는 물론 노인 보행기는 계단 한 칸도 오르지 못한다. 고령 인구가 유독 많은 동네에서 새 단장을 한 카페에 엘리베이터 하나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도시는 늘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변모한다. 부산시 또한 여러 변화에 직면해 있다. 이미 맞이한 초고령사회인 부산은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4%를 넘어 광역시 중 가장 빠르게 늙어가는 도시가 됐다. 이와 맞물려 청년인구는 꾸준히 유출되고 있다. 원래부터 관광도시였지만, 최근에는 더 많은 여행자의 사랑을 받으며 외국인 여행자 수가 늘어나고 있다. 다문화 가정을 이룬 이웃들도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 현상들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결국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도시의 다양성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이나믹 부산’에서 ‘Busan is good’이 된 지금, 이 도시는 다양한 사람들을 품는 미래를 상상하고 있을까? 고령화는 그 질문의 출발점이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령화 사회에 대처하는 방식이 곧 다양성을 수용하는 첫 번째 연습이 되는 이유다. 〈마이너리티 디자인〉의 저자 사와다 도모히로는 말한다, “사람은 모두 무언가의 약자이며, 소수자다.” 모든 도시에는 보이지 않는 기본 사용자가 있다. 빠르고, 젊고, 디지털에 익숙하고 몸이 건강한 사람. 계단은 그 사람을 기준으로, 키오스크는 그 손가락에 맞게 설계되곤 한다. 하지만 건장한 청년의 이동권에서 벗어나 보면 시각이 달라진다. 기준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시는 이미 충분히 좁다. 어르신, 휠체어를 탄 장애인, 아이와 함께하는 부모, 무거운 짐을 든 여행자. 설계가 그들을 처음부터 상상하지 않았을 때, 그 좁음은 벽이 된다. 이들 역시 도시가 당연히 품어야 할 사용자인데 말이다. 우리는 모두 어린이였고, 청년을 지나 노년을 맞이할 것이다. 지금 키오스크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어르신의 모습이 먼 훗날 나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니 이를 개인의 서툶으로 넘길 일은 아니다. 도시의 효율이 누군가에게는 긴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불편함을 도시의 과제로 읽어내는 일, 그리고 그것을 정책으로 옮길 사람이 누구인지 묻는 일이 남았다. 가장 느린 사람까지 상상하는 도시가 가장 다양한 사람을 품고, 결국 가장 많은 사람이 살고 싶은 도시가 되지 않을까. 눈앞의 작은 것을 제대로 보는 사람이 부산의 미래도 제대로 설계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편집국에서] 엘시티와 까르띠에
엘시티와 까르띠에. 6·3 지방선거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면서 최근 더불어민주당 전재수 부산시장 후보와 국민의힘 박형준 후보가 상대방을 공격하는 키워드다. 네거티브는 자극적이고 직관적이다. “그래서 까르띠에를 받았냐. 안 받았냐” “그래서 엘시티는 왜 안 파냐. 언제 팔 거냐”. 이게 요지다. 이해하기 아주 쉽다. 자신의 일상에 바쁜 정치 저관여층 유권자들에겐 이보다 더 어필하기 좋은 주제 거리는 없다. 그래서 ‘네거티브는 안 할 거다’라는 후보들도 막판 선거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한 번쯤 유혹에 빠진다. 2, 3등 후보들에겐 이보다 더 좋은 먹잇감은 없다. 전재수와 박형준. 진보와 보수 양 진영에서는 극좌와 극우가 아닌 비교적 합리적인 인사라는 평가를 받는다. 선거 초반엔 그래도 신사적인 이미지에 걸맞게 상대방에 대한 비난보다는 정책이 주를 이뤘다. 북항의 돔야구장, 영도 아레나 등은 신선했다. 언론은 물론 부산 시민들의 관심도 뜨거웠다. 하지만 이들도 정치인이다. 선거가 정점에 달할수록, 판세가 접전일수록, 강렬한 네거티브라는 자극제가 필요했다. 이들 선거 캠프에서는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겠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새로운 팩트가 나오는 것도 아닌, 그저 상대방의 아킬레스건이라고 생각하는 약점을 잡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X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다. 부산 시민의 입장에선 슬프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라는 말로 위안받기에는, 이 같은 법적 혹은 도덕적 결함이 없는 인사가 부산시장 후보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사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부산시장 못지않은 중요성을 가지는 부산시교육감 선거다. 현재 출마한 후보 3인 모두 사법리스크를 안고 있다. 아직까지 별다른 공약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부산시교육감 선거의 키워드는 사법리스크와 단일화뿐이다. 유권자들이 평가할 게 없다. 누가 당선돼도 법원 판결에 따라 재보선을 치러야 한다는 현실과 교육감 선거마다 항상 따라다니는 각 진보진영과 보수진영 단일화에 이제는 식상을 넘어 염증을 느끼게 된다. ‘부산에 이토록 인재가 없나’라는 자조적인 말이 나온다. 전국적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는 국회의원 북갑 재보선은 또 어떠한가. ‘진짜 북구 사람’이 누구냐는 정체성 논쟁부터 ‘손 털기’ ‘카메라맨 꽈당’ 등 가십성 보도가 주를 이룬다. 나아가 빼놓을 수 없는 단일화 이슈만 매일 신문과 방송을 도배하면서 유권자들의 진을 빠지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투표를 안 할 수는 없다. 어쨌든 선택해야 한다.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봉착해서, 또다시 ‘정책을 보라’ ‘일 잘하는 사람을 뽑아라’는 원론적인 말을 꺼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해달라. 최근 몇 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보듯이 일 못하는 사람과 일 잘하는 사람에 대한 효용성은 이미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이 때문에 〈부산일보〉는 6·3 지방선거 보도에서 ‘정책 검증’에 천착하고 있다. 각 후보자의 네거티브 언사, 가십성 기사, 단일화 이슈보다는 정책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지면에 전진 배치함으로써 지방선거를 정책 선거로 이끌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어떤 중앙지나 지방지보다도 많은 지면을 지방선거에 할애하고 있다. ‘블라인드 정책 오디션’ ‘PK 기초지자체 격전지 분석’ 등 각종 기획 시리즈를 게재하면서 유권자들의 바른 선택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또한 ‘HMM 반쪽짜리 본사 이전 우려’ ‘오페라하우스의 라 스칼라 공연 논란’ 등의 보도로 각각 전재수·박형준 후보의 경제·문화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선거판을 흔드는 화두를 제시했다. 물론 이 같은 보도로 양측 캠프로부터 볼멘소리가 나올 수도 있고 때로는 각 진영을 지지하는 독자들로부터 〈부산일보〉의 정파성을 의심받기도 한다. 기사 댓글은 온갖 정치색을 띤 말로 도배되기도 한다. 하지만 〈부산일보〉는 후보들의 말만 그대로 따라 쓰는 ‘받아쓰기’ 언론이 아니다. 〈부산일보〉의 모든 기자들은 공정 중립을 지향하며, 어느 당파에도 치우치지 않는다. 자극적인 기사 대신 정책을 검증하는 기사는 일견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어느 당파에 치우치지 않는 기사는 일부 독자들에게 외면받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의 미래를 이끌 지방선거에서 일 잘하는 사람을 뽑기 위해서는 〈부산일보〉를 보라. 〈부산일보〉의 정책 검증 기사를 읽으면서 선택의 순간에 조금이나마 도움받기 바란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결국 남는 것은 엘시티와 까르띠에뿐이다.
극과 극 PK 선거 열기… 교육감 ‘썰렁’ 시장은 ‘과열’ [6·3 지방선거]
삼성전자 노사 극적 타결 가능성
이 대통령 "중동평화 조속한 회복 공감"…다카이치 "인·태지역 평화 위해 능동적 노력"
떡 사러 새벽 '오픈런' 시장 떡집은 '떡상' 중
전재수 “길을 잃고 방황한 5년…부산도 일 잘하는 시장이 필요하다” [부산시장 후보 심층 인터뷰]
전재수 N잡러 지원센터 ‘혁신적’ 박형준 무상보육 확대 ‘현실적’ [블라인드 정책 오디션]
역대 지선과 다른 흐름 보이는 부산시장 선거...최종 결과는 어떻게?
북갑 3자 대결 현실화 땐 하정우 유리…셈법 복잡한 보수 진영
승객 잃고 기능 잃은 노포터미널… “부산 전체 수요 맞춰 재편해야” [시외버스 교통 새판 짜자]
[단독] “유류할증료 추가분 내라”… 5500만 원 ‘먹튀’ 여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