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첫 도심형 국립공원, 금정산을 보존과 이용의 조화 모델로
부산과 경남 양산에 걸친 금정산이 3일 국립공원으로 출범했다. 국내 24번째 국립공원인데, 설악산이나 지리산처럼 깊은 산속이 아닌 대도시 한복판에 자리 잡은 첫 도심형 공원인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오랜 세월 시민의 삶에 맞닿아 있던 ‘동네 뒷산’이 국가가 보존해야 할 자연유산으로 인정받은 대목은 당연히 기대와 자부심으로 직결된다. 국립공원 출범을 목전에 둔 지난 주말, 고당봉 정상 표석 앞에 인증 사진을 찍으려는 대기 행렬이 북적인 게 그 실례다. 다만 일반 산지에서 바로 국립공원으로 승격한 탓에 관리 체제와 탐방 문화에 큰 변화가 불가피하다. 보존과 이용의 균형점을 찾는 데 국립공원 안착의 성패가 달렸다. 금정산이 명품 반열에 오르려면 갈 길이 멀다. 앞서 승격된 팔공산이나 무등산은 도립공원 단계를 거쳐 관리 체계를 축적했지만, 금정산은 백지상태에서 자료 조사와 관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따라서 안내 체계 정비와 재난 대응 시스템 구축까지 최소 3~4년이 걸릴 전망이다. 더구나 예산안 편성 뒤에 승격이 결정되면서 올해 예산을 확보하지 못한 점이 뼈아프다. 그 결과로 공원 관리사무소에 추가 인력을 확보하지 못한 채 준비단 13명만으로 개소할 수밖에 없었다. 50∼70명이 일하는 다른 공원과 비교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기대와 자부심이 실망감으로 바뀌지 않도록 국립공원공단과 인접 8개 지자체는 초기 대응책을 내놔야 한다. 국립공원의 안착을 위해서는 시민 인식 전환도 필수다. 그동안 금정산은 일상의 공간과 인접한 특성상 입산과 이용 방법에 거의 제한이 없었다. 현재 금정산에는 200개가 넘는 등산로가 전체 300㎞ 길이로 펼쳐져 있다. 다른 국립공원에 비해 훨씬 큰 규모다. 생태 보존을 위한 탐방로 정비는 불가피한데, 이는 기존의 이용 관행과 충돌할 공산이 크다. 또 자연공원법 적용으로 반려견 동반, 야간 산행, 취사와 음주 등이 금지되면 불만이 제기될 수도 있다. 국립공원 지정이 개발과 편의가 아닌 공공의 자산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이 점을 관리 당국은 설명할 책임이 있고, 시민은 적극 수용할 책임이 있다. 국내 첫 도심형 국립공원 지정은 자부심이면서 동시에 책임을 의미한다. ‘국립’에 걸맞은 품격은 보존과 이용의 균형점에서 얻을 수 있다. 그러려면 출범 초반에 원활한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것이 관건이다. 환경부와 국립공원공단, 부산시와 인접 지자체, 시민단체와 학계가 참여하는 상설 협의 구조를 통해 사유지와 불법 시설 관리, 재난 대응과 이용 규칙을 조율해야 한다. 내실 있는 관리 체계로 신뢰를 얻으면 사회적 합의도 순조로울 것이다. 그러면 금정산은 도심형 국립공원의 모범 사례가 될 것이고, 향후 다른 대도시 인접 산지의 국립공원 지정에 선례가 된다. 거버넌스와 신뢰 구축이 명품 공원을 만든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설] 전운 확산하는 중동, 호르무즈 해협 봉쇄 장기화 대비해야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 이후 이란의 맞대응이 이어지면서 중동 전역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 사실상 중동 전역을 사정권에 두고 보복 공습을 감행한 데다 이란의 지원을 받아온 헤즈볼라까지 가세하면서 전선은 확산하는 양상이다.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는 세계 원유 해상 수송의 핵심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나섰다고 공언했고 실제로 해협을 오가는 유조선은 급감했다. 2일 외신에 따르면 전쟁 개시 직전 60여 척에 달하던 통과 선박이 하루 만에 한 자릿수로 줄었다. 해협 인근에서 민간 선박이 공격받는 일까지 벌어지며 긴장은 한층 고조됐다. 중동의 포성이 세계 경제의 심장을 직접 겨누고 있는 형국이다. 중동 정세에 국제 에너지 시장도 요동치고 있다. 브렌트유와 WTI는 장외에서 8%가량 급등해 배럴당 70~80달러 선을 위협했고, 확전 시 100달러 돌파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은 더 우려스럽다. 수입 원유의 약 70%, LNG의 20~30%를 중동에 의존하는 구조에서 공급 차질은 곧 산업 전반의 비용 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미국 싱크탱크 스팀슨 센터 측도 분쟁이 장기화할 경우 전력 공급과 수출 경쟁력에 부담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1억 배럴 이상의 전략비축유와 약 50일 치 LNG가 완충 역할을 하겠지만 일시적일 뿐이다. 한국 경제에 적잖은 타격이 불가피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작전 기간이 “4주 또는 그보다 짧을 것”이라고 했지만, 걸프 국가들도 이란 공격 동참을 저울질하고 있어 전선 확대 가능성이 높다. 전문가들은 호르무즈 해협이 실제로 봉쇄되는 상황을 가장 우려한다. 단순한 유가 상승을 넘어 공급망 전반에 충격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는 에너지 수급 불안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우회 루트를 활용할 경우 해상운임이 기존 대비 최대 50∼80% 상승할 수 있고 육로 운송과 통관 절차로 운송 기간도 3~5일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과거 해당 지역에서는 보험료가 최대 7배까지 할증된 사례가 있다. 에너지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한국으로서는 경제적 비용이 커질 수밖에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철저한 대비다. 정부는 비축유 방출과 대체 수입선 확보, 해상 운송 지원 등 단기 대응을 서두르는 한편, 재생에너지 확대와 원전, 수소 등 중장기 에너지 전략도 병행해야 한다. 기업들 역시 물류 지연을 계약에 반영하고 복수 운송 노선을 검토하는 등 리스크 관리에 나서야 한다. 중동에 체류 중인 우리 국민 1만 7000여 명의 안전 확보도 시급하다. 산업통상자원부가 긴급대책반을 가동했지만 불확실성은 여전하다. 중동의 전운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냉정한 현실 인식과 선제적 대응만이 경제 충격을 최소화하는 길이다. 정부와 산업계, 금융권이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할 때다.
[사설] 미국, 이란 공습… 중동발 경제 리스크 철저히 대비해야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이란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가 사망하면서 국제 정세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란이 즉각 미사일 공격으로 대응한 데 이어 핵심 원유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면서 세계 경제 불확실성도 높아지고 있다.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 중동 수입 원유 비중이 높은 우리 경제도 타격을 입을 것으로 우려된다. 더욱이 최근 북한의 잇단 강경 발언에도 코스피지수가 6000선을 넘어 안착하는 등 소비·투자 등 실물 경기 호조세까지 기대했으나 중동 리스크라는 초대형 악재가 터지면서 경제는 물론 국가 안보에도 비상이 걸렸다. 현재 이란의 반응은 지난해 6월 미국이 벙커버스터 등으로 핵시설을 타격했을 때와 전혀 다르다. 당시 이란은 우왕좌왕했지만 이번 사태 직후 이란 혁명수비대는 1시간 만에 ‘역대 최대 보복’을 천명하며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등 인접국에 주둔한 미군 거점에 대한 동시다발적 타격을 이어가고 있다. 중동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원유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선박 통행 불가’ 조치까지 내렸다. 지난해 기준 원유 69.1%를 중동에서 들여오는 우리나라로서는 에너지 수급 불안에 따른 경제 충격이 불가피하다. 우회 루트를 활용하더라도 해상운임이 기존 대비 최대 80% 상승할 것으로 전망됐다. 정부는 교민들의 안전 확보 등을 위한 긴급 상황점검회의 등 즉각적인 대응 체계를 가동하고 있다. 금융위원회도 ‘비상대응 금융시장반’을 가동, 중소기업 피해 최소화 등을 위해 100조 원 이상 규모인 시장안정프로그램 시행에 돌입했다. 정부의 신속한 대처는 무척 다행스럽다. 하지만 이번 중동 사태는 역사적 전환점이 될 정도로 큰 후폭풍을 몰고 올 전망이다. 에너지 안보가 흔들리면 소비자 물가가 상승하고 경제 성장이 둔화된다. 이번 사태가 한층 커지고, 장기화한다면 우리 경제의 피해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으로 우려된다. 국가 경제 핵심인 에너지 안보 수호를 위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중동의 군사 충돌은 우리 안보 문제와도 직결된다. 단순한 지역 분쟁이 아닌 이번 사태로 인해 향후 지구촌 국제 안보 환경은 크게 요동칠 예정이다. 미국이 중동에 군사적 역량을 집중하면 동북아 안보 환경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친다. 더욱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최근 ‘한국의 완전 붕괴’를 거론하며 위협 수위를 높였다. 돌발 상황에 대비한 정밀한 외교, 안보 전략과 함께 한층 세심한 경제정책이 요구된다. 무엇보다 중동발 유가 불안이 물가와 원달러 환율에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인 만큼 이 부분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정부는 빈틈없는 안보, 경제 대응 체계로 중동발 리스크를 최소화하길 바란다.
AI발 실업 공포
인공지능(AI) 기술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우리는 현재 평범한 개인이 궁금증을 AI로 즉시 해소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컨설팅 서비스까지 손쉽게 제공받는 놀라운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AI 성능이 향상될수록 대량 감원과 소비 여력 감소에 따른 실업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미국 러서치업체 ‘시트리니 리서치’는 지난달 22일 ‘2028년 글로벌 지능 위기’란 보고서를 공개했다. 보고서 골자는 현재 진행 중인 다양한 AI 혁신이 2028년 대형 금융 위기를 야기한다는 것. 보고서는 가까운 미래엔 초고성능 AI가 기업용 구독 소프트웨어를 대체하고, 스테이블코인 등 결제 수수료가 저렴한 경로까지 스스로 찾아내 신용카드 수요를 급감시킬 것으로 전망했다. 이 때문에 은행과 소프트웨어·컨설팅 기업이 연쇄 도산하고 사무직 대량 감원 사태가 벌어진다고 봤다. 결국 주택담보대출을 못 갚는 금융 대혼란이 벌어진다는 것이다.보고서 공개 여파로 최근 미 증시에서는 관련 업종 주가가 줄줄이 급락하면서 월가를 충격에 빠뜨렸다. AI 공포에 따른 투매 현상은 미국 기업공개(IPO) 시장에도 찬물을 끼얹었다. IPO를 진행 중인 중소형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계획을 철회하거나 공모가를 밑도는 주가 부진을 겪고 있다. AI 충격을 견딜 수 있는 빅테크 기업들만 향후 살아남을 것이라는 비관적 분석도 이어진다.글로벌 선도 기업들이 AI를 이유로 채용을 중단하고 고용을 줄이는 현상은 이미 현실화하고 있다. IBM의 경우 신규 채용 일시 중단을 선언했다. 이어 5년 내에 고객과 직접 접점을 갖지 않는 부서 업무 30%를 AI와 자동화로 대체하겠다고 밝혔다. 트위터 공동 창업자 잭 도시가 설립한 결제 회사 블록도 직원 1만 명 가운데 4000명 이상을 감축한다며 그 이유에 대해 AI가 회사 운영 방식 자체를 바꿔놓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AI가 인간 채용을 제약하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된 셈이다.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시중은행들은 ‘AI 은행원’ 도입에 속도를 내고 있다. 게임업계 등도 밑그림과 채색 작업 등을 AI로 대체하고 있다. 상당수 산업의 인력 운용 구조 자체가 채용 규모를 줄일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가뜩이나 청년을 위한 정규직 일자리가 부족하다. AI발 기술 혁신이 고용 절벽 현상을 심화시키지 않도록 한층 세심한 정책을 당부한다.
논설주간/이사
강윤경
논설위원
김승일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김승일 칼럼] 황석영처럼 누구나 AI로 소설 쓸 수 있을까
‘〈어린 왕자〉 주인공에 시공간의 왜곡이라는 시련이 닥친다. 별 여행 후 지구로 오는 여정에서 시간이 50년 빨리 흐른 것이다. “저는 B-612 소행성에서 온 어린 왕자랍니다.” 부산 광안리해수욕장에 불시착한 우주선을 발견한 해양구조대는 자신을 어린 왕자로 칭하는 중년 사내를 보고 깜짝 놀란다.’ 문학의 문외한이지만 AI(인공지능)로 소설을 써 보리라 작정했다. 여든 중반을 바라보는 황석영 작가가 신작 〈할매〉 집필에 챗GPT를 활용했다고 공개한 것이 계기다. 평소 자료 검색 도구로 생성형 AI를 요긴하게 쓰는 편이지만, 사색이 필요하고, 한 자 한 자 새겨야 하는 글쓰기는 ‘글쎄요’다. 경험과 직관, 의도가 용광로처럼 뒤섞이는 창작을 AI가 대체할 수 있을까. 이 관념을 황 작가가 깼다. 그의 인터뷰를 보면 자료 조사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개념 정리에 AI를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구성안이나 글쓰기 방식까지 상의해 결정했다. 이는 단순 조수 역할로 볼 수 없다. 창작의 협업을 넘어 능수능란하게 부렸다고 보는 게 맞다. 황 작가의 작업 방식을 유추해 과정을 설계했다. 제목은 〈늙은 왕자〉.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세계관을 현대 도시로 확장한 스핀오프다. 동화 형식을 빌린 성장 소설의 틀과, 권력과 허영, 중독, 자본, 기계적 노동, 관념적 지식의 허상을 목격한 뒤 사랑과 관계의 본질을 깨닫는 원작의 서사를 유지했다. 챗GPT에 콘셉트를 입력한 뒤 광안리 불시착 이후 만날 인물의 예시와 상징체계를 완성했다. 부동산 중개업자(소유와 숫자), 인플루언서(허영과 인정 욕망), 환경미화원(책임과 헌신), 은퇴한 조선소 노동자(시간과 노동), 자갈치 아지매(길들임과 관계), 길고양이(조건 없는 돌봄), 사진관 주인(본질을 보는 눈). 낯선 부산에서 사랑과 관계의 의미를 깨닫고, 사진사의 도움으로 어린 영혼을 되찾는 결말로 가닥을 잡았다. 200자 원고지 200매 분량의 중편 소설 구성안이 나왔다. ‘원작처럼 우화 형식으로, 단문과 반복, 여백이 가득한 동화체로 서술하라!’ 전체 21장으로 나뉜 소설 한 권이 생성됐다. 지면 한계로 전재가 어려워 원작의 뱀 역할을 대체한 사진사와의 만남 장면만 소개한다. ‘“나는 길을 잃었습니다.” 사진사는 웃지 않았다. “사람은 길을 잃지 않아요.” “그럼요?” “자기가 누구인지 잊어버릴 뿐이지.” 사진사는 조용히 촬영 버튼을 눌렀고,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속에는 중년의 남자가 아니라 어린 소년이 앉아 있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대표작 〈소년이 온다〉를 일본어로 번역한 이데 슌사쿠 작가 인터뷰가 떠올랐다. “번역하다가 울고, 그래서 쉬었다가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 “세 줄 쓰고 한 시간 울었다”는 한강 작가의 고통과 맞닿아 있다. 내면의 울림을 문자의 씨줄과 날줄로 엮어내려면 웬만한 내공으로는 어림없다. 예컨대 4만 자 소설을 쓴다면 작가는 4만 번 이상 선택의 고뇌를 거쳤다고 보면 된다. 완성된 〈늙은 왕자〉를 읽고 가책을 느꼈다. ‘데뷔 작가’로서 완성도를 높이는 역할을 해야지 싶었다. ‘이 소설에서 작동하는 매개 변수(파라미터)를 찾아 줘.’ 매개 변수는 인물과 사건을 연결하고, 의미를 생성하며, 서사의 방향을 바꾸는 구조적 요소다. 평론가 뺨치는 방대하고 치밀한 분석이 쏟아졌다. 변수의 패턴 분석까지 읽으니, 사진사에 극적 긴장감을 배치하는 게 나아 보였다. ‘사진사를 ‘전환 장치’에서 ‘시간·기억을 관장하는 존재’로 격상해서 재구성하라.’ 소설 중반 곳곳에 사진관 복선을 깔고, 결말에 사진사를 복귀의 문지기가 되게끔 사건을 만들라고 입력하자 중후반부만 바뀐 수정본이 뚝딱 나왔다. 긴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지우고 쓰기를 반복하는 번민의 고통은 이제 불필요한 것일까. 갑자기 올해 〈부산일보〉를 비롯한 전국 신문사의 신춘문예 응모작이 최대 두 배 가까이 늘어난 흥행 미스터리가 겹쳐 떠올랐다. 누구나 AI 도구를 활용하면 황석영 작가처럼 중편 소설을 창작할 수 있을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다. 서랍 속 먼지 쌓인 습작도 매개 변수 조정을 거듭하면 탄탄한 서사 구조로 탈바꿈할 수 있다. ‘주인공 캐릭터를 유머러스하게 강조해.’ ‘범인의 폭력성을 부각해.’ 하지만 ‘황석영 문체로 쓰라’고 단순히 입력하면 실망하기 십상이다. 프롬프트의 정교함이 결과의 품질과 정비례하기 때문이다. 창작에 동반되는 고통스러운 선택은 체화된 경험과 사상이 뒷받침한다. 문즉인(文卽人). 글이 곧 사람이고, 글 속에 지문(指紋)이 있다. 범용 AI(AGI) 시대가 오면 예술 문법은 더 큰 변화가 불가피하다. AI를 제 몸처럼 다뤄 창작 의도를 지문처럼 새기는 능력. 문재(文才)의 정의가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열을 품은 도시, 식지 않는 밤
지난해 역대급 폭염으로 인해 온열질환자가 급증하고 가축 폐사와 농작물 피해가 속출했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올해는 그 더위의 기세가 더 앞당겨질 것이라는 예보가 잇따르고 있다. 기후변화의 가속화로 이제 4월만 되어도 초여름 못지않은 가마솥더위가 시작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폭염으로 인한 피해는 녹지가 풍부한 농어촌보다 인구가 밀집된 도시 지역에서 훨씬 가혹하게 나타난다. 이는 도시가 주변 교외 지역에 비해 기온이 수도 이상 높게 유지되는 ‘도시열섬’ 현상이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태양열을 거침없이 흡수하는 아스팔트 도로와 거대한 콘크리트 건축물은 낮에 축적한 열기를 밤새도록 뿜어내며 도심을 거대한 열기 보관소로 만든다. 여기에 자동차와 에어컨 실외기 등에서 쏟아지는 인공 열까지 가세하면서, 도시의 기온은 식을 줄 모르는 악순환에 빠진다. 결과적으로 시골 지역보다 훨씬 이른 시점에 폭염 경보가 발령되고 열대야가 길어지는 환경은 도시민의 건강을 직접적으로 타격한다. 도시가 기후 위기 시대의 가장 위험한 열의 사각지대가 되는 것이다. 도시열섬 현상의 진정한 위협은 해가 진 뒤에 극명하게 드러난다. 실제로 낮 동안에는 도시와 교외 지역의 온도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밤이 되면 대지는 급격히 냉각되는 시골과 달리, 온종일 태양열을 머금은 도시의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건물들은 축적된 열기를 서서히 내뿜으며 기온 하락을 방해한다. 이로 인해 밤사이 기온이 충분히 떨어지지 않는 열대야가 고착화되면서 도시는 거대한 열 저장고가 된다. 도시열섬의 본질적인 차이는 지표면의 물리적 성질, 즉 ‘열용량’(Heat Capacity)에 있다. 시골의 흙과 나무는 열을 금방 내뱉지만, 도시의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는 낮 동안 받은 거대한 에너지를 내부 깊숙이 저장한다. 이로 인해 밤이 되어도 도시는 식지 못하고 야간 열섬 현상을 일으킨다. 즉, 도시는 열을 잠시 머물다 가게 하는 곳이 아니라, 전체 시스템의 열 보유 능력을 스스로 키워버린 상태다. 즉, 낮과 밤의 기온차가 줄어들면서 낮에는 주변보다 온도가 낮아지고 밤은 높아지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도시는 낮은 알베도(반사율)와 복잡한 건물 구조(어두운 표면)로 인해 태양 에너지를 튕겨내지 않고 그대로 흡수한다. 결과적으로 지표면이 받아들이는 전체적인 열의 양 자체가 시골보다 훨씬 많아진다. 자동차, 에어컨 등에서 발생하는 인공 열까지 더해지면서 도시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열과 내부에서 발생하는 열이 모두 늘어나는 이중의 가열 상태에 놓인다. 도시열섬 현상의 본질은 두 가지 물리적 변화가 결합한 결과다. 먼저, 도시가 시골보다 더 많은 ‘열속’(Heat Flux)을 받아들인다는 점은 도시 전체의 평균 기온을 상승시키는 근본 원인이 된다. 여기에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지표면의 열용량 증가가 더해지면, 낮 동안 축적된 방대한 에너지가 밤사이 천천히 방출되면서 낮과 밤의 기온 차(일교차)를 현저히 감소시킨다. 이 두 기제가 맞물리며 낮에는 주변 시골과 기온 차이가 크지 않더라도, 밤이 되면 냉각이 저지되는 도시 특유의 구조 때문에 두 지역 간 온도 격차는 본격적으로 벌어진다. 결국 전체적인 기온 상승과 일교차 감소라는 이중주가 도시에서 열대야를 훨씬 빈번하고 가혹하게 만든다. 이러한 물리적 메커니즘은 실제 기온 자료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대도시인 서울과 근처 상대적으로 시골인 양평의 기온 변화는 일변화와 장기 추세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낮 동안에는 두 지역의 최고기온 차이가 비교적 크지 않지만, 밤에는 서울의 기온이 양평보다 유의하게 높게 유지되어 도시-농촌 간 기온 차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특히 1970~80년대 서울의 급격한 도시화 시기에 두 지역 간 야간 기온 차가 크게 확대되었으며, 이후 양평 지역 역시 점차 기온이 상승하면서 서울과의 차이 증가 폭은 다소 완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결론적으로, 전 지구적 온난화와 도시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현실에서 열대야의 심화는 이미 시작된 현재의 과제이다. 특히 다가오는 올해 여름 역시 예외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지금부터 대비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폭염 취약계층 보호, 냉방 인프라 점검, 도시 열지도 기반의 대응 체계 강화와 같은 실질적 준비가 필요하다. 중장기적으로는 도시의 열용량을 줄이는 구조적 전환을 병행해야 한다. 공원과 도시 숲 확대, 가로수 식재, 옥상·벽면 녹화 등 녹지화를 포함한 도시계획을 통해 열 저장을 줄이고 야간 냉각을 회복시키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뜨거워진 도시의 밤을 완화하기 위한 준비는 지금 이 순간 정책과 설계에서 시작돼야 한다. 그것이 올여름을 넘어 미래의 여름을 견디는 가장 현실적인 대응이다.
[데스크 칼럼] 기대에 한참 못 미친 부산 프로농구
부산을 연고지로 한 남녀 프로농구팀 부산 KCC 이지스와 부산 BNK썸이 올 시즌 부진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다. 부산의 한 농구 팬은 “2년 전과 지난해 각각 챔피언에 오른 두 팀이 올 시즌에는 이렇다 할 경기력을 선보이지 못하며 리그 중위권에 머물고 있다”며 “롯데 자이언츠가 지난 시즌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한 데 이어 두 팀 모두 리그 우승이 좌절된 처지여서 실망감이 크다”고 말했다. 프로농구 전문가들도 “수비력이 약한 부산 KCC와 높이가 약점인 부산 BNK가 막판 대반전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는 있어도, 챔피언전 정상을 차지할 가능성은 낮다”고 입을 모았다. 먼저, ‘슈퍼팀’으로 불렸던 부산 KCC는 2023-2024 정규리그에서 5위로 플레이오프에 향했다. 하지만 6강 플레이오프부터 전혀 다른 경기력을 보여줬다. 허웅과 최준용, 송교창의 시너지 효과가 제대로 나왔고, 당시 외국인 선수였던 라건아까지 내외곽에서 상대 선수를 맹폭한 결과, KCC는 ‘KBL(한국농구연맹) 역대 최초 정규리그 5위 팀의 챔피언 결정전 우승’이라는 새 역사를 썼다. 하지만 2025-2026시즌에는 화려한 선수들의 이름값과 달리 성적은 너무 실망스럽다. 현재 리그 5위를 기록 중인 KCC는 올 시즌 국가대표 출신 가드 허훈과 장신 센터 장재석을 영입하고 역시 국가대표를 지낸 이승현을 트레이드로 내보냈다. 기존 멤버인 허웅과 최준용, 송교창에 허훈과 장재석, 숀 롱이 가세한 KCC는 ‘역대 최강’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았다. 올 시즌 KCC 지휘봉을 잡은 이상민 감독도 정규리그 우승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송교창, 최준용은 잦은 부상으로 밥값을 하지 못하고 있다. 숀 롱이 골밑과 외곽에서 분전하며 두 선수의 공백을 메우고 있는 상황이다. 이상민 감독은 “왜 우리 팀에 부상이 잦은지 나도 알고 싶다”며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슈퍼스타에 의존한 팀 구성으로 인해 주전을 받치는 벤치 멤버가 약하고, 수비 조직력이 취약한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KCC의 공격력은 10개 구단 중 최고 수준이다. 팀의 해결사 허웅은 지난달 2일 열린 서울 SK전에서 14개의 3점포를 꽂은 것을 포함해 51점을 터뜨렸다. KBL에서 국내 선수가 50점 이상을 넣은 건 허웅이 역대 세 번째다. 2004년 3월 7일에 당시 인천 전자랜드에서 뛰던 문경은(현 수원 KT 감독)이 원주 TG삼보(현 원주 DB)를 상대로 66점(3점슛 22개)을 쏟아부었다. 같은 날 울산 모비스(현 울산 현대모비스)의 우지원이 창원 LG전에서 70점(3점슛 21개 포함)을 뽑았다. 당시 문경은과 우지원은 3점슛 타이틀을 두고 경쟁 중이었다. 정규리그 마지막 날 동료들이 두 선수에게 3점슛 기회를 몰아주면서 비현실적인 득점 기록이 나온 것이다. 따라서 SK의 빡빡한 수비를 뚫고 51점을 꽂은 허웅이 역대 득점 1위라고 해도 무방하다. 지난 시즌 디펜딩 챔피언 부산 BNK도 지난달 5연패의 부진에 빠지며 우승팀다운 위용을 과시하지 못하고 있다. 2024-2025시즌 공수에서 탄탄한 조직력과 빠른 스피드를 자랑하며 리그 1위와 챔피언전 우승을 동시에 거머쥔 BNK는 올 시즌 리그 4위에 머물고 있다. 이 같은 부진의 원인은 수비 조직력의 약화와 높이의 열세 때문이다. 특히 팀의 센터 역할을 하는 변소정과 박성진, 김도연이 지난 시즌에 비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팀의 공수를 지탱하고 있는 베테랑 김소니아와 박혜진, ‘돌격 대장’ 이소희의 분전에 힘입어 길었던 5연패의 사슬을 끊어내고 플레이오프 진출의 희망을 살릴 수 있었다. 김소니아는 올 시즌 평균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며 득점 랭킹 10위권 내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또 리바운드에서도 개인 순위 10위권 내에 들며 팀의 중심을 확실히 잡고 있다.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활동량과 해결사 본능이 빛을 발하고 있다. 슈터 이소희의 성장세도 눈부시다. 이소희도 올 시즌 평균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리며 지난 시즌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팀의 승부처마다 맹활약하고 있는데, 김소니아와 박혜진이 집중 견제를 받을 때 외곽에서 터뜨리는 이소희의 득점포는 팀 공격의 혈을 뚫어주는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 BNK 박정은 감독은 “리바운드 등 높이에서 다소 약점이 있지만, 주전 선수 5명을 비롯해 벤치 멤버까지 원팀으로 이기는 모습을 항상 주문하고 있다. 코트에서 수비나 경기 조율 등 리더 역할을 해줄 수 있는 박혜진과 김소니아 같은 선수가 있다는 게 우리 팀의 믿을 만한 구석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슈퍼팀’ KCC와 강한 조직력을 자랑하는 BNK가 다시 한 번 기적의 역사를 쓸 수 있을지 주목된다.
[노트북 단상] 동물원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고?
부산 부모들에게 ‘동물원’은 애증의 단어다. 주말이면 아이 손을 잡고 유아차를 밀며 등산을 하듯 가파른 경사를 올라야 했던 부산진구 초읍에 있던 삼정더파크. 그 살벌한 경사도 때문에 유아차 옆에는 늘 시원한 음료가 상비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2020년 문을 닫았다. 최근 부산시가 이를 인수해 내년에는 문을 열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비싼 땅값과 좁은 부지라는 부산의 태생적 한계 속에 그나마 있던 공간도 규모와 시설 면에서 늘 아쉬움을 남겼던 것이 사실이다. 결국 부산의 부모들은 큰마음을 먹고 1박 2일 일정으로 용인 에버랜드행 고속도로에 오른다. 심지어 해외여행에서도 동물원을 보기 위해 하루를 온전히 소비한다. 대형 동물원 하나를 보기 위해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야 하는 이 비효율적인 풍경은 역설적으로 우리 지역이 처한 칸막이 행정과 정치적 불통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가까운 경남으로 눈을 돌리면 넓은 땅과 완만한 지형이 널려 있다. 하지만 ‘우리 시’의 예산이 ‘남의 도’에 쓰일 수 없다는 행정의 벽은 그동안 견고했다. 부산 사람은 즐길 곳이 없어 떠나고, 경남은 인프라를 채울 동력을 찾지 못하는 모순이다. 최근 부상한 행정 통합 논의가 단순히 정치적 수사가 아닌, 우리 삶의 실질적인 해법으로 다가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동물원 하나 제대로 짓지 못하게 가로막았던 그 낡은 벽, 그리고 정치적 자존심이라는 더 높은 벽을 허물자는 것이다. 문제는 최근 이 논의가 정치적 이해관계의 늪에 빠져 더 꼬이고 있다는 점이다. 메가시티 파기 이후 추진 중인 행정 통합은 지자체장들의 정치적 성향과 차기 대권·선거 셈법에 따라 온도 차, 속도 차가 극명하다. “누가 통합 지자체의 수장이 될 것인가” “어느 도시의 위상이 낮아질 것인가”를 두고 벌이는 소모적인 기싸움은 시민들의 실질적인 이익보다 우선시되고 있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부울경이 하나의 행정 구역처럼 움직인다면 자본을 한 곳에 집중 투입해 에버랜드 부럽지 않은 공간을 우리 곁에 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5극 3특의 본질은 이름 합치기가 아니라, 흩어진 자원을 모아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 수도권이라는 거대한 ‘원시티’에 대응할 체급을 키우는 결단이다. 실제로 수도권은 워낙 교통이 발달하고 인프라를 공유해 ‘니꺼 내꺼’의 개념이 지역에 비해 약하다. 경제 영역으로 넘어가면 통합의 절실함은 더욱 커진다. 설계는 부산에서, 건조는 거제와 울산에서 이뤄지는 조선업 생태계는 이미 행정 경계를 넘나든다. 이를 뒷받침할 광역 경제권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미래 모빌리티와 물류 산업에서도 수도권이 가질 수 없는 압도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이 거대한 설계도에서 우리가 견지해야 할 원칙은 ‘냉정한 선택과 집중’이다. 인구 감소 시대에 모든 지역을 똑같이 개발하겠다는 ‘N분의 1’ 방식은 결국 모두를 고사시킨다. 그러기에 냉정한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도록 이를 결정할 수 있는 다양한 권한의 이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다. 정치적 셈범이 시민의 일상을, 그리고 지역의 미래를 볼모로 잡아서는 안 된다. 부울경의 부모들이 넓은 공간에서 유아차를 한 손으로 밀며 여유롭게 ‘뜨거운’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날을 기대해본다.
[중앙로365] 전기가 곧 자본인 시대, 부산의 '에너지 경제학'
우리는 하루를 전기와 함께 시작한다. 스위치를 누르면 불이 켜지고, 밤새 충전된 스마트폰으로 아침을 연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흐르는 전기는 현대 문명을 지탱하는 가장 조용하고도 강력한 자원이다. 그러나 지금, 이 조용한 에너지가 도시의 위상을 바꾸고 산업 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 지난 1월, 정부는 그동안 지연되었던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의 이행을 공식화하며 신규 대형 원전 2기와 소형모듈원자로(SMR) 1기 건설을 확정했다. 유력 후보지로 거론되는 동해안 벨트는 이번에도 우리 부울경 인근이다. 지역 사회에서는 또다시 수도권을 위한 ‘전기 공장’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하지만 철저한 안전장치와 제도적 혜택이 전제된다면, 역설적으로 이 상황은 부산에 위기이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수도권의 현실을 볼 때,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하나가 필요로 하는 전력만 무려 15GW, 이는 원전 약 10기 규모와 맞먹는 수준이다. 전력 자급률이 60%에 불과한 수도권은 이미 포화 상태다. 송전 과정에서 사라지는 전력 손실 비용만 연간 1조 6000억 원에 달한다. 최근 대두되는 ‘수도권 원전 건설론’은 현 전력 공급 체계의 모순이 임계점에 다다랐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방증이다. 위험은 지방에 집중되고, 소비는 수도권에 몰리는 이 불균형한 전력 구조는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 최근 정부와 국회는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을 시행하며 “전기는 생산되는 지역에서 쓰이게 해야 한다”는 ‘지산지소(地産地消)’의 대원칙을 세웠다. 이에 따라 ‘송전 거리 비례 요금제(지역별 차등요금제)’ 도입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이는 단순한 요금 체계 변화가 아니다. 바야흐로 자본과 기술, 인재가 ‘싼 전기’를 찾아 이동하는 ‘에너지 경제학’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부산의 경쟁력은 명확하다. 단순히 전기가 남는 도시가 아니라,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전력 공급망을 갖췄다는 점이다. 지난해 지정된 ‘분산에너지 특화지역’은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한다. 특화지역 내에서는 ESS(에너지저장장치)를 활용한 유연한 전력 운영으로 산업용 전기요금을 실질적으로 낮출 수 있다. 특히 데이터센터에 필수적인 UPS(무정전 전원장치)를 대체할 ‘ESS 기반 구독형 서비스’는 기업의 초기 투자 부담을 크게 줄여준다. 자본 효율성을 중시하는 AI·플랫폼 기업에 이는 매우 강력한 유인책이다. 변화는 이미 숫자로 증명되고 있다. 현재까지 부산에 유치된 데이터센터 투자 규모만 12조 7000억 원에 달하며, 마이크로소프트 등 15개사가 부산을 선택했다. 여기에 대한민국 해저 광케이블의 90%가 연결되는 통신 인프라는 부산을 단순한 항구 도시에서 데이터가 흐르는 ‘글로벌 디지털 물류 허브’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풍부한 전력’과 ‘초고속 통신망’, 그리고 원전 인접 지역의 가격 경쟁력까지 갖춘 도시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더 큰 가치는 ‘전기의 양’이 아니라 ‘전기의 질’이다. 구글을 비롯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이제 24시간 끊김이 없는 ‘무탄소 에너지(CFE)’ 사용을 기업의 필수 조건으로 요구한다. 원전이라는 확실한 무탄소 기저 전원과 수소 에너지 인프라를 동시에 갖춘 부산은 최적의 대안이다. 깨끗하고 저렴한 에너지가 있는 곳에 데이터센터가 들어서고, 그 위에 AI·반도체 등 고부가가치 산업이 뿌리내린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지역 청년들이 머물며 성장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가 만들어진다. 이는 결코 부산만을 위한 주장이 아니다. 수도권 과밀에 따른 국가적 에너지 비효율을 해소하는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다. 전기가 있는 곳으로 산업이 이동하는 것은 정책 선택이 아니라 물리적 법칙이자 경제적 순리다. 이 순리를 따를 때, 부산은 수도권의 ‘대안’이 아니라 대한민국 산업 지도를 다시 그리는 새로운 성장 축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산업용을 넘어 주택용까지 포함하는 전면적인 차등요금제 논의에 속도를 내고, ‘지산지소’ 원칙 이행에 대한 흔들림 없는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이와 함께 거대한 에너지·산업 시스템을 운용할 혁신 인재 양성도 필수적이다. 이미 지역 대학들은 반도체·에너지 융합 전공 등을 운영하며, 산업 현장에 즉시 투입 가능한 실무형 인재를 배출하고 있다. 도시는 늘 선택의 결과로 만들어진다. 전기가 산업 경쟁력의 척도가 된 지금, 부산은 다른 도시들이 갖기 힘든 최고의 패를 손에 쥐고 있다. 수도권의 전력난이 심화할수록 부산의 전략적 가치는 더욱 분명해진다. 에너지의 흐름이 바뀌는 지금, 전력 다소비 기업들을 부산으로 이끄는 일은 필연적 선택이자 부산의 재도약을 위한 전략적 승부수다.
[편집국에서] 지역의사제의 한계
정부가 지역의사제 지원 자격을 내년부터 해당 지역 중학교 출신으로 제한하면서 의대를 노리는 학생과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또 한바탕 논란이 일고 있는 모양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27일 지역의사의 양성 및 지원 등에 관한 법률(지역의사양성법) 시행령 제정안에 대해 재입법 예고를 하면서 당초 2033학년도부터 적용하려던 중학교 소재지 요건 적용 시점을 2027학년도로 앞당겼다. 또 비수도권이었던 중학교 소재지 요건은 진학하려는 의대 소재 지역 및 인접 지역인 광역권으로 변경했다. 이는 중학생의 지방 유학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지적을 반영한 것이다. 지역의사제는 지난달 10일 정부가 의대 증원분을 전부 지역의사제로 뽑는다는 정책을 발표하면서 이슈로 떠올랐다. 제7차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는 지난달 10일 2027학년도부터 2031학년도까지 지역의료 강화를 위해 서울을 제외한 32개 의과대학 정원을 총 3342명, 연평균 668명 늘리기로 결정했다. 정부는 기존 의대 정원 3058명(2024년 기준)을 초과해 증원하는 인원은 모두 지역의사전형으로 선발한다. 지역의사제는 지역의료 붕괴를 막기 위한 것으로 등록금 등 정부 지원을 받고 졸업 후 지역 공공의료기관 등에서 10년간 복무하는 정책이다. 이로써 지역의사제를 둘러싼 정책 방향은 일단락된 셈이다. 의료계의 반발로 중단됐던 의대 증원이 결정된 점, 지역의료 붕괴를 막기 위한 지역의사제 도입 등은 정부의 결단으로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현재 지역의료의 문제점을 해결하기에는 너무나도 갈 길이 멀다. 좀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면 사실 개선 효과가 전무하다는 냉혹한 평가를 할 수밖에 없다. 의료 인력 공급 측면에서 살펴보면, 부산과 울산의 입장에서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이번 지역의사제의 혜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부산대, 동아대, 인제대, 고신대, 울산대 등 부산과 울산지역 의대를 졸업한 이들은 경남의 의료취약지역에 배치된다. 정부가 입법예고한 지역의사법 시행령안에 따르면 부울경 의과대학을 졸업하는 경우 의무복무지는 창원권(창원, 의령, 함안, 창녕), 김해권(김해, 밀양, 양산), 진주권(진주, 사천, 남해, 하동, 산청), 통영권(통영, 거제, 고성), 거창권(함양, 거창, 합천) 등이다. 경남지역에서는 직접적인 인력 공급 효과가 나타나 도움이 되겠지만, 문제는 10년간 의무복무를 마친 이후다. 경남 내에서도 창원, 김해, 진주 등 일부 대도시에만 의사들이 몰려들 가능성이 높다. 결국 군·농어촌 등 최말단 지역은 여전히 의료취약지역으로, 의료 공백이 남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필수 의료의 개선 정책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부산과 경남은 소아과 진료 대란, 산부인과 분만 대란, 응급실 뺑뺑이 등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외과, 응급의학과 등 생명과 직결된 필수과 의료 인력 부족이 항상 문제로 지적돼 왔다. 지역의사제 혜택을 받는 경남지역조차도 지역의사제 도입만으로는 필수의료 인력 부족을 해결할 수 없다. 현재처럼 지역의사제가 지역 의무복무 10~12년을 유지하는 한, 즉 전공 선택을 강제하지 않는 한 인기 과목 쏠림은 계속될 것이고 필수과 의료 공백은 그대로일 수 있다. 지역의사제의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단기적 인력 공급 대책에 대해서도 의문이다. 이들이 의사면허를 취득하기까지 통상 10년의 교육기간이 필요한데, 당장의 의료 공백 해결에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지역의료 공백의 본질은 의사 수의 부족과 필수 의료 인력의 부족이다. 지역의사제 도입으로 일정 부분 의사 수의 부족을 메운다 해도, 그 절대 인력은 여전히 부족하다. 성형외과, 피부과 등 인기과의 포화로 인해 필수과로 넘어가는 ‘낙수효과’를 기대하기에는 그 수가 턱없이 적다. 특히 지역의사제가 필수 의료과로의 강제 선택을 요하지 않는 이상 필수 의료의 공백도 메우기 힘들다. 결국 문제 해결의 핵심은 의사 수의 대폭 확대와 필수의료의 수가 인상인데, 의사 수의 확대는 의료계의 반발을 부르고, 의료수가 인상은 국민건강보험기금의 고갈을 불러온다. 하지만 의사 수가 대폭 늘어나 경쟁이 치열해지면, 필수과로의 낙수효과는 커질 것이며 지금 같은 고소득을 보장할 수 없게 돼 장기적으로 인재가 의대에만 쏠리는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지역의사제의 성공을 위해서 정부는 하위법령 개정 등을 통해 좀 더 촘촘하고 구체적인 대책을 제시해야 하고, 나아가 지역의료의 붕괴를 막기 위한 본질적인 부분을 고민해야 한다. 의료 개혁은 이제 시작이다. 그동안 의료계의 눈치 보기에만 급급해 미봉책으로 때웠다면, 여러 분야에서 개혁이 진행되는 지금, 지금이야말로 의료 개혁의 출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최세헌 편집국 부국장 cornie@busan.com
인증샷 찍는 데만 20분 “여긴 금정산 고당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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