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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평화가 손실인 사람들

[밀물썰물] 평화가 손실인 사람들

기원전 1세기 로마에는 누군가의 집에 불길이 치솟으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사내가 있었다. 로마 최고의 부자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다. 그는 노예 500여 명으로 꾸린 사설 소방대를 거느렸으나, 화재 진압비를 미리 낸 사람의 불길만 잡았다. 그렇지 않은 이의 집은 팔짱 낀 채 지켜만 봤다.한술 더 떠, 발을 동동 구르는 집주인에게 크라수스는 흥정을 걸었다. 집을 헐값에 넘기면 그제야 물을 뿌렸고 버티면 내버려뒀다. 잿더미가 된 부지는 시세보다 싸게 사들여 새 집을 올린 뒤 세를 놓았다. 집터를 팔지 않고 제 손으로 집을 다시 짓겠다는 이에게는 비싼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줬다. 로마 시대 역사가인 플루타르코스는 저서에서 크라수스의 이런 방식을 ‘타인의 재난으로 배를 채우는 탐욕’이라 꾸짖었다.미국과 이스라엘이 지난 2월 28일 이란을 공습한 이후 중동의 포성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휴전을 놓고 정치적 줄다리기가 계속되는 사이 인명 피해는 불어난다. 이란 법의학청은 지난 12일(현지 시간) 수습한 시신 3375구의 신원 확인을 마쳤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어린이를 포함한 18세 이하 미성년자만 383명이다. 미처 수습하지 못한 시신과 레바논 등 인접국 피해까지 고려하면 최소한의 수치다.그사이 지구 반대편에서는 ‘쩐의 전쟁’이 벌어진다. 세계 최대 예측시장 플랫폼 ‘폴리마켓’엔 전쟁의 향방을 두고 수십억 달러어치 베팅이 오간다. 미국의 이란 공습 날짜, 이스라엘의 이란 내 핵시설 공격 여부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이란에서 실종됐던 미군 조종사의 구조 시점이나, 핵무기 사용 예측까지 등장했다가 들끓는 비난에 중단하기도 했다. 실제 돈이 걸리는 만큼 여론조사보다 솔직하고 정확하다는 평가도 있다. 양대 예측시장 플랫폼인 폴리마켓과 '칼시'의 합산 기업가치는 약 420억 달러, 한화 58조 원대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그러나 자본의 인정이 옳고 그름의 잣대가 될 수는 없다. 전쟁에 돈을 건 사람에게 전쟁은 비극이 아니다. 조속한 종식과 평화는 곧 손실이다. 베팅 참여자가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의 집단 윤리는 마모된다. ‘디지털 크라수스’가 자신의 성공 확률을 높이려 정보 조작과 여론 호도를 서슴지 않으리란 우려는 지나친 것인가. 미국 의회는 사망이나 전쟁 관련 베팅을 금지하고 공직자 참여를 막는 법안을 초당적으로 발의한 상태다. 다른 사람의 비극을 비극으로 받아들이는 것. 우리가 문명인임을 자처한다면 마땅히 지켜야 할 선이다.

부산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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