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홍수’ ‘흑백요리사2’ 넷플릭스 비영어권 1위
한국 영화 ‘대홍수’와 예능 시리즈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2’가 2주 연속 넷플릭스 비영어권 부문 정상에 올랐다.31일 넷플릭스 공식 사이트 투둠에 따르면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2’는 지난주 TV쇼 비영어 부문 1위를 기록했다. 시청 수는 470만으로 집계됐다. 한국을 비롯해 홍콩, 싱가포르, 대만 등 4개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 뉴칼레도니아와 아랍에미리트(UAE),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 16개국에서도 톱10에 이름을 올렸다.이 프로그램은 미슐랭 등으로 공인받은 스타 셰프 ‘백수저’와 실력파 무명 셰프 ‘흑수저’의 대결을 그린다. 시즌1이 한국 예능 최초로 3주 연속 넷플릭스 비영어 쇼 1위를 기록한 데 이어 시즌2도 공개 후 연속 1위를 지키고 있다.영화 ‘대홍수’는 영화 비영어 부문 1위를 이어갔다. 지난주 시청 수는 3310만으로, 공개 첫 주(2790만)보다 상승했다. 한국을 포함해 브라질, 멕시코, 싱가포르, 태국 등 53개국에서 1위에 올랐고, 92개국에서 톱10에 포함됐다. 이 작품은 대홍수가 덮친 지구의 마지막 날을 배경으로 한 SF 재난물이다. 김다미와 박해수가 주연을 맡았다.이밖에 이준호 주연 ‘캐셔로’가 TV쇼 비영어 2위, ‘키스는 괜히 해서!’ 3위, ‘아이돌아이’ 6위, ‘자백의 대가’ 9위 등 한국 콘텐츠 다수가 상위권에 포진했다.
'함께 가는 저녁길'·'톰과제리' 성우 송도순 별세…향년 77세
라디오와 TV를 넘나들며 청량한 목소리로 사랑받은 성우 송도순 씨가 별세했다. 향년 77세. 1일 연합뉴스 등에 따르면 고인은 전날인 지난해 12월 31일 오후 10시께 서울 건국대병원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전했다. 1949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고인은 중앙여고를 거쳐 중앙대 연극영화학과를 중퇴했다. 대학생 때인 1967년 동양방송(TBC) 성우 3기로 입사했다. 1980년 언론통폐합 후 KBS에서 성우로 활동했다. '산다는 것은', '사랑하니까', '달수 시리즈', '간이역' 등 방송 드라마에도 출연했다. '싱글벙글쇼', '저녁의 희망가요', '명랑콩트' 등을 진행하기도 했다. 또 MBC 만화영화 '톰과 제리'의 해설을 맡아 독특한 목소리톤으로 이름을 알렸다. 미국 애니메이션인 '톰과 제리'는 국내에선 1972년 '이겨라 깐돌이'라는 제목으로 첫 방영됐고, 1981년부터 '톰과 제리'라는 제목으로 전파를 탔다. 다양한 버전 중에서도 고인이 해설한 버전이 가장 유명하다. 만화영화 '101마리 달마시안', '내친구 드래곤' 등에도 목소리를 남겼다. 교통방송(TBS) 개국 후에는 1990∼2007년 성우 배한성 씨와 함께 '함께 가는 저녁길'을 17년간 진행하면서 '똑소리 아줌마'라는 별명도 붙었다. '세바퀴', '공감토크쇼 놀러와' 등 TV 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했다. 2015년 한국관광 명예홍보대사를 맡았다. 배한성, 양지운씨 등과 함께 스페셜스피치아카데미(SSA)를 개설해 원장으로 일했다. 1975년 대한민국 방송대상 라디오부문 대상, 2020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유족은 남편 박희민 씨와 아들 박준혁(배우)·박진재(스포티비 근무) 씨, 며느리 채자연·김현민 씨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3호실(1일 오전 10시부터 조문 가능), 발인 3일 오전 6시20분.
'천만 계보' 끊긴 한국 영화, 명예 회복 주인공은 누구?
지난해는 K컬처가 전 세계를 상대로 맹위를 떨친 한 해였다. 하지만 영화산업만 놓고 보면, 2025년은 우려하던 암흑기를 현실로 받아들여야 했던 해로 기억될 듯하다. 우선 코로나 팬데믹 기간 2년(2020~2021년)을 제외하곤 2012년 이후 이어지던 ‘천만 영화’ 계보가 끊겼다. 극장을 찾은 관객은 2019년(2억 2667만 명)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억 520만 명에 그쳤다. 한국 영화는 4333만 명을 불러들이며 점유율 41%에 머물렀다. 흥행 1, 2위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주토피아 2)과 일본 애니메이션(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 차지했다. 한국 영화 1, 2위 ‘좀비딸’(564만 명)과 ‘야당’(338만 명)은 전체 3위와 8위에 자리했다. 기대를 모았던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과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는 각각 9, 10위로 톱 10에 포함된 걸로 만족해야 했다. 2026년, 한국 영화는 어둠의 터널을 뚫고 비상할 수 있을까. 새해 첫날, ‘천만 부활’을 꿈꾸는 후보작들을 살펴보며 기대를 걸어보는 건 어떨까. 2026년 최고 기대작으로는 우선 나홍진 감독의 ‘호프’가 손꼽힌다. 화제작 ‘곡성’ 이후 10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으로 황정민과 조인성, 정호연 등 출연 배우부터 눈길을 끌어당긴다. 해외에서 인지도가 높은 감독답게, 마이클 패스벤더와 알리시아 비칸데르 등 할리우드 스타까지 가세해 기대감을 높인다. 비무장지대 인근의 고립된 항구 마을에 미지의 존재(외계인)가 목격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SF 스릴러물이다. 국내 영화 사상 가장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작품으로 7월 개봉이 예상된다. 류승완 감독의 ‘휴민트’는 설날 연휴를 앞둔 2월 11일 개봉을 일찌감치 확정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배경으로 첩보원들이 격돌하는 액션 드라마로 조인성과 박정민, 박해준, 신세경 등이 연기 대결을 펼친다. ‘밀수’(2023)로 514만 명, ‘베테랑’(2024)으로 752만 명을 동원한 류 감독 자체가 흥행 보증수표. 코로나 팬데믹 기간 개봉한 ‘모가디슈’(2021)조차 361만 명을 극장으로 이끈 그의 티켓 파워를 생각하면, 새해 첫 천만 영화에 가장 근접한 작품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K좀비영화의 탄생을 알린 ‘부산행’(2016)으로 ‘천만 감독’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연상호 감독의 신작 ‘군체’도 기대작으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381만 명의 관객을 모은 ‘반도’(2020) 이후 6년 만에 내놓는 작품으로,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창궐한 후 감염자들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진화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암살’(2015) 이후 11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하는 전지현을 비롯해 구교환, 지창욱, 신현빈, 김신록 등이 출연한다. 연 감독이 주특기인 좀비영화로 다시 재미를 볼지 기대를 안고 지켜볼 일이다. 설날 흥행을 겨냥한 사극 ‘왕과 사는 남자’에도 눈길이 간다. 장항준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유해진, 유지태, 전미도, 박지훈, 박지환, 안재홍 등이 출연한다. 조선 왕위에서 폐위된 단종과 마을 부흥을 위해 단종의 유배지를 자처하는 촌장의 사연을 그린 영화다. 2월 4일 개봉을 알렸다. 이밖에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 2’와 최국희 감독의 ‘타짜: 벨제붑의 노래’도 전작의 흥행 기운을 계승하려는 바람으로 제작 중이다. 올해 개봉이 목표지만, 개봉 여부와 시기는 유동적이다.
[알림] 2026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단편소설 : 여기서 누군가 윤현준(27·경기도 남양주시) ■시 : 셰어 하우스 박은우 (55·대전시 대덕구) ■시조 : 방아쇠 수지 최애경 (56·경북 포항시) ■아동문학(동시) : 엄마의 머그컵 류한월(54·충북 제천시) ■희곡 : 홀드 김재은(32·서울시 동대문구) ■평론 : 실존의 침묵에 맞서는 재현의 윤리 김형식(39·서울시 영등포구) 심사위원 ※시상식:1월 8일 오후 4시 부산일보사 10층 대강당 ◇ 단편소설 : 조갑상 정홍수 정영선 서정아 김경연 ◇ 시 : 김경복 신정민 ◇ 시조 : 정희경 ◇ 아동문학 : 박선미 안미란 ◇ 희곡·시나리오 : 김문홍 김지용 ◇ 평론 : 하상일
[2026 신춘문예] 내 문장이 너에게 닿기를… 다시 ‘문학의 시대’
2026 부산일보 신춘문예에는 사상 최다 작품이 접수됐다. 전반적으로 수준이 고르게 우수했고, 치열하게 쓴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분야별 최종 심사에 오른 작품들은 심사위원들이 격론을 벌일 정도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2026 부산일보 신춘문예 선정작은 “당장 무대에 올리거나 출간해도 될 정도”라는 호평이 나올 만큼 수준이 높았다. 6개 부문 당선자는 20대가 1명, 30대가 2명, 50대가 3명으로 연령대도 고른 편이었다. 부산일보 신춘문예를 거쳐 이제 막 문단에 정식 데뷔한 6명의 당선자를 만나 그들의 문학 이야기를 들었다. 시 - 박은우 “세상의 가능태 상상하고 나의 언어가 가능의 영토 누추하게 만들지 않게 노력” 시 부문은 응모작 수로만 따지면 매년 독보적인 1등이다. 그 치열한 경쟁에서 50대 박은우 씨가 영광의 자리를 차지했다. 시를 좋아하던 독자였던 그는 어느 순간 내가 직접 써보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박 씨는 “처음엔 수사가 과하고 감정이 넘쳤다. 그게 멋있는 글이라 착각했다. 그러다 나만의 사유를 담지 않고서는 기성품과 다를 것과 없다는 걸 깨달았다. 기꺼이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라고 고백했다. 이번 신춘문예는 마감 하루 전에 겨우 접수했는데, 1년 내내 머릿 속에 맴돌던 문장 몇 개를 정리해 시로 완성했기에 속이 후련한 기분이었다. 박 씨는 “세상의 가능태를 상상하고 나의 언어가 그 가능의 영토를 누추하게 만들지 않도록 애쓰겠다”라며 앞으로의 계획조차 시의 한 문장처럼 밝혔다. 단편소설 - 윤현준 “참사 기록하고 표현하며… 슬픔 애도”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님 되기 목표로 소설 당선자 윤현준 씨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했다. 스무 살 때부터 일 년에 수십 편의 습작을 쓸 정도로 글쓰기에 빠졌다. 윤 씨는 “여전히 안타까운 참사가 이어지는데 사람들이 모르는 것 같아 슬펐고, 그것들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것이 슬픔을 애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더불어 “누군가에게 새겨지는 밑줄 친 문장이 자신의 것이라면 보람찰 것 같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앞으로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시조 - 최애경 “굽은 등 수선사 보며 세월 흔적 느껴 정형 속에서 적확한 단어 찾는 희열” 시조 당선자 최애경 씨는 많이 참고, 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눈치 안 보고 말할 수 있는 수단이 글이었고, 글을 쓰며 혼자 대화하는 게 익숙한 버릇이 되었다. 당선작 ‘방아쇠 수지’는 남편의 손가락 수술에서 출발했다. 마침, 시장 뒤 수선실에서 굽은 등의 수선사를 보며 노동의 고단함, 세월의 흔적을 느꼈고 이번 작품이 탄생했다. 최 씨는 “시조의 매력을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정형의 틀이 있어 처음에는 생소하고 힘들게 느껴지지만, 오히려 정형 속에서 적확한 단어를 찾는 순간 환희와 희열이 크다. 시조만이 갖는 품격도 있다”라고 강조했다. 부산일보 시조 당선 소식을 듣고 며칠 후 다른 작품으로 중앙지 신춘문예에도 당선돼 2관왕이 되었다. 최 씨는 “내가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작품을 부산일보에 보냈다. 그 어떤 곳보다 부산일보에 꼭 당선되고 싶었다. 그래서 당선 소식을 듣는 순간 눈물이 났다”라고 전했다. 딱 하루만 기뻐하고 계속 정진하겠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올해 아동문학은 동시에서 탄생했다. 동시 - 류한월 “아이처럼 돌멩이도 다시 보는 법 배워” 매일 동시 하나 쓰는 성실한 기록자 꿈 동시 당선자 류한월 씨는 50대 후반으로 소프트웨어를 설계하는 전문가로서 현재도 1인 기업의 대표를 맡고 있다. IT업계 칼럼을 10년 이상 게재하고 있을 정도로 IT와 글쓰기 두 분야를 자유롭게 오간다. 문학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고 오직 독학으로 시작하다 보니, 류 씨는 장르의 구분 없이 문학의 모든 장르가 그저 글쓰기로 다가왔다. 중앙지 신춘문예에 시조로 당선된 적이 있고, 시와 수필로 지역의 크고 작은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동화를 출간한 적도 있다니 그야말로 장르를 가리지 않는 작가인 셈이다. 류 씨는 “공원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어른은 목적지만 보고 걷지만, 아이들은 돌멩이도 본다. 다시 돌멩이를 보는 법을 배우자 싶어 동시를 쓰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류 씨는 이어 “동시를 쓰려면 무릎을 굽혀야 한다. 개미의 눈과 마주하려면 땅에 엎드려야 하고, 꽃의 향기를 맡으려면 고개를 숙여야 한다. 끊임없이 오르려 하는 세상의 속도와 반대로 아래를 보고 멈춰 서서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 그게 바로 동시의 매력이다”라고 소개했다. 거창한 계획보다 매일 아침 일어나 물 한 잔을 마시고, 매일 하나의 동시를 쓰는 성실한 기록자가 되고 싶다는 계획을 밝혔다. 희곡 - 김재은 “글로 끝나지 않고 재창조 거쳐 ‘재미’ 내 희곡 직접 무대 올리는 날 기다려” 30대 초반의 프리랜서 공연제작 프로덕션 매니저(PM)로 연극 현장을 늘 지키던 김재은 씨는 올해 희곡 부문 당선자가 됐다. 심사위원들이 이 씨의 희곡에서 연극의 흐름과 무대의 특성을 잘 아는 현장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했는데, 역시 그랬다. 워낙 어릴 때부터 다양한 장르의 책을 좋아했고, 고등학교를 문예창작과로 가면서 자연스럽게 글쓰기를 시작했다. 김 씨는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고, 보고 싶은 세상이 많았다.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글로 표현하게 됐다. 졸업 후 공연 현장에 뛰어들었지만, 틈이 날 때마다 글을 쓰며 내 인생의 일부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장애인 댄스스포츠 영상을 보다가 뭔가 가슴에 뜨거운 감정이 올라왔고, 이번 작품에 그 감정을 담게 되었다고 한다. 김 씨는 “희곡은 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다. 연출 스태프 배우를 거쳐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고, 같은 대본이어도 연출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재창조 과정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다”라고 밝혔다. 자신이 쓴 희곡을 직접 무대에 올리는 날을 기다리며 계속 글쓰기를 이어 나갈 계획이다. 평론 - 김형식 이론·현실 자유롭게 오가기 마음 뺏겨 “글쓰기는 세계·타자와 소통하는 수단” 올해 평론 분야 당선자 김형식 씨는 30대 후반으로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글 쓰는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조금 늦은 출발인 것 같다고 말하는 그는 특히 이론과 현실,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자유롭게 오가는 평론에 온 마음을 빼앗겼다. 김 씨는 “나에게 글쓰기는 세계와 타자와 닿고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다. 글을 통해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다”라고 전했다. 그에게 신춘문예는 애증 같은 존재이다. 2016년 신춘문예에 도전했지만, 최종 심사에서 탈락했고 이후 이런저런 이유로 글쓰기를 하지 않았다. 지난해 다시 도전을 시작했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보고 난 후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쓴 글이 당선작이다. 김 씨는 “영화 평론의 매력은 동시대적 글을 쓸 수 있다는 점이다. 동시대적 평론가는 무엇보다 현재의 기대를 살피며 과거의 부름에 응답하는 사람이다. 과거로부터 새로운 자원과 물을 길어 올려 현재를 성찰함으로써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사람이다”라고 소개했다. 평론에 관해 확실한 자신의 철학이 있었다. 2026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은 오는 8일 오후 4시 부산일보 10층 대강당에서 열린다. 시상식 현장에선 당선자들의 소감을 직접 들을 수 있다.
[2026 신춘문예-희곡] 홀드 / 김재은
등장인물 김지우 이수현 그 외 #모든 인물은 ‘김지우’의 입을 빌려 이야기한다. 공간 가상의 공간. 지우의 무의식의 세계와도 같다. 지우의 이야기에 따라 학원이 되기도, 대회장이 되기도, 병원이 되기도 한다. 프롤로그 어둠 속에서 작게 음악이 흘러나온다 에스파냐 카니(Espana Cani) 점점 음악은 커지고 이곳을 한가득 채울만큼 음악 소리가 가득하다 음악에 맞춰 발소리가 들린다 천천히, 희미하게 조명이 들어오면 무대 중앙에서 춤을 추는 사람이 있다 파소도블레(Pasodoble) 희미한 빛 사이로 보이는 그는, 투우사의 강렬한 움직임이다 * 지문은 〈 〉 안에 표기. 1장 다들 뻔한 이야기를 좋아하죠. 나도 뻔한 이야기를 하나 알고 있습니다. 꿈을 꾸며 매일 하루에 열 몇 시간씩 연습하던 아이가 불의의 사고로 인해, 꿈을 포기하고 마는 그런, 슬프고 ‘뻔한’ (강조하는) 이야기말이에요. 다들 그 아이를 떠올리며 눈물을 감추겠죠. 그러나 다행히도 아이는 꿈을 놓치지 않았고, 재활에 성공하여 결국은 꿈을 이루고 마는거죠! (박수) 맞아요, 이런 뻔한 굴곡이 있는 해피엔딩을 모든 사람들은 다 좋아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아니에요. (사이) 나는 꿈을 포기한 아이거든요. 〈바지를 걷어 올려 상처를 보인다〉 불의의 사고로 인해 꿈을 포기한 아이, 네, 그게 바로 접니다. 이야기의 아이처럼 전 재활에 성공하지 못하였고, 꿈도 미래도 다 놓아버렸어요. 극복하지 못했죠. 다쳤지만 주변 사람의 도움으로 어쩌구저쩌구 블라블라 희망을 잊지 말자!하며 밝고 희망차게 다시 살아가기엔… 난 너무 힘들어요. (사이) 와! 힘들다는 말을 입밖으로 내뱉어 본지가 얼마만인지… 힘들다! 힘들다! 나는 말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내기가 너무도 힘들고 벅찹니다. 〈그대로 바닥에 누워버린다. 한참이나 말이 없다〉 이렇게 가만히 누워있다 보면 어느 순간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E(이펙트)/ 지우야, 일어나, 우리 함께 춤추자! 지우야, 일어나, 우리 함께 춤추자! (환청과 동시에, 그리고 이내 크게 소리내어 웃어버린다) 그래요, 미친거죠! 미쳐버리고 만거에요! (벌떡 일어나) 아아, 불쌍한 우리 엄마아빠. 다 큰 자식이 돈도 못 버는 주제에 환청까지 듣는 미친놈이라니… 불쌍한 내 가족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세요. 전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거든요. 〈자조적으로 웃는다.〉 (엄마를 흉내내며) 김지우! 언제까지 그렇게 누워 있을래?! 엄마아빠 죽는꼴 보고 싶어서 그래?! 그러면 저는 손을 싹싹 빌면서 말해요, 죄송해요, 엄마. 그치만… 그치만 엄마아빠보다 제가 먼저 죽지 않을까요? 〈정적〉 아, 농담이에요, 농담! 살기 벅차긴한데 아직 죽을 생각은 아니에요. 물론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일단 지금은 아니에요. (사이) 사실 여기까지 얘기하면 다들 도망칠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네요. 다들 제 이야기가 궁금한 걸까요? 꿈을 잃고 도망친 아이의 이야기요. 행복도 없고 즐거움도 없을 텐데, 다들 끝까지 도망가지 않으시려나요? 〈아예 몸을 일으킨다〉 그럼 다들 기다리던 제 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요? 〈뒤돌았다가 다시 객석을 바라보며,〉 여기는 구청입니다! 내가 아주 애기였던 시절이죠. 아마도 8살? 9살? 그 정도로 어리고 한창 귀여웠을 때에요. 그때, 엄마는 날 데리고 구청에 가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좋아한다?라고 말하기는 조금 애매할 지도 모르겠어요. 얘가 흥미로워 하는 것이 있나, 알아보기 위해 갔다고 말하는 게 더 확실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엄마는 늘 나를 데리고 구청을 갔고, 온갖 수업을 보게 했습니다. 엄마는 이것저것 보여주며 말해요. 지우야, 이거 어때? 지우야, 수영도 배워볼까? 테니스 같이 쳐볼래? 뜨개질도 있네~ 그러면 전 땡깡을 부리죠. (어린아이 목소리로) 아, 싫어! 물 무서워서 싫어! 공 무서워! 내가 고양이도 아니고 실 가지고는 안 놀아! 다 싫어, 싫어! 안 해! 집 갈 거야! 엄마는 나를 데리고 몇 날 며칠을 구청에 오고 갔지만, 매우 불행하게도 내가 흥미로워 하는 것을 찾아주지는 못 했어요. 바로 그때였죠. 〈음악 Let‘s Get Loud - Jennifer Lopez〉 음악 소리가 들렸어요. 아세요? Let’s Get Loud라는 노래인데. 네, 지금 들리는 이거요. 이 노래가 들리는 곳으로 홀린 것처럼 갔어요. 노래가 흘러나오는 곳을 들여다보니까 댄스스포츠 수업을 하는 곳이더라구요. (어린 목소리로) 엄마! 이거! 이거! 나, 이거! 저 누나들처럼 반짝이는 옷 입고 휙휙 할래! 그렇게 저는 댄스스포츠를 배우게 됐습니다. 2장 혹시 이 노래에 대해서 아시나요? 음악을 틀고 신나게 즐기라는 내용입니다. 아주 가사와 음악이 딱 들어맞죠. 이토록 신날수가 없다니까요? 〈노래 가사를 흥얼거린다〉 Ain‘t nobody gotta tell ya What you gotta do If you wanna live your life Live it all the way and don’t you waste it Every feelin’ every beat Can be so very sweet you gotta taste it 모든 감정과 모든 리듬을 맛보고 즐기라고 말하죠. 인생을 온전히 즐기며 살라고 말해요! 네! 그래서 전 즐기기로 했습니다. 〈댄스스포츠 구두를 꺼내 신는다.〉 정말 태어나 처음 신어보는 신발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랬겠죠. 8살이 무슨 이런 구두를 신어봤겠어요? 이 낯설고 어색한 신발을 신고 저는 엉거주춤 서있었어요. 저 빼고 다 여자였거든요. 전 제가 여자화장실에 잘못들어온줄 알았습니다. 오버라고요? 아뇨! 정말 그 정도였어요! 강의실에 엉거주춤 서있는데 선생님이 나타났어요, 자, 다들 신발 갈아 신었죠? 기초부터 시작할게요~! (박수치며) 원 투, 쓰리 아 포! 원 투, 쓰리 아 포! 전 정말이지 그 어떤 말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저는 바보처럼 되묻고 말았죠. 에? 하지만 선생님은 제 되물음을 못들은게 분명했어요. 또 다시 박수를 치면서 말했거든요. 자세 흐트러지지 않게~! 원 투! 원 투! 정말 미쳐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저 빼고 다들 선생님 박수 소리에 맞춰서 몸을 움직였거든요. 원 투 원 투에 맞춰서 바쁘게 발과 손을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는 한층 더 바보처럼 서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에? 어쩌면 난 맞지 않는 수업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수 소리에 맞춰서 정신이 혼미해졌고 눈앞이 깜깜해지고… 울고 싶은 마음이 극도로 다달았을 때,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어요. 지우학생, 잘 따라오고 있나요~? 선생님이 멍청하게 서있는 절 그제야 발견한거에요! 저는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니요… 제 말에 모두가 절 쳐다봤어요. 쥐구멍이 있었더라면 전 바로 거기로 도망쳤을 거에요. 선생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제 옆에 서주었어요. 자, 선생님을 보고 잘 따라오면 되는거에요~ 원 투! 원 투! 원 투? 원 투? 네, 그래요. 전 몸치인게 분명해요. 그러지 않고서야 한 동작 한 동작 끊어서 설명해주는 것을 못 따라할리가 없으니까요. 선생님의 인내심은 그리 길지 못했어요. 이제와 생각해보면,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기에는 너무 짧은 인내심이었어요. 장난하지 말고 따라와야지, 원 투! 원 투! 내 첫번째 선생님은 그다지 친절한 타입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절 바라보았고, 답답해 죽겠다는 말투로 친절하게 설명해주었어요. 〈손을 들어 자세를 잡으며, 좀 전과는 달리 프로페셔널한 자세로〉 자, 기본 자세부터 갈게요. 왼손 들어 파트너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파트너의 허리를 잡는 거예요. 파트너가 있다고 상상하고 손을 취해볼게요. 발은 무게 중심 오른쪽~ 왼발은 펴서 포인트! 이게 기본 자세에요. 멋져요! 〈잠깐의 멈춤〉 멋지다? 그치만 너무 불편했어요. 선생님! 너무 자세가 불편해요! 제가 말했어요. 네, 그게 맞아요. 지금 자세 이뻐요~ 선생님은 말했어요. 자세는 이쁘다며 그대로 움직이면 된다고 했어요. 맞는 말이에요. 댄서의 자세가 불편해야 우아하고 아름다운 동작이 나오더라구요. 물론, 그때의 나는 그냥 불편만 했죠. 우아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이상한 움직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죠. 곧 선생님은 발을 움직이며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와! 진짜 멋졌어요! 〈기본 동작을 보여준다〉 선생님은 말해요. 한쪽 다리를 뒤에서 앞으로 옮기면서, 이게 기본 동작이에요. 왼쪽 다리를 가볍게 들고, 엄지발가락부터 천천히 내리는 거에요. 내리는 게 원! 오른발 누르고 왼발 떼면서 투! 체중은 옮기지 않아요, 중심 그대로! 상체 움직이지 말고! 원 투! 원 투! 왼발을 옆으로 옮기고, 오른발 따라가고, 왼발 옆으로 옮기면, 쓰리 아 포! 다시 체중을 오른발로 옮기면서, 왼발 끌어오고, 오른발 옮기면, 쓰리 아 포! 선생님은 일타강사였고, 저는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이었을 뿐이에요. 박수 소리는 끊임없었어요. 원 투 쓰리 아 포! 쓰리 아 포! 원 투 쓰리 아 포! 쓰리 아 포! (박수) 꿈에도 나오더라니까요? 지우학생, (박수) 원 투 쓰리 아 포! (박수) 분명 재밌어 보여서 들어간건데 꿈에도 나오는게 맞나요? 그건 아름다운 꿈이 아니라 악몽 그 자체였죠. 박수 소리는 절 따라왔고, 전 박수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을 향해 도망가다가 깨고는 했죠. 그 박수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릴거 같을때쯤, 그 아이를 만났어요. 아니 보게 되었어요. 이수현. 그 아이는 정말 빛나는 사람이었어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빛나게 춤을 추고 있었거든요. 8살 조그마한 소년의 마음에 불을 지른 거죠. 그 빛나는 아이는 소년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한순간에 사라져버렸어요. 선생님한테 물어보니, 수현이? 이사갔단다, 거기서도 계속 댄스스포츠를 배울거라고는 했는데 아쉬운 인재야, 라고 했습니다. 소년의 마음에 불을 질렀으면 끝을 봐야할거 아니에요? 그 뒤로는 아주 음침한 마음으로 댄스스포츠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래요. 맞아요. 네. 이수현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었죠. 3장 취미가 업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아이를 만나기 위해 댄스스포츠를 그만 둘 수가 없었어요. 나와 그 아이의 공통점이라고는 오로지 이것뿐이었으니까요. 인정할게요. 나는 공부보다 댄스스포츠를 잘했습니다. 엄마도 그것을 알았기에 저에게 늘 말했어요. 지우야, 전문적으로 배워보는게 어떻겠니? 엄마가 학원 알아봤어, 예중은 늦었으니 예고부터 도전해보자. 사실 썩 내키지는 않았습니다. 예술을 업으로 사는건 그렇게 괜찮은 일 같아보이지 않았거든요. 너무도 힘들고 고된 일처럼 보였어요. 몇몇만 성공해서 있어보이는 거. 그게 예술 아니겠어요?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나는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었고, 할 줄 아는 거라곤 댄스스포츠 뿐이었습니다. 취미반에서 입시반으로 반을 옮긴건 단순히 그 이유였습니다. 공부에는 답이 없는 거 같으니까. 운명. 이건 운명이었습니다. 운명이 아니고선 이걸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안녕? 이수현이었어요. 저에게 안녕?하고 인사해준건 수현이었습니다. 너무 놀라고 당황하고... 뭐라고 표현하지도 못하고 굳어 버렸기에 저는 바로 인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진짜 멍청이처럼 어버버거리다가, 어...어 안녕, 하고 말했어요. 내 바보 같은 인사에 수현이는 웃었어요. 젠장! 진짜 말도 안되게 이뻤어요. 이걸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등신 같지만 이쁘다는 말 말고는 그걸 나타낼 말이 없었어요. 그 아이는 여전히, 여전히 빛나고 있었어요. 첫눈에 반했던거 같은데, 또 다시 반할 수가 있는 걸까요? 너... 너 파트너 있어? 없으면 나랑 파트너 할래?! 바보 같죠? 알아요, 바보 같은 거. 근데 어쩔 수 없었어요. 나도 모르게 터져나오듯이 말을 뱉어버리고 만거에요. 게다가 삑사리까지 났죠. 그 아이 앞에서 난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했고, 저절로 떠들어대는 이 저주받은 입을 막을 수가 없었거든요. 나 이번에 이사와서 파트너 없는거 어떻게 알았어? 수현이가 말해요. 아 진짜?! 몰랐어! 나는 그냥! 파트너가 되고 싶어가지고! 내가 멍청하게 말해요. 나는 라틴인데, 너도야? 수현이의 말에, 어! 그럼! 나도 라틴이야! 내가 또 바보같이 답해요. 내 대답에 소리내어 웃던 수현이가 그래 그러자, 하고 손을 내밀어요. 나는 땀에 젖은 손을 옷에 박박 닦고는 그 손을 잡아요. 잘부탁해. 진짜진짜. 잘부탁해. 그래서 라틴이 무엇이냐? 다들 알고 계신가요? 아마 모르실 거 같으니 제가 잠깐 선생님이 되어보도록 하죠. 댄스스포츠에는 크게 두 가지의 종목이 있습니다. 바로 모던댄스와 라틴댄스입니다. 모던은 스탠다드라고도 불립니다. 부드럽고 우아한 왈츠 〈노래가 나오고 왈츠의 한 스탭을 밟는다.〉 왈츠보다 빠른 비엔나왈츠, (노래가 바뀌면 비엔나왈츠의 동작을 보여주고) 부드러운 스탭과 리듬의 폭스트롯 (노래가 바뀌고, 마찬가지로 스탭을 보여준다) 또 다시 음악이 바뀌고, 열정의 탱고! 빠르고 경쾌한 퀵스탭이 있죠. 제가 보여드린 이 동작은 아마 정확하진 않을겁니다. 앞서 말했듯이 전 “라틴”이니까요. 운명처럼. 수현이와 같은 라틴 말이죠. 〈경쾌한 음악소리가 점점 커지면〉 이제 제 전공을 보여드릴게요. 라틴입니다. 〈춤에 맞춰서 음악이 계속 바뀐다. 가벼운 움직임.〉 브라질 민속 무용에서 온 춤입니다. 삼바! 아프리카 흑인들 특유의 바운스와 리듬, 힙 무브먼트가 가미되어있죠. 제자리에서 머무르지 않고 무대를 원으로 돌면서 춤추는 것이 특징입니다. 자, 파소도블레를 보여드릴게요! 투우입니다. 소를 형상화하여 드라마틱하고 박력 있는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다음은 룸바. 관능적이고 부드러운 동작이 특징이죠. 로맨틱한 표현과 동작들이 강조되기에 사랑의 춤이라고도 불리는 라틴의 대표적인 춤 중 하나입니다. 차차차. 흥겹고 경쾌한 4/4박자 리듬으로 빠른 템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음을 짧게 끊어주는 스타카토 액션에 무릎을 펴주며 춤춥니다. 자이브는 재즈에 맞춰 추는 격렬한 춤입니다. 재즈 또는 스윙 음악과 함께 빠르고 활기차게 출 수 있는 제일 유명한 종목이죠. 제가 맨 처음 배운 원투 쓰리 아 포가 바로 이 자이브입니다. <잠깐 멈춰서고, 음악 박자에 맞춰서> 원 투 쓰리 아 포. 박자에 딱 맞죠? 보통 학원에 가면 이렇게 자이브부터 알려줍니다. 가장 대표적이기 때문일까요? 언제나 이것부터 배우죠. 원투 쓰리 아 포. 나는 수현이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습니다. 수현이의 허리에 살포시 손을 얹습니다. 음악에 맞춰 발을 옮기고, 손을 움직입니다. 댄스스포츠 좋아해? 춤을 추는 수현이의 표정은 매우 맑았고, 눈은 매우 반짝였어요. 그녀의 질문은 매우 순수했고 그에 반해 나의 욕망은 너무도 초라했습니다. 나는 얼른 수현이의 손을 놓고 뒤돌아섰습니다. 땀이 나는 손을 바지에 박박 문질렀어요. 아, 아니… 나는 사실, 사실 그러니까… (수현) 그러니까? 나는! 나는… 댄스스포츠를 썩 좋아하지 않아! 그냥 널 만나고 싶어서 계속한거야! 기억나? 너 구청에서 배웠을 때, 그때 나 너를 봤거든. 내 말에 수현이는 꺄르르 웃었어요. 나는 수현이의 웃음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왜 웃냐는 나의 말에 대답도 하지 못하고 숨이 멎어라 웃어댔어요. 한참을 웃던 그녀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어요. 아니, 너는 댄스스포츠를 좋아해. 그러지 않고 어떻게 10년을 해? 니 마음을 속여서 좋을게 뭐가 있니? 인정할건 인정해. 넌 댄스스포츠를 좋아하는 거야. 난 부수적인 거지. 나쁜 짓도 아니고 왜 안 좋아한다고 생각해? 너 진짜 웃긴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4장 <커다란 함성 소리가 귀 아플 정도다. 무대를 가득 채운다.> 대회는 언제 와도 사람이 많고 시끄럽습니다. 생각보다 댄스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고, 보러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여전히 놀라운 일입니다. 반짝거리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긴 머리를 망으로 질끈 동여 묶고, 진한 화장을 한 선수들이 대회장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나 역시 어색한 대회복을 입고, 머리에 왁스를 발라 흐트러지지 않게 고정하고, 늘 신던 구두를 신습니다. <말을 하며 옷을 대회복으로 갈아입는다.> 가슴팍이 다 파인 이런 옷은 입을 때마다 낯섭니다. 내가 내가 아닌 기분. 나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귀가 따가울 정도로 큰 음악 소리가 쿵쿵 심장을 뛰게 합니다. 이게 큰 소리 때문에 울리는 것인지, 대회로 인해 심장이 울리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땀으로 젖어가는 손을 바지에 박박 닦아댔습니다. 떨려? 수현이의 질문에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팀 무대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열정적으로 움직이는 선수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고 말았습니다. 우리 차례야! 수현이의 손을 잡고 무대로 걸어나갔습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우리를 바라보며 치는 그 박수 소리가 우렁찹니다. 귀가 먹먹해집니다. <무대 중앙에 서서, 가만히 눈을 감는다. 음악 소리가 점점 커지면 눈을 뜨고, 자세를 잡고 댄스스포츠를 춘다. 추는 내내 웃고 있는 표정의 지우> 춤을 다 선보인 우리는 인사를 하고, (가운데 서서 중앙, 오른쪽, 왼쪽 방향으로 몸을 틀어 인사를 한다) 무대 밖으로 걸어나갔습니다. <잔뜩 격양된 목소리로> 진짜, 진짜 최고였습니다! 제가 대회에 처음 와본 것도 아니고, 대회에 처음 나와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근데 이런 기분이 든 건 정말이지, 처음이었습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손에 땀이 너무 많이 나고, 눈앞이 어지럽고, 숨이 막히고…! 이 흥분감을, 이 뜨거움을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몰라서 저는 그저 양 손을 꽉 잡고 숨을 헐떡대고만 있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수현이 말했어요. 거봐, 너 댄스스포츠 엄청 좋아하네. 그 말에 전 웃음이 터졌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죠. 드디어 인정하고 만겁니다. 그래요, 전 댄스스포츠를 좋아합니다! 좋아해요! 그리고 내 눈 앞에 이수현도 좋아합니다. <앞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는 듯한 행동을 보이며> 응! 나 진짜 좋아해! 댄스스포츠도! 너도! 그리고 우리 앞 커다란 스크린 위로 점수가 떴습니다. 3등. 수현과의 첫 시작으로는 나쁘지 않은 스타트였습니다. 이 열정을, 뜨거움을, 강렬함을,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애정을 어떻게 숨길 수가 있을까요. 단단히 잡은 손에서, 아! 살아있음을 느꼈습니다. 5장 뻔한 일은 뻔하게 일어나는 법입니다. 다들 기다리지 않으셨나요? 사고가 대체 언제 일어나는 것일까, 하고요. (바지를 걷어 상처를 보이며) 드디어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사고가 벌어집니다. 교통사고였어요. 어떠한 멋진 영웅처럼 누군가를 구하려다가, 누구를 지키려다가~ 하는 영웅이야기는 아닙니다. 아주 재수없고, 어이가 없는 사고였습니다. 사고. 진짜, “사고”. (강조하며) 눈이 미친듯이 많이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눈으로 인해서 날은 포근했고, 쏟아진 눈에 사람들이 다 나와 각자 집앞, 도로에 쌓인 눈을 쓸어내렸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죠. 현관문 앞에 쌓인 눈을 삽으로 퍼내고 염화칼슘을 뿌렸습니다. 깨끗해진 도로 위로 눈이 금방 다시 차올랐습니다. 아주 쓸데없이 열심히 일했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포근하게 내리는 눈은 예뻤고, 그날도 연습하기로 했기에 수현이를 만나러 갈 예정이었거든요. 수현이와 처음 대회에 나갔다 온 이후로, 저는 진짜로 이 악물고 연습을 하고는 했습니다. 사실 수현이와의 격차도 제법 있었거든요. 취미로 즐기던 약간의 재능이 있던 사람과 재능과 열정, 노력을 갖고 있던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 정도였으니까요. 제 노력을 어여삐 봐준 수현이는 저와 같이 피나는 연습을 했습니다. 그 뒤로 나간 대회에서는 아주 상을 쓸어모으고 다녔거든요, 신문에도 났습니다. “댄스스포츠 고등부 금메달을 휩쓰는 커플”이라는 헤드라인이었습니다. 바로 이 신문이죠. 몇부나 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크랩 해놓고, 벽에 붙여놓고, 학원에도 학교에도 가져다 놨거든요. (웃음) 아, 커플! 사실상 파트너를 커플이라고 호칭합니다. 누구 누구 커플! 이렇게 호명하고는 하죠. 연인이라는 의미의 커플이 아닌, 단순히 ‘두 사람’이라는 뜻의 커플인거죠. 아쉽게도요. <잠깐의 정적> 지우야, 연습하자! 수현이는 말했습니다. 보다시피 연습에 미쳐있는 아이입니다. 눈이 미치게 내리는 날에도 몸을 쉬게 할 수는 없었죠. 그리고 대학에 붙었다고해서 (자랑하듯이 엄지검지 두 손가락으로 브이(v)모양을 만들어 보인다) 게을러 질 수는 없는 법이었죠. 세상에 천재는 많고, 노력하는 천재는 더더욱 많은 법이니까요. 우리 연습실은 언덕 끝자락에 있습니다. 그저 싸기 때문이었죠. 구두와 의상을 챙겨들고 눈 내린 언덕을 힘겹게 올랐습니다. 돈 벌면 비싼 연습실 구하고 만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나마 눈이 덜 쌓인 길을 찾아 발을 디뎠습니다. 언덕을 내려오던 차가 방향을 잃은건 한순간이었어요. 비틀비틀, 방향을 찾지 못하던 차가, 점점 빠른 속도로, 가속도가 붙어 방향을 채 틀지도 못한 채로. 어? 차가 왜 저러지?라는 의문조차 갖기도 전에, 쾅! 쨍! <지우,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다.> 쾅! 차는 그대로 나를 지나쳐 옆 건물을 그대로 들이박았습니다. 그 건물은 작은 소품샵이었고, 전체가 유리로 되어있는 그런 쇼룸 창문이었죠. 차는 그대로 소품샵을 뚫고 들어갔고, 깨진 유리창의 파편은 사방팔방으로 날라갔습니다. 쇼룸을 장식하고 있던 인형, 그릇, 향초들도 다 사방으로 퍼졌습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죠? 나는 바닥에 넘어져 이 상황을 이해해보려고 했습니다. 나는 그저 길을 걷고 있었을 뿐인데 말이죠. 그것도 아주 조심조심.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습니다. 학생, 괜찮아? 누군가의 질문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다리에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방팔방으로 날라간 유리 파편은 당연하게 나에게도 날라왔습니다. 아주 재수없게도 다리에 말이죠. 아아악! 나는 비명을 질렀고 그대로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잠깐의 고요가 있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운전자는 타박상뿐이었습니다. 다행히도 그날 소품샵은 휴무였죠, 아무래도 눈이 많이 내리던 날이었으니까요. 그 날 불행해진건 오로지 나하나 뿐이었습니다. 오로지. 불행하게도 파편은 다리 근육을 찢어놓았고, 불행하게도 나는 제대로 걷지 못하는 병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운전자는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날 찾아와 울면서 사과했습니다. 바로 제 상상 속에서 말이죠. 그 사람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보험으로, 법대로 처리하라고 했습니다. 빙결된 도로 탓이니 자신의 죄는 없다고 했습니다. 가해자 없이 피해자만 존재하는 사건이 되어버린 겁니다. 몇 천의 손해를 본 소품샵 사장과 미래를 잃어버린 나만 존재하는 불행한 사건이 된거죠. 아, 운전자가 도의상 치료비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하하! 치료비요! <자조 섞인 웃음을 멈추고>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병신이 된 제 다리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이 된다고 해도 근육이 찢긴 사람이 다시 멀쩡하게 춤추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겁니다. 춤? 꿈? 그 자그마한 파편에 다 날라갔습니다. 제게 날라온 파편처럼 날라가버린 겁니다. 의사선생님은 말해요. 파편이 깊숙하게 들어갔습니다, 신경과 근육조직이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되묻죠? 제가 다시 댄스스포츠 선수를 할 수 있을까요? 의사선생님은 아주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안경을 쓸어올리죠. 휠체어를 이용하셔야 합니다. 수술은 잘 되었지만… 나는 그 말을 차마 끝까지 듣기가 힘들어서 의사선생님의 말을 잘라버렸습니다. 알겠어요! 네,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요. 됐습니다. 내가 이꼴이 났기에 수현이는 다른 파트너를 찾아야했어요. 댄스스포츠에서 파트너 없이는 연습도, 대회도 무엇하나 제대로 하기 힘드니까요. 수현이는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날 찾아와 울며 말했어요. 미안해, 지우야 미안해. 대체 뭐가 미안한 걸까요? 수현이가 운전한 차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수현이와 함께 있다가 다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오히려 미안해야할 사람은 저이지 않을까요? 그 순간에 언덕을 오른 나를, 그 순간 재빠르게 피하지 못한 나를, 그런 언덕에 연습실을 잡은 나를, 수현이에게 맨처음 파트너 제안을 했던 나를. 나를 원망합니다. 원망하고자 원인을 파고드니 끝도 없이 나옵니다. 대회를 보고 열망을 느낀 나를, 포기하지 않았던 나를, 수현이에게 반했던 나를, 갑자기 댄스스포츠를 배우고자 했던 나를, 나에게 댄스스포츠를 보여준 엄마를. 원망합니다. 원망하고 또 원망합니다. 파고들고 또 파고들어가며 원망합니다. 끝도 없습니다. 아! 엄마! 대체 왜 어린 나에게 댄스스포츠를 시작하게 한 거야? 왜 나에게 그런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거야? 저주하고 또 저주합니다. 내 편 같았던 세상이 이토록 어두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세상을 살아갈 의지가, 더 이상 없었습니다. <그대로 스르르 주저앉아 고개를 푹 숙인다.> 6장 수현이는 종종 나를 찾아왔습니다. 나는 그녀를 웃으며 반겨줄 힘이 없습니다. 나와는 달리 계속해서 빛날 수현이를 볼 용기가 도저히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녀를 좋아한다던 말이 다 거짓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빛나는 그녀를 보면 내가 더 작고 추악해지기만 합니다. 수현이는 새로운 파트너를 찾았습니다. 우리가 함께 다녔던 학원 원장님이 다른 학원 친구를 소개시켜주었다고 했습니다. 조심스럽게 말하는 수현이에게 묻고 싶었습니다. 나보다 걔랑 더 잘 맞아? 그러나 차마 이런 말을 입밖으로 내뱉지는 않습니다. 찌질합니다. 너무너무도 찌질합니다! 그렇게까지 한심해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와, 잘 됐네. 내 말에 수현이는 힘없이 웃고 병실을 나갔습니다. 욕짓거리가 절로 나옵니다. 부모님은 내게 다른 방안을 제시합니다. 다리를 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다양한 일을요. 하지만 내게 무엇도 닿지 않았습니다. 8살 때, 엄마와 함께 구청을 돌던 때가 생각납니다. 지우야, 이거 어때? 이건 어떠니? 다른 점이 있다면 엄마의 말투가 그때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울부짖습니다. 싫어! 다 싫다고! 스무살 먹고 땡깡부리는 자식을, 부모님은 안타깝게 바라보고 품에 가득 안아줍니다. 그래요, 나는 복받은 녀석입니다. 이렇게 망가져도 사랑해주는 가족이 있으니까요. 그치만 그게 뭐요? 그게 내 다리를 치료해주지도, 내 마음을 치유해주지도 않습니다. 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더 댄스스포츠를 사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암전> 7장 <불이 켜지면, 휠체어 위에 앉아있는 지우> 수현이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습니다. 마치 다시 만났을 그때처럼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습니다. 있대! 있대, 지우야! 할 수 있대! 희망에 가득찬 수현이의 목소리에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장애인댄스스포츠라는 게 있대! 이것봐, 선수들 영상이야! 수현이는 핸드폰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고, 영상을 하나 보여주었습니다. 휠체어에 탄 사람들이 바쁘게 바퀴를 움직이고, 손을 움직이며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장애인과 장애인 커플도 있었고, 비장애인과의 커플도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이건… 이건, 네,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정말로, 꿈에서조차도요. 수현이는 새로운 파트너와 정리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좀 웃기긴 한데, 그 친구에게 다른 파트너를 찾아야할 거 같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러면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너는 대학에 그대로 가서 그 친구랑 같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가 되어야한다고 했지만,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나 때문에 희생하지 말라고 했다고 크게 한소리 듣기도 했습니다. 희생? 내가 왜 너 때문에 희생하니!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야! 김지우, 정신 차려! 장애인댄스스포츠가 우습니? 너 쉽게 선수가 될 수 있을 거 같아? 치열한 세계야! 표독하게 쏘아붙이는 수현이에게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반박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댄스스포츠를 하기 위해서는 이수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휠체어를 탄 채로 수현이의 손을 잡고 다시 댄스스포츠를 시작했습니다. 쉽지는 않았습니다. 휠체어의 바퀴를 굴려야했고, 안무를 위해 웨이브를 해야 했고, 수현이의 손을 잡아야했고, 다시 놓고 돌아야 했고, 다시 손을 잡고, 멈추지 않게 휠체어 바퀴를 굴려야하고… 수현이의 말대로 아주 치열한 세계였습니다. 연습을 끝내고 나면, 팔에 근육통이 가득했습니다. 휠체어 바퀴를 굴리는 일이란,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었습니다. 8장 홀드. 파트너의 손을 잡고 자세를 유지하는 것을 홀드라고 합니다. 사실, 죽으려고 했습니다. 나를 이룬 세계는 이수현과 댄스스포츠 뿐이었으니까요. 근데 단 한 번의 사고로 난 이 모든 것을 놓칠뻔 했습니다. 삶에 더 이상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 나를 잡아준 겁니다. 이수현이, 댄스스포츠로. 전 살겁니다. 아주 잘 살아내 보려고 합니다. 살아서, 날 살리기 위한 것들을 최선을 다해,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사랑하고자 합니다. 나를 사랑한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나를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살아보려고 합니다. <손을 들어 댄스스포츠의 기본자세를 취한다> 왼손을 들어 파트너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 파트너의 허리를 잡고. 곧은 자세를 유지하고. 홀드. 홀드 미.
[2026 신춘문예-희곡 심사평] '주인공 의지' 드러난 1인극… 실험·도전에 당선작 선정
단막극은 한계 상황 속 인간의 본질적 조건과 성찰을 다루기 때문에, 시종일관 서사적 긴장을 요구한다. 그래서 플롯과 대사에 압축과 절제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주제를 통한 작가의 현실 인식으로서의 독창적 비전 역시 서사와 대사에 은유적으로 용해되어 있어야 한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모두 6편이었는데 단막극의 특성과 본질에 부합되지 않는 4편은 아쉽게 밀려나고, 최종적으로 ‘홀드’와 ‘추락’만 남게 되었다. ‘추락’은 군더더기 하나 없는 서사적 긴장감으로 교육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주인공의 신념과 의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결말 부분의 처리가 모호하게 끝나는 아쉬움이 있었다. ‘홀드’ 역시 시종일관 희망을 관철해 나가는 주인공의 의지가 서사적 긴장감과 호기심을 주고 있지만, 1인극으로 정석을 약간 벗어나는 극적 형식이 단조롭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심사위원 두 사람의 시각 또한 엇갈려 오랫동안 토론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플롯의 정석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형식적 실험에 무게 중심을 더 둘 것이냐로 티격태격했다. 그래서 1인극이지만 삽입되는 음악과 주인공의 의지가 단조로운 서사를 극복하는 힘이 있기에, ‘홀드’에다 무게 중심을 더 두어 당선작으로 미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신춘문예의 본질적 속성인 실험과 도전에 힘을 실어 무대에도 혁신의 바람이 불 것이라는 간절한 바람에서다. 당선작인 ‘홀드’는 대중적 재미와 문학성이 잘 어우러진 공연 텍스트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주인공의 의지, 음악, 실험적 형식이 서사의 추동력이 되었다. 당선자는 끝까지 연극 일선을 지켜주기 바라며, 아쉽게 밀려난 분에게는 격려와 분발을 드린다. 심사위원: 김문홍 극작가, 김지용 연출가
[2026 신춘문예-희곡 당선 소감] "내 희곡으로 공연 올리기, 막연했던 미래 더 가까워져"
공연이 재미있고, 글을 쓰는 일도 재미있습니다. 두 즐거움이 만난 끝에, 저는 희곡이라는 지점에 자연스럽게 서게 되었습니다. 일이 바빠 글을 쓰지 못하는 순간에도, 언젠가는 제 희곡으로 공연을 올리겠다는 꿈을 늘 품고 있었습니다. 이번 당선으로 그 막연했던 미래에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홀드’는 1인극이라는 비교적 드문 형식의 희곡입니다. 최근 1인극이 무대에 오르는 경우가 늘고는 있지만, 여전히 흔한 형식은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그렇기에 ‘홀드’를 신춘문예에 출품하는 일은 제게 작은 도전이었습니다. 그 도전이 인정받아 기쁩니다. 학창 시절 합평 자리에서 “넌 참 쓰고 싶은 대로 쓰는구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저는 여전히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말, 재미 있는 것을 중심에 두고 글을 써왔습니다. 그 방식이 늘 옳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이 저의 글쓰기였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제 속도와 방식으로, 다만 이전보다 조금 더 성실하게, 더 잘 쓰고 싶습니다.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셈이니, 마음껏 써볼까 합니다. 글을 쓰겠다는 저를 지지해준 가족들에게 감사드리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써온 저 자신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제 글을 읽고 가능성을 발견해주신 <부산일보> 신춘문예 희곡 심사위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쓰겠습니다. 좋은 공연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재미있고 즐겁게, 그리고 잘 쓰겠습니다. 약력: 서울 출생. 안양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이메일 jjaenii.k@gmail.com
[2026 신춘문예-평론] 실존의 침묵에 맞서는 재현의 윤리 / 김형식
파시즘의 귀환과 재현의 (불)가능성 최근 스웨덴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V-Dem)’에서 발행한 〈민주주의 보고서 2025〉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자유 민주주의’에서 한 단계 하락한 ‘선거 민주주의’로 분류했다.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에서 발행한 〈민주주의 지수 2024〉 역시 한국을 ‘결함 있는 민주주의 국가’로 선정한 바 있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공통적 현상처럼 보인다. V-Dem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72% 국가가 독재 정부 치하에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이는 1978년 이래 최고 수치에 해당한다. 이탈리아 철학자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는 전 세계가 파시즘으로 치닫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야만적 폭력과 인간성 말살 현상이 빠르게 증대할 것이며, 문명의 종국적인 붕괴까지 초래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일련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파시즘과 인종 학살을 다룬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3)가 거둔 성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무엇을 성취했는가를 이야기하기 앞서, 영국 비평가 마크 피셔의 논의를 알아보자. 마크 피셔는 자크 라캉에 기대어 ‘실재’와 ‘현실’을 구분한다. 실재란 현실이 반드시 억압해야 하는 재현 불가능한 X, 균열과 비일관성 속에서만 엿볼 수 있는 트라우마적 공백을 의미한다. 우리는 존재하지만 재현할 수 없는 실재와 ‘직접’ 마주할 수 없다. 다만 어떤 균열과 얼룩, 오점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실재란 현실과 대립하며 기만적인 현실의 층위를 벗겨내는 무엇이라고 지적한다. 현실은 실재를 억압함으로써 구조화되기에, 실재의 환기가 현실의 구조를 깨부수기 때문이다. 전쟁의 실재는 추상적인 기호 체계, 이를테면 사망자 숫자, 경제적 피해액, 간접적인 목격담, 혹은 단편적인 정보와 이미지 몇 장만으로 재현 불가능한 무엇이다. 전쟁의 실재는 전쟁이 실행되고 진행되는 순간, 그것을 몸으로 체감해야만 했던 주체에게 닥치는 공포와 폭력의 실체,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함과 참혹함으로 가득한 현장의 한가운데 있다. 따라서 실재를 재현하려는 영화적 시도는 한계점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재현의 대상이 ‘쇼아’처럼 트라우마적 사건이라면 더욱 그렇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공포와 절망―시체 타는 냄새, 희생자의 공허한 눈빛들, 가축처럼 끌려가 도살당하는 인간 등―의 실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화할 수 없는 대상, 카메라 렌즈와 축음기로 담아낼 수 없는 사태 앞에서 예술가는 침묵을 지킬 뿐이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쇼아를 ‘암흑의 구멍’이라 지칭하며 이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를 구분한다. 첫 번째는 구멍을 금기의 영역에 내버려두는 것이다. 이는 쇼아를 접근 불가능하고 상상할 수 없으며 형상화할 방법이 없는 ‘환영의 공간’으로 취급하는 방식이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시는 불가능해졌으며, 아우슈비츠 이후의 모든 문화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언한 바 있다. 이는 재현 불가능한 실재로서 쇼아를 손댈 수 없는 어둠 그 자체이자, 마치 종교적인 ‘성스러움’의 대상과 유사하게 취급하는 태도다. 두 번째는 실재에 대한 재현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구멍 안에 빛을 비추기 위해 시도하는 것이다. 이는 구멍을 응시하고, 구멍 안으로 들어가고, 어둠으로부터 무언가를 끄집어내려는 시도를 부단히 감행하려는 태도다. 이와 관련하여 알랭 바디우는 아도르노가 언급한 시의 불가능성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바디우는 파울 첼란의 시를 예시로 들며, 그가 아우슈비츠에 관한 시적 창조를 결코 멈추지 않음으로써, 실재를 사유하고 명명하는 ‘시적 성취’를 달성했다고 평가한다. 글레이저 감독은 파울 첼란의 작업처럼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한다. 감산하고 비워내기를 통해 재현 불가능한 대상의 재현을 감행한다. 그렇다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재현하려는 대상은 무엇인가? 누구의(혹은 무엇의) 무엇인가? 바디우는 ‘존재’와 ‘실존’을 엄밀하게 구분한다. 존재한다고 해서 모두가 동일한 강도로 실존하는 건 아니다. 바디우는 플라타너스 나무 한 그루를 예시로 든다. 길거리에 줄지어 서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들은 각각을 구성하는 원소가 다르기에 존재적으로 구별되는 개체다. 그러나 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사람에게는 차이가 인식되지 않기에, 두 그루의 나무는 유사성으로 출현한다. 반면 두 나무 사이에 가만히 누워있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에게 두 그루의 나무는 본질적으로 다른 고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두 경우 모두 나무의 존재는 동일하지만, 세계에서 드러나는 실존의 양상은 다르다. 빠르게 지나치는 운전자에게 플라타너스 나무는 거의 인식조차 되지 않으며 실존값은 미약하다. 반면 나무 아래 누워 나뭇가지의 흔들림을 관찰하는 몽상가에게 플라타너스 나무의 실존값은 크고 강렬하다. 이러한 구도는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하나의 세계 내에서 누군가의 실존은 크고 강렬한 강도를 갖지만, 반대로 누군가의 실존은 미미하다. 세계는 어떤 이들에게 관심이 없으며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취급한다. 이를테면 난민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나위 없이 확실하지만, 이들의 실존은 지극히 미약하다. 이들은 세계 내에서 아무런 힘을 소유하지 못하며 원하는 바를 거의 쟁취할 수 없다. 오늘날 현실 세계에서, 특히 정치의 영역에서 난민은 ‘비실존자’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비실존자란 세계 내에서 최소로만 측정되는 어떤 것일 뿐, 결코 ‘무(無)’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독일 장교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 분)가 지닌 실존의 정도는 강렬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인 루돌프 회스는 수용소 안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수용소 바로 옆에 호화로운 저택을 지어 가족과 함께 거주 중이다. 집에는 많은 방과 욕실, 커다란 수영장이 자리 잡고 있으며, 다양한 꽃과 식물을 키울 수 있는 넓고 아름다운 정원도 갖추어져 있다.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담당하고 관리할 하인 역시 즐비하다. 이렇듯 루돌프와 그의 가족은 안락한 저택에서 친구와 가족을 초대하여 파티를 벌이며 풍요롭고 충만한 생활을 영위한다. 반면 루돌프의 집 너머의 세계, 화면 바깥의 세계와 그곳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실존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의 존재는 명백하지만, 세계 내에서 어떠한 위치도 점유하지 못하는 비생명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비실존자다. 광학적 방식에 관하여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재현 전략은 모호하고 간접적인 방식을 사용하여 비실존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영화는 수용소 담장을 기준으로 서로 다른 장소에 거주하는 자들의 실존값의 차이를 내화면과 외화면의 분리로 구분한다. 먼저 루돌프 가족을 비출 때 카메라는 수평 앵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주체의 시선과 밀착하여 담아냄으로써 그들이 세계에 출현하는 실존의 강도를 부각한다. 영화의 디제시스 안에서 루돌프의 집은 어두운 무대 한가운데 강렬한 핀 조명이 떨어진 공간과 유사하다. 조명 안과 밖의 대비가 강렬할수록 주변은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게 된다. 조명이 내리쬐는 루돌프의 집이 바다 가운데 섬처럼 떠오르고 그 바깥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침묵한다. 카메라는 담장 너머의 비실존자를 응시하지 않는다. 가해자가 지닌 시선의 권력을 재현하듯 그들을 비가시적 대상으로 외화(外化)하고 밀어냄으로써 극소의 실존값을 재현한다. 실제로 카메라는 집안일을 돕는 하인으로 등장하는 짧은 장면을 제외하고는 유대인을 거의 비추지 않는다. 특히 수용소 내부의 유대인은 한 번도 카메라의 시선에 온전히 포착되지 않는다. 하지만 라캉이 말했듯 상징계가 억압한 실재는 상징화되지 않는 오점으로서, 현실의 한계를 가리키고 그 너머의 이면을 드러내는 구멍으로서 영속한다. 스크린은 그러한 오점을, 다시 말해 현실이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배제한 것의 흔적을 포함하고 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비실존자가 화면 내부로 틈입하는 순간은 그들이 신체를 지니고 살아있는 인간 존재로부터 추방당하여 인간 아닌 무엇(이를테면 무기물에 해당하는 비생명)이 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요컨대 비실존자의 존재는 실재적 오점―오물이나 잔여물로 상징화됨으로써만 카메라 시선의 내부로 포착된다. 루돌프 가족의 시선에서 유대인은 인간이 아닌 불결한 폐기물로 제시된다. 생일 선물로 나룻배를 선물 받은 루돌프가 아이들과 함께 강가로 놀러 간 씬을 보자. 루돌프는 낚시하고 있고 아이들은 물가에서 장난치며 놀고 있다. 이때 강 상류로부터 희뿌연 무언가가 떠밀려 내려온다. 회색빛 물결의 정체는 수용소에서 학살당한 유대인들의 시체를 소각하고 남은 잿물이다. 그때 루돌프는 물속에서 인간의 얼굴 뼈 일부를 건져낸다. 놀란 루돌프는 집으로 돌아와 자신과 아이들의 몸을 철저히 소독하고 닦는다. 아이들이 코를 풀자 소각장의 연기 그을음이 흘러나온다. 또 다른 씬은 루돌프의 부인 헤트비히 회스(산드라 휠러 분)가 남편을 찾아 강가로 걸어가는 장면이다. 카메라는 그녀의 눈높이에 맞춘 수평 앵글로 움직인다. 배경에 보이는 수용소 지붕 너머로 시체 소각장의 연기가 끊임없이 올라온다. 이처럼 루돌프 가족 일상의 중간 무심하게 틈입하는 실재의 잔여는 비실존자가 화면 너머에 존재하고 있음을 부단히 상기시킨다. 리얼리즘적 재현을 포기한 카메라의 시선은 참상을 직접 보여주며 고발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바깥에 누군가 분명히 존재했다고(혹은 존재한다고) 말이다. 루돌프 가족에게 장벽 너머의 세계에 거주하는 존재들은 인지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카메라는 이들의 시선을 따라 수용소 내부를 보여주지 않는 편을 선택한다. 하지만 불가피하게 그 세계를 보여주어야 할 순간이 있다. 물론 수용소는 철저히 분리되고 격리된 세계이며, 출입 역시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금지된 세계로의 외출을 시도하는 소녀가 있다. 루돌프의 집에서 일하는 폴란드 소녀는 수용소 안을 돌아다니며 누군가 먹을 수 있도록 음식을 숨겨둔다. 이때 카메라는 적외선 촬영을 활용한 광학적 방식으로 조심스럽게 금기에 접근한다. 오직 파충류 중 일부 종만이 적외선을 통해 사물을 인식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루돌프 가족이 살아가는 세계, 풍요롭고 살만한 ‘인간적인 세계’를 비출 때 카메라는 인간의 시선을 활용한다. 하지만 이와 대비되는 ‘비실존자의 세계’는 수많은 생명이 스러져가는 비(非)공간이다. 카메라는 인간적 시선의 리얼리즘을 포기하고 비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봄으로써 재현 불가능한 것의 재현을 시도한다. 쇼아의 공간은 검은 장막으로 온통 둘러쳐진 듯한 칠흑 같은 어둠의 세계로 그려진다. 모든 게 말살되고 빛을 잃은 지옥 안에서 오직 소녀의 작은 몸짓과 따뜻한 선의를 품은 음식만이 미약한 빛을 발산할 뿐이다. 음식을 숨긴 소녀는 루돌프의 집으로 돌아온다. 이때 카메라는 동일한 장면을 다른 각도에서 두 번 보여준다. 먼저 외부에서 소녀를 바라보는 씬이 나오고 뒤이어 집 안에서 소녀를 맞이하는 씬이 붙는다. 집의 내부가 인간의 세계임을 보여주듯 집 안의 카메라는 일상적인 장면과 동일한 방식으로 소녀를 비춘다. 반면 집 바깥의 카메라는 수용소 내부와 동일한 열화상 카메라를 사용하여 소녀를 바라본다. 인간적 시선과 비인간적 시선으로 구분되는 카메라의 시선은 분절된 두 세계 간의 대비를 감추거나 이음새를 메우려는 어떠한 노력도 시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급작스러운 장면 전환을 통해 간극을 넓히고 기묘한 이질감을 강조한다. 음향적 방식에 관하여 광학적 방식에 더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음향 기법을 활용하여 평온해 보이는 현상 너머의 실재를 드러낸다. 이는 오점을 드러내는 카메라의 시선과 유사하게 의미화되지 않고 상징화되지 않는 소리, 그러나 화면 너머에서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소음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앞서 언급한 씬으로 돌아가 보자. 소녀가 위험한 외출을 시도하는 동안, 카메라는 비인간의 시선으로 소녀의 행적을 좇는다. 동시에 그림 형제의 동화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와 함께 낮고 누군가 경고하는 듯한 소리의 신경질적인 저음이 반복해서 삽입된다. 어린아이를 위한 동화 내용과 대비되는 위협적인 사운드의 극명한 대비는 압도적인 현실의 폭력 앞에 노출된 소녀의 상황과 몸짓의 의미를 선연하게 강조한다. 사운드가 일으키는 심상의 불일치는 그 외에도 여러 장면에서 반복된다. 수용소 내 루돌프의 일상을 보여주는 씬에서 카메라는 무언가를 응시하는 루돌프의 얼굴을 로우 앵글로 클로즈업한다. 루돌프는 성가시다는 듯 다소 인상을 찌푸리며 무언가를 내려다보기도 하지만 표정이나 자세에 거의 변화가 없다. 카메라는 무려 30초에 달하는 긴 시간 동안 동일한 각도에서 루돌프의 무료한 일과를 담아낸다. 보이는 건 루돌프의 옆모습과 어깨에 걸친 희뿌연 하늘, 그리고 원인 모를 검은 연기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연기의 정체가 시체 소각장이 뿜어내는 그을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끝없이 피어오르는 연기를 배경으로, 고함과 비명, 누군가의 처절한 절규와 흐느낌이 들리고, 뒤이어 총성이 울려 퍼진다. 카메라는 지옥일 것임이 분명한 수용소 장내의 풍광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배경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통해 비실존자의 존재를 암시한다. 우리는 내화면 바깥의 참극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헤트비히가 정원을 소개하는 쇼트는 영화가 추구하는 재현 방식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헤트비히는 집을 찾아온 어머니 리나 한셀(이모젠 코제 분)에게 공들여 가꾼 정원을 소개한다. 헤트비히는 꽃과 허브, 채소 등을 자랑한 뒤, 자신을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라 지칭한다. 이후 카메라는 정원의 꽃을 비춘다. 꽃이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잡히고 배경에서 들려오던 소음이 커지기 시작한다. 꽃 주위를 맴돌던 벌의 날갯짓 소리가 증폭되다가 이윽고 먼 소음으로 확장된다. 윙윙대던 소리가 비명과 총성으로 변하더니 붉은 꽃이 화면을 가득 채워 핏빛으로 물든다. 헤트비히가 자랑하는 정원이 타인의 피와 생명을 대가로 피어났음이 암시된다. 경고하는 듯한 과도하고 불쾌한 저음과 신경질적인 사운드가 잇달아 들려온다. 이처럼 화면과 불협하는 사운드의 삽입은 우리에게 목가적 상황처럼 보이는 내화면의 기만으로부터 깨어날 것을, 바깥의 실재를 기억할 것을 부단히 상기시킨다 극 중간에 삽입되는 사운드가 이질감과 낯섦의 충격 효과를 산출한다면, 오프닝과 엔딩에 배치된 사운드는 존재론적 질문을 제기한다. 일반적인 음악은 한 옥타브를 12개로 분절한 평균율(equal temperament)을 기반으로 창작되었다. 하지만 자연에는 사실 무한한 수의 ‘음(音)’이 존재한다.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12음이 제시하는 음과 음 사이에 존재하는 다채로운 음의 존재를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우리는 무한의 음 중에 임의로 구분한 12개의 음으로 한 옥타브를 구성하여 음악에 활용할 뿐이다. 이때 선택받은 극소수의 12개 음은 선율과 화성을 이루며 수많은 음악 안에서 강렬하게 실존하지만, 배제된 무한한 나머지 음은 음악의 영역에서 비실존하는 침묵의 음이 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이전까지 음악에서 무관심했던 음에 주목하며 실재에 접근한다. 그것은 12음계보다 세분화된, 음과 음 사이의 간극에 존재하는 미분음(微分音, Microtone)을 사용하여 음계 바깥에 위치한 음들을 되살려내는 방식이다. 미분음은 청자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낯설고 기묘한 감각과 함께 불안감과 긴장감을 자아낸다. 작곡가 미카 레비(Mica Levi)는 음악의 형식적 실험을 통해 미분음처럼 분명히 존재하지만 침묵 당해 온 비실존의 존재를 표출한다. 미카 레비는 글레이저 감독의 다른 영화 ‘언더 더 스킨’(2013)에서도 미분음을 사용한 바 있다. 이때 미분음은 영화 곳곳에 삽입되어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외계 존재를 향한 기괴하고 으스스한 감각을 형성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미분음은 극 중간이 아닌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오프닝과 엔딩 크레딧에 삽입된다. 오프닝 장면은 미분음을 활용하여 불협하는 사운드를 들려주면서, 비실존자의 존재를 들려주려는 영화의 목적을 암시한다. 극 중간의 사운드는 비실존자의 고통과 비명을 화면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의 형태로 삽입한다. 엔딩 크레딧은 오프닝에서 제시된 미분음에 더해 영화의 상영시간 전체를 통해 하나씩 축적된 비실존자의 절규를 한 데 응축하여 폭발시킨다. 마지막 순간 미분음들 사이에 희생자의 소리를 배치하고 쌓아 올려, 거대한 절규의 교향곡을 상연한다. 영화의 디제시스 내에서 시종일관 인식 너머로 추방당해 제대로 보이거나 들리지 않던 비실존자들은 그제야 비로소 저마다 고유한 주파수를 가진 미분음이 되어 강렬하게 실존함으로서 공기를 뒤흔든다. 비실존자들이 온몸으로 발산하는 공기의 파동은 켜켜이 쌓여 존재를 부정하는 세계를 향해 고함친다. 가해자에 의해 피해자의 실존은 침묵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는 지워지지 않고 남아 비명을 지른다. 실존을 은폐 당한 존재가 내지르는 탄식과 곡(哭)을 들으며 우리는 문득 소름 끼치는 섬뜩함을 느낀다. 그들은 말한다. 내가 분명히 여기에 존재했다고(혹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악의 평범성 혹은 정치성 루돌프는 낮에는 수용소 내부에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면 다정하고 따뜻한 가장이자 동물애호가가 된다. 루돌프의 가족은 장벽 너머에서 수많은 인간이 죽고 소각당하는 와중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평온한 일상을 보낸다. 그들은 마치 수용소가 없다는 듯, 장벽 너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 생활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인지 능력에 문제가 있거나, 어리석은 바보들인 것은 아니다. 이들은 누구보다 약삭빠르고 속물적이며, 기민하게 자신의 손익을 정치적으로 판단하여 행동한다. 이는 언뜻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에 대한 예증처럼 보인다. 아렌트에 따르면 나치 전범들은 끔찍한 괴물이나 악마가 아니라 평범한 이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다만 상부의 명령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순응한 끔찍한 인간들이었을 뿐이다. 바디우에 따르면 아렌트주의자들이 주장하듯 나치의 부역자들이 사유하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행동한 바보들이라 여기는 순간, 우리는 사태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 아렌트주의자들은 주로 악의 행위를 저지른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다. 비판적 사고력이 결여된 개인이 문제라는 식이다. 하지만 바디우는 나치 전범들은 분명히 자신이 저지르는 행동을 인식하고 사유하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나치즘 자체가 정치이자 사유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나치 독일은 끔찍하고 파렴치한 조치들을 정성스럽게 계획하고 사유하였으며, 가장 엄격한 방식으로 다루었다. 나치가 저지른 악은 무사유로 인한 게 아니라, 정치 그 자체의 온전한 실패로부터 비롯되었다. 희생자들을 비가시화하고 침묵시킨 건 개인의 무사유가 아니라 정치의 작동으로부터 비롯된다. 영화는 악의 평범성을 넘어 악의 정치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는 독일군이 헝가리를 점령하게 된 이후의 회의에서 잘 드러난다. 나치 독일의 수뇌부는 헝가리에 거주하는 70만 명의 유대인 학살을 위한 계획을 논의하고 있다. 매일 유대인이 1만 2천 명씩 열차를 통해 수송되고, 노역에 동원되는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은 수용소로 보내 학살당하는 계획이 수립된다. 이때 카메라는 수직의 부감숏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본다. 외곽부가 왜곡되어 있고 중앙에 집중되는 형태의 카메라 시선은 학살을 결의하고 실행에 옮긴 세기의 범죄가 이루어진 정치적 장소를 고발하는 듯하다. 동일한 시선이 조금 뒤 반복된다. 70만 명의 학살을 결정한 뒤, 나치 수뇌부와 그들의 가족들이 참여하는 파티가 벌어진다. 흥겨운 음악과 분위기에 맞춰 멋을 낸 사람들이 파티를 즐기고 있다. 이때 카메라는 수직에서 중앙을 부각하는 시선으로 이들을 내려다본다. 카메라는 인간의 시점에서 파티의 흥취에 동참하는 대신 멀리서 거리를 둔 채 비인격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는 인간의 얼굴을 한 파티장 내부의 범죄자들로부터 거리를 둔 채, 이들이 추악한 범죄자 집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동시에 이 장면은 높은 곳에서 파티장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루돌프의 시선과도 유사하다. 루돌프는 이전부터 대량의 유대인들을 효율적으로 말살하고 소각하는 방법을 개발하기 위해 애써 왔다. 24시간 쉼 없이 작동하는 소각장을 만들기 위해 구획을 나누어 가열과 소각, 냉각을 반복할 수 있는 순환 소각장 도입을 계획한다. 파티장에서도 루돌프는 파티에 동참하는 대신 높은 곳에 올라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건물 전체의 구조와 규모를 살피며, 어떻게 하면 이들을 효과적으로 학살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루돌프는 자신의 성취를 즐기거나 타인과 감정적으로 교류하지 못한다. 그는 세상의 속물성으로부터 거리를 둔 채, 열정적으로 자신의 일에만 골몰해 있다. 이처럼 루돌프는 자신이 맡은 일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든가 생각 없이 명령을 따르는 게 아니다. 그는 마치 종교적 헌신에 가까운 태도로 정교하게 임무에 관해 사유하고 고도화하여 악을 실현한다. 문제의 관건은 루돌프의 태도와 행동에서 무사유와 아둔함의 증거를 찾기는 힘들다는 점이다. 그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악이 된 것이 아니라, 추구하는 목표 자체가 악이었기에 생각이나 과정과 무관하게 악의 구현자가 된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나면 문제의 원인이 정치의 실패 때문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떠오른다. 아내 헤트비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흠뻑 빠진 헤트비히는 남편의 인사이동을 따라가는 대신 아이들과 함께 아우슈비츠에서 그대로 지내겠다고 말한다. 헤트비히는 자신뿐 아니라 아이들 역시 이곳에 적응하여 행복하고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지옥 옆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온전할 리 없다. 아이들은 가스실을 흉내 내며 서로를 가두고 처형하는 놀이를 즐긴다. 헤트비히는 ‘아우슈비츠의 여왕’으로 계속 살고 싶은 자신의 속물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진실을 애써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헤트비히와 그녀의 어머니 리나와의 대화 씬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외부에서 온 리나는 수용소의 담장을 똑바로 응시하며, 헤트비히에게 담장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수용소가 없다는 듯 살아가던 헤트비히는 그제야 담장을 언급하며, 포도 덩굴을 잔뜩 심어 가리려 한다고 말한다. 리나가 이야기를 이어가려 들자 재빨리 말을 끊고 화제를 돌린다. 헤트비히는 수용소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다. 다만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기에 시야에서 차단하고 인식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그녀에게 정원 가꾸기란 밤낮없이 수용소로부터 들려오는 비명과 절규, 소각장으로부터 날아오는 시체의 연기와 그을음을 무시하고 비가시화하려는,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현실을 봉합하고 상징화하려는 가증스러운 몸부림이다. 리나는 실재의 틈입을 버티지 못해 딸의 집을 떠나고 만다. 반면 헤트비히의 속물적 욕구는 살풍경한 장벽과 소음, 죽음의 재조차 불사하고 무시할 만큼 집요하다. 루돌프 역시 희생자들의 절규와 고통이 보거나 듣지 못하는 게 아니다. 루돌프는 바로 앞 희생자들의 절규는 들리지 않는 듯 아무런 주의와 관심도 기울이지 않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작은 새 소리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며 호기심을 보인다. 그렇다면 나치나 그와 유사한 파시즘이 초래하는 위기에 관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가? 다시 바디우로 돌아가 보자. 바디우는 정치적 사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바디우에게 사건이란 특정한 존재 혹은 집단의 실존값을 극소로 떨어뜨려 무화(無化)하려는 세계에 저항하는 사태를 의미한다. 사건은 현실 속에서 거의 실존하지 않는 듯 여겨지는 비실존자의 실존값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그들의 실존을 강렬하게 현시하는 어떤 사태다. 이러한 사건은 주체 내부로 수용됨으로써 세계 내에 자리를 잡고 정치화되며 계속 이어진다. 사건의 주체는 비실존자가 세계 안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며, 세계의 구도와 배치 전체를 변화시켜 그들에게 온당한 몫과 자리를 할당하는 구체적이고 정치적 행위로 나아간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관련하여 우리는 발생한 참상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려는 세계에 대항하여, 수용소 안에는 수많은 사람이 존재했으며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인간적 고통과 죽음이 있었음을 증언하고 부단히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는 주체적 충실성을 견지해야 한다. 요컨대 반복되는 파시즘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적 참상을 어둠에 방치한 채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재현의 (불)가능성, 반복되는 재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끊임없이 재현을 시도하고 감행할 때 비로소 비극은 반복되지 않는 과거의 일로 머물 수 있다. 사건으로서의 영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신적 시선이 다시 한번 등장한다. 루돌프 회스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유대인 70만 명에 대한 이송과 학살 계획이 자신의 이름을 딴 ‘회스 작전’으로 결정되었다며 승전보를 고지하듯 자랑한다. 자다 깬 아내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듯 무료한 태도로 대꾸할 뿐이다. 루돌프는 사무실에서 나와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이동하던 중 문득 구역질하더니 비틀거린다. 이때 루돌프가 바라보는 시선의 복도 끝 소실점에 작은 빛이 보인다. 카메라의 시선은 소실점을 향해 수평으로 이동하더니 시간을 건너뛰어 현재의 수용소를 비춘다. 이전의 카메라가 수직으로 올라가 인간의 자리로부터 거리를 둔 채 초월적 관찰자의 위치에서 역사적 참극의 순간을 고발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면, 이번에 카메라는 수평으로 이동하여 미래의 시간을 경유한다. 박물관이 된 아우슈비츠 수용소. 희생된 자들이 신었던 신발, 수용복, 그 외 다양한 소지품, 사진, 그리고 남은 건 끔찍하리만큼 고요한 적막과 암전. 카메라라는 대타자의 시선은 인간의 눈높이에서 참담한 비극 이후를 담담히 돌아본 뒤, 다시 루돌프에게로 돌아온다. 미래의 시간이 작은 소실점을 통과하며 역류한다. 희생자들의 고통이 주체를 향해 넘실대는 파도처럼 쇄도한다. 카메라는 질문을 던지는 듯한 시선으로 주체를 응시한다. 케 보이(Che Vuoi)? 루돌프의 신체가 일으킨 구역질은 그에게 남은 일말의 인간성이자 희생자와 동일한 한 명의 생명체로서의 신체가 보이는 생리적 거부 반응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루돌프는 이윽고 정모(正帽)를 눌러쓰고는 깊고 어두운 지하로, 끔찍하리만큼 긴 절멸의 침묵을 향해 내려간다. 파시즘 정치, 루돌프의 정치적 자아는 그의 인간적 자아를 억누르고 돌이킬 수 없는 승리를 거두었다. 루돌프가 주도한 회스 작전으로 헝가리 거주 유대인 70만 명 중 40만 명이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석 달에 걸쳐 모두 살해당했다. 전 세계의 정치적 위기가 고조되는 오늘날,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가해자의 시선과 행적을 따라가며 지난 세기 파시즘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재현을 감행한다. 재현 불가능한 것의 재현을 위해 영화는 총체적 재현을 포기하고, 이질적인 것의 출몰을 통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설핏 드러낸다. 보이지 않는 바깥의 어둠을 고통스럽게 응시하고, 들리지 않는 비실존자의 낮은 신음에 귀를 기울인다. 이는 희생자를 침묵시키고 무로 만들려는 시도에 맞서, 그들의 실존을 강경하게 상연하는 영화적 리얼리티와 재현의 윤리를 보여준다. 극소의 미광으로, 백색 소음으로 바스러지던 비실존자는 치밀하게 계산된 광학 장치와 음향 기법을 통해 강렬한 실존값을 갖는 하나의 ‘사건’으로 거듭난다. 영화가 박물관에 전시된 쇼아의 증거물을 보여주며 숨 막힐 듯 잔인한 침묵을 이어갈 때, 우리는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고요함 속에 여전히 은폐된 미분음이 존재하고 있음을, 비가시화된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을 소리높여 반복해 증언하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실존은 또다시 침묵 당하고 말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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