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대한 감각·경험·상상… 치열하게 지우고 쓴 흔적 느껴"
23일 부산에서 해양수산부 개청식이 열리며 부산이 동북아 해양수도, 글로벌 해양 강국을 향한 첫발을 뗐다. 이날 이재명 대통령은 해수부 청사에서 6년 만에 국무회의를 열며 해양수도 부산에 적극 힘을 실었다. 부산일보와 해양진흥공사는 해수부 부산 시대의 개막을 앞두고 해양의 가치와 인간의 삶을 예술적으로 조명하고, 바다를 향한 문학의 시선을 확장하기 위해 ‘해진공과 함께하는 부산일보 해양문학 공모전’을 열었다.기성 작가조차 정해진 소재나 주제 안에서 글을 쓴다는 것이 힘든 작업이기에 문단에선 처음 열리는 공모전에 관해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다. 신춘문예를 비롯해 문인단체나 문예지의 공모전이 이미 문학 지망생에겐 행사 내용과 공모 시기가 알려져 있어 몇 달 전부터 준비하는 것을 고려하면, 이번 공모전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걱정이 많았다. 일반인뿐만 아니라 청소년 부문도 넣었고, 보통 소설만 공모하는 것과 다르게 일반부는 소설, 시·시조, 수필 등 다양한 장르를 준비했다는 점도 관심을 받았다.한 달여 공모 끝에 모두 292편의 작품이 도착했다. 일반부는 해양시와 시조가 151편 접수됐으며 해양 소설 75편, 해양 수필 42편이 심사에 올랐다. 일반부 심사는 구모룡 문학평론가 겸 한국해양대 명예교수, 유연희 작가, 이병순 작가가 참여했다.심사위원은 공통으로 “일반부의 투고작은 비교적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고 심사가 까다로울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치열하게 지우고 쓴 흔적이 보인다. 가까운 연안 바다에서 대양을 아울러 바다를 감각하고 경험하고 상상하는 다양한 경향이 있다”라고 밝혔다.구 교수는 시·시조 부문을 심사하며 “바다와 연관한 장소와 사물에 감정을 이입하거나 가족사의 기억을 소환하는 경향이 뚜렷하였고 더러 연안 어업과 원양의 경험을 서술하려는 시편도 보였다. 시적 표현에 서툰 경우도 있었으나 대체로 수준을 유지하였으며 시에 비하여 시조는 투고 편수가 적었다”라고 평가했다.소설 부문을 심사한 유 작가는 “투고된 소설이 보여준 해양 서사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었다. 기존의 원양어선 조업 과정의 문법이 있는가 하면 해양 판타지도 적지 않았다. 첨단 선박 기술을 매개한 모험 소설도 보였고 과학적 지식을 수반하여 내용을 풍부하게 한 작품도 있었다. 익숙한 항해의 서사보다 새로운 변화를 주목할 수 있어 좋았다”라고 설명했다. 이 작가는 “중편과 단편을 모두 아울러 상당한 수준을 보여주었다. 단편의 경우 잘 짜인 작품이 없지 않았으나 다수 우수한 중편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둘을 구분하여 공모하는 방안이 있으면 좋겠다. 형식과 내용에서 기존의 익숙한 항해 서사보다 새로운 내용으로 해양소설의 다양성을 견인하는 작품에 더 눈길이 갔다. 특히 결말이 밋밋하여 흠이 된 경우가 있었다”라고 말했다.구 교수는 일반부 수필 분야에 관해 “바다 여행을 통하여 부산 연안의 바다 풍경을 이야기하려는 작품이 많았고, 해양을 매개로 아픈 가족사를 진솔하게 서술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바다와 사물을 사유하고 이해하는 철학적 에세이도 더러 보였다. 대체로 수필을 통하여 해양을 경험하고 인식하는 구체적 과정을 잘 진술하고 있었다”라고 전했다.중등부와 고등부로 나눈 청소년부는 24편이 응모돼 전체 편수는 적었다. 사실 청소년 대상 글쓰기 대회가 폐지되거나 위축되는 건 전반적인 경향이다. 대학 진학에 큰 영향을 미치는 생기부에 외부 활동, 시상에 관한 내용을 쓰지 못하게 되며 글쓰기에 관한 관심이 급속히 식었다. 이번 공모전 청소년부 역시 입시에 모든 걸 맞춘 고등부보다 시간이 자유로운 중등부 작품이 오히려 수준이 더 높았다.청소년부 심사를 맡은 임성용 작가와 오선영 작가는 “바다와 해양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 탓인지 자기의 언어를 제대로 찾지 못하는 응모자가 많았다. 다루는 소재 또한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해양 오염과 자기 연민을 다루는 글이 주를 이루어서, 해양의 넓고 다양한 얼굴을 담는 글은 부족했다. 전개 면에서도 단조로운 고백의 형식을 넘어서지 못하고 일관성과 통일성이 부족한 작품들이 많아 아쉬움이 남았다”라고 평가했다.임 작가는 “기본적인 문장 구사력 부족, 띄어쓰기, 맞춤법에 대한 소양 부족, AI의 무비판적 사용, 인터넷 자료 표절에 대한 우려가 되는 작품도 보였다. 창작의 윤리성에 대한 인식 미흡은 지금의 청소년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라고 지적했다.오 작가는 “바다와 그 주변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웅숭깊은 시선을 담은 작품들이 있었다. 항만과 조선소 노동자의 삶을 살갑게 살피고, 바다가 주는 위로에서 생활의 방식을 통찰했다. 바다 환경에 대한 실태를 다변적 시각으로 살핀 점은 칭찬하고 싶다”라고 전했다.당선자들에겐 개별 통보를 했으며, 해양진흥공사와 부산일보는 첫 공모전에 작품을 접수한 응모자들에게 감사 선물을 전달하기로 했다. 청소년부 참가자 전원, 일반부 참가자 80명에게 문화상품권을 보내줄 예정이다.1회 해진공과 함께하는 부산일보 해양문학 공모전 시상식은 내년 1월 14일 오후 5시 부산일보 10층 대강당에서 열린다.
23일 부산에서 해양수산부 개청식이 열리며 부산이 동북아 해양수도, 글로벌 해양 강국을 향한 첫발을 뗐다. 이날 이재명 대통령은 해수부 청사에서 6년 만에 국무회의를 열며 해양수도 부산에 적극 힘을 실었다. 부산일보와 해양진흥공사는 해수부 부산 시대의 개막을 앞두고 해양의 가치와 인간의 삶을 예술적으로 조명하고, 바다를 향한 문학의 시선을 확장하기 위해 ‘해진공과 함께하는 부산일보 해양문학 공모전’을 열었다. 기성 작가조차 정해진 소재나 주제 안에서 글을 쓴다는 것이 힘든 작업이기에 문단에선 처음 열리는 공모전에 관해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다. 신춘문예를 비롯해 문인단체나 문예지의 공모전이 이미 문학 지망생에겐 행사 내용과 공모 시기가 알려져 있어 몇 달 전부터 준비하는 것을 고려하면, 이번 공모전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걱정이 많았다. 일반인뿐만 아니라 청소년 부문도 넣었고, 보통 소설만 공모하는 것과 다르게 일반부는 소설, 시·시조, 수필 등 다양한 장르를 준비했다는 점도 관심을 받았다. 한 달여 공모 끝에 모두 292편의 작품이 도착했다. 일반부는 해양시와 시조가 151편 접수됐으며 해양 소설 75편, 해양 수필 42편이 심사에 올랐다. 일반부 심사는 구모룡 문학평론가 겸 한국해양대 명예교수, 유연희 작가, 이병순 작가가 참여했다. 심사위원은 공통으로 “일반부의 투고작은 비교적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고 심사가 까다로울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치열하게 지우고 쓴 흔적이 보인다. 가까운 연안 바다에서 대양을 아울러 바다를 감각하고 경험하고 상상하는 다양한 경향이 있다”라고 밝혔다. 구 교수는 시·시조 부문을 심사하며 “바다와 연관한 장소와 사물에 감정을 이입하거나 가족사의 기억을 소환하는 경향이 뚜렷하였고 더러 연안 어업과 원양의 경험을 서술하려는 시편도 보였다. 시적 표현에 서툰 경우도 있었으나 대체로 수준을 유지하였으며 시에 비하여 시조는 투고 편수가 적었다”라고 평가했다. 소설 부문을 심사한 유 작가는 “투고된 소설이 보여준 해양 서사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었다. 기존의 원양어선 조업 과정의 문법이 있는가 하면 해양 판타지도 적지 않았다. 첨단 선박 기술을 매개한 모험 소설도 보였고 과학적 지식을 수반하여 내용을 풍부하게 한 작품도 있었다. 익숙한 항해의 서사보다 새로운 변화를 주목할 수 있어 좋았다”라고 설명했다. 이 작가는 “중편과 단편을 모두 아울러 상당한 수준을 보여주었다. 단편의 경우 잘 짜인 작품이 없지 않았으나 다수 우수한 중편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둘을 구분하여 공모하는 방안이 있으면 좋겠다. 형식과 내용에서 기존의 익숙한 항해 서사보다 새로운 내용으로 해양소설의 다양성을 견인하는 작품에 더 눈길이 갔다. 특히 결말이 밋밋하여 흠이 된 경우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구 교수는 일반부 수필 분야에 관해 “바다 여행을 통하여 부산 연안의 바다 풍경을 이야기하려는 작품이 많았고, 해양을 매개로 아픈 가족사를 진솔하게 서술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바다와 사물을 사유하고 이해하는 철학적 에세이도 더러 보였다. 대체로 수필을 통하여 해양을 경험하고 인식하는 구체적 과정을 잘 진술하고 있었다”라고 전했다. 중등부와 고등부로 나눈 청소년부는 24편이 응모돼 전체 편수는 적었다. 사실 청소년 대상 글쓰기 대회가 폐지되거나 위축되는 건 전반적인 경향이다. 대학 진학에 큰 영향을 미치는 생기부에 외부 활동, 시상에 관한 내용을 쓰지 못하게 되며 글쓰기에 관한 관심이 급속히 식었다. 이번 공모전 청소년부 역시 입시에 모든 걸 맞춘 고등부보다 시간이 자유로운 중등부 작품이 오히려 수준이 더 높았다. 청소년부 심사를 맡은 임성용 작가와 오선영 작가는 “바다와 해양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 탓인지 자기의 언어를 제대로 찾지 못하는 응모자가 많았다. 다루는 소재 또한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해양 오염과 자기 연민을 다루는 글이 주를 이루어서, 해양의 넓고 다양한 얼굴을 담는 글은 부족했다. 전개 면에서도 단조로운 고백의 형식을 넘어서지 못하고 일관성과 통일성이 부족한 작품들이 많아 아쉬움이 남았다”라고 평가했다. 임 작가는 “기본적인 문장 구사력 부족, 띄어쓰기, 맞춤법에 대한 소양 부족, AI의 무비판적 사용, 인터넷 자료 표절에 대한 우려가 되는 작품도 보였다. 창작의 윤리성에 대한 인식 미흡은 지금의 청소년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라고 지적했다. 오 작가는 “바다와 그 주변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웅숭깊은 시선을 담은 작품들이 있었다. 항만과 조선소 노동자의 삶을 살갑게 살피고, 바다가 주는 위로에서 생활의 방식을 통찰했다. 바다 환경에 대한 실태를 다변적 시각으로 살핀 점은 칭찬하고 싶다”라고 전했다. 당선자들에겐 개별 통보를 했으며, 해양진흥공사와 부산일보는 첫 공모전에 작품을 접수한 응모자들에게 감사 선물을 전달하기로 했다. 청소년부 참가자 전원, 일반부 참가자 80명에게 문화상품권을 보내줄 예정이다. 1회 해진공과 함께하는 부산일보 해양문학 공모전 시상식은 내년 1월 14일 오후 5시 부산일보 10층 대강당에서 열린다.
정명훈, 라 스칼라 이어 KBS교향악단까지… 클래식부산 예술감독 잘 수행할까?
지휘자 정명훈(72)이 내년 1월부터 2028년 12월까지 3년간 KBS교향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선임됐다. 오케스트라 운영을 총괄하고, 중장기 예술 전략을 수립하는 역할이다. 정명훈은 2027년부터 이탈리아 오페라 극장 ‘라 스칼라’의 음악감독으로도 활동하게 돼 있어, 현재 맡고 있는 ‘클래식부산’의 예술감독직 수행에 차질이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정명훈은 지난 6월 개관한 부산콘서트홀과 2027년 개관 예정인 부산오페라하우스를 총괄하는 부산시 산하 ‘클래식부산’의 예술감독으로 위촉돼 활동하고 있다. 그의 임기는 내년 6월까지인데 부산오페라하우스가 문을 여는 2027년 이후까지 계약 연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고령이라고 할 수 있는 정명훈이 3곳의 음악감독을 동시에 맡을 경우 각각의 예술단체를 잘 이끌어갈 수 있느냐는 의문이 나온다. 부산, 서울, 이탈리아까지 오가면서 지휘도 맡고, 예술 운영과 관련한 업무도 해내야 하기 때문에 체력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면 음악계에서는 세계적인 거장들의 경우 감독직을 중복으로 맡는 경우가 많아서 문제될 것 없다는 의견도 많다. 오히려 자신만의 대중성과 실력을 바탕으로 해당 예술단체의 국제적 인지도를 높이고, 음악적 역량을 끌어올리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실제 영국 출신의 세계적 지휘자 사이먼 래틀은 베를린 필하모닉 상임지휘자, 런던 심포니오케스트라 음악감독, 독일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상임지휘자를 동시에 수행했다. ‘지휘계의 슈퍼스타’로 불리는 구스타보 두다멜도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과 심온 볼리바르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으로 동시에 재직하고 있고, 내년부터는 뉴욕필하모닉 예술감독으로 임명될 예정이다. ‘20대 천재 지휘자’ 클라우스 메켈레는 오슬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와 오케스트라 드 파리의 음악감독을 동시에 맡고 있다. 특히 메켈레는 최근 세계 3대 오케스트라로 불리는 로열콘세르트헤바우(RCO)의 수석지휘자로 내한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클래식부산 관계자는 “정명훈 감독이 있었기 때문에 부산콘서트홀이 빠른 시일 안에 자리를 잡고, 대외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라며 “항상 부산을 1순위로 생각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제 부산콘서트홀이 어느 정도 안정기를 거쳤다고 판단해서 KBS교향악단 음악감독직을 수락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정 감독께서는 내후년 개관을 앞둔 부산오페라하우스의 성공적 정착에 누구보다 깊은 열정을 가지고 있다”면서 “여러 곳의 음악감독직 수행이 오페라하우스 성공에 더 좋은 요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명훈은 앞서 자르브뤼켄 방송교향악단,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산타 체칠리아 국립아카데미 오케스트라,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등 세계 유수 악단에서 음악감독을 지내며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왔다.
어둠에서 피어나는 생명, 마음의 무한을 그리다
부산 영도에서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을 보낸 서양화가 길 후(본명 김길후)가 부산에서 개인전 ‘무량대수’(無量大數)를 열고 있다. 지난해 8월 기장의 빌라쥬 드 아난티 컬처클럽 개인전 이후 1년 4개월 만이다. 서울 학고재 갤러리 전속 작가로, 중국 베이징과 대구를 오가며 꾸준히 작업해 온 그는 지난 12일부터 내년 2월 22일까지 영도구 복합문화공간 스페이스 원지에서 인간 내면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화면에 응축한 신작을 선보이고 있다. 초기작 몇 점과 10년 만에 완성한 작품 일부도 포함했지만, 대부분 신작이다. “작가의 자세는 창작에 대한 도전이잖아요. 새로운 작업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도전하는 게 작가가 가져야 할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창작자이지 장인이 아닙니다. 피카소가 최고인 이유는 계속된 도전에 있다고 봐요.” 전시 제목 ‘무량대수’는 인간의 감각으로 다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수를 뜻하며, 작가는 이를 ‘마음의 무한한 깊이와 파동’이라는 내면의 차원으로 확장한다. 캔버스에는 구체적 형상 대신 흐릿한 흔적과 사라지다 남은 질감, 빛과 어둠의 층이 남아 감정의 잔향처럼 화면을 채운다. 길 후의 회화는 ‘블랙’(black)에서 시작된다. 그는 검정을 ‘죽음과 삶의 경계선’ ‘빛이 나오기 직전의 어둠’으로 정의하며, 여러 겹의 칠 위에 브론즈와 스틸 물감을 스치듯 내리쳐 화면을 구축한다. 서양화의 재료(캔버스, 아크릴, 유화 등)를 사용하면서도 배접용 평붓을 무사의 칼처럼 휘두르는 몸동작은 동양적 회화론(화론육법)의 골법용필(骨法用筆)·기운생동(氣韻生動)을 현대적으로 실천하는 방식이다. 화면은 정지된 이미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기운이 진동하는 장으로 변한다. 때로는 그 붓이 종이에 구멍을 내기도 한다. 작가는 “마음속 흔들림을 붙잡기보다 그 찰나를 그대로 두려 했다”고 말한다. 길 후의 회화는 오랫동안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 대한 탐구를 중심에 두고 전개됐다. 그는 수만 점의 작업을 거듭하는 동안 스스로 감동하지 않는 그림은 모두 폐기하며, “과거의 그림이 지금의 나를 움직이지 못하면 존재 이유가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2000년 밀레니엄을 앞두고 그의 작품 1만 6000여 점을 불길 속에 내던져 버린 일도 있었다. 이후 그는 ‘블랙 페이퍼’로 작업하기 시작했다. “블랙 페이퍼는 경제적으로 부담이 없고, 보관하기가 쉬워서 1000점을 해도 얼마 안 됩니다. 지금도 그림을 없애는 일은 반복해서 합니다.” 끊임없는 덧칠과 긁힘, 삭제의 과정을 거치며 화면에 남는 것은 완성된 형상이 아니라 변화 그 자체다. ‘현자’(賢者) 연작과 ‘검은 눈물’(Black Tears) 작업에서 보듯, 그의 작업은 인간 존재의 비극성과 구원을 동시에 품은 실존적 미학으로 읽힌다. “‘검은 눈물’ 시리즈를 할 때 미셸 푸코를 좋아했습니다. ‘파놉티콘’ 이론을 다룬 푸코의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을 읽고 감옥 시리즈를 그렸습니다. 나 자신이 감옥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감옥 시리즈의 한 테마가 ‘검은 눈물’입니다. 인간은 존재 자체가 비극적이고 처참한 거예요.” 길 후의 일부 작업은 회화이면서 동시에 조각처럼 입체감을 드러내며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흐린다. 두껍게 중첩된 물감과 물질 덩어리가 실제 오브제처럼 공간을 점유하고, 표면은 시각과 촉각의 감각을 동시에 자극한다. 입체 작업에서 반복되는 ‘세 다리’(삼족) 구조는 균형과 불안정성을 동시에 내포한 구조적 메타포로, 전통적인 ‘주조-완성’ 중심의 조각 개념을 해체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작가는 신화적 상징 해석을 경계하며, 형식 자체가 드러내는 긴장과 불완전성에 주목한다. 평론가 윤진섭은 길 후의 작업 태도를 두고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이르지 못한다”는 말을 인용한 바 있다. 작가에게 매일의 그림은 단순한 생산이 아니라, 자신을 갱신하는 수행적 행위나 다름없다. “재작년에 그림 그릴 종이를 2만 장 구해 달라니까 독일 하네뮬레, 이탈리아 파브리아노, 영국 서머셋, 프랑스 아르쉬 등 전국에 있는 걸 다 가져와도 2만 장이 안 된다는 겁니다. 지금 7000장 정도 그렸는데, 2~3년 안에 1만 장을 해내고, 5년 안에는 2만 장을 끝낸다는 계획입니다. 인간의 깊은 내면을 담아내는 데는 오랜 축적이 필요하거든요. 그럴수록 다양한 작업을 해야 합니다.”
영화의전당 서승우 공연본부장, 문화예술회관발전 국무총리표창 수상
(재)영화의전당 서승우 공연본부장이 23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문화예술회관발전상 시상식에서 국무총리표창을 받았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가 주관하는 한국문화예술회관발전상은 전국 문예회관 종사자 및 문화 예술인 중에서 문화예술회관 발전에 이바지한 이에게 수여하는 상으로 2023년 제정됐다. 올해 국무총리표창 수상자인 서승우 본부장은 김해문화의전당 개관 준비와 운영 총괄, 영화의전당 개관 공연 감독 및 공연본부장으로서, 문화예술회관이 단순한 공연장이 아닌 지역 문화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서 본부장은 특히 공공성과 창의성의 균형을 이끄는 협력형 공연 모델을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기업의 사회공헌활동과 공연예술을 접목한 ‘맞춤형 공연 프로젝트’를 기획, 전국 문화예술회관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만들었다. 서 본부장이 추진한 영화의전당 ‘영화 드라마 로케이션 투어’는 공연예술과 영상산업, 관광이 결합한 융복합 프로젝트로, 지역 예술가에게 안정적인 창작 일자리와 지속 가능한 활동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서 본부장은 언론홍보학 석사, 예술경영학 박사과정을 수료하며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전문가로 평가받고 있다. 연극으로 공연계에 첫발을 디딘 후 부산연극협회, 부산예총, 부산시립극단, 부산문화재단, 부산시축제조직위 등에서 경력을 쌓았다. 서승우 본부장은 이번 수상에 대해 “개인 이름으로 받은 상이지만, 부산을 비롯한 지역의 예술가, 문화행정가, 무대 예술인들이 함께 만든 성과라고 생각한다”라며 “문화예술회관이 단순한 공연장이 아니라, 시민의 삶을 담아내는 ‘문화 들판’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부산노인전문제3병원, 공공보건의료·치매환자지원사업 ‘2관왕’
부산 공립 요양병원 ‘부산노인전문제3병원’은 2024년 공공보건 의료사업과 치매환자 지원사업 평가에서 모두 최우수 등급을 받았다고 23일 밝혔다. 공공보건 의료사업의 경우 지난해 우수 등급을 받은 데 이어 올해 최우수 등급을 달성하면서 지역 거점병원의 위상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치매환자 지원사업에서는 99.5점의 높은 점수를 받아 2년 연속 최우수 기관으로 선정되는 성과를 거뒀다. 전문성과 공공성을 동시에 인정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인본의료재단에서 운영 중인 부산노인전문제3병원은 지역 내 치매 안심 네트워크 구축, 보호자 교육, 인지재활 프로그램 등을 꾸준히 추진해 왔다. 공공보건 의료사업을 통해 의료 취약계층을 위한 건강진단 및 의료 상담, 무료 치매 선별검사 진행, 퇴원 치매 환자 주거환경 개선 등의 사업을 확대하기도 했다. 공립 요양병원으로서 부산시의 고령친화 정책 실현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부산노인전문제3병원은 치매전문병동 내 배회 공간을 조성하고, 회상 치료실을 운영하는 등 환자 맞춤형 환경개선 사업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지역 주민과 함께하는 산림복지와 힐링 프로그램 역시 공공 보건의료 우수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부산노인전문제3병원은 치매 환자와 가족을 위한 통합적 지원체계 구축에 역량을 집중한다는 방침이다. 부산노인전문제3병원 김여정 진료원장은 “이번 성과는 전 직원이 한마음으로 지역사회 건강 증진과 치매 환자 돌봄에 힘쓴 결과”라며 “공공 의료의 가치와 치매 친화 환경 조성을 위해 선도적 역할을 이어가겠다”고 전했다.
케데헌·K뮤지컬… K컬처 세계 문화 주류됐지만 영화 위기는 계속
2025년의 K컬처는 흥행 성적표보다 산업의 지형 변화를 더 또렷하게 드러낸 한 해였다. 음악과 드라마에 집중됐던 한류는 애니메이션, 뮤지컬, 전시, 문화유산 영역으로 확장됐고, 글로벌 시장에서도 장르 구분은 점차 무의미해졌다. 개별 작품의 성공을 넘어, 콘텐츠가 여러 산업을 관통하며 작동하는 구조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눈에 띄는 성과와 함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질문 역시 동시에 제기됐다. 올해 가장 상징적인 변화는 ‘흥행의 출발점’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공개 직후 북미와 유럽, 중남미 시장에서 빠르게 흥행하며 장기간 많이 본 콘텐츠 상위권을 유지했다. 누적 시청 수는 약 3억 회에 달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극장 싱어롱 상영으로까지 이어졌다. K팝 세계관에 오컬트 판타지와 한국적 생활 문화가 결합된 이 작품은 영상 시청을 넘어 음악 소비, 캐릭터 팬덤, 2차 창작으로 불을 지폈다. 영상 흥행이 음악 소비를 끌어올리고, OST 인기가 다시 작품의 생명력을 연장하는 선순환 구조가 본격적으로 가동된 것이다. 작품 속 한복과 전통 문양, 서울의 공간들은 설명 없이도 세계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고 K문화 열풍을 불러왔다. 영상 IP가 음악과 상품, 체험 콘텐츠로 확장되는 순환 구조가 가시화된 사례였다. K팝의 국제적 영향력은 여전히 견고했다. 그룹 블랙핑크 멤버 로제의 ‘아파트’는 장기 흥행과 함께 그래미 어워즈 후보에 오르며 글로벌 음악 시장에서 존재감을 각인했고, 군 생활을 마친 그룹 방탄소년단의 완전체 활동 재개가 예고되면서 K팝에 대한 관심도 다시 한번 세계 시장에서 확장하는 흐름을 보였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열풍이 이어지면서 OST인 ‘골든’도 큰 인기를 끌었다. 이 곡은 미국과 영국 차트 정상에 오르며 내년 2월 열리는 제68회 그래미어워즈 주요 부문 후보에도 이름을 올렸다. 같은 해 3월 개최되는 '제 98회 아카데미상' 주제가상 예비후보에도 들었다. 공연예술 분야에서도 지형 변화가 나타났다. 한국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토니상 주요 부문을 석권했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출발한 작품이 세계 상업 뮤지컬 시장에서 경쟁력을 입증한 사례로, K컬처의 확장이 영상 중심에서 무대 예술로까지 확장됐음을 보여준다. 문화 소비 방식도 달라졌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연간 관람객 600만 명을 돌파하며 ‘전시 공간’을 넘어 대중적 문화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했다. 경주에서 열린 신라 금관 특별전에는 개관과 동시에 관람객이 몰리는 현상이 반복됐다. 유물을 활용한 상품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빠르게 소진됐다. 전통 유산이 보존의 대상에서 경험과 소비의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K문화 전반에서 이뤄진 성과가 무색하게 영화 산업의 현실은 냉혹했다. 올해 국내 극장가는 관객 감소와 흥행 부진이 동시에 이어지며 구조적 위기를 실감해야 했다. 연간 관객 수는 전년 대비 큰 폭으로 줄었고, 흥행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천만 영화’는 끝내 한편도 나오지 않았다. 흥행 상위권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토피아 2’와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 각각 1, 2위를 차지했다. 22일 기준 박스오피스 1, 2위 역시 영화 ‘아바타: 불과 재’와 ‘주토피아 2’다. 한국 영화 가운데 가장 많은 관객을 모은 작품은 ‘좀비딸’이었지만, 과거와 같은 흥행 공식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관객 감소는 극장 산업 전반의 구조 변화를 촉발했다. CGV, 메가박스, 롯데시네마는 잇따라 지점 정리와 인력 감축에 나섰다. 롯데시네마와 메가박스는 합병 논의를 공식화했다. 이는 일시적 조정이 아니라, 멀티플렉스 중심 구조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판단이 반영된 결과로 영화계는 보고 있다.
시립예술단과 함께 문화 체험 '꿈꾸는 예술학교'로 오라
부산시립예술단이 지역 학생들의 다양한 문화예술 체험을 위해 2026년 ‘꿈꾸는 예술학교’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2020년부터 부산교육청이 학생 문화예술교육 활성화를 위해 매년 진행하는 ‘꿈꾸는 예술학교’는 지난 5년간 공연장, 학교 등에서 550여 회의 공연을 통해 부산 지역 학생들에게 감동과 재미를 선사했다. 내년에는 교향악단, 합창단, 국악관현악단, 극단, 청소년교향악단 등 부산시립예술단 5개 단체가 참여해 8개의 공연 프로그램을 평일에 40여 차례 진행할 예정이다. 내년 공연의 첫 무대는 부산시립극단이 4월 시작한다. 동화 신데렐라를 현대적으로 재해석, 유쾌한 어린이 뮤지컬 형식으로 풀어낸 ‘신데렐라: 너의 뜻대로’이다. 유치원생,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 관객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부산시립합창단은 4월 29~30일 부산문화회관 중극장에서 신작 어린이 음악극 ‘꿈을 향해’를 준비했다. 네 마리의 동물 친구들이 등장해 각자의 꿈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려 신나는 합창과 귀여운 안무를 바탕으로 구성해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어 ‘딩동댕 합창 여행’ 프로그램을 6월과 10월, 11월에 갖는다. 교과서 수록곡, 오페라와 뮤지컬, 가요, 가곡 등 다양한 곡들을 합창, 중창, 독창으로 들려준다. 새롭게 선보이는 토크 오페라 ‘오페라 속 편지 이야기’는 7월 9~10일 오전 10시 30분, 오후 2시 총 4회 부산시민회관 대극장에서 진행된다. 다양한 오페라 작품 속 ‘편지’ 장면을 소개한다. 대사나 아리아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을 전달하고, 사건의 발단을 알리거나 극의 결말에 영향을 미치는 등 극적 사건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도구인 편지 장면을 통해 오페라에 대한 이해도를 높인다. 부산시립청소년교향악단(지휘 이동신 국립창원대 교수)과 연출가인 유철우 계명대 교수가 함께한다.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의 ‘알쿵달쿵 우리 국악’은 5월 8일 시작해 10월, 11월에 국악 실내악, 악기별 중주곡, 로비 국악기 체험 등을 통해 한국 음악의 매력을 선사한다. ‘큰별쌤 최태성과 함께하는 역사 속 우리 음악 이야기’ 공연도 7월 2~3일 양일간 부산시민회관 대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부산시립교향악단은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부산문화회관 중극장에서 ‘우리 아이 음악회’(5월 6일)를 통해 오케스트라의 구성 및 악기 종류 등을 이해하기 쉽도록 소개한다. 부산시립청소년교향악단은 6월 4일 ‘똑! 똑! 클래식아 놀자’로 클래식 명곡과 다양한 레퍼토리를 통해 오케스트라의 풍성한 하모니와 울림을 전할 예정이다. 학생 단체 관람으로 신청이 가능하며 부산시립예술단 공연사업팀(051-607-3111)을 통해 예약할 수 있다.
견디며 익어 가는 얼굴들… 권용재 감독의 영화 ‘고당도’
떫은 감은 처음부터 달지 않다. 서둘러 베어 물면 입안에 거친 맛만 남고, 상품 가치도 없다. 하지만 시간을 견디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스스로 수분을 내어주고, 단단했던 결을 풀어내며 다디단 홍시가 되거나 곶감이 된다. 영화 ‘고당도’가 바라보는 가족 역시 그런 존재다. 함께 있다는 이유로 늘 옳지도, 오래 버텼다는 이유로 곧장 달아지지도 않는다. 메가폰을 잡은 권용재 감독은 한 가족을 떫은 채로 놓아두고, 그 안에서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끝내 남는지를 조용히 바라본다.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권 감독은 “감은 씹고 삼켜야 하는 과일”이라며 “가족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좋고 싫음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관계”라고 했다. 지난 10일 개봉한 ‘고당도’는 아버지의 부의금으로 조카의 의대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가짜 장례식을 치르는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감독은 이 과정에서 아직 익어 가는 중인 관계의 시간을 기록한다. 사랑이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책임과, 미움이라는 말로도 밀어낼 수 없는 연대가 겹겹이 쌓여 있는 한 가족을 조용히 응시한다. 감독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축적된 시간과 감정의 무게, 명암을 단순화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지나치게 현실에 밀착하면 공감보다 불쾌감이 먼저 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그래서 인물과 상황 사이에 의도적으로 간격을 두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설정만 놓고 보면 블랙코미디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영화는 웃음의 타이밍보다 감정이 멈칫하는 순간에 더 오래 머문다. 누군가는 독박 간병에 지쳐 있고, 누군가는 실패한 삶을 숨기듯 도망쳐 왔다. 또 다른 누군가는 아직 펼쳐보지도 못한 미래 앞에 서 있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만들어내는 장례식은 죽음을 애도하는 의식이기보다, 가족이라는 관계가 어디까지 버텨 왔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에 가깝다. 권 감독은 “후반 작업을 하면서야 이 영화가 블랙코미디에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발견하기 힘든 실낱같은 희망을 보여주고 싶은 게 내가 영화를 하고 싶은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영화의 중심에는 장녀 선영이 있다.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오랜 시간 아버지를 돌봐온 그는 가족의 균형을 붙잡고 버텨온 인물이다.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현실을 계산하고, 연민보다 책임을 먼저 떠안는다. 선영을 연기한 강말금은 이 인물을 비장하게 끌고 가지 않는다. 체념과 피로,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는 날 선 말들 사이에 미세하게 남은 온기를 남겨두며, 인물의 얼굴을 설득력 있게 완성한다. 그 덕분에 선영의 선택은 이해를 구하는 변명이 아니라, 우리 삶 어딘가에서 이미 반복돼 온 결정처럼 다가온다. 권 감독이 “선영은 누군가를 구원하는 인물이 아니라, 그저 버텨 온 사람”이라며 “그 버팀의 시간 자체를 존중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가족도 한 집단이잖아요. 해체될 수 있는 여러 상황이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들이 일정 부분 봉합이 되더라고요. 버티면서 살아내면 견딜 수 있다는 걸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보고 배운 것 같아요.” ‘고당도’는 단편영화 ‘조의’에서 출발한 이야기다. 권 감독은 그때보다 한 발짝 물러서 인물들을 바라보고, 웃음과 불편함 사이의 간격을 부드럽게 조율한다. 감과 제철 과일의 이미지, 고인의 ‘고(故)’와 도착한다는 의미의 ‘당도(當到)’가 겹쳐진 제목처럼, 영화는 서서히 익어 가는 시간을 견디는 가족의 얼굴을 비춘다. 덜 익어 떫고, 너무 익어 무르기 직전의 순간, ‘고당도’가 붙잡는 건 바로 그 지점이다. 감독은 “따뜻한 가족 이야기보다 차가운 가족 이야기를 좋아하고 아이러니한 지점에 관심이 간다”며 “가족만큼 아이러니한 관계가 없는 것 같다. 놀이터에서 노부부가 함께 노는 장면 같은 걸 보면 마음에 그 모습이 깊이 맺힌다”고 했다. 첫 장편을 세상에 내놓은 그는 이제 다음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 또 다른 가족 이야기다. 다만 이번에는 ‘건강하게 해체되는 관계’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여전히 회색지대에 놓인 것들이 많아요. 저는 그런 걸 조금이라도 걷어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선한 영향력이라고 하잖아요. 저도 거기에 작게나마 함께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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