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윤의 세상톡톡] 차라리 슈바이처 박사에게 맡기고 싶다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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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급차 응급실 뺑뺑이 속출에
1339 시스템 공백 지적 나와
소송 부담에 방어 진료도 난무
특정 과 없으면 응급환자 기피
과 구분 않고 진료한 슈바이처
그 시대보다 못한 상황이 현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국내에선 아프리카에서 의사로 활약한 에피소드만 주로 알려져 있지만 다방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위인이다. 30세까지 신학과 철학을 전공한 정통 인문학자였다가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한 꿈을 실현하겠다며 7년 동안 의학 공부를 해 37세 늦깎이 의사가 됐다. 음악에도 뛰어나 오르간 연주 실력은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이었던 당시 유럽에서도 일류로 꼽혔다. 특히 구형 파이프 오르간 연주 실력이 출중해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서는 흑인들을 살리더니 유럽에서는 파이프 오르간을 되살렸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우리가 익히 아는 슈바이처 박사의 활약상은 그가 선교를 위해 아프리카 땅을 밟으면서 시작된다. 유럽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열악한 아프리카의 의료 수준을 본 그는 간호사 면허를 획득해 의사 남편과 봉사의 길을 나선 부인과 함께 전방위적 의료 행위에 몰두한다. 감기 몸살과 같은 경증 환자부터 복통과 고열에 시달리는 내과 환자와 맹장염 같은 외과 수술이 필요한 환자까지 가리지 않고 돌보았을 터이다. 난산으로 힘들어 하는 임신부를 만났을 땐 산부인과 의사로도 활약했을 것이며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병원을 찾아온 모든 환자들을 기꺼이 치료했을 것이다. 다재다능한 그가 진료에서 진료 과를 가리며 뒷짐졌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런 슈바이처 부부의 활약으로 당시 해당 지역에선 어떤 유형의 응급환자라도 진료를 받아보지도 못 하는 일은 없었을 것임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그게 20세기 초반의 일이다.


무대를 21세기로 접어든 지도 벌써 수십 년이 된 대한민국으로 옮기면 슈바이처 박사가 활약하던 시대보다 더 열악한 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드는 현실을 마주한다.

얼마 전 국내에서는 한 고등학생이 건물에서 추락해 사경을 헤매던 중 119 구급차에 실려갔으나 응급 치료를 받아보지도 못 하고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대표적 ‘응급실 뺑뺑이’ 사례로 불린 이 사고는 119 대원이 추락 후 경련을 일으키는 환자를 보고 소아신경과 진료가 가능한 응급실을 찾다가 마땅한 의사가 없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의료계에서는 외상센터로 이송해야 할 환자를 소아신경과 진료 가능 병원으로 보내려다 벌어진 일이라는 얘기들이 나돈다. 1339 응급의료정보센터가 있었던 2012년 이전엔 응급실에 일단 도착한 환자를 초기 진단한 뒤 적절한 병원으로 이송하는 시스템이 작동했으나 지금은 119에만 응급실 타진을 전적으로 맡기고 있어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뒤따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지적돼야 하는 것은 이 같은 중증 응급환자를 소아신경과 전문의가 없더라도 받을 수 있는 체계가 왜 없느냐 하는 점이다. 일반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로는 왜 응급 진료가 안 되는 것이며 어떤 의사라도 목숨이 경각에 달린 환자를 일단 치료부터 하고 보는 일이 왜 그다지 힘든지 일반 국민들은 너무나 이해하기가 힘들다. 비행 중인 여객기 안에서 중증 응급환자가 발생했을 때 기내에서 특정 과 전문의를 찾고 있진 않을 것 아닌가. 어떤 의사든 도움을 주려 뛰어오고 응급 진료부터 하고 봐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함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일단 목숨이 경각에 달린 환자를 살리고 봐야 한다는 인지상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데 대해 의료계는 사법 리스크를 원인으로 꼽는다. 의료계는 신생아의 응급 수술을 소아외과 전문의가 아닌 일반외과 전문의가 시행했다가 결과가 좋지 않자 법원이 담당 진료 과가 아닌 일반외과 의사가 수술했다는 이유로 거액의 배상 판결을 한 전례를 든다. 응급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수술을 한 의사에게 징벌이 내려진다면 의사들은 방어를 위해 조금이라도 과 이름이 다를 경우 응급 진료를 하지 않으려 든다는 논리다. 이 때문에 의료계는 응급 진료에 임한 의사가 고의나 중과실을 범한 경우가 아니라면 책임을 덜어주는 방안이 시급히 적용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형사 불기소를 원칙으로 하고 결과가 좋지 않아 배상이 필요할 경우 민사소송은 국민건강보험공단과 심사평가원이 피고를 대리하는 방법 등이 거론된다.

시스템의 부실이든 과도한 사법 리스크에 따른 방어 진료든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환자의 치료가 제때 이뤄지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의 불행이다. 시스템이 부실하다면 이전에 제대로 작동했다는 1339 응급의료정보센터 부활을 검토해야 할 것이고 사법 리스크가 문제라면 국회가 나서서라도 법적인 뒷받침을 서둘러야 할 일이다.

이런 현실을 방치한다면 과를 가리지 않고 진료를 한 슈바이처 박사에게 응급 진료를 맡기는 게 더 낫지 않느냐는 푸념에도 할 말이 없어질 터이다.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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