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적한 바닥, 퀴퀴한 냄새… 박스 들추자 바퀴벌레 튀어나와

김동우 기자 friend@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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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지역 저장강박 의심가구 급증
작년 129건, 올해 1~9월 157세대
악취·벌레·오염 등 이웃들도 ‘고통’
지자체별 정확한 현황 파악도 안 돼
정신 질환·사회적 고립 등 원인 다양
전문가 “청소 대응 넘어 관계 회복을”

지난 14일 부산 부산진구 전포동의 저장강박 의심가구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집 안을 정리·청소하고 있다. 정대현 기자 jhyun@ 지난 14일 부산 부산진구 전포동의 저장강박 의심가구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집 안을 정리·청소하고 있다. 정대현 기자 jhyun@

집 안에 물건이나 쓰레기를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는 저장강박 의심가구가 해마다 늘고 있다. 이에 따라 위생 등 생활 여건 악화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지만, 정확한 실태 파악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4일 오전 9시 30분 부산진구 전포동의 한 아파트. 60대 여성 A 씨가 혼자 살고 있는 집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퀴퀴한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했다. 끈적한 거실 바닥과 소파에는 박스와 캔, 음식물이 남은 일회용 도시락 용기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박스를 들추자, 바퀴벌레가 튀어나왔다. 배달 용기가 산처럼 쌓인 부엌 싱크대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5년 전부터 치매를 앓아 온 A 씨는 지난해 기초생활수급자로 등록된 이후 행정복지센터의 방문 조사 과정에서 저장강박 의심가구로 분류됐다. 행정복지센터에 따르면 A 씨는 약 7개월 전부터 물건들을 버리지 않고 모으는 증세가 악화했다. 왜 쓰레기를 모으는지 묻자 A 씨는 “쓰레기가 아니라 평소에 쓰는 물건이어서 버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행정복지센터는 A 씨가 청소를 거부하자, 자녀를 통해 어렵사리 A 씨를 설득할 수 있었다.

이날 부산진구청이 주관하는 ‘저장강박 의심가구 주거환경개선사업’에 참가한 자원봉사자 10여 명은 약 3시간에 걸쳐 집안 가득 쌓인 폐기물을 배출하고 청소했다. 작업에는 75L들이 자루 약 60개가 사용됐다. 2.5t 트럭 2대 분량이다. 부산진구 사랑의열매 행복봉사단 배금향 회장은 “악취가 심해 작업이 힘든 여름철에는 사람 모으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26일 부산시 16개 구군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파악된 저장강박 의심가구는 157세대다. 이는 지난해 1년 동안 파악된 129건을 뛰어넘는 수치다. 2022년에는 119건으로 집계됐다. 저장강박은 물건을 버리지 못하거나 외부의 쓰레기를 수집해 집 안에 쌓아두는 강박 장애의 일종이다.

저장강박으로 인한 피해는 이웃들도 겪는다. 악취와 해충, 오염 등 위생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 악취와 바퀴벌레가 이웃집으로 쉽게 퍼진다. 이에 따라 갈등을 빚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박스 등 가연성 물질을 모으는 경우가 많아 화재 위험성도 높다. 실제로 올해 3월 부산 북구와 해운대구의 저장강박 의심가구에서 화재가 발생해 거주자 2명이 숨졌다. 당시 화재가 난 북구의 주택에는 1t 트럭 1대 분량의 쓰레기가 가득했다.

저장강박 의심가구는 드러난 수치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 지역 상당수 지자체에서는 이웃의 민원 등으로 발굴한 전체 사례 가운데, 실제 지원이 이뤄진 경우에만 저장강박 의심가구로 집계해 관리하고 있다. 사하구 등 올해 처음으로 현황을 파악하기 시작한 지자체도 있다.

부산진구에서는 정확한 실태 파악을 위해 지난달 22일 저장강박 의심가구 지원 대상의 범위를 확대하고, 실태 조사를 의무화하도록 관련 조례가 개정되기도 했다. 조례 개정을 주도한 부산진구의회 한일태 구의원은 “최근 주민 제보로 저장강박 의심가구 현장에 방문하는 과정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저장강박 의심가구는 발견돼도 즉각적인 조치가 어렵다. 당사자의 거부 때문이다. 이들 상당수는 치매 등 정신질환으로 정상적인 판단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오랜 사회적 고립으로 소통 자체를 거부하는 사례도 흔하다. 한 구청 관계자는 “개입을 거부하면 사유재산 침해 소지가 있어 강행할 수 없다”며 “1년 넘게 설득해 겨우 집을 청소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확한 실태 파악과 지역 공동체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현재 지자체별로 청소 위주로 이뤄지는 저장강박 의심가구 대응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제각각인 조사의 기준과 방식에 대해 부산시가 지침을 제시하고 통합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라대학교 상담치료복지학과 손지현 교수는 “이웃 간 관계가 단절된 사회 속에서는 누구나 당사자가 될 수 있고, ‘깨진 유리창’처럼 지역 내 거주 환경을 점차 악화시킨다는 점에서 저장강박 의심가구는 개인을 넘어선 사회적 문제”라며 “대응을 위한 조례 제정, 전문 인력 양성과 이웃 커뮤니티 차원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부산시 복지정책과 관계자는 “저장강박은 구군마다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시 차원에서 일률적인 지원과 개입이 어렵다”며 “이를 위한 조례 등 제도적 근거도 아직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난 14일 부산 부산진구 전포동의 저장강박 의심가구 내부. 거실에 각종 물건이 쌓여 있다. 정대현 기자 jhyun@ 지난 14일 부산 부산진구 전포동의 저장강박 의심가구 내부. 거실에 각종 물건이 쌓여 있다. 정대현 기자 jhyun@


김동우 기자 friend@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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