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디지털 무역금융, 부산이 표준을 만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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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준식 비온미디어 대표

화물 이동 속도보다 대금 결제 늦어
중소 수출기업은 자금 효율성 저하

블록체인, 대금 집행 투명하게 기록
스테이블코인, 인터넷으로 즉시 송금

부산, 물류·금융·데이터 통합해서
진정한 '디지털 해양 허브'로 진화를

대한민국 수출의 절반 이상이 부산항을 거쳐 간다. 2024년 2440만TEU를 처리하며 세계 7위 항만 자리를 지켰다. 부산에서 실은 컨테이너가 베트남 하노이까지 가는 데는 하루면 충분하다. 정작 이상한 건 그다음이다. 물건값이 수출업체 계좌에 도착하려면 일주일이 걸린다. 부산항의 크레인은 5G로 제어되고, 선박 스케줄은 AI가 최적화한다. 반면 송금은 여전히 은행 영업시간을 기다리고, 서류 확인에 며칠이 걸린다. 물류는 이미 실시간으로 움직이는데, 금융은 여전히 복수의 중개 은행을 거치는 절차와 영업시간 제약에 묶여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화물의 이동은 센서와 GPS가 실시간으로 추적하지만, 돈의 이동은 여전히 사람의 확인과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중개 은행을 경유하고, 환전 수수료를 내며, 영업일 기준으로 처리된다. 그 사이 기업 자금은 공중에 떠 있고, 이자 비용은 고스란히 기업 몫이 된다. 특히 중소 수출기업에 이 일주일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다. 수출 대금이 묶여 있는 동안 운전자금 대출 이자는 계속 나가고, 다음 발주를 위한 원자재 구매는 미뤄진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중소 수출기업의 평균 운전자금 회전 기간은 90일 안팎이다. 결제가 일주일만 빨라져도 자금 효율은 8% 가까이 개선된다.

블록체인과 스테이블코인은 이 구조를 바꾼다. 블록체인은 거래 기록을 위변조할 수 없게 만들어 신뢰 검증을 사람이 아닌 알고리즘에 맡긴다. 조건이 충족되면 자동으로 대금이 집행되고, 모든 과정이 투명하게 기록된다. 스테이블코인은 달러 가치에 1대1로 연동된 디지털 화폐다. 비트코인처럼 가격이 들썩이지 않으면서도 인터넷만 있으면 즉시 송금할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 무역 결제는 단순한 효율성 개선이 아니다. 전신환에서 스위프트로, 다시 블록체인 기반 즉시결제로 이어지는 국제결제 시스템의 근본적 전환이다.

이미 글로벌 금융 기업들은 변화에 나섰다. 페이팔은 자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했고, JP모건 같은 대형 은행들도 디지털자산 기반 결제 인프라 구축에 나섰다. 비자와 마스터카드는 스테이블코인 결제 시스템 통합을 추진 중이다. 무역 결제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그렇다면 부산항에서는 실제로 어떻게 작동할까. 부산항에서 화물이 선적되는 순간 스마트 계약이 작동해 계약금 일부가 자동 송금된다. 배가 베트남 항구에 도착하고 전자선하증권이 확인되면 잔금이 정산된다. 결제 시간은 ‘수일’에서 ‘수분’으로 줄고, 중개 은행 수수료와 환전 비용을 합친 총 거래비용은 거래액의 3~5%에서 1% 이하로 줄어들 수 있다.

이런 변화는 금융기관의 역할도 근본적으로 바꾼다. 신용장 발급으로 거래를 보증하던 전통적 역할은 스마트 계약이 대신한다. 은행은 이제 거래 중개자가 아닌, 규제 준수와 리스크 관리 서비스 제공자로 전환된다. 자금세탁 방지 모니터링, 제재 대상 검증, 무역금융 컨설팅이 새로운 수익원이 된다.

부산은 이 변화를 선도할 모든 조건을 갖췄다. 2019년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된 이후 금융·물류·공공 서비스 분야에서 실증을 진행하며 블록체인 기술과 산업 간 융합을 준비해 왔다. 부산의 진짜 강점은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중국과 일본 중간에 위치한 부산항은 동북아 허브항만으로서 중국 동북지역과 일본 서안 항만들을 연결한다.

환적화물이 전체 물동량의 50% 이상을 차지한다. 환적은 여러 국가 간 복잡한 결제가 동시에 발생하는 거래다. 중국 수출업체가 일본 수입업체에 파는 화물이 부산을 거쳐 가면서, 한국 물류사와 선사에 각각 대금을 지불해야 한다. 이런 다자간 결제를 스테이블코인으로 처리하면 결제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블록체인 규제특구의 실증 경험과 동북아 허브라는 지정학적 이점이 결합하면, 부산항은 물류·금융·데이터가 통합된 디지털 해양 허브로 진화할 수 있다.

글로벌 경쟁은 이미 시작됐다. 싱가포르는 2023년 세계 최초로 스테이블코인 규제 프레임워크를 도입해 승인된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가했다. 두바이는 2024년 중앙은행 라이선스 제도를 완성하며 리플과 테더 같은 글로벌 기업을 유치했다. 홍콩도 올해 8월 스테이블코인 조례를 시행하며 앤트그룹 같은 중국 빅테크가 발행을 준비 중이다. 누가 먼저 규제와 인프라를 완성하느냐에 따라 아시아 디지털 무역금융의 표준이 결정된다. 부산이 그 표준을 선점한다면, 아시아 물류 중심지이자 디지털 금융 중심지라는 두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블록체인이 물류를 추적하고 스테이블코인이 결제를 실행하며 스마트 계약이 거래를 검증하는 구조. 이것이 완성되면 부산항은 아시아 디지털 무역금융의 거점이 된다. 기술은 준비됐다. 이제 실증을 넘어 실행으로 옮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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