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유권자의 망각을 먹고 사는 무책임 정치
전창훈 서울정치부장
'목불인견' 국민 환멸 부른 지난 국감
현행 제도로는 선거 외 심판 수단 없어
여론 안중 없는 행태 배경은 유권자의 망각
기억하는 것만이 정치를 바꿀 동력
‘목불인견’.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이재명 정부 첫 국정감사였다. 우리 대의민주주의 시스템에 틈입한 병증이 ‘말기’에 이르렀다는 절망감이 들 정도다. 그 졸렬한 행태를 다시 열거해 국민적 화를 돋우고 싶지 않다. 사실 이런 비판마저 그들에게는 훈장이다. 야당 의원의 질의를 방해하기 위해 옆자리서 째려보는 황당한 기행을 벌인 최혁진 의원에게는 이후 후원금이 쇄도했다. 강성 팬덤 정치가 저질 의원을 영웅으로 만드는 꼴이다. 최근 팬덤의 총애를 받는 의원들을 보면 하나같이 국회를 파행으로 몰고 간 주인공들이다. 반대로 팬덤이 세운 콜로세움의 검투사 역할을 거부하는 정치인들은 민주당에선 ‘수박’이라고 배척 당하고, 국민의힘에서는 ‘당성’이 부족하다고 질타 받는다.
정치인들의 생멸이야 그들만의 리그에서 벌어지는 권력쟁투일 뿐이라고 치부하자. 문제는 ‘유튜브 쇼츠’로 재미나 보겠다는 무책임한 정치 속에 우리의 삶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권의 검찰 개혁에 대해 많은 양식 있는 법조인들이 “보완수사권이 없어진 상태에서 경찰이 1차 수사를 마무리할 경우 불송치 증가, 수사 지연, 피해자 보호 공백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를 공통적으로 쏟아냈다. 그 중에는 소위 진보 인사들도 적지 않다. 성향을 막론하고 이런 부작용을 예견한다면, 그건 현실화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일 테다. 그러나 이런 후유증은 시간을 두고 서서히 나타나고, 그 때 쯤에는 피해의 기원을 따지기가 쉽지 않다. 당연히 그 책임을 묻는 일은 더욱 어렵다.
의원들은 이런 허점을 잘 안다. 난장판 국감 중에 이런 문답이 있었다. 법사위에 참고인으로 출석한 안미현 검사는 “(검찰 개혁으로) 부작용이 크게 일어나면 책임을 지셔야 할 분들은 무리하게 입법을 하신 분들이 된다”고 했다. 안 검사는 과거 국민의힘 권성동 의원의 채용비리 의혹을 수사에 대한 검찰 수뇌부의 중단 압박을 폭로한, 굳이 분류하자면 여당 성향 검사다. 그런 사람이 ‘입법 부작용의 책임은 입법한 사람에게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얘기를 하자, 여당 의원들의 반응이 가관이었다. “그게 말인가. 그러니까 검사답다는 소리를 듣는 것”, “입법자가 책임지라는 건 어디서 나온 자세냐”고 쏘아붙였다. 책임질 생각이 전혀 없다가 정곡을 찔린 듯하다.
이들이 책임에 무신경한 데는 쌓인 경험이 있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유례 없는 집값 폭등을 일으키면서 주거 사다리 붕괴 등 사회 전반에 엄청난 상처를 남겼다. 명백한 정책 실패였다. 이런 요인이 겹쳐 문 정권은 다음 대선에서 야당에 권력을 내줬지만, 당시 관련 정책 입법에 앞장섰던 의원들 대부분은 22대 국회에서도 건재했다. 정권은 심판해도, 그 정책을 뒷받침한 국회의원을 심판하는 투표가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당장 ‘혁진 기행’의 장본인이 탄생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21대 국회에서 여권의 일방적인 선거법 개정으로 탄생한 비례위성정당이 발단이었지만, 이를 강행한 여당 지도부가 누군지 알고 있는 유권자가 얼마나 될까.
결국 무책임 정치의 최대 동력은 유권자들의 망각이다. 여당이 이재명 대통령 관련 ‘재판중지법’을 ‘국정안정법’으로 바꾸겠다는 속이 빤히 보이는 ‘언어 혼란 전술’을 밀어부치는 데에는 대선 전만 해도 ‘신속한 재판’을 원했던 여론이 과반이었다는 사실을 유권자들이 잊어버렸다고 믿기 때문일 테다. ‘입법 폭주’도 마찬가지다. 정가에서는 여권이 연말까지 각종 입법을 마무리한 뒤 지방선거 시즌인 내년부터는 중도 실용 모드로 급전환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망각의 힘(?)을 믿는 건 국민의힘이라고 다르지 않다.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을 걱정하던 후배 의원에게 “내일, 모레, 1년 후에 국민은 또 달라진다. 1년 후면 다 찍어주더라”며 유권자의 ‘기억 시한’을 제시한 바 있다.
고 노회찬 의원이 “50년 동안 똑같은 판에다 삼겹살을 구워먹으면 고기가 시커매집니다. 판을 갈 때가 왔다”고 양당 체제의 쇄신을 외친 지 20년이 지났다. 이후에도 정치권에서 틈만 나면 ‘객토’니, ‘전면 쇄신’ 같은 말들을 쏟아냈지만, 실행 의지 없는 허망한 말의 잔치였다. 죽을 듯 싸우는 여야지만, 자리 보전에는 ‘찰떡궁합’이다. 대통령도 적용되는 탄핵은커녕, 지자체장·지방의원에까지 적용되는 주민소환제도 국회의원은 예외다. 선거 외에는 저질 의원들을 쫓아낼 방법이 없다.
그러니 기억하자. ‘기만의 시대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혁명적 행위’라고 했다. ‘국민은 잊는다’는 오만한 정치인들이 득세하는 시대에 기억은 정치를 조금이나마 변화시킬 동력이다. 특히 ‘국감 중 딸 결혼식’으로 국민적 지탄을 받고 있는 최민희 의원이 올해 초 “정치권의 더 책임 있는 의정활동”을 위해 국회의원 국민소환제를 대표발의했다는 사실도 꼭 기억해두자.
전창훈 기자 jch@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