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정치가 가로막는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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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정희 전 (사)여성인권지원센터 '살림' 상임대표

몇 해 전 부산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여성 시의원이 당선 이후 면담을 청한 한 기업체의 사장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남자 시의원이라면) 보통은 룸살롱에서 뵙자고 하면 되는데 여성분은 어디서 뵙자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에서 이런 일이 버젓이 일어났다. 오죽하면 룸살롱을 ‘비즈니스 클럽’이라고 불렀겠는가.

이 일화는 한국 사회의 정치가 어떤 방식으로 성차별적 문화를 가지게 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룸살롱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유흥’과 ‘접대’가 주로 남성을 대상으로 일어난다. 성 산업을 뿌리로 하고 있는 이러한 룸살롱 문화는 여성을 소외시키고, 성적 대상으로 취급하도록 만든다. 정치권에서 이러한 남성 중심의 네트워크는 여성의 정치 진입을 실질적으로 가로막는 비공식 제도로 작용해왔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유흥업소 접대 문화에 대해서 일반 시민 응답자의 76.6%가 “성차별, 성희롱 등 부정적 사회문화를 만든다”고 답했다. 일반 국민의 상식 수준에서도 수용하기 어려운 구습이 정치와 사법 등 우리 사회의 중심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면 참담한 일이다.

국민의 상식에도 못 미치는 구습

정치권에서 자꾸 벌어지는 현실

조국혁신당 성비위 사건 공론화

성평등 내건 당이라 더 큰 실망

성차별적인 문화 바꾸려는 노력

거기에서 진정한 반성 시작해야

정당 내에서 여성 정치인 및 당직자에 대한 일련의 성희롱, 성폭력 사건이 벌어지는 이유도 이 같은 성차별적 정치 문화의 연장선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은 다방면에서 빠른 속도로 여권 신장을 이루어냈지만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은 눈에 띌 정도로 낮다. 여성 정치인은 남성 중심의 조직 문화, 뿌리 깊은 성차별적 편견, 성적 괴롭힘 등 구조적, 문화적 장벽에 여전히 가로막혀 있다. 정당은 이러한 성차별적 문화를 바꾸어나갈 책임이 있지만, 그간 국민 뒤통수를 때리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 성평등 가치를 우위로 내세우는 비교적 진보적인 정당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최근 조국혁신당에서 당내 성비위 사건이 공론화된 바 있다. 여성 당직자에 대한 직장 내 괴롭힘과 성추행이 보고되고, 여성위와 시도당에서 가해자 업무 배제 및 빠른 진상 조사를 수차례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앙당의 사건 처리 과정은 절차적 형식주의에 그쳤고, 주요 당직자마저 ‘성희롱은 범죄가 아니다’라며 가해자를 두둔하면서 혁신당의 지지율은 급락했다. 이는 몇 해 전 더불어민주당 출신 지자체장의 권력형 성범죄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성평등 민주주의를 주요 방향으로 삼고 있는 정당이기에 국민의 실망감이 컸다. 조직 보위를 더 우선시하거나 피해자를 공격하는 2차 가해도 일어났다.

물론 성비위 사건이나 권력형 성폭력 사건을 공개적으로 해결해가는 과정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정당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일이다. 가장 성평등한 나라로 알려진 스웨덴에서 성범죄 신고율이 높은 이유도 신고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어서 그렇다는 분석을 상기해보면 더욱 그렇다. 피해자가 말을 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조국혁신당의 경우도 당내에 우려와 자성의 목소리가 있었으며 중앙 조직의 미흡한 해결을 두고 탈당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권력의 중심에 있는 이들의 국민 상식에 어긋나는, 반하기까지 하는 태도와 언행이 문제가 되었다. 2차 피해가 어김없이 일어나고 문제의 핵심을 외면한 사태로 이어진 것이다.

정당에서 반복되는 성희롱, 성폭력 사건과 이에 따르는 2차 피해가 일어난다면 이에 대한 구조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보다 근본적으로 성차별적인 조직 구조와 문화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특히 진보 진영의 경우 ‘성적 엄숙주의로부터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왜곡된 성 관념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성적 불쾌감을 주는 음담패설을 분위기 띄우는 농담으로 이해하고, 마음만 먹으면 폭력적이고 착취적인 방식을 동원해서 성희롱, 성폭력을 일삼는 일은 국민의 상식 수준과 동떨어져 있다. 성폭력, 성희롱 사건이 일어나는 환경도 문제지만 정치권에서 성희롱,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는 역량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이다. 때문에 정치가 이룩해야 할 성평등은 스스로의 성차별적 문화를 인식하고 바꾸어나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존폐 위기에 몰렸던 여성가족부는 이제 성평등가족부로 그 기능을 강화하고 확대 개편을 눈앞에 두고 있다. 지난 정부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에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우리 사회는 미투 운동을 거쳐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성폭력 문제를 가시화하고 피해자다움의 통념에 도전했다. 그 결과로 시민의 사회적 성인지 감수성이 향상되었다. 하물며 정당이 성평등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정치권이 성숙한 시민의 상식 수준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통렬한 자기 반성을 통해 거듭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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