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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참모의 조건
훌륭한 지도자 뒤에는 언제나 뛰어난 참모가 있다. 참모의 역할에 따라 지도자의 위상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모든 역사를 관통하는 불변의 진리다. 유비가 중국 삼국시대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제갈량이라는 걸출한 책사 덕분이었고, 딕 모리스라는 세계적인 킹 메이커가 없었다면 아칸소주 법무장관이었던 빌 클린턴이 미국 42대 대통령에 당선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참모는 ‘윗사람을 도와 일을 꾀하는 사람’이나 ‘지모가 뛰어난 사람’을 말한다. 책사나 킹 메이커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 참모는 전략·전술에 능해야 하고 국내외 정세를 잘 꿰뚫고 있어야 한다. 지도자가 정확한 판단을 내리도록 조언하는 것도 참모의 역할이다. 리더가 잘못된 길을 갈 때는 목숨을 걸고 바로 잡을 수 있어야 한다. 지도자가 반대 세력도 과감히 끌어안을 수 있는 포용심을 갖게 만들어야 한다.
대한민국 대통령에겐 다양한 부류의 참모가 있다. 국무총리와 장·차관, 정보기관 수장, 공공기관장까지 수십명에 이른다. 넓은 의미로 대통령이 임명한 공직자는 모두 참모로 봐야 한다. 대통령실 멤버들은 핵심 참모로 분류된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 반환점을 앞둔 상황에서 과연 참모다운 참모는 얼마나 될까. 윤 대통령에게 쓴소리 하면서 혜안을 제시하는 유능한 참모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윤 대통령은 지난 2일 22대 국회 개원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현직 대통령의 국회 개원식 불참은 처음이다. 여러가지 이유를 들었지만 핑계에 불과하다. 역대 대통령 중 국회가 마음에 들어서 개원식에 참석한 사람은 거의 없다. 삼권분립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국회가 협조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국정운영이 힘들다. 더욱이 지금은 거대 야당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이다. 가기 싫어도 가야 한다는 의미다.
의대 증원 문제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의료계의 현실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의대 증원 자체에 회의적이다. 백번 양보해 의대 정원을 늘린다고 해도 그 규모나 시기는 주도면밀하게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 정부는 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코 앞에 두고 의대 증원을 밀여붙였다. 그러자 지난 대선 때 윤 대통령을 지지했던 상당수 유권자들까지 돌아섰다. 집권당의 총선 참패는 예고된 셈이었다.
고집 부려서 될 일이 있고,안 될 일이 있다. 그리고 국정운영은 고집으로 되지 않는다. 최근 국정운영 지지율이 20%대에 불과한 것에서 드러났듯이 우리 국민들은 윤 대통령에게 국정 기조 전환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의료대란에 책임이 있는 인사들을 과감히 문책하고 의대 증원 문제를 원점에서 재검토 해야 한다. 곧 출범할 ‘여야의정협의체’ 결정을 전면 수용하겠다고 사전 약속해야 한다.
대통령의 참모는 자리에 연연해선 안 된다. 예리한 분석력과 판단력으로 국내외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해서 대통령에게 정확하게 보고해야 한다. 대통령이 수용하지 않을까 두려워서 보고하지 못하는 참모는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다. 그런 참모는 하루빨리 물러나야 한다. 그들을 대신할 유능한 참모는 주위에 많다.
여야 지도자의 참모들도 한심하기 그지 않다.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의 참모라면 그를 이번 당대표 선거에 출마시키지 말았어야 했고,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핵심 측근은 그와 열성 지지자를 서둘러 분리시켜야 한다. 우선 한 대표는 국민의힘 총선 참패에 적잖은 책임이 있는데다, 윤 대통령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 지금과 같은 윤-한 갈등이 계속된다면 한 대표는 상처만 입고 중도하차할 가능성이 있다. 이 대표도 친명계 정치인들과의 관계 정립이 필요하다.
요즘 박형준 부산시장의 인사를 보면 답답한 생각이 든다. 특히 최근에 단행된 정무라인 인사는 온전히 부산시장 선거용이다. 차기 대권과 관련된 인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차기 경쟁자인 오세훈 서울시장의 정무라인 인사와 극히 대조적이다. 단언컨대 박 시장은 현재 거론되는 차기 대권주자 중 가장 경쟁력 있는 인물이다. 풍부한 경험과 높은 식견,글로벌 마인드 등 다른 대권주자들이 갖지 못한 훌륭한 자산을 갖고 있다. 박 시장이 차기 대권경쟁에 적극 임해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도 그의 참모들은 시장 선거 준비에 올인하는 형국이다. 중앙 정치권 사정에 밝고, 인맥이 두터운 참모진을 대거 발탁해야 한다.
국회의원에겐 보좌관이 핵심 참모 역할을 한다. 보좌관이 국회의원 성패의 70% 이상 감당한다. 그런 점에서 상당수 부울경 국회의원들의 보좌진 구성은 낙제점을 면키 어렵다. 참모없는 리더는 존재할 수 없다.
2024-09-08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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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떠날 것인가, 구독할 것인가
국가나 기업, 조직은 왜 퇴보하는가. 미국의 경제학자 앨버트 허시먼(1915~2012)이 파고든 주제다. 대강 정리하자면, 그는 기술발전에 따른 잉여(느슨함)가 퇴보를 초래한다고 봤다. 발전경제학자인 그는 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유럽을 재건한 ‘마셜플랜’에도 참여했다.
그가 1970년에 쓴 책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는 그런 퇴보 상황의 치유 방안을 다룬다. 떠나거나(Exit), 항의하거나(Voice), 충성하거나(Loyalty). 이 3가지 선택의 상호작용을 통해 회복 모멘텀을 만들 수 있다는 요지다.
부산이 퇴보하고 있다. 지역이 소멸하고 있다. 거대한 블랙홀, 수도권이 돈과 사람을 마구 빨아들인다. 그 결과로 수도권은 고도비만, 지역은 영양실조 상태다. 윤석열 대통령도 “과도한 집중을 막아야 한다”고 최근 밝혔다.
지역의 청년 유출(그로 인한 고령화)과 일자리 부족 문제를 굳이 여기에서 중언부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허시먼 식으로 보자면 이런 현실에서 지역민에게는 3가지 선택지가 있다. 지역을 떠나거나, 일극 체제에 항의하거나, 그도저도 아니면 군말 없이 잠자코 있거나.
청년들의 이탈은 곧 항의 기능의 약화를 부른다. ‘삶의 품질’에 관심 많고, 앞장서서 목소리를 내야할 주체들이 가장 먼저 떠나니 말이다. 지역에 오래 산 노인들은 충성도가 높지만 떠나기도 목소리를 높이기도 어렵다.
지역의 아우성에 야당은 무심하고, 여당은 무능하다. 인구 감소로 지역 정치권의 위상이 떨어지는 것도 걱정스럽다. 수도권 면적은 국토의 10%가 약간 넘지만, 국회의원 수는 절반에 육박한다. 이런 현실에서 누군가는 ‘우는 소리’를 해야 한다. 허시먼 식으로 중앙과 지방 정부, 정치권에 항의할 구심점이 필요하다.
필자는 지역언론에 답이 있다고 본다. 신문사에 근무해서가 아니라, 근무해 봤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꼭 〈부산일보〉가 아니어도 좋다. 〈경남신문〉 〈경상일보〉 〈매일신문〉 등 지역언론은 쓸모가 많다. 종이신문이든, 포털이든, 닷컴이든 지역언론에 관심을 갖는 것이 지역의 목소리를 살리는 길이다. 따지고 보면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도 지역신문이다.
회사로 배달되는 중앙지들 틈에서 가끔 다른 지역의 신문을 찾아본다. 명색이 일간지인데도 사나흘 뒤 우편으로 오는 것도 있다. 그 신문을 읽을 때마다 솔직히 드는 심정이 있다. 바로 ‘촌스럽다’는 것이다. 기사, 편집, 디자인, 광고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그러하다. 그런데 내가 25년째 만드는 〈부산일보〉는 어떨까? 다른 지역의 눈으로 보면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결국 돈과 인력의 문제다. 지역언론은 중앙집중 구조의 피해자이면서 이를 극복할 구심점이다.
‘촌(村)스럽다’는 것은 나쁘게만 볼 일이 아니다. 적어도 ‘관점’에서는 그렇다. 지역언론은 ‘전국의 지역화, 지역의 전국화’를 지향한다. 전국 뉴스를 지역 시각에서 재해석하고, 지역 이슈를 전국적 관심사로 만든다. 사회 고발이든, 정책 요구든, 약자의 목소리든 지역이 우선이다. 이를테면 ‘좋은 맹목성’이다.
장담하건대 만약 부산 언론이 없었다면 가덕신공항은 언감생심이었을 것이다. 가덕신공항을 추진할 때 서울 언론은 ‘멸치 말리는 공항’이 될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그쪽의 시각이 대개 그러했다.
지난해 11월 부산엑스포가 좌절됐을 때 서울 언론은 비난의 글을 쏟아냈다. 사우디를 넘어선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부산시와 시민, 정치권, 지역언론이 똘똘 뭉쳤기에 국가를 대표해 도전이라도 해볼 수 있었다.
엑스포 좌절 이후 서울 언론은 다시 가덕신공항에 대해 견제하기 시작했다. 명분은 ‘제대로 된 공항’이다. 그들 논리대로라면 멸치 말리는 공항을 제대로 만들자는 말인가?
이쯤에서 지역언론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느냐는 반문이 있을 것이다. 매일 고민하는 것이지만 솔직히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 평가는 독자들 몫이다. 잘한다면 ‘엄지척’을, 독자들로부터 멀어졌다면 ‘회초리’를 들어주시길.
미국은 ‘떠남’의 전통이 강한 나라다. 조국(영국 등)을 떠나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고, 수틀리면 떠난다는 원칙 아래 정치(양당제도)와 경제(자본주의)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신대륙도, 서부도 없다. 필요할 때마다 ‘지금 여기에서’ 목청껏 외치면서 불만 사항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다.
부산시민공원은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보다, 온천천은 서울 청계천보다, 부산대는 하버드대보다 못할 수 있다. 그래도 우리가 아끼고 가꿔야 하지 않겠는가. 그 아낌의 대상에 비록 촌스럽지만 지역언론도 포함되기를 바란다. ‘공공재’로서, 분명히 보답할 것이다. 마감하면서 보니 이 글 또한 떠나는 독자들을 향한 하소연(Voice)임을 깨닫는다.
2024-09-01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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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어떤 목소리를 기억할까요
지난 22일 서울 종로구 씨네큐브광화문에선 의미 있는 행사가 있었다. 이날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2019년부터 이어온 ‘올해의 보이스’ 시상식을 연 것이다. ‘올해의 보이스’상이란 우리 사회의 진일보에 영감을 준 개인 또는 단체에 감사와 연대의 마음으로 수여하는 상으로, 최근 1년간 여성 이슈와 현안에 관심을 두고 활동한 개인과 단체를 선정해 상금과 상패를 수여한다.
올해 수상자는 일명 ‘부산 돌려차기’라고 불리는 사건의 피해생존자 김진주 작가, 기후 위기 시대의 대안 농업 방식인 ‘퍼머컬처’ 농법을 바탕으로 기후 위기 대응 활동을 해온 ‘소란’의 유희정 활동가, 2019년 ‘N번방’ 사건 관련 가해자가 춘천지법에서 재판받은 일을 계기로 디지털성폭력 재판 방청과 모니터링 등에 힘써 온 춘천여성민우회이다.
김진주 작가는 사건 조사 과정에 대한 적극적인 문제 제기와 외부 활동으로 젠더폭력 피해자에 대한 편견(피해자다움)을 깨고 인식 변화에 앞장서 왔다. 가해자의 계속되는 협박과 2차 가해 속에도 활동을 이어왔고, 자신의 분투를 진솔하게 다룬 저서 〈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를 펴내 주목받았다.
김 작가는 소감문을 통해 “이런 뜻깊은 상을 받을 줄 몰랐다. 당시 나는 절박했다. 매시 매초 사건은 다르게 흘러갔고 하루하루 가늠할 수 없었다. 재판 이후 이 시간이 또 다른 피해자들에게 주어질 생각을 하니 가만있을 수 없었다. 영원히 피해자를 표현하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밝혔다.
사실 김 작가는 부산일보 취재진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김 작가의 사건은 부산일보의 단독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일회성 사건 보도를 넘어 지속적인 보도를 통해 수사부터 재판까지 모든 과정에서 피해자가 ‘제3자’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현 사법 시스템의 부실함을 낱낱이 보여줬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부산시는 범죄 피해자를 위한 원스톱 지원 시스템을 마련했고, 정부는 범죄 피해자의 재판 기록 열람권도 강화했다.
‘돌려차기’사건과 김 작가는 부산일보 젠더데스크인 나와도 인연이 있다. 젠더데스크로서 성범죄 사건 보도는 유난히 꼼꼼하게 모니터링을 하게 된다. 단어 하나에도, 표현 한 줄에도 피해자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건 아닌지 조심하게 된다. 사건에 대한 자세한 묘사, 자극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제목은 철저하게 배제하려고 한다. 기자협회 성범죄사건 기사 작성 가이드라인에도 이 같은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돌려차기’라는 단어 사용을 하지 말자고 주장했다. 자칫 사건 자체를 희화화시키는 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옷매무새를 비롯해 발견 당시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묘사 역시 빼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피해자에게 괴로웠던 상황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건 2차 가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오히려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건을 상세하게 묘사해주길 부탁했다고 전해 들었다. 단순 폭행이 아니라 처음부터 성범죄를 노리고 접근했고 폭행으로 피해자는 정신을 잃었지만, 자신이 입었던 옷의 특징과 상황으로 볼 때 성범죄를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피해자가 직접 증명해야 했다.
‘돌려차기’사건은 젠더데스크로서 성범죄 기사 보도에서 하지 말라고 했던 걸 예외로 허용한 기사였다. 그만큼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를 증명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는 뜻이다.
김진주라는 필명은 가해자의 폭행으로 인해 마비됐던 오른쪽 다리의 감각이 기적적으로 되돌아온 6월 4일을 기억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6월의 탄생석이 진주이기 때문이다. 김 작가는 책 제목에 대해 “죽지 않았음에도 ‘죽는 것이 다행인가, 아니면 죽었어야 마땅했나’ 이런 고민을 했던 걸 담아낸 제목”이라고 설명했다.
올해의 보이스 상의 또 다른 주인공, 유희정 활동가는 서울 은평구에서 농부들과 함께 마을공동체를 운영하며 화학비료를 쓰거나 땅을 갈아엎지 않고 탄소를 땅에 가두는 유기 순환 농사를 짓고 있다. 유 활동가는 수상 소감에서 “40일 가까이 무더위가 지속되고 기후 위기가 가속되며 이전엔 없던 일들을 밭에서 만나게 된다. 이번 수상은 자연에서 만나는 일들을 더 많은 분들께 이야기하란 뜻 같다”고 했다.
춘천여성민우회는 활동가들이 36건의 성폭력 사건 재판 방청을 함께하며 피해자와 연대하고 가해자들에게 정당한 처벌이 내려지는지 감시해 왔다. 이경순 춘천여성민우회 대표는 “디지털성범죄는 피해자의 영혼과 육신을 철저히 파괴하는 범죄다. 가해자의 목소리만 높고, 피해자의 목소리는 검사나 국선 변호를 통해 약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여성이 죽어야만 겨우 귀를 기울일 정도”라고 꼬집었다.
살려달라는 성범죄 피해자의 목소리, 기후 환경 변화로 신음하는 지구의 목소리에 우리는 좀 더 민감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게 곧 우리 모두를 살게 하는 길이다.
2024-08-25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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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한국 근현대사를 둘러싼 민감한 이슈를 이야기할 때 흔히 인용되는 문장이다. 그런데 요즘 같아선 오히려 역사를 잠시 잊고 싶은 심정이다. 십수 년째 되풀이되며 슬슬 지겨울 법도 한 건국절 논쟁이 또 한 번 불붙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건국 시기가 1919년이냐 1948년이냐를 두고 다시 좌우가 충돌 중이다.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가 논쟁의 핵심. 이는 일제강점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빌미는 윤석열 정부가 제공했다. 정부 산하 국내 3대 역사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수장을 모두 뉴라이트 계열 인사로 교체하더니, 최근 독립기념관장마저 뉴라이트 성향이 짙은 인사로 채웠다. 뉴라이트 역사관은 대체로 임시정부 등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의 역할을 축소 평가하고, 대신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창한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한반도의 근대화, 경제 발전에 도움을 줬다는 내용이다. 독립운동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을 정작 독립운동을 기리는 독립기념관장의 자리에 앉힌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반발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다만 반발하는 측의 행태도 다소 과해 보인다. 광복회는 ‘뉴라이트 판별법’까지 내놓았다.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이라고만 말해도 일본의 식민지배 합법화를 꾀하는 이른바 친일파라는 식이다. 무모하다. 올해 초 이승만 대통령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개봉돼 큰 반향을 일으켰다. 누적관객수가 무려 100만 명을 훌쩍 넘었다. 이승만의 과(過)는 눈감고 공(功)에만 집중했다는 논란도 있었지만, 실관람객 평점이 높았던 것도 사실이다. 광복회의 기준대로라면 그 영화에 좋은 평점을 준 시민 모두가 친일파인 셈이다.
물론 뉴라이트 역사관이라는 것이 듣는 이에 따라 다소 불편할 수도 있고, 또한 한국사회의 주류 견해도 아니다. 특히 조선인 위안부의 강제 동원을 부정(이미 일본 정부도 1993년 고노담화에서 강제성을 인정했다)하는 등 일부 내용은 재론의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여전히 학문적으로 충분히 다퉈볼 수 있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이 시점에 건국 논쟁이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는 별개로 하더라도, 영토·국민·주권을 필수 요소로 하는 국가의 성립이 임시정부 당시에도 합당했냐는 의문이 마냥 억지스럽지만은 않다. 사료를 바탕으로 학자적 견해를 밝히고 토론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학문의 토론 과정이어야 할 역사 논쟁이 사상을 검증하고 불온자를 색출하는 작업으로 변질되고 있다.
급기야는 윤석열 대통령이 “(건국절 제정 논쟁이) 먹고 살기 힘든 국민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냐”며 진화에 나섰다. 내 말이 그 말이다. 정작 이 진흙탕 싸움에 불을 붙인 것이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대통령의 말에 크게 공감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최근의 무의미해보이는 이념 논쟁에 대한 피로가 자칫 역사에 대한 무관심, 냉소로 이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어서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얼마 전 우리 정부는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일본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에 앞장서 찬성표를 던져 논란을 불렀다. 이를 두고 “과거의 강제노역 사실을 들춘들 먹고 살기 힘든 국민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냐”고 변명한다면? 통 크게 찬성표 던져주고 우호적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이득이라는 논리가 만들어진다. 이런 것도 가능하다. “이제 와서 일본 정부가 공식 사과를 하는 것이 먹고 살기 힘든 위안부 가족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냐”고. 일본 정부가 주든 한국 정부가 주든 보상금부터 받으라는 소리로 들릴 수 있다.
대통령 말에 대한 과도한 확대 해석이라고? 과연 그럴까? 윤석열 정부의 대일 외교는 이미 이런 사고 체계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 최근 광복절 축사에서 대통령이 일본의 과거사에 대해 한마디 언급조차 없었던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미 대통령은 먹고 사는 데 별 도움도 되지 않는 과거사 따위는 훌훌 털어버린 것 같다.
일본의 과거사에 면죄부를 주고 얼마나 많은 경제·안보적 이익을 가져올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위안부 할머니와 그 가족들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서까지 조금 더 잘 먹고 잘 살고 싶지는 않다. 미래 세대 역시 마찬가지 심정일 거라 생각한다. 여전히 이 지긋지긋한 역사 논쟁들에 머리가 지끈지끈거리지만,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겠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김종열 문화부장 bell10@busan.com
2024-08-18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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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우리 곁의 동천, 똥천
펄펄 끓는 여름날 모두가 흐느적거리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와, 물고기다.” “에이, 거짓말.” 누군가 피식대는 순간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닌 물고기 떼였다. 일행들은 일제히 하천변 난간에 매달렸다. 뜻하지 않게 한여름 땡볕 길을 걷다 생긴 구경거리였다. 며칠 전의 일화가 여기서 마무리된다면 참 아름다운 풍경이겠지만, 현실은 전혀 딴판이다.
“저 물고기 잡아서 먹으면 (먹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지.” “웩, 똥물에 사는 걸 어떻게 먹어.” 물고기가 사는 물은 푸르죽죽한 것 같기도 하고 거무튀튀 누리끼리한 듯도 했다. 수면엔 시커먼 건더기가 이리저리 둥둥 떠다녔다. 누군가 인분이 아닐까 의심했는데 이 시대 대한민국에선 있어서는 안 될, 부산에선 있을 수도 없는 일이겠지. 하수를 푹 삭힌 듯한 역한 냄새도 코를 찔렀다. 섭씨 35도가 넘는 폭염으로 하천수가 발효되고 있는 건가 하는 무식한 생각이 들었다. 괜히 이 길을 걸었다. 우리는 울렁거리는 속을 붙들고 서둘러 동천을 빠져나왔다. 저 혼탁한 물에 사는 물고기는 생명력이 대단한 걸까. 아니면 물이 보기보단 덜 더러운 걸까. 혼란스러워 잠시 따져보고 싶었지만 유쾌하지 않은 경험은 얼른 지우고 싶을 뿐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부산 남구 문현혁신도시 이전공공기관 직원들의 말이 떠올랐다. 그들과 함께 동천 ‘썩은다리’를 건널 때마다 늘 나온 불평이다. 부산으로 이전한 공공기관 직원들은 동천과 처음 맞닥뜨리는 순간 깊이 절망했다고 한다. 자신들이 정착해야 할 부산에 대한 이미지가 ‘동천 수준’으로 곧장 수렴된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한동안 심한 자괴감에 시달렸다고 했다. 부산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하천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수준 낮은’ 도시에서 가족과 함께 평생 살아가야 하는 현실을 부정하며 도망치고 싶었다고 입을 모았다. ‘내가 어쩌다 이런 곳까지 떠밀려 왔나’하는 생각으로 괴로웠다는 이도 있었다. 여러 이전기관 수많은 직원들은 약속한 듯 비슷한 말을 꺼내며 혀를 찼다. “부산시가 천문학적인 돈을 들이고도 동천 수질을 못 잡는다. 무능한 지방 행정의 상징이 바로 여기 우리 눈앞의 ‘똥천’이다.” 동천 악취에 기겁하던 이전기관 직원들은 시간이 흐르자 슬프게도 나쁜 환경에 슬슬 적응했다. 거리낌 없이 썩은다리를 건너 밥 먹으러 다닌다. 하지만 다른 지역이나 외국에서 온 방문객이 동천을 보며 눈을 찡그릴 땐 왠지 모르게 솟아오르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어렵단다.
동천을 하염없이 방치하는 듯하던 부산시가 다시 동천 수질 개선에 나선다고 한다. 바닷물을 부산진구 광무교 쪽으로 끌어와서 방류하는 부산시의 시도는 여러 번 실패했다. 하천 바닥 오염토를 걷어내는 준설 공사도 지금껏 효과가 거의 없었다. 엄청난 예산과 노력을 투입했지만 악취 풍기는 동천 수질은 여전하다. 이번엔 부산진구 성지곡수원지 계곡물을 부전천 구간에서부터 별도로 끌어와 동천에 유입시키는 방안이 추진된다. 오염토 제거를 위한 준설 공사도 다시 이어진다. 시는 하루 평균 7000t가량의 성지곡 계곡물을 동천에 계속 흘려보내면 수질을 개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바닷물을 하루 최대 25만t씩 끌어올려 공급하는 방식으로도 동천 수질은 나아지지 않았다. 시의 거듭된 동천 수질 개선 정책 실패는 불신만 높였다. 성지곡 계곡물을 흘려 넣어 동천 물을 맑게 만들겠다는 최근 시 발표에도 반응이 시큰둥한 이유다.
동천은 부산 도심권 핵심 하천이다. 부산 최대 번화가 서면을 지나 동북아 금융중심지를 꿈꾸는 문현금융단지, 부산의 새로운 미래 공간 북항재개발지구로 이어지는 물길이다. 부산의 비전을 일구는 핵심 공간을 품은 동천. 이 물줄기에서 진동하는 악취를 방치한 채 부산의 내일을 기약하긴 어렵다. 산업은행, 한국수출입은행 이전을 위한 선결 조건일 수도 있다. 만약 부산이 세계박람회(엑스포) 등과 같은 글로벌 메가 이벤트 개최에 다시 나선다 해도 더러운 동천을 외면해선 곤란하다. 전임 부산시장 시절 시는 동천 광무교~부암역 구간 물길을 복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더불어 동천과 북항, 남항을 잇는 ‘시티 크루즈’를 띄우겠다는 장밋빛 구상을 함께 내놓았다. 냄새 풍기는 지금의 동천 모습을 보면 허황된 아이디어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맑은 물이 흐르는 동천에서 시티 크루즈를 타고 도심 곳곳을 누비는 건 공상일 뿐일까. 북적이는 문현금융단지에서 물길로 북항재개발지구와 남항을 거쳐 남포동을 오가는 구상을 현실로 이루긴 불가능한 걸까. 깨끗한 동천을 누리고 싶은 부산시민의 기대는 언제까지 헛된 꿈에 그쳐야 하는 것일까. 동천에 다시 칼을 빼든 박형준 부산시장의 의지에 희망을 걸어 본다.
2024-08-11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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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미술관과 아파트, 이기대 동상이몽
달맞이언덕과 함께 부산의 해안 비경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명소, 이기대에 일대 변화가 예고됐다. 무려 8000만 년 동안 생명들은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조용히 모습을 바꿔 온 역사를 꺼내지 않더라도 해안 탐방로를 한 번이라도 걸어본 사람이라면 왜 부산이 이기대를 사랑하는지, 또 지켜왔는지 저절로 느끼게 된다. 그 이기대가 크게 바뀔 모양이다.
이기대는 수년 내에 ‘숲 미술관’으로 재탄생될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 굳이 이기대를 바꾸려 든다면 유일한 방법은 예술이어야 한다는 데에 적극 동의한다. 부산시는 이기대를 어떤 예술공간으로 만들지 용역을 진행하고 있고, 연내에 구체적인 밑그림을 시민들에게 내놓기로 했다.
이기대 숲 미술관을 이룰 시설도 하나둘 공개되고 있다. 변화의 첫걸음이 프랑스의 세계적 현대미술관 퐁피두센터 분원으로 향하고 있는 사실은 다행스럽다. 일도 꽤 진척된 듯하다. 며칠 전 부산시가 언론사 문화부 기자들 대상으로 연 간담회에서는 박형준 시장이 직접 나서서 퐁피두 분원 유치 현황을 설명했다고 한다. 퐁피두 분원 유치에 성공한다면 그 위치로 이기대 중간인 어울마당을 점찍었다고도 했다.
이기대와 퐁피두. 아직은 이질적으로도 느껴지지만 부산시는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다. 부산시가 설명하는 퐁피두 분원 규모도 상당하다. 퐁피두 측에 3만㎡ 부지를 내줘 연면적 1만5000㎡ 건물을 짓는다는 게 부산시 설명이다. 내·외부에는 전시실, 창작공간, 수장고, 커뮤니티홀, 교육실, 야외공원도 갖춘다.
퐁피두 분원은 최종 결실을 맺는다면 박 시장의 주요 업적이 될 것으로 보인다. 퐁피두 분원은 부산 전체로 보면 북항에 들어설 오페라하우스, 최근 준공한 부산콘서트홀, 부산 기장군에 문을 연 영화촬영소와 묶여 새로운 부산 예술문화 벨트가 꿰어질 핵심 고리이기도 하다.
이기대는 박 시장에게도 중요한 장소가 됐다. 그가 이기대를 활용하는 첫 정치인이 됐다는 의미다. 실제 박 시장은 지난해 10월 20일 연 기자회견에서 “해양문화도시로 만들기 위해 이기대를 활용하기로 했다”면서 “이날부터 이기대예술공원 기본계획 용역에 들어가 2024년 말까지 마무리 짓겠다”고 공언했다.
‘정치인 박형준’이 내세운 ‘이기대 활용법’은 그 자체로 ‘정치적 카드’가 됐다. 1997년 군사보호구역에서 해제된 이후에도 이기대는 전체적인 경관을 잘 유지했다. 오륙도 앞에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선 일 정도가 아쉬운 변화였다. 이기대에 눈독을 들인 여러 건설업체가 개발 시도에 나서기도 했지만 부산시와 관할 지자체는 시민과 함께 해안산책로를 조성하고 국가지질공원 지정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이기대를 지켜왔다. 그 연장선에서 박 시장은 생태와 예술이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이기대를 바꾸겠다는 아이디어를 고안했고, 첫 행보로 퐁피두 분원 유치에 공을 들여왔다. 이기대 활용법 성공 여부에 따라 그의 정치적 발걸음도 바뀔 수 있다.
관건은 이기대의 본원적 가치를 지켜 활용하는 데 성공하느냐다. 이기대에 채울 시설을 유치하는 일 역시 간단치 않지만 이기대를 잃어버리지 않을 방법은 언제까지고 고민해야 할 숙제다. 퐁피두 분원이 들어와 긍정적 결과를 낳는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부산 시민이 비행기가 아닌 버스를 타고 가 세계적 미술품을 향유할 기회를 얻는 일은 사실 큰 변화다. 지역 미술계에도 새로운 기회다. 아시아권을 비롯한 국내외 관광객이 퐁피두 작품을 보러 부산으로 몰려온다면 금상첨화다. 부산시는 이기대가 일본의 나오시마, 덴마크 루이지애나현대미술관, 독일 인젤홈브로이미술관처럼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비슷한 때, 이기대 가치를 무너뜨리려는 탐욕도 불거졌다. 사실 이기대는 개발업자들이 항상 군침을 흘리는 표적이었다. 고향 부산을 떠나 2008년부터 ‘서울 건설사’가 된 아이에스동서(주)가 이기대 길목에 아파트를 짓는 사업 인허가 절차를 밟고 있다. 건설사 계획대로 31층, 29층, 28층 등 3개 동 짜리 아파트가 들어서면 시민들은 이기대를 한눈에 볼 권리를 박탈당한다. 이기대 아파트가 부산에서 진행하는 마지막 사업이라는 게 아이에스동서 측 관계자의 해명이었는데, 부산에서 여러 차례 아파트 사업으로 재미를 본 건설사가 마지막으로 이기대를 망치고 떠나겠다는 꼴이다. 이런 시도는 아이에스동서 하나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앞장서서 이기대를 지켜야 할 행정기관이 오히려 건설사를 돕고 나서는 상황은 답답하기만 하다. 부산 남구청은 당초 용적률 200%까지만 허용된 해당 아파트 사업 부지에 대해 250%까지 올려 지을 수 있도록 제한을 풀어버렸다. 전문가들도 “세계적 미술관은 미술관과 주변부 조화가 너무도 중요한데 미술관 가는 길을 아파트가 막아서면 기능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이기대 숲 미술관이 아파트 입주민 미술관이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2024-08-04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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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험난한 여로 가덕신공항
국토교통부가 지난 21일 가덕신공항 부지 조성공사 입찰 조건을 변경해 재입찰에 나섰다. 그동안 사업자 선정이 2차례나 유찰되면서 수의계약이냐 재입찰이냐를 두고 고심하던 국토부는 특혜 여지가 있을 수 있는 수의계약 대신 재입찰을 택했다.
하지만 국토부는 재입찰에서 건설사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던 공기 연장과 컨소시엄 구성 조건 완화를 수용했다. 먼저 공사 기간을 착공 후 6년에서 7년으로 1년 연장했다. 제한된 공간에서 다양한 공정이 동시에 진행되고 해양 매립 등 난도가 높은 공사가 많다는 점을 감안했다. 또 당초 시공능력평가 상위 10개사 중 2개사까지 컨소시엄을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을 3개사까지로 완화해 건설사들의 리스크를 줄여줬다.
국토부는 이 같은 내용으로 이달 31일 신규 입찰을 공고하고 다음 달 19일까지 사전심사 신청서를 받는다는 방침이다.
현재 가덕신공항 부지 조성공사를 둘러싼 쟁점은 두 가지다. 우선, 공기 연장으로 인해 가덕신공항의 완공 시기가 늦춰졌다는 것이다. 올 초 국토부가 발표한 계획안은 2029년 말 개항에 이어 2030년 말 완공한다는 내용이었다.
2029년 말까지는 활주로와 여객터미널 등 동쪽 지역에 위치한 필수시설을 먼저 시공해 우선 공항 개항을 한다는 것. 이어 2030년 말까지는 주차장 등 서쪽 지역에 위치한 시설들을 완공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마저도 2030세계박람회 부산 유치 실패 이후에 나왔기 때문에 엑스포 실패로 인한 공기 지연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 국토부의 재입찰에 따른 계획안 수정은 여기에 1년 더 늦춰져 완공시기가 2031년 말이 됐다. 2029년 말 개항을 하고도 마무리 공사를 2년 더 해야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반쪽 개항’ 아니냐는 비판이 곳곳에서 나온다.
당초 2029년 개항과 준공이 가능하다는 공약을 한 국토부가 난도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공기를 늦추는 것은 그동안 지방공항 건설에 부정적인 입장을 표출했던 국토부의 무관심이 드러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공기 연장 문제는 국토부와 건설사들 간의 간담회 등에서도 주요 쟁점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이런식으로 조금씩 공기를 늦춘다면 2029년 말 개항도 낙관할 수 없다. 안전 공사도 물론 중요하지만, ‘보신주의’를 벗어나 최신 공법 적용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공기를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된다.
두 번째 쟁점은 지역 건설업체의 참여 비중이다. 지난 두 번째 입찰에서 현대건설 컨소시엄에 참여한 지역 업체의 비중은 모두 합쳐 11%에 불과했다. 부산 업체 10곳, 경남 업체 4곳 등 14개의 부울경 건설사가 참여했지만 지분이 너무 낮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지역 업체의 하도급 공사를 의무화하라는 지역의 목소리에 국토부는 지난 5월 지역 업체 지분율에 따라 입찰 가산점을 주는 식으로 지역 기업 우대 조항을 신설한 바 있다. 1~5%는 2점, 5~10%는 4점, 10~20%는 6점, 20% 이상은 8점이다. 현대건설 컨소시엄은 가산점 6점을 받기 위해 턱걸이로 지분율 10%를 겨우 넘긴 게 아닌가 하는 비판이 나왔다.
수의계약이 아닌 신규 입찰로 국토부가 방향을 튼 만큼, 건설사들은 컨소시엄 구성을 새롭게 할 수 있다. 여러 여건상 경쟁 입찰보다는 또 단독 입찰이 유력하다는 말이 나온다. 현대건설 컨소시엄이 지역 업체의 비중을 얼마나 더 늘릴지 주목된다. 국토부와 부산시도 민간의 일이라고 방관만 해서는 안 된다.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지역 업체 비중 확대에 온힘을 쏟아야 한다.
이외에도 가덕신공항과 관련한 현안은 여전히 쌓여만 있다.
현재 1본에 불과한 활주로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제2활주로 등을 건설하는 2단계 확장 계획의 조기 완성은 필수적이다. 부산시는 가덕신공항 확장 계획의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정부를 설득하는 작업을 펼쳐야 한다. 머뭇거렸다가는 인천공항과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질 것이고 자칫 대구신공항에도 밀릴 수 있다는 위기감을 가져야 한다.
가덕신공항 부지 조성공사와 제2활주로 확장이 하드웨어적 성격이라면 이를 채워주는 소프트웨어도 간과할 수 없다. 에어부산 분리매각 등을 통한 신공항 지역 거점 항공사의 확보다. 지역 거점 항공사 확보는 정부 차원에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중대 사안임에도 정부, 산업은행, 대한항공 등에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하거나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시와 지역 상공계 등이 합심해서 총력 대응해야 한다.
가덕신공항을 둘러싼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역량이 중요하다. 임기 반환점을 돈 박형준 부산시장과 새롭게 출범한 22대 부산지역 국회의원들이 얼마나 역할을 할지 시민들은 지켜보고 있다.
최세헌 경제부장 cornie@busan.com
2024-07-2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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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북항의 '킬러 콘텐츠'가 궁금하다
그야말로 찜통 같은 더위,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는 공기와 뜨거운 태양, 밤에도 식지 않는 지열은 꽤나 낯설었다. 생애 첫 방문한 싱가포르는 기후부터 큰 인상을 남겼다. 지난 6월 11~15일 4박 5일 일정으로 한국편집기자협회가 주최하는 전국 일간신문·통신사 데스크 세미나에 편집부장 자격으로 다녀왔다. 40여 개 언론사 편집 데스크가 참가해 각 사의 고군분투를 공유하고 공감하며 함께 신문과 편집의 미래를 고민한 시간이었다. 초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적도에 위치한 작지만 강한 섬나라 싱가포르는 예상보다 더 후끈한 열기를 내뿜었고, 편집 데스크들 또한 빠르게 변화하는 언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나름의 열정을 분출했다.
싱가포르는 얼핏 부산과 많이 닮아 있었다. 가이드는 싱가포르의 면적이 부산과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확인해보니 싱가포르가 728㎢, 부산은 771㎢였다.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 부산과 섬 나라인 싱가포르는 모두 항만이 발달돼 있다. 특히 싱가포르는 준설이 필요 없는 깊은 바다 수심 덕분에 일찌감치 세계적인 무역항으로 입지를 다졌다. 말레이반도 끝에 위치한 작은 도시국가 싱가포르의 항만은 동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잇는 말라카해협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1819년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개발한 작은 항구에서 시작해, 인도·태평양 해상무역의 요충지로 성장했다. 2023년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비교해보면, 싱가포르가 8만 4734달러로 부산을 포함한 대한민국(3만 4653달러)의 배 이상 수준이다.
이런 점 때문에 싱가포르는 부산의 롤모델이기도 하다. 부산은 싱가포르에서 배울 점이 많아 보였다. 그 중에서도 1969년부터 1992년까지 23년 간의 국가적 매립 사업을 통해 조성된 ‘마리나 베이’는 부산 북항을 떠올리게 했다. 싱가포르 도시재개발의 대표작으로 평가 받는 마리나 베이에는 노아의 방주를 닮은 특급 호텔 ‘마리나 베이 샌즈’를 비롯해, 영화 ‘아바타’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슈퍼 트리’와 세상 모든 꽃과 나무를 구현하겠다는 비전이 담긴 실내 온실을 갖춘 ‘가든스 바이 더 베이’, 가까운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를 오가는 크루즈선을 위한 선착장 ‘크루즈 센터’ 등이 들어섰고, 포화 상태에 놓인 중심업무지역(CBD)도 구역을 넓혀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매년 ‘마리나 베이’를 방문하는 전세계 관광객이 1000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무척 부러웠다.
그럼 이제 부산 북항으로 눈을 돌려보자. 북항 재개발 사업은 20조 원의 사업비가 투입되는 부산의 최대 프로젝트 중 하나다. 1876년 개항한 부산항이 대규모 항만으로 성장하고 물동량이 점차 늘어나 항만 포화 현상에 시달리면서 부산시가 부산신항을 건설하고 기존의 부산항을 재개발해 원도심에 활력을 불어넣기로 한 것이다. 초량동과 수정동 일대를 개발하는 1단계와 범일동과 좌천동 일대를 재개발하는 2단계, 영도구와 남구 일대를 재개발하는 3단계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매립이 시작된 이후 1997년 외환 위기와 부산시의 재정난 등으로 사업이 불안정하게 추진됐지만 2012년 국제여객터미널 착공을 기점으로 물꼬를 트고, 지난해 11월 1단계 사업 구역이 시민들에게 개방되면서 큰 관심을 받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그랬듯 콘텐츠다. 부지 조성이 끝나 속속 알맹이가 채워져야 할 1단계 사업 구역은 여전히 휑하다. 친수공원이 열렸고 국제여객터미널이 운영되며 부산역과 연결하는 보행데크가 만들어졌고 마리나 시설이 일부 운영되고 생활형 숙박시설 건물 몇개가 완공됐을 뿐, 공공시설, 상업·업무 시설, 문화·관광 시설, 랜드마크, 오페라하우스 건립 등은 별다른 진전이 없다. 랜드마크 부지가 어떤 식으로 개발될지가 가장 궁금하지만 잠잠하기만 하다. 게다가 부산 북항만의 정체성을 살릴 ‘킬러 콘텐츠’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항구 옆 버려진 땅을 재개발한 독일 함부르크의 하펜시티, 항만·물류 중심지인 구도심에 대형 주거·상업·공공시설을 건립한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대지진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내 재생한 일본 고베, 글로벌 금융기업들이 즐비한 도시적 상업지구와 공원, 관광지가 함께 깃든 싱가포르의 사례를 부산시가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부산시는 지난해 2030월드엑스포 유치에 실패했기 때문에 북항을 제대로 살려내야 한다는 책임이 더 무겁다. 월드엑스포 개최의 희망이 사라진 자리에 글로벌허브도시 부산이라는 그림을 새로 그렸고, 이 때문에 엑스포의 무대가 될 것으로 기대됐던 북항의 미래 청사진이 글로벌허브 국제도시가 됐다면, 이번에는 진정 심도있고 체계적으로 북항의 미래를 계획하고, 과감하고 힘 있게 추진하길 바란다. 부산만이 보여줄 수 있는 콘텐츠를 생명수 삼아, 북항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길 기대한다.
2024-07-21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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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정치 실종된 22대 국회
코로나 팬데믹 이후 자기 전 누워서 여행 유튜브를 보는 게 취미생활이자 소소한 낙이 됐다. 일종의 대리만족이다. 볼 때마다 머리 아프고 나라를 걱정하게 되는 정치뉴스보다는 정신건강에도 좋다. 몇 달 전 한 유튜버의 중국 여행 영상에서 어떤 중국인이 뜬금없이 한국 정치보다 중국 정치가 더 낫다고 한 말이 가끔씩 떠오른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여야로 갈린 정치권이 내 싸우기만 하는 한국보단, 국민을 위하는 정치를 하는 중국 공산당이 훨씬 좋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공산당 1당 독재에 대한 황당한 자부심은 물론 어이가 없다. 중국에선 지금도 조금이라도 정부의 눈 밖에 나면 한동안 자취를 감추기도 한다. 정치인 기업인 일반 국민 등 가릴 것 없다. 정부 비판 발언으로 그룹 자회사 지배권을 잃은 알리바바 창업주 마윈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치 상황을 보면 그렇게 보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국내 여야 정치권이 늘 싸움박질하는 모습만 보이니, 중국 등 제3국에선 이러한 모습이 더 부각될 것이다. 미국과의 패권전쟁에서 수세에 몰리고 부동산 경기 침체로 위기를 겪는 중국 당국이 첨단산업 육성 등에 매진하는 반면, 인구 위기와 고금리 보호무역주의 등 대내외 복합위기에 놓여 있는 한국 정치권은 자기들끼리의 싸움에만 골몰하고 있다. 역대 최악의 국회라고 평가받은 21대보다 지금 22대가 더하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는 정치의 정의는 실종 상태다. 국가 권력 획득·유지에만 몰두할 뿐 국민들의 이해를 조정하기는커녕 정치권이 앞장서 거친 말을 내뱉으며 극한 대립으로 치닫는다.
22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더불어민주당의 주도로 야권은 각종 특검법과 탄핵안을 쏟아내고 있다. 정부 여당의 독주를 막기 위한 야당의 최후 수단이었던 탄핵이 일상이 되고 있다. 특히 검사 탄핵은 이재명 전 대표의 사법리스크 방탄용이란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여기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청원 청문회도 곧 열린다. 국민동의청원에 따른 청문회 개최는 유례가 없다. 일종의 사전정지작업인 청문회 개최가 탄핵으로 곧바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윤석열 정부를 더욱 무력화해 차기 대선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효과를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민주당이 절제 없이 빼든 탄핵은 앞으로도 정쟁의 주요 도구가 돼 정치 혼란이 가중될 게 뻔하다.
민주당은 이재명 전 대표의 연임이 사실상 확정되면서 1인 체제가 더 굳어지는 모습이다. 당권·대권 분리 규정을 바꿔 이 전 대표는 연임에 도전장을 던졌다. 지방선거 공천권을 행사하고 사법리스크를 최대한 방어하면서 대권후보가 되기 위해 무리수를 뒀다는 비판이 당내에서도 나왔다. 여기에 시도당위원장 선출도 권리당원 비중 강화와 생소한 선호투표제 도입 등 팬덤 정치 강화로 친명계 약진이 전망된다. 제왕적 당대표, 1인 사당화에 대한 강도 높은 김두관 당대표 후보의 날선 비판이 일반 여론과 달리 당 내에서 얼마나 먹힐지는 의문이다.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는 더 가관이다. 원희룡 한동훈 후보 캠프를 중심으로 자해 수준의 폭로전, 비방전으로 흐르고 있다. 거대 야당의 노골적인 탄핵몰이에 대응하기는커녕 내전 수준의 자중지란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총선 참패를 성찰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할 장인 전당대회가 친윤(친윤석열), 친한(친한동훈)계 간 이전투구의 장으로 전락했다. 연금 개혁 등 정책 현안 논의도 실종 상태다. 여기엔 대통령실도 자유롭지 못하다. 최근 불거진 김건희 여사와 한동훈 후보 간의 문자 논란이 이번 사태의 주요 발단이 됐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 민주당 지지율이 모두 30% 안팎에서 머무는 것은 일반 국민들이 어느 쪽 한 곳 마음 둘 데 없는 현실을 반영한다.
세계적인 AI(인공지능) 붐으로 반도체 산업 등의 실적이 개선되며 수출을 비롯한 국내 경제지표는 조금 개선되는 모습이다. 그러나 날로 심해지는 양극화로 지방과 서민은 갈수록 더 힘들어지고 있다. 건설경기 악화의 직격탄을 맞은 부산은 외국인 노동자마저 외면할 정도로 산업단지는 무너지고 있고, 거리 곳곳은 상가 공실로 넘쳐나 자영업자의 무덤이 되고 있다. 민생경제의 경고음이 곳곳에서 요란하게 들린다. 그러나 정치권은 묵은 민생법안은 외면한 채 권력투쟁에만 열중이고, 이들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온통 나라 걱정이다. 팍팍한 민생에 정치 걱정까지 해야 하는 국민만 더 피곤하게 됐다.
2024-07-1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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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노인을 위한 부산
누구는 현대인의 죽음을 삶의 완결이 아닌 그저 ‘끝나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현대인의 삶은 어떤 질서 속에서 방향성을 갖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이기 사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 끝난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끝남’은 정년퇴직이라는 방식으로 생전에도 이뤄진다. 특정 나이가 되면 계속 일할 능력과 상관없이 있던 자리를 떠나야 한다. 정년이라는 개념은 상품의 유통 기간과 비슷하다. 삶의 완결 대신 끝남을 강요받는다. 그래서 주변에서 정년퇴직 하는 사람들을 보면 씁쓸한 구석이 있다. 퇴직자 중에는 ‘이제 좀 쉴 수 있어 좋다, 당연히 후배들을 위해 자리를 비워줘야 한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상당수는 평생 쌓아왔던 역량이 한순간에 소용없어지는 것에 상실감을 느낀다.
고령화 속도가 아찔한 한국이지만 퇴직 전후의 이들을 위한 생애 전환기 프로그램은 엉성하다. 고령화가 사회 성장 동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만 취급될 뿐, 고령화 사회를 사는 사람에 대한 대책은 간과된 결과이다.
특히 퇴직 전후의 5060세대가 이후 어떤 삶을 살 것인지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으로도 중요하다. 이들의 소득 감소나 건강 악화는 고스란히 사회적 비용 증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본보 ‘5060, 부산의 활력으로’ 기획을 위해 둘러본 일본 도쿄 릿쿄대학 세컨드 스테이지 프로그램과 광주의 빛고을노인건강타운에서 고령 사회 해법의 실마리를 볼 수 있었다. 2008년 릿쿄대학이 개설한 세컨트 스테이지는 만 50세 이상만 수강할 수 있는 평생 교육 프로그램이다. 일본의 베이비부머 세대를 위해 대학의 사회 공헌을 고민한 끝에 탄생한 프로그램으로, 인생 후반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고민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새로운 삶을 모색하도록 도와주는 강좌로 구성되어 있다.
릿쿄대학의 세컨드 스테이지 강의실을 둘러봤을 때 백발이 성성한 이들의 학구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배움과 성장의 욕구는 나이가 들었다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세컨드 스테이지 과정은 나와 비슷한 목적을 가진 이들을 동기생으로 만나 지속적인 교류가 이뤄지는 장의 역할을 했다. 퇴직으로 단절되는 사회적 관계가 배움으로 다시 이어지는 것이었다. 세컨드 스테이지 과정 일부는 젊은 학생들과 동일한 수업을 받는데, 오리엔테이션에서는 동기나 젊은 학생들과의 공존을 위해 필요한 에티켓 교육이 중요하게 이뤄졌다. 공동체 안에서 필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기본 예의이지 나이 차에 따른 분리가 아니었다.
광주 빛고을노인건강타운은 대규모 실버타운이 지역의 관광자원으로 거듭난 사례였다. 하루 약 3000명이 이용하는 대규모 시설로 이용자들은 모두 활기가 넘쳤다. 100여 개가 넘는 프로그램에서 이용자들은 건강도 챙기고 친구도 사귀었다. 식사를 저렴하게 해결하고 은행이나 주민자치센터 등 각종 편의시설도 한곳에서 이용할 수 있었다. 골프장이나 숲 등 자연친화적인 환경과 주차 등 편리한 교통 환경은 사람을 모으는 핵심 인프라였다. 노인복지의 성공 사례를 배우기 위해 각 지자체를 비롯해 해외에서도 많은 방문객이 찾아와 별도의 대응팀을 만들 정도였다.
두 군데를 둘러보면서 관점만 바꾸면 부산에서 노인은 중요한 자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풍부한 대학 자원을 활용해 부산에 살고 있는 고령자를 위한 인프라를 잘 만든다면 다른 지역의 고령자가 유입될 수 있는 도시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다행인 것은 부산시는 하하캠퍼스 등을 통해 노인 정책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퇴직을 앞둔 개인들도 은퇴 이후를 위해 다양한 준비를 하고 있다. 기획 보도 이후 기사 취지에 공감하며 퇴직 이후 새로운 삶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독자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사회 공헌이나 창업을 준비하거나 퇴직자 커뮤니티를 구상한다는 이들이었다.
이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나 프로그램이 정책적으로 지원되어야 한다. 하하센터와 같은 전용 공간도 좋지만, 시민 누구나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 등의 공공시설이 이들을 위한 플랫폼으로 제격이다. 노인만을 위한 시설은 오히려 노인들에게도 외면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했으면 한다.
국내외 나이 든 이들이 살기 좋은 부산으로 몰려와서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고, 지역 경제도 살아나는 상상을 해본다. 부산이 그저 나이 들어가는 도시가 아닌 고령화에 대한 해법을 선도적으로 보여준 도시가 되길 기대한다.
2024-07-07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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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만나기만 하면 '명승부'… 엘롯기 이름값
최근 ‘엘롯기’가 만나기만 하면 4시간이 넘는 명승부를 펼치며 한국 프로야구의 최고 인기 구단임을 다시 한번 입증하고 있다.
엘롯기는 LG 트윈스와 롯데 자이언츠, KIA 타이거즈의 첫 글자를 딴 신조어로 2000년대 초반 KBO리그 만년 하위 3개 팀을 일컫는 유행어였다. 2001부터 2004년까지는 롯데가, 2005년과 2007년은 KIA가, 2006, 2008년은 LG가 꼴찌를 차지하면서 엘롯기라는 단어가 야구 팬들에게 점차 각인되기 시작했다.
당시 엘롯기가 모두 가을야구에 진출하면 ‘대한민국이 폭발한다’는 속설도 떠돌았다. 실제로 엘롯기가 동시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엘롯기 3개 팀이 포스트시즌에 전부 탈락한 경우는 1982년, 1985년, 2001년, 2005년, 2007년, 2015년으로 총 6번이나 있다.
LG는 1994년 이후 2022년까지 20년이 넘게 우승을 못 하다 지난해 통합우승의 기쁨을 만끽했다. 롯데는 한술 더 떠 1992년 이후 무려 30년이 넘게 우승컵을 들지 못했다. 봄에만 반짝해 ‘봄데’라는 오명까지 보유하고 있다. 이대호마저 은퇴식에서 “롯데 팬들이 꿈꾸고 나 또한 바랐던 우승을 끝내 이루지 못 했다”고 울먹였다. KIA는 그나마 2000년 이후 두 차례나 우승을 해 체면치레는 했다.
지난 4월 30일 KBO리그에서 33번째로 통산 100승을 달성한 한화 류현진에게 가장 많은 승리를 헌납한 팀도 바로 엘롯기이다. 류현진은 100승을 쌓는 동안 LG전에서만 22승을 챙겼다. 2위는 롯데로 17승, 3위는 KIA로 15승을 각각 챙겼다. 유독 류현진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던 엘롯기가 그에게 무려 54승을 헌납한 셈이다.
하지만 반대 의미로 엘롯기는 자타공인 국내 최고 인기 구단을 의미하기도 한다. 각각 서울, 부산, 광주라는 대도시를 연고지로 삼은 대표적 흥행 구단이어서 그만큼 극성적인 팬덤을 가진 팀들이라는 것이 공통점이다. 최근 성적도 LG와 KIA는 꾸준하게 상위권을 맴돌며 우승 후보다운 면모를 과시하고 있고, 롯데는 비록 하위권에 처져 있지만, 폭발력 있는 ‘불방망이’를 앞세워 중위권 도약을 노리고 있다.
수도 서울의 제1구단이라고 할 수 있는 LG, 구도(球都) 부산을 연고지로 하는 롯데, 호남권의 인기를 독차지하며 ‘해태 시절’ 화려한 기록에 힘입어 전국적으로 팬이 많은 KIA가 이처럼 이름값에 걸맞은 경기력으로 최근 3개 팀 간 맞대결마다 명승부를 연출하고 있다.
엘롯기의 최근 가장 인상적이었던 명승부는 지난달 14~16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펼쳐진 LG와 롯데의 주말 3연전 ‘엘롯라시코’였다. 엘롯라시코는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의 더비 매치를 부르는 말인 ‘엘 클라시코’에서 각 팀의 앞 글자를 붙여 만들어졌다.
3연전 중 14일엔 LG가 5-3으로 낙승을 거뒀고, 15일에는 롯데가 9회초 2사 1, 2루에서 터진 나승엽의 결승타에 힘입어 9-8로 이겼는데 이날 경기가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각본 없는 드라마’와 같았다. 무려 6번의 역전이 펼쳐진 ‘진땀 승부’였기 때문이다.
이날 역전과 재역전, 재재역전을 주고받은 양 팀은 9회까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거듭했다. 6-7로 뒤진 롯데가 8회초 박승욱의 2점 홈런으로 또 다시 역전하자 LG는 8회말 박동원의 적시타로 8-8을 만들었다. 9회초 윤동희가 LG 마무리 유영찬에게 2루타를 뽑아내 득점권 기회를 만들었고, 나승엽이 우전 적시타로 천금 같은 결승타를 때려 4시간이 넘는 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다음 날인 16일 경기는 반대 상황이 벌어지며 롯데가 8-9로 분패했는데 이 또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혈투였다.
전날처럼 역전과 재역전을 거듭하며 롯데가 8-3으로 앞서 승리를 챙긴 듯했다. 하지만 LG는 이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8회와 9회말 3점과 2점을 얻어 8-8 동점을 만든 뒤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갔다. LG는 10회말 무사 만루의 기회에서 신민재가 끝내기 희생플라이로 결승 타점을 올려 4시간 25분의 혈투를 마무리했다.
지난달 25일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롯데와 KIA의 경기도 양 팀 팬들을 울고 웃긴 ‘영호남대전’이었다.
경기 초반 1-14로 뒤졌던 롯데는 4회말 6득점을 올렸고, 5회와 6회말 2점과 3점을 보태 12-14로 점수 차를 좁혔다. 롯데는 마침내 7회말 고승민의 2타점 적시타로 동점을 만든 후 이정훈의 희생플라이로 기어이 15-14로 경기를 뒤집었다. 그러나 KIA는 8회초 2사 2루에서 홍종표의 15-15 동점 적시타가 나왔고 이후 두 팀은 연장 12회까지 가는 투수전을 벌이면서 승부를 가리지 못 했다. 이날 경기는 역대 최다 점수 차 무승부 타이 기록으로 인정됐다. 또 5시간 20분 동안 혈투가 이어져 올 시즌 최장 경기로 기록되기도 했다.
변현철 스포츠부장 byunhc@busan.com
2024-06-30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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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박형준 시장에게 부족한 그 무엇
일주일 후면 박형준 시장이 제39대 부산시장으로 취임한 지 정확하게 2년이 된다. ‘박형준 2기’ 체제가 반환점을 돈다는 얘기다. 2021년 4월 보궐선거 승리로 38대 시장에 취임한 것까지 합치면 1180일이 된다.
이 기간 동안 박 시장은 그 어느 부산시장보다 많은 성과를 거뒀고, 전국적인 주목도 받았다. 하지만 2년 남은 박 시장 2기 체제에 뭔가 아쉬움이 남는 건 왜일까.
박 시장은 ‘임시 관리인’에 불과했던 1기 때와 달리 재선 시장에 취임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실력을 발휘했다. 그가 2022년 7월부터 이달까지 유치한 총 투자 규모는 8조 4000억 원에 달한다. 역대 최대이며, 이전보다 10배 증가한 규모다. 이는 1만 2700여 명의 고용 창출 효과에 해당된다고 부산시가 밝혔다. 이 덕분에 부산은 미래산업과 신산업 중심으로 경제 구조를 빠르게 혁신 중에 있다. 현 정부를 집중 설득해 가덕신공항 개항 시기를 6년 앞당길 수 있게 됐고, 자신의 선거 공약이었던 ‘15분 도시’ 사업도 착착 진행하고 있다. KCC 이지스 남자 농구단을 유치해 27년 만에 부산 연고 프로 스포츠단의 우승을 이끌었다.
이런 노력으로 부산은 ‘글로벌스마트센터지수’에서 세계 14위와 아시아 3위를 기록했고, ‘세계 살기 좋은 도시’ 부문에서도 아시아 6위를 차지했다.
그런데도 요즘 “박 시장이 존재감이 없다”는 얘기가 간혹 나온다. 한때 전국 언론에서 그의 활동상을 부각시키는 보도가 연일 쏟아지더니 최근에는 많이 줄었다. 리얼미터가 18일 발표한 ‘전국 17개 광역단체장 직무수행 평가 조사’(4월 26일~5월 1일, 5월 28~6월 2일 실시)에서도 박 시장은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일각에선 2030월드엑스포 유치 불발에서 그 원인을 찾지만 그건 잘못된 진단이다. 단언컨대 엑스포 실패는 박 시장의 잘못이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엄청난 물량 공세를 퍼붓는 상황에서 어느 나라라도 성공하기 힘들다. 굳이 따지자면 잘못된 정보와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한 현 정부 잘못이다.
그렇다고 박 시장이 원래 무능하거나 무기력한 사람도 아니다. 대학 교수 출신인 박 시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이론가이자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국회의원과 청와대 정무수석, 국회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게다가 그는 수준급의 농구와 테니스 실력을 갖춘 만능 스포츠맨이다. 외국어 실력도 뛰어나다. 그는 과거 부산시장들에게선 찾기 힘든 다양한 재능을 갖추고 있다.
일부 인사들은 “차기 선거에서 박 시장이 교체될 수 있다”고 흠집내기를 시도하지만 현재로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 그는 2021년 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해 윤석열 정부 탄생의 기틀을 마련했다. 2022년에는 역대 부산시장 중 최다 득표율(66.4%)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 당시 부산 기초단체장들은 “박 시장이 우리를 살렸다”고 그에게 공을 돌리기도 했다. 부산시민들이 그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준 것이다.
국민의힘 예비후보들 중에서 박 시장만 한 경쟁력을 갖춘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 한물간 친윤(친윤석열)계 인사이거나 중앙무대에서 존재감이 현저히 떨어지는 정치인들이다.
게다가 1995년 지방자치제가 도입된 이래 보수 정당 소속 현직 부산시장이 중간에 다른 후보로 교체된 전례가 없다. 허남식 전 시장은 내리 3선을 했고, 서병수 전 시장은 본선에서 민주당 후보에게 뒤졌다.
한마디로 박 시장은 다른 예비후보들이 넘보기 힘든 ‘절대 강자’인 셈이다.
그런데도 ‘박형준 3선’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가끔 들리는 이유는 뭘까. 그건 한마디로 박 시장이 자신의 장점을 잘 살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박 시장은 모든 정치인들 중에서 ‘상품성’과 ‘대중성’이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부산시장 박형준’에 머물러 있는 한 본인은 물론 부산에도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뜻이다.
엑스포 유치 실패후 극도로 제한된 활동폭을 대폭 넓혀야 한다. 세계 각국을 다니며 부산을 알리고 그랜드디자인을 그려야 한다. 전국시도지사협의회 회장으로서 전국을 찾아다니며 ‘관광과 문화 도시 부산’을 적극 홍보해야 한다. 가끔 SNS 활동을 통해 중앙 현안에 적극 개입할 필요도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국적인 인물로 재부상해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차기 대권주자 반열에 다시 오르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정무라인을 포함한 인적 자원의 대개편이 절실하다. 박 시장은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를 가진 사람이다. 그 인맥을 활용해 전국에서 인물을 찾아야 한다.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미래’에 도움될 사람을 두루 등용해야 한다. 이번 기회에 자신이 왜 부산시민의 선택받았는지 고민해 보고 기본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2024-06-23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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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신문 이야기
이 글은 종이신문 이야기다. 만약 당신이 폰이나 컴퓨터로 보고 있다면 그만 읽어도 상관없다. 다만 이렇게 무미건조한 제목을 클릭했다면 최소한 언론에 관심 있는 분일 거라 짐작한다. 그 점에 감사드린다. 종이신문 독자라면 경험으로 이미 아는 내용이 많을 것이다.
“신문은 어떻게 봐야 하는 건가요?”
공교로운 일이었다. 최근 후배 동료 2명으로부터 거의 같은 질문을 각각 받았다. 디지털 환경에서 자란 1990년대생에게 종이로 된 신문은 낯선 물건인 모양이다. 신문사 밥을 먹는 특수한 처지에서 일종의 ‘종이신문 리터러시(문해력)’를 고민하는 것이다. 내 직책 때문에 물은 것은 아닐 테지만 명색이 신문 제작을 책임진 입장에서 뭔가 답을 해야 할 것 같다.
한국의 언론 구조를 볼 때 단순히 뉴스만을 위해서라면 굳이 종이신문을 볼 이유는 없다. 포털에 시시각각으로 뉴스가 쏟아진다. 〈부산일보〉는 하루 200건 남짓 기사를 생산한다. 이 기사들 역시 네이버(구독자 310만 명)나 부산닷컴(4만 1000명)에서 다 볼 수 있다. 그중 종이신문에 실리는 것은 70~80건. ‘부산’과 ‘일보’(日報)라는 회사 이름은 실은 우리의 업무 패턴과 안 맞는 측면이 있다. 지역을 막론해 24시간 웹에 기사를 전송하고 있으니.
기사 선별 작업은 ‘제작회의’에서 이뤄진다. 20년차 안팎의 기자들이 하루 2번씩 한다. 이 자리에서 어떤 기사를, 어떤 크기(밸류)로 지면에 담을지도 결정한다. 우리 사회, 특히 부울경에 의미 있는 것을 엄선하고 기획하는 과정이다. 반면, 속도가 생명인 웹 기사는 현장 기자에게 배포 등의 자율권이 많이 부여된다.
신문이 인터넷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편집’이다. 기사와 사진(그래픽)을 종이라는 한정된 공간에다 앉히는 과정이다. 세부적으로 제목과 레이아웃으로 나뉜다. 인터넷 기사는 클릭하면 그 기사만 볼 수 있지만 신문 편집은 기사들 간 조화와 균형, 중요도, 관련성, 아름다움, 가독성 등을 종합해 따지는 작업이다.
필자는 다른 신문을 6개 본다. 본문은 거의 안 읽는데, 전날 신문 제작 때 웬만큼 본 내용이라서다. 대신 어떤 기사를, 어떤 제목과 크기로, 어느 면에 넣었는지와, 같은 사안을 얼마나 다르게 접근했는지를 챙겨본다. 신문의 얼굴은 1면이다. 개별 언론사는 그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사와 사진을 이곳에 담는다. 우리도 1면 톱거리가 마땅찮은 날은 비상이다.
신문의 또다른 재미는 ‘제목’이다. 훌륭한 제목을 보면 감탄이 나온다. 본질적으로 독자 눈을 붙잡는 것이지만 인터넷과 신문의 문법은 다르다. 대체로 클릭(PV)을 노리는 인터넷은 가볍고, 신문은 무겁다. 신문 제목의 덕목으로 핵심 짚기, 방향 잡기, 간결함, 운율, 언어유희(pun), 중의성(重義性) 등을 꼽을 수 있다.
인터넷 독자들은 이게 뭐 그리 중요할까 싶을 것이다. 사회 어젠다를 만드는 데 신문은 여전히 강력한 플랫폼이다. 그 힘은 취재·기획력과 편집에서 나온다. 웹 기반으로 지면을 볼 수 있는 서비스가 생긴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편집을 마친 신문은 인쇄된다. 이 과정이 의미가 깊다. 인쇄된 것은 절대 이전 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인쇄 전에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그래도 틀리면 다음 날 지면에 바로잡기를 한다. 심할 경우, 인쇄된 신문을 몽땅 버린다. 인터넷은 다르다. 언제든 고칠 수 있고, 아예 없앨 수도 있다. 마음가짐 자체가 다르다.
같은 기사라도 플랫폼이 웹이냐 지면이냐에 따라 내용도 조금씩 차이 난다. 종이신문은 마감시간이 있고 지면이 한정돼 압축·정제된다. ‘정보의 바다’에서 뉴스가 이 정도라도 품질을 유지하는 것은 그 뒤에 종이신문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AI(인공지능)의 주요 학습 자료도 언론사가 생산한 콘텐츠다.
종이신문은 철저한 아날로그 매체다. 오감을 집중해 천천히 ‘완독’할 수 있다는 게 매력이다. 확증편향 걱정 없이 관심 없는 분야도 자연스레 접한다. 또 여러 생각들이 담긴 칼럼은 '공공 포럼'이고, 광고는 또다른 정보다.
장황하게 신문을 설명했다. 이는 그만큼 많은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면서, 반대로 속도 지향의 세상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신문은 노동집약적 장치산업이다. 이 글로 ‘디지털 쓰나미’를 거스르겠다는 욕심 따위는 없다. 한때 신문을 만든 자의 소박한 기록 정도의 의미라면 모를까.
언론 환경은 이미 종이냐, 디지털이냐의 수준을 넘어섰다. AI가 더 똑똑해지면 기자가 했던 일의 상당 부분을 대신하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신문이라는 ‘숙주’와 함께 수백 년 공진화했던 ‘저널리즘 정신’이 이런 환경 변화에 어떻게 적응하느냐다. 오늘도 꿋꿋하게 신문을 만드는 언론인들의 숙제다.
답이 됐는지 모르겠다.
김마선 페이퍼랩 본부장 msk@busan.com
2024-06-1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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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여자는 애 낳는 기계가 아니야!
여성에 대한 편견, 소수자에 대한 차별, 성·인권 범죄에 대한 2차 가해를 막고 올바른 관점으로 신문을 만들겠다며 시작한 부산일보 젠더데스크가 어느새 4년을 맞았다. 단어 하나에도 신경 쓰며 매일 신문을 만들지만, 아쉬운 순간은 여전히 존재한다.
신문이 인쇄되기 직전까지 문제있는 문장이나 단어가 발견되면 수정하고 있다. 일명 ‘가치중립적 단어 쓰기’를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유모차’는 육아를 마치 여성(엄마)의 몫으로만 생각하게 하는 표현이기에 이제 ‘유모차’ 대신 이젠 ‘유아차’라는 단어로 바꾸고 있다.
최근 몇 년간 가치중립적 단어 쓰기를 진행하며 고민되는 점이 있다. ‘저출산’과 ‘저출생’이다. 다들 알고 있듯 대한민국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최저 출산율 국가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4분기 합계출산율은 사상 처음으로 0.6명대로 떨어졌다. 몇 년간 몇 백 조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투자했지만, 상황은 더 심각해지고 있다. 관련 뉴스가 자주 나올 수밖에 없다.
가치중립적 단어 쓰기에선 ‘저출산’은 사용하지 않아야 할 단어로 지적된다. ‘저출산’은 여성이 아이를 적게 낳는다는 뜻으로 마치 여성에게 책임을 돌리는 느낌이 있다. 그래서 ‘저출산’ 대신 아이가 적게 태어나는 현상만 뜻하는 ‘저출생’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의 핵심부서 이름은 여전히 저출산고령화대책위원회이다. 이들이 발표하는 정책 이름도 저출산으로 시작된다. 결국 기사를 쓸 때 저출산 대신 저출생으로 쓰자고 했지만, 부서나 정책 고유명사를 살리면 ‘저출산고령화대책위원회가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올해 저출산대책을 발표했다’는 애매한 문장이 돼 버린다.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최근 공적 기관들의 황당무계한 저출생 대책을 보며 이들은 ‘저출산’과 ‘저출생’의 차이조차 알지 못하는 수준이지 않을까 싶어서다.
많은 이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황당한 저출생 대책을 보자. 먼저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재정포럼은 인구 비중 감소에 대한 대책으로 “남성의 발달 정도가 여성 발달 정도보다 느리다는 점을 고려해 여성들을 1년 조기 입학시키면 향후 적령기 남녀가 매력을 더 느낄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여성을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도구로 보는 관점이자 국책연구기관이 대놓고 남자는 발달 속도가 느리다며 남혐을 조장하고 있다.
저출산고령화위원회는 지역 순회 간담회에서 인천시를 찾아 “무료로 미혼남녀 만남을 많이 지원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만날 기회가 없어서 결혼을 안 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일까. 핸드폰만 켜면 데이팅앱을 통해 즉석 만남이 가능하고 밴드와 인터넷 동호회에서 취미·관심이 비슷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시대이다. 남녀를 만나게만 해주면 결혼해서 금방 애를 낳을 것이라는 철없는 기대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서울시가 추진하는 정관·난관 복원 수술 지원도 그렇다. 애를 낳지 않으려고 굳이 수술했는데 애를 낳을 수 있도록 수술해주면 애가 많이 태어날 것이라는 정책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서울시 한 의원은 ‘괄약근을 조이는 케겔 운동으로 자궁이 건강해지면 저출생을 극복할 수 있다’며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저출생 같은 복잡미묘한 사회 문제를 괄약근 운동으로 해석하는 논리는 마치 ‘여성은 애 낳는 자궁 기계’로 보는 것 같아 불쾌하기 짝이 없다.
괄약근을 조여도, 정관을 풀어도, 남녀 만남을 주선해도, 여성을 1년 먼저 입학시켜도 저출생은 해결될 것 같지 않다. 이미 비슷한 정책으로 실패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2016년 행정차지부는 자치단체별 가임기 여성의 수를 공개하고 줄을 세운 ‘대한민국 출산지도’를 발표했다가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2017년에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여성의 고학력과 소득수준 상승이 저출생 현상을 심화시킨다며 불필요한 스펙 쌓기를 방지해 하향 결혼이 가능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물론 쏟아지는 비판에 선임연구원은 보직 사퇴했고, 연구원장은 공식 사과글을 올렸다. 당시 화가 난 여성들은 항의 시위에 나섰다. “내 몸이다 이것들아 얻다대고 낳으라 마라야” “우량암소 통계내냐 출산지도 웬말이냐” “여성은 아기공장이 아니다”라고 외쳤다. 7~8년이 지났지만, 정책은 나아진 것이 없다. 당시 항의 시위 문구 중 “여성인권 없는 나라 비출산으로 망해라”가 현실이 되고 있다.
저출생이 심각해진 건 여성이 똑똑해져서도, 남녀가 만나지 못해서도, 자궁이 튼튼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대한민국이 과연 아이를 낳고 키울 만한 좋은 환경인지 확신하지 못해서다. 여성인권, 육아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실질적인 대책을 내놓는 것이 저출생 문제를 푸는 첫걸음이다.
2024-06-09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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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지난달 부산시는 올해부터 열릴 부산형 융복합 전시컨벤션 이벤트 ‘옥토버 부산페스티벌’(가칭)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페스티벌 참여 기관들과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제각각의 일정으로 열렸던 부산 대표 행사를 10월 초에 한데 뭉쳐놓음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하겠다는 취지다. 이른바 ‘집적효과’다.
옥토버 페스티벌에 참여할 ‘옥토버 어벤져스’에는 △플라이 아시아창업엑스포 △부산디자인페스티벌 △부산국제영화제 △데이터 글로벌 해커톤 △부산국제공연예술마켓 △국제록페스티벌 △국제음식박람회&마리나셰프챌린지 △수제맥주페스티벌 △2024부산원먼스페스티벌 등이 포함됐다. 행사는 대체로 9월 30일~10월 6일 일주일 중에 몰려있고, 부산국제영화제처럼 큰 행사(행사 기간만 열흘이다)는 10월 11일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행사는 뭉쳐놨는데 정작 사람은 행사만큼 뭉쳐지지 못한 것 같다. 지역 문화계 곳곳에서 볼멘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행사의 경우 큰 행사의 덕을 볼지 아니면 큰 행사에 묻혀버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대체로 부산시로부터 지원을 받아 살림을 꾸리는 기관·단체들로선 시의 ‘헤쳐모여’ 명령을 거부하기도 힘들다. 올해 행사를 예년 대비 몇 달 미뤄 치르게 된 A 단체 관계자는 “시의 방침에 따라 일정을 바꾸긴 했지만, 국제영화제나 국제공연예술마켓과 같은 큰 행사에 밀려 사람들의 관심이나 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털어놓았다.
“(뭉쳐진) 행사들의 성격이 제각각이라 관객층이 겹치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라는 변명도 들려온다. 충성도 높은 관객만 취하겠다는 의도처럼 들려 다소 거슬린다. 영화광들은 영화만 볼 것이고, “Rock Will Never Die”(록은 영원하다)를 외치는 이들은 록페스티벌만 찾을 거라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평소 영화에 관심이 적은 사람도, 록을 잘 듣지 않던 사람도, 축제를 계기로 좀 더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고 록을 즐겼으면 좋겠다. 그것 또한 축제의 역할 중 하나일 테다. 그렇다면 관객층은 분명 겹친다. 관객층뿐 아니라 겹치는 것은 하나 더 있다. 바로 숙박 인프라다. 예년에도 국제영화제나 불꽃축제 같은 큰 행사가 열리면 인근 숙박 시설이 부족해 불편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올해는 벌써부터 ‘10월 초 숙박대란’에 대한 흉흉(?)한 소문마저 돈다.
물론 어떤 변화이든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기 마련이다. 너무 우려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변화의 시도조차 어려워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누가 확신할 수 있나. 문화계가 가진 우려들은 대부분 기우에 그칠 뿐이고, 부산시가 기대하는 집적효과가 더 클 수도 있다. 무사안일주의보다는, 시도를 거듭하며 수정해 나가는 것이 낫다.
그렇게 이해하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너그러운(?) 시선으로도, 단 한 가지만큼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오는 8·9일로 예정된 부산원아시아페스티벌에 관한 것이다. 올해로 8회째를 맞는 원아시아페스티벌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10월에 열렸던 행사다. 지난 2월 말 부산시는 올해 행사를 6월로 앞당기면서 그 이유로 “10월엔 국제영화제, 불꽃축제 등이 몰려있어 ‘원아페’ 관객들의 항공권·숙소 예매가 어렵다는 지적에 따라 일정을 변경하게 됐다”고 했다. 게다가 “일정을 옮김으로써 상대적으로 관광객이 덜한 6월에도 ‘원아페’를 보러 모인 관광객으로 부산이 북적일 것”이라는 기대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분산효과’다.
혼란스럽다. 홍상수 감독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가 떠오른다. 불과 몇 달 전에는 10월에 겹친 행사를 헤쳐 놓더니, 이제는 다시 10월로 행사를 모은다. 그때는 틀렸던 것이 지금은 맞다? 기자의 짧은 생각으로는, ‘옥토버 페스티벌’에 대한 검토가 한두 달 새 급하게 이뤄졌거나(실제로 부산시가 ‘옥토버 페스티벌’의 모델이라는 미국의 모 축제를 견학한 것은 불과 지난 3월의 일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원칙이나 철학 없이 순간순간의 직관으로 일 처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입장이 바뀔 순 있다. 다만 충분한 검토가 있어야 하고, 입장을 바꾼 이유도 명확해야 한다. 그런데 부산시는 대충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한다.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잘못한 사람도, 책임지는 사람도 없다. 대체거래소(ATS)만 해도 그렇다. 그렇게 설립 반대만 외치더니, 언젠가부터 슬그머니 “유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을 바꾼다. 이대로라면 시민들이 비싼 돈을 들여 총명탕이라도 먹어가며 기억을 ‘총명’하게 해야 할 판이다. 부산시가 지금은 ‘맞다’고 한 것을 언제 또 은근슬쩍 ‘틀렸다’고 말바꿈 할 지 몰라서다.
2024-06-02 [1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