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일상과 밀접한 정책은 투표… 학교·병원·기업 '재균형' [세계가 주목하는 N분 도시]
프랑스 파리의 성공 사례
적용·토론·수정 과정 통해 추진
시내 ‘학교 가는 길’ 300여 곳
현장 의견 충분히 반영해 실시
반대 목소리 수렴 수정하기도
도심 핵심 시설 재배치에 초점
시민단체가 중간자 역할 효과
골목을 예쁘게 바꾸고 평생교육센터만 늘린다고 15분 도시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핵심은 시민들이 생활권 안에서 이웃과 소통하며 커뮤니티를 회복하고, 나아가 공정하게 재배치된 도시 기능을 누리는 데 있다. 부산시는 2021년부터 15분 도시를 표방하며 시범 지역 조성에 나섰지만, 결국 도시 전역에서 이런 목표를 어떻게 실현할지는 숙제로 남아 있다. 〈부산일보〉 취재진이 찾은 프랑스 파리는 그 답을 과감한 분배와 적용, 토론과 수정을 통해 모색하고 있었다.
■학교 가는 길… 투표하고 수정한다
지난 3일 프랑스 파리 빅토르 쿠쟁 공립 초등학교 앞 골목 ‘학교 가는 길’ 공사 현장. 어린이들이 뛰놀기에 위험한 학교 앞 좁은 골목의 차선을 줄이고 보도를 넓혀 보행자 전용 도로로 바꾸는 중이었다. 길가엔 다양한 종류의 식물을 심은 미니 정원을 조성했다. 도시의 주요 기능까지 누구나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15분 도시 정책의 현장이다.
올 9월 초 기준 파리 시내에는 ‘학교 가는 길’이 300여 곳 있다. 구급차나 쓰레기 수집차가 아니라면 학부모라도 이 길에서 차를 몰 수 없다. 앞으로 파리시는 이런 차 없는 거리를 500곳 추가할 예정이다. 시민들이 그렇게 투표했기 때문이다. 올 3월 주민투표 결과 투표율은 4%대에 그쳤지만, 보행자 우선 도로 확대에 65.9%가 찬성했다.
정치 선거만큼 투표율이 높지 않지만, 일견 사소해 보여도 시민의 일상과 매우 밀접한 정책을 주민투표에 부쳤다는 점에서 현장 의견을 충분히 듣겠다는 파리시의 세심한 시각이 드러난다. 시내에 전동 킥보드를 퇴출할지, SUV 차량에 특별 주차 요금을 부과할지도 투표 안건으로 오른 적 있다.
현장 인근 바닥에는 기존 흰색 실선 위에 노란색 페인트로 겹쳐 그린 횡단보도가 눈에 띄었다. 파리시는 교통 정책을 바꿀 때 표지를 일단 노란색으로 그려 수개월 운영 해보고, 의견을 수렴한 뒤 문제가 없으면 흰색으로 다시 그린다. 한국에서는 ‘정차 금지’와 같은 확정적 의미의 도로 표지를 노란색 페인트로 그리지만, 이곳에선 임시적 의미다.
15분 도시 교통 정책은 차량 중심의 보행자와 자전거 전용으로 바꾸는 작업을 수반하기 때문에 운전자들의 반발이 거세다. 그렇지만 파리시는 과감하게 적용하되, 시민 의견을 바탕으로 수정하는 데도 열려 있었다. 15분 도시 창시자인 카를레스 모레노 교수가 이끄는 소르본대 파리기업행정연구소 한승훈 디자이너는 “도로 위 노란 선처럼 충분히 의견을 듣고 필요하다면 수정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가 눈여겨볼 만한 태도인 것 같다”며 “볼라드를 10cm만 안으로 옮겨 달라는 디테일한 이야기까지 나올 만큼, 활발하게 의견을 주고받는 시간이 많다”고 말했다.
■과감한 재배치와 시민단체의 역할
학교와 병원, 기업 등을 효율적으로 재배치 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기능들이 서로 멀리 흩어지면 생활권이 넓어져 차량으로 이동하려는 경향이 짙어질 수밖에 없다. 15분 도시 최초 사례로 알려진 파리 북서부 클리시 바티뇰 지구처럼 신도시를 짓는다면 생활권 조성은 비교적 수월하다. 그러나 도시 전체를 허물고 새로 지을 수는 없기에 기능의 재배치, 즉 ‘재균형’이 중요하다.
파리기업행정연구소 캐서린 걀 총괄 책임자는 “거주지와 일자리의 근접성을 높이기 위해 라데팡스에 있는 회사 본사를 시내로 이전하게끔 하는 솔루션도 있었다”고 전했다. 이어 “또 올림픽을 계기로 체육시설이 부족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수영장이나 스포츠센터를 지었다”며 “대학도 파리 북쪽, 남쪽에 캠퍼스를 둔 것처럼 기능을 외곽으로 배치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민단체가 직접 인프라 개선에 나서며 중간자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도 15분 도시 정착에 힘을 발휘했다. 파리 시민단체 ‘더 나은 자전거의 이동을 위한 협회(RDB)’와 ‘파리 앙 셀(Paris en Selle)’는 파리 시내 공유 자전거 시스템 도입과 인프라 개선, 시민 교육, 캠페인 운영을 주도해 자전거를 시내 주요 교통수단으로 자리잡게 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파리(프랑스)/글·사진=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
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