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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BIFF '서른 즈음에' 길을 묻다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30년 전에 발매된 가수 김광석의 4집 앨범 수록곡 ‘서른 즈음에’의 가사 중 일부다. 1996년 남포동 골목에서 쏘아 올린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지난달 스물아홉 번째 항해를 마쳤다. 그동안 BIFF는 부산의 도시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아시아 영화제 중 후발 주자로 출발했지만 빠른 시간 안에 세계적인 영화제로 성장하며 부산을 대표하는 문화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BIFF의 여정이 항상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2014년에는 영화 ‘다이빙벨’ 상영 논란으로 위기를 맞았고, 지난해에는 지도부 사퇴 등 내홍도 겪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BIFF는 영화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노력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통상적으로 한 세대를 30년으로 본다면 내년이면 BIFF는 한 세대를 맞는다. 서른 돌은 한 시대의 종착점이자 새로운 30년을 준비하는 출발점이다. 이에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BIFF의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타 장르와의 연계다. 또 다른 하나는 주변 공간의 활용이다. 특히 타 장르와의 연계는 BIFF의 확장성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이제 BIFF는 단순한 영화 행사가 아니다. 부산과 이 시대의 문화를 담는 그릇이다. 지금까지 BIFF는 영화라는 틀 속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영화인만 즐기는 축제라는 지적이 이를 말해 준다. BIFF는 영화 축제를 넘어 문화 축제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화제 개폐막식 때 영화인뿐만 아니라 지역의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을 초청해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영화인들 사이에서 여전히 “BIFF는 모든 게 영화로 시작해 영화로 끝난다”고 얘기할 정도다. 이는 영화 너머를 바라봐야 한다는 뼈 있는 충고이기도 하다. 이제는 ‘비욘드 시네마(Beyond Cinema)’를 추구하며 타 장르와의 연계성을 강화해야 한다. 영화제 기간 영화의전당뿐만 아니라 부산시립미술관이나 복합문화공간 F1963에서도 영화 관련 주제 전시나 연계 프로그램을 운영할 필요가 있다. 개폐회식 때 부산 시립교향악단의 선율을 감상하지 못하란 법도 없다. 이렇게 영화와 다른 예술 장르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문화의 바다는 BIFF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매년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영국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의 여름 임시 별관을 설계해 건축의 최신 트렌드를 선보이는 전시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완성된 파빌리온이 서펜타인 갤러리에 남아 건축과 미술의 경계를 허무는 예술 작품으로 거듭난다. 그동안 자하 하디드, 프랭크 게리 등 유명 건축가들이 참여했으며, 올해는 한국의 조민석 건축가가 선정돼 그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BIFF에 적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 BIFF의 ‘배우 특별전’을 서펜타인 파빌리온처럼 기획해 보는 것이다. 국내외 유망 건축가들을 통해 배우 특별전을 파빌리온 형태로 영화의전당 앞 APEC 나루공원에 설치해 시민들이 관람할 수 있게 한다면, BIFF는 더욱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마치 멋진 건축물이 모여 도시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과 같다. 또한 이러한 파빌리온은 시민들에게 ‘일상 속 영화 향유’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영화의전당이 건물 앞 도로 지하화를 통해 APEC 나루공원과 수영강에 이르는 ‘영화의광장’으로 진화 발전하는 만큼 이에 대한 준비도 서둘러야 한다. 단절돼 있던 길을 영화라는 끈으로 이어주면 금상첨화다. 이를테면 BIFF 개막식 때 초청 배우들이 배를 타고 수영강을 통해 영화의전당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수변 공간을 활용한 이벤트를 추진하면 BIFF의 인지도도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이 밖에 F1963의 현대모터스 전시관처럼 기업 유치를 통해 1층에는 자동차 전시관, 2층에는 영화관을 만들어 공간의 확장을 가져오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다. 영화의전당 인근 빈 공간을 활용하면 된다.
몇몇 영화인들은 “BIFF가 오로지 영화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 융복합을 통한 확장이 필요하다. 이제는 영화를 넘어 문화, 월드 비전까지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 이러한 제안은 BIFF가 서른 돌을 맞아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볼 때면/ 나의 가슴은 설렌다/ 내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나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거니/ 나 늙어진 뒤에도 제발 그랬으면.’ 영국의 계관시인 W 워즈워드의 ‘무지개’라는 시다. BIFF가 그런 설렘의 대상이면 좋겠다. BIFF의 ‘서른’을 기대한다.
2024-11-0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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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1000만 원 예산이면 어르신이 즐겁다 [정달식의 일필일침]
“뭘 사고 싶어도, 요즘은 시장 보기도 힘들다. 차 타는 것도 겁나고 동네 이웃 차가 시장이나 마트에 가면 얻어 타고 가서 물건을 사 오곤 하는데…. ” 올 추석 때 시골 고향에 갔을 때 팔순을 훌쩍 넘기신 어머니께서 하신 얘기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일전에 온갖 것을 싣고 동네마다 다니며 물건을 파는 트럭을 TV에서 봤는데, 우리 마을에도 그런 차가 다니면 좋겠다”라며 말을 맺으셨다.
이제 대부분의 농어촌 지역은 70~80대 이상의 고령자가 주를 이루는 초고령 사회로 진입했다. 이와 함께 식료품을 살 수 있는 가게조차 사라진 마을이 늘고 있다. 이런 곳을 흔히 ‘식품 사막(food desert)’이라고 한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소매점이 하나도 없는 마을이 무려 73.5%에 달한다. 이는 농어촌 마을 대략 네 곳 중 세 곳은 내부에 구멍가게 하나조차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필품을 사려면 꼼짝없이 차를 타고 대형 마트가 있는 큰 동네나 면 소재지로 나가야 할 판이다. 어떤 이들은 필요한 물건을 배달받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이런 서비스는 도시에서나 누릴 수 있는 혜택일 뿐이다. 농어촌 어르신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단순히 편의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서비스다.
어머니가 얘기한 트럭은 가게가 없는 마을을 순회하는 이동식 마트 개념의 만물 트럭이다. 고향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어르신들이 많이 사는 농어촌 지역에는 이런 서비스가 꼭 필요하다. 하지만 농어촌 지역 지방자치단체는 아직 만물 트럭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청년 인구 유입을 위한 정책들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지만, 정작 지역에 거주하는 어르신들을 위한 정책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에 군 단위 기초지자체에서 지역 어르신들이 생활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이동식 만물 트럭’을 운영해 볼 것을 제안한다.
군 단위로 보자면 만물 트럭 1~2대 정도면 충분하다. 3.5톤가량의 냉동·냉장 기능을 갖춘 트럭이면 더 좋다. 신선식품은 물론이고 온갖 일상 잡화를 싣고 1주일 혹은 10일 간격으로 마을을 순회하면 된다. 문제는 누가 만물 트럭을 몰고 물건을 판매하느냐 하는 것이다. 여유가 있다면 지자체 사회복지팀을 활용할 수도 있고, 아니면 만물 트럭을 운영해 본 사람을 공모해 월급제로 운영할 수도 있다. 월급제로 하면서 수익 일부를 판매자가 가져가는 방식도 가능하다. 차량 구입비와 설치비 등을 제외하고 지자체가 월 1000만 원 정도의 예산을 확보하면, 지역 어르신들의 삶이 한결 윤택하고 즐거울 수 있단 얘기다. 만물 트럭은 판매에만 국한될 필요는 없다. 때론 형광등 교체 등의 간단한 도우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트럭은 마을 단위로 1시간 정도 머물다가 다른 동네로 가면 된다. 만물 트럭에 사회복지사가 동행한다면, 단순히 생필품을 판매하는 차원을 넘어 마을 어르신의 건강이나 안부를 확인하는 현장형 사회복지 기능도 수행할 수 있다. 만물 트럭은 시골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부산 기장군이나 강서구처럼 도농복합지역에도 요긴하다. 지역 저소득·홀몸 어르신이나,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이 많은 곳이라면 더 좋다.
예산이 부담돼 지자체가 선뜻 나서기 어렵다면 지역 농협과 손잡고 할 수도 있다. 물품 공급 체계와 탑차 등을 갖추고 있어 연계가 가능하다. 일부 지역에선 농협이나 지역협의체가 이동식 트럭을 운영하는 곳도 있다.
이웃 일본은 식품 사막을 겪는 이들을 위해 일찍부터 이동 판매 차량을 운영하고 있는데, 2023년 기준 1200대에 달할 정도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농림축산식품부가 소위 이동식 만물 트럭 형태의 ‘가가호호 농촌 이동장터’ 시범 운영을 몇몇 지자체와 협의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재 지자체 차원에서 만물 트럭을 직접 운영하는 곳은 없다.
지방소멸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급격한 인구 감소는 이제 시골 마을의 생활 기반마저 위협하고 있다. 손님이 줄어들면서 가게가 문을 닫고, 이에 인구는 더욱 줄어드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정부도, 지역 농협도 더 이상 팔짱만 끼고 있어선 안 된다. 만물 트럭은 단순한 생필품 제공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어르신들이 다시 활기를 찾고, 사회적 고립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오늘도 농어촌의 어르신들은 2022년 tvN에서 방영된 ‘우리들의 블루스’ 속 만물 트럭의 만물상(이병헌 분)을 한없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2024-10-08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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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동천 살리기' 백년하청 안 되려면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2020년 10월 사망한 후, 이듬해 4월 유족 측은 이 회장이 평생 수집해 온 미술품과 문화재 2만 3000여 점을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이 소식에 가장 먼저 반응한 곳은 부산이었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곧바로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건희 미술관, 부산에 오면 빛나는 명소가 됩니다’라는 글을 올리며 부산 유치를 위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이어 수원, 세종, 광주, 대구, 창원 등 여러 도시가 유치 경쟁에 뛰어들었으나, 결국 이 회장 소장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기증되면서 부산 유치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되돌아보면, 부산시가 이건희 미술관 유치를 위해 좀 더 전략적으로 접근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부산시는 해묵은 과제를 하나 들고나왔다. 그건 바로 동천 수질 개선 사업이다. 동천 살리기는 2024 파리 올림픽에서 센강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으면서 부산 시민들의 관심이 더 높아진 상황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최근 부산시는 동천의 수질을 개선하기 위해 하루 평균 7000t의 성지곡수원지 계곡물을 투입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몇 년 전 준설 작업처럼 동천을 살리는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동천의 수질 개선은 지역의 숙원 사업이었으나 최근 10년간 진행된 해수 투입 대책마저 수백억 원의 예산만 낭비했다는 비판을 받는 실정이다. 그렇기에 이번 사업 역시 부분적인 정화에 그쳐, 동천 살리기는 자칫 백년하청(百年河淸)이 될 가능성이 높다.
동천을 살리려면 부전천 등 대여섯 개의 동천 지류까지 전부를 손대야 한다는 게 관련 전문가들의 입장이다. 그들은 “생활오수의 하천 유입을 막는 분류식 하수관거 정비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게 선행되지 않고서는 동천이 맑아지길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또 퇴적토 제거부터 철저한 정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땜질식 정비로는 절대 안 된다는 얘기다. 강 밑바닥까지 깨끗하게 하려면 적어도 10년 이상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민, 민간단체는 물론이고, 기업의 참여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울산 태화강 생태 회복에도 이들의 참여가 큰 힘이 됐다.
그래서 다소 엉뚱한 제안을 해 본다. 바로 특정 기업을 지렛대 삼아 부산 동천을 살리자는 것이다. 서두에서 삼성그룹을 언급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부산은 삼성과는 오랜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동천 옆 서면 더샵 센트럴스타 자리는 오늘날 삼성그룹의 모태가 된 제일제당이 있었던 곳이다. 동천과 삼성은 그만큼 인연이 깊단 얘기다. 기업의 재정적 참여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꼭 이런 도움이 아니어도 괜찮다. 기업이 할 일은 많다. 이에 상응해 동천에 특정 기업과 관련된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건설하는 방안도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참여가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성사된다면 그 혜택은 오롯이 시민에게 돌아온다. 특정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유치는 지역 문화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 관광객 유입의 유인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삼성이 아니면 어떤가. 동천 주변에는 LG그룹의 시초인 락희화학을 비롯해 수많은 기업의 터전이 있었다.
이쯤 되면 일각에선 동천 살리기가 정말 그렇게 중요하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 대답은 “그렇다”이다. 동천은 부산의 미래이자 희망이다. 도심 한복판으로 냄새나는 탁한 물이 흐르는 것을 방치한 채 부산의 내일을 얘기할 순 없다.
동천은 근대 부산의 역사와 문화를 오롯이 품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큰 그림을 그릴 필요도 있다. 복개된 구간을 걷어내고 프랑스 센강이나 싱가포르의 싱가포르강처럼 배를 활용해 부산의 역사와 흔적을 관광객들에게 보여주는 길이 열렸으면 좋겠다. 뱃길 구간은 동구 미군 55보급창 인근에서 부산진구 광무교까지라도 괜찮다. 도시재생과 연계한 동천 개발은 싱가포르강 인근 클락키(Clarke Quay) 지역이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이곳은 세계적인 수변 관광지로 싱가포르의 역사 흔적을 보여주는 옛 건물과 현대적인 상업 시설이 강을 따라 펼쳐져 있어 관광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싱가포르 정부가 1977년부터 10년여에 걸쳐 개발한 결과다. 동천 또한 도시재생과 연계해 장기 마스터플랜을 세운다면 못 할 것도 없다. 지금이라도 행정, 시민, 환경단체, 도시 디자이너 등이 적극 나서서 동천에 활기를 불어넣는 장기 계획을 세워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동천의 수질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낱 꿈에 불과하다. 꿈이 현실이 되려면 부산시와 시장의 실행 의지가 필수적이다. 비록 힘들지라도 동천의 꿈이 꼭 실현되길 기대해 본다. 동천이 살아야 부산이 산다.
2024-08-29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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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부산 특별건축구역, 도시 미래 될 수 있나 ?
도미니크 페로, 렘 콜하스, 리처드 마이어, 위니 마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들이다. 갑자기 이들을 호명한 이유는 부산 특별건축구역 활성화 시범사업 후보지 설계를 맡아서다. 국내 건축 설계사와 컨소시엄 형태로 이루어진다. 최근 부산시는 특별건축구역 활성화 시범사업 후보지 7곳을 선정했다. 최종 시범사업지는 10월쯤 4~5곳이 선정될 예정이다. 특별건축구역은 도시경관을 고려해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건축물을 설계할 경우 건축법상의 건폐율, 건축물의 높이 등의 건축 규제를 완화해 주는 제도다. 부산시는 최종 시범사업지에 세계적인 건축가의 설계가 실현될 수 있도록 건축법 완화뿐만 아니라 기획설계비 일부 지원, 절차 간소화 등의 행정적 뒷받침도 할 방침이다. 앞서 부산시는 2020년 북항 1단계 재개발지역 등 4곳을 특별건축구역으로 지정한 바 있다. 하지만 세계적인 건축가들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특별건축구역 시범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부산시는 세계적인 건축가의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설계안을 특별건축구역에 적용하려는 이유를 “단순히 건축물의 형태와 기능을 넘어 도시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시도”라고 말한다. 도시 경쟁력의 중심에 건축 디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세계는 지금 도시 경쟁력이 국가 경쟁력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몇몇 도시는 건축 디자인을 통해 세계적 도시로 발전한 사례도 있기에 이 말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문화 콘텐츠 강화나 생태도시 지향을 통해 자연스럽게 도시의 가치를 높인 사례도 많다.
부산시가 세계적인 건축가를 초빙해 건축 디자인에 신경을 쓴 것은 이해할 만하다. 지역의 건축 공사 중 상당수가 공동주택으로, 삭막하고 획일적인 디자인이 도시 경관을 저해하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부산시의 논리대로라면 외국의 유명한 건축가를 초빙해 도시경관을 개선하는 것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이는 외국의 유명 건축가와 굳이 컨소시엄까지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으로는 부족하다.
한편으로는 서글픈 생각마저 든다. 부산의 미래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내지 못하고, 외국 건축가에게 맡기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랄까. 특히 지역 건축가로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실제로 지역의 한 건축가는 “왜 굳이 외국 건축가의 힘을 빌리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한다.
이번 기회에 지역 건축계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오랫동안 타성에 젖어 현실에 안주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건설사가 시장 논리에만 집착해 주거 다양성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은 아닌지 성찰이 필요하다. 도시 행정도 마찬가지다. 장기적인 도시 비전 없이 근시안적으로 대응해 온 것은 아닌지, 싱가포르나 홍콩처럼 행정이 획일적인 아파트 설계를 막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반성해야 한다.
세계적인 건축가와의 컨소시엄은 분명 장점이 있다. 그러나 다양한 문제점도 수반된다. 지역 건축가의 역할 감소와 경쟁력 약화는 물론, 특별건축구역 인센티브가 자칫 오용될 경우 도시경관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지금 당장 도시 고층화가 문제인데, 왜 용적률을 20%나 더 주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고층화로 인한 경관훼손과 주변 조망과 일조간섭, 기존 사업지, 이후 개발지와의 형평성 문제도 불거질 수 있다. 적어도 이게 해결되어야 부산의 특별건축구역이 도시의 미래가 될 수 있다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외국 유명 건축가와의 컨소시엄은 부산 도시 건축을 일깨우는 ‘일회성 죽비’이어야지, 연례 행사처럼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부산 도시 건축의 먼 미래를 고려할 때, 이는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외국 건축가와의 컨소시엄 같은 단기 처방이 아니라, 지속 가능성을 염두에 둔 장기적인 처방을 더 고민해야 한다.
부산시가 외국 건축가들과의 컨소시엄을 통해 특별건축구역 사업지를 선정하는 것은 분명히 전략적 선택이다. 적어도 세계적인 건축가들을 초빙한 노력이 헛수고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 참에 부산 도시 건축이 한 발짝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멋진 건축물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부산의 정체성을 반영한 창의적인 디자인이면서 소통의 공간을 제공하는 건축물을 조성하는 방안이 담겼으면 좋겠다. 소위 혼(魂), 창(創), 통(通) 말이다.
세계적인 건축가와의 컨소시엄을 통한 부산 특별건축구역의 혜택은 도시의 미래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정교한 계획과 균형 잡힌 실행이 함께해야 가능하다. 무엇보다 부산의 도시환경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지속 가능한 도시 개발을 위한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일에 부산시가 소홀하지 않기를 바란다. dosol@busan.com
2024-07-25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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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총괄건축가 언제까지 비워둘 건가
일본 구마모토현에는 건축을 통해 도시를 바꾸어 나가는 프로젝트가 있다. 바로 구마모토 아트폴리스 프로젝트(KAP)다. 1988년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추진된 건축물은 공공화장실, 경찰서 등 수십 개에 이른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지어진 건물은 대부분 그 지역 명물이 되었다. KAP의 성공 뒤에는 커미셔너(commissioner) 제도가 있었다. 민간전문가인 커미셔너는 사업 전반에 대한 기획과 각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이를 위해 건축가를 선정할 수 있는 권한도 갖는다. 특이한 점은 이 프로젝트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치단체장이 바뀌면 하루아침에 정책과 사업이 종종 중단되거나 소멸하는 우리의 현실과는 너무나 다르다.
일본에 커미셔너가 있다면 우리는 총괄건축가 제도가 있다. 민간전문가인 총괄건축가가 공공 건축물과 도시계획 등 공간환경 전반을 총괄 기획하고 자문하는 역할을 하는 게 총괄건축가 제도다. 국내에서는 서울시가 2014년 처음 이 제도를 도입해 현재 4대 총괄건축가가 위촉돼 이어오고 있다. 한데 부산에서는 총괄건축가가 보이질 않는다. 부산시는 2019년부터 이 제도를 도입해 시행해 오고 있지만, 지난해 6월 김민수 2대 총괄건축가 임기 종료 후 이 자리는 1년 넘게 비어 있다. 이에 부산건축사회를 포함해 부산 지역 4개 건축 단체는 올해 초 부산시에 이른 시일 내 총괄건축가를 임명해 줄 것을 건의했다. 더불어 지역 사정에 밝은 인물이 새 총괄건축가가 되어야 한다는 여론도 전달했다.
지난해에는 2030월드엑스포 부산 유치라는 지역 현안이, 올해는 4·10 총선이 있었다. 그동안 부산시 입장에선 나름대로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명분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명분마저 사라진 상황이다. 그런데도 부산시는 여전히 총괄건축가 자리를 비워두고 있다. 이렇다 보니 지역 건축계 일각에서는 부산시장이 총괄건축가를 둘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얘기도 들린다. 1년 넘게 총괄건축가가 공백 상태이기에 당연히 의심의 눈초리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 시점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부산시장은 새 총괄건축가를 위촉할 의지가 있는가?
지난해 9월 부산시는 총괄디자이너를 임명하면서 “총괄디자이너는 총괄건축가와는 별개”라 했다. 그래 놓고선 총괄건축가를 여전히 임명하지 않고 있는 건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최근 이루어진 부산시 조직 개편에서 총괄건축가 등을 지원하는 전담 부서였던 총괄건축과가 없어진 것도 이런 의심을 증폭시킨다. 물론 부산시 관계자는 종전 총괄건축과에서 하던 일을 건축정책과에서 챙기고, 총괄건축가도 현재 그 적임자를 찾는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쯤 되면 이런 설명마저 있는 그대로 들리지 않는다. 1년여 동안 못 찾았는지 안 찾았는지 궁금해진다. 이제는 부산시가 이 의문에 제대로 답해야 한다.
총괄건축가는 오랫동안 비워둘 자리가 아니다. 도시의 공간환경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주요 전략 프로젝트를 발굴해 이를 묶고 엮어 줄 사람이 바로 총괄건축가다. 지역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공공건축의 사업 방향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고, 지역 특성과 여건에 적합하게 진행되는지 살피는 것도 총괄건축가의 몫이다. 부산시가 정말 의지가 있다면, 하루빨리 총괄건축가를 임명해 파편적으로 움직이는 부산의 도시 재생 사업이나 도시 계획을 전체적으로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생태 도시, 보행 도시 등 부산만의 특색이 조화롭게 발현될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도시환경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박형준 부산시장이 주창하는 ‘15분 도시’와 연계하기 위해서라도 총괄건축가 제도는 필요하고, 멈춤 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그동안 총괄건축가 제도를 운영하면서 시행착오도 있었다. 그래서 앞서 시행된 총괄건축가 운영과 제도에 대한 평가도 필요하다. 문제점이 있다면 보완하고 장점은 강화해야 한다. 요컨대 부산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담고 미래 비전을 그리기 위해서는 지역 현안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총괄건축가가 필요하다. 지역을 잘 아는 인물이면서 이 눈치 저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면 금상첨화다. 총괄건축가에 대한 자리매김도 중요하다. 단순히 공급자와 시행자 사이에서 조정·자문하는 소극적인 역할이 아니라, 최고의 도시환경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건축적 이상과 경험을 적용, 실행하는 적극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도시는 시장이나 총괄건축가 같은 몇몇이 만들어가는 게 아니다. 하지만 막혀 있는 곳을 뚫어 줄 전문가적인 ‘통찰과 혜안’, 그리고 ‘침술’ 역할은 꼭 필요하다. 부산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이런 중요한 자리가 1년 넘게 비어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2024-06-2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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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영화의전당-수영강 연계 프로그램 모색하라
중국 저장성의 대표 관광지 항저우(杭州)는 우리에겐 제법 낯익다. 지난해 열렸던 하계 아시안게임 개최지가 바로 항저우여서 일 게다. 관광객 사이에선 “항저우에 가서 서호(西湖)를 보지 않으면 항저우에 갔다 왔다고 할 수 없고, 서호에 가서 ‘인상서호’(印象西湖)를 보지 않으면 서호에 갔다 왔다고 할 수 없다”라는 말이 회자된다. 서호는 항저우시 서쪽에 있는 아름다운 호수다. 인상서호는 이곳에서 펼쳐지는 수상 뮤지컬로 영화 ‘붉은 수수밭’ ‘홍등’으로 유명한 장이머우 감독이 연출했다. 애절한 사랑 이야기와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져 낭만적이면서도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놀라운 것은 호수 위에 무대를 세우고 그 위에 10cm 정도의 물이 채워진 상태에서 수백 명의 출연진이 연기를 펼친다는 점이다. 물 위를 걸으며 공연하는 배우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환상적이다. 기발한 상상력과 자연이 결합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한 게 바로 인상서호인 셈이다.
우리는 흔히 부산을 항구 도시, 해양 도시라 한다. 강과 하천을 끼고 있어 때로는 물의 도시라 칭한다. 물의 도시란 물이 공간의 형성과 변화에 영향을 주면서, 그 특성이 잘 나타나고 있는 도시를 말한다. 이를테면 이탈리아 베니스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프랑스 파리와 일본 도쿄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도시는 수변 공간을 중심으로 도시의 역사적 맥락을 이어 나감과 동시에, 삶 속에 수변 공간이 형성돼 도시를 다양하고 풍요롭게 만든다.
그렇다면 부산도 그럴까? 과거 부산은 크고 작은 강과 하천이 언덕과 조화를 이루며 그 속에서 삶이 공존했다. 부산 도심엔 수영강과 동천, 그리고 보수천을 비롯한 다수의 크고 작은 하천이 흘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바다로 흐르는 대다수의 하천이 복개돼 단지 해안 공간 중심의 해양 도시로만 인식될 뿐이다. 도로로 인해 생활 공간과 수변은 단절됐고, 물 공간 특유의 장소성을 가진 문화나 축제도 쉬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아이러니하게도 규모 있는 강이나 하천 말고는 우리 삶, 우리의 일상 가까이서 냇가나 실개천 같은 수변 공간을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동안 부산의 수변은 시민의 것이 아니었다.
10여 년간 부산시 숙원사업이었던 영화의전당 지하차도 건설이 최근 실시설계가 마무리돼 이르면 올해 10월께 공사가 시작된다. 영화의전당과 APEC나루공원 사이 차로를 지하차도로 만들고 지상 구간은 공원, 광장 등을 조성하는 것으로, 2026년 연말께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열리는 영화의전당과 그 주변은 도심에 강이 흐르는 부산의 수변 이미지를 함축한 곳이다. 하지만 영화의전당은 차로에 둘러싸여 보행로를 비롯해 공간이 오랫동안 단절돼 있었다. 이번 공사를 통해 영화의전당은 나루공원-수영강과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돼 향후 수변 공간 접근성이 좋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그래서 하는 얘기다. 수영강에서 인상서호 같은 특별한 공연이 펼쳐진다면 어떨까? 오스트리아 호반 도시 브레겐츠의 야외 오페라 같은 공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축구 경기장으로 사용되는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의 플로팅 플랫폼처럼 수상 무대를 만들어 활용하는 방안도 있다. BIFF 개폐막식 때 초청 배우들이 수영강을 통해 영화의전당으로 진입하는 것도 생각해 봄 직하다. 그동안 영화제가 한정된 공간에서 열리다 보니, 개폐막식 때 부산을 제대로 보여주는 데 한계가 있었다. 수영강에 덱을 설치해 영화의전당에서 나루공원-수영강-F1963으로 이어지는 길도 조성해 볼 만하다. 영화제 기간 외국인들이 부산을 찾았을 때 영화만 보고 끝나는 게 아니라 수영강에서 공연을 즐기고 인근 F1963에서 전시를 본다고 상상해 보라. 이 공간은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강과 문화, 공원이 한데 어우러지는 부산 대표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BIFF는 물론이고 부산이란 도시의 인지도도 높아질 것이다.
BIFF는 부산이란 도시가 내세울 만한 대표적인 행사다. 올해로 29회째를 맞는다. 수변 공간과의 연계는 새로운 30년의 도약을 위한 발판이 될 수도 있다. 부산시와 BIFF조직위원회, 영화의전당이 합심해 새로운 기회의 출발점인 영화의전당-수영강 연계 프로그램을 지금부터 꼼꼼하게 챙겨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지하차로 완공까지는 2년 정도 남았다. 연계 프로그램을 준비하기엔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다. 세계적인 문명비평가 제러미 리프킨은 “물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 물과 협력할 방법을 찾으라”라고 말했다. 그동안 부산의 수변이 시민의 것이 아니었다면, 이제 시민에게 그 기회를 부산시가 만들어 주어야 한다. 수변 공간과 연계한 질 높은 프로그램 개발을 기대한다.
2024-05-21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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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마을지기 사업' 부산 복지의 희망 싹으로
한 달에 한 번 정도 시골 고향에 가는 편이다. 홀로 계신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못해 늘 마음 한구석엔 송구함이 앞선다. 근래 고향에 갔을 때다. 집에 가보니 몇몇 생활용품이 고장 나 있었다. 냉장고는 냉장실 냉기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고, 화장실 물탱크의 물 조절 볼 탑은 연결 부위가 부러져 있었다. 나일론 빨랫줄은 낡아 햇볕에 옷을 널면 그 부스러기가 옷에 허옇게 묻어 나왔다.
냉장고는 서비스센터에 연락해 수리하고 나머지는 재료를 직접 사다 교체했다. 이번에는 시기가 잘 맞았다. 다행히 고향에 내려갔을 때 고장 난 것들을 수리·교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간혹 겨울철에 보일러가 고장 나거나 수도꼭지가 얼어 탈이 나면 손재주 좋은 이웃집 형님이 곧바로 고쳐주곤 했다. 그는 고장 난 걸 잘 수리해 줘 동네에선 1980~1990년대 TV에 나오던 만능 재주꾼 ‘맥가이버’로 통했다. 어머니는 이번에도 이웃집 형님에게 고쳐달라 부탁할 법도 했지만, 너무 자주 얘기하는 것도 미안하고 눈치가 보여 못 했다면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일이 한꺼번에 많아진 거였다고 말씀하셨다.
요 몇 년 새 고향을 오고 갈 때면 마을 어르신들의 생활 속 문제들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는 사람이 동네에 상주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이를테면 맥가이버 같은 사람 말이다. 자식들 대부분이 객지로 나가 있어 도움을 요청할 젊은이들이 없는 시골 어르신들에게 맥가이버 같은 사람은 너무나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맥가이버의 필요성’은 시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저소득층, 한부모 가정,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등 우리 주변의 사회적 약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필요하다. 다행히 부산은 수년 전 맥가이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2015년부터 ‘마을지기사무소 사업’이란 이름으로 시행하고 있다. 마을지기와 만물수리사가 상주하면서 집 수선, 공구 대여, 무인택배 보관 등 소위 ‘동네 맥가이버’ 역할을 한다. 주민이 마을지기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재료비와 출장비 등으로 일정액을 내면 된다.
부산에서 처음 이 사업을 시작할 때는 마을지기사무소가 13곳이었다. 차츰 주민의 호응을 얻어 2020년에는 50곳으로 늘어났다. 2022년 부산 금정구는 연간 1278건, 부산 중구는 1200건의 서비스를 주민에게 제공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사업은 일몰제였다. 사무소 설치 후 3년간 부산시가 예산을 지원하고 이후에는 각 구·군 자체 계획으로 전환해야 했다. 이렇게 되자 마을지기사무소는 24곳으로 쪼그라들었다. 마을지기사무소가 줄어든 것은 각 구·군 예산 사정이 여의찮아서다. 매년 사무소 한 곳당 운영비가 6000만~7000만 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산 부족으로 이 사업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최근 부산시는 마을지기 지원 사업을 재추진할 뜻을 비췄다. 언론의 눈치를 보며 마지못해하는 느낌도 있다. 하지만 지역 내 취약계층과 복지 사각지대 주민들을 위해 마을지기 사업을 펼치는 것은 오히려 지자체가 앞장서 장려할 일이다.
부산은 노인 인구 비중이 전체 인구의 20%가 넘은 초고령 도시다. 그렇기에 노인에게 더 절실히 요구되는 마을지기는 부산에 꼭 필요한 사업이다. 부산은 다른 곳과 비교해 일상적인 편의시설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취약할 수밖에 없는 산복도로 지형을 가졌다. 그래서 더 적합한 제도기도 하다. 따라서 이참에 마을지기 사업을 더 세밀하게 다듬어 부산이 내세울 만한 대표적인 복지 사업으로 만들었으면 한다.
최근 들어 부산시는 도시 인구의 고령화와 1인 가구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당연히 고립된 노인도 늘어나면서 관계망 회복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다. 나이 들면 말벗이 최고라 했다. 인공지능(AI)이 어르신의 말벗이 되는 시대에 살지만, 마을지기 역시 단순히 어르신들의 생활 불편만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따뜻한 말벗이 되어줄 수 있다. 관계망 복원 역할도 얼마든지 가능하단 얘기다.
마을지기 사업의 서비스 영역도 넓혀갔으면 한다. 소규모 아파트 단지나 산복도로 등 거주민을 위해 ‘찾아가는 마을지기’도 운용할 필요가 있다. 마을지기 사업이 좀 더 탄탄해지기 위해서는 부모가 거주하는 지역의 마을지기사무소에 ‘고향사랑기부제’처럼 자식이나 친척들이 일정 금액을 기부할 수 있게 하는 것도 검토해 볼 수 있다. 복지 전문가들은 “마을지기 사업은 한 동네에 온기를 불어넣고, 침체한 도시에 건강한 변화를 끌어내는 ‘촉매제’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달려가는’ 마을지기 사업이 부산에서 제대로 꽃피길 기대해 본다. 이는 갈수록 느슨해지는 도심 속 마을공동체를 회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2024-04-1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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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아파트는 죄가 있다
20~30년에 걸쳐 도시 공간을 카메라에 담은 영상을 빠르게 돌려보면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단독 주택지였던 공간들이 도미노처럼 빠르게 아파트 단지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을 터이다. 우리나라의 웬만한 도시들은 하루가 다르게 아파트로 채워지고 있다. 여기엔 부산도 예외는 아니다.
국토교통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주택 인허가 물량 38만여 가구 중 아파트가 88%였다. 부산 지역은 더 심한데, 인허가 물량의 98.4%가 아파트였다. 지난해 부산의 주택 인허가 물량 2만 3129호 중 아파트를 제외한 단독, 다세대, 연립 주택은 겨우 356호에 불과했다. 한 나라 혹은 한 도시에서 새로 지어지는 주택의 90% 이상이 아파트라는 것은 외국에선 쉬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도시 계획 전문가들은 “20~30년 후엔 국내에서 사람이 사는 지역엔 아파트만 남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결국 가까운 시일 내 부산의 주택은 아파트 일색이 된다는 얘기다.
혹자는 ‘단순한 데이터를 가지고 왜 이렇게 호들갑이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도시가 아파트화된다는 건 우리가 잃는 게 너무 많아서다.
잠시 자연으로 생각을 돌려보자. 자연 생태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생물 다양성이 필요하다. 생태계의 복원력을 높이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종들은 서로 다른 생존 전략과 특성이 있기에, 어떤 한 종의 감소나 손실이 나타났을 때 다른 종들이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 만약 한 종이 없어지면 먹이사슬은 붕괴한다. 궁극적으로 생물 다양성은 생태계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하단 얘기다.
도시 역시 마찬가지다. 도시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한다. 그래서 도시를 흔히 생물체에 비유해 유기적 복합체라고 말한다. 하나의 주거 건물, 하나의 상업 지구가 아닌 전체가 유기적 관계를 형성해 도시를 생기 있는 공간으로 만든다는 얘기다. 상위 포식자와 하위 포식자, 생산자가 함께 뒤섞여 있어야 자연 생태계가 유지되듯 한 도시가 다양성을 품고 있어야 그것이 섞이면서 역동성이 생기고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다. 더불어 거리도 활기 넘치고 경제도 활성화된다. 살맛 나는 도시, 건강한 도시는 바로 이런 것이다. 한데 도시 생태계의 상위 포식자인 아파트가 그 도시를 싹쓸이했다는 건, 그 도시가 건강성을 잃었다는 얘기다.
물론 도시의 아파트화는 콤팩트한 주거 생활, 부동산으로서의 가치 측면에서 다른 주거 형태에 비해 유리하다는 장점도 있다. 그런데도 도시가 아파트로 가득 채워지는 것은 이런 장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부정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택 공급이 상대적으로 비싼 아파트로 쏠리면서 서민 주거 불안정이 발생한다.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하는 다세대나 연립 주택 공급에 차질을 빚게 돼 서민들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는 주택이 줄어든다는 것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수도 있다. 도시의 대부분이 아파트로 채워져 있다면, 거리를 걸을 때 너무도 따분할 것이다. 이건 엄청난 ‘시민 정서의 마이너스’를 가져온다.
아파트만 빼곡히 들어서는 것은 도시 경쟁력 차원에서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지역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대단지 아파트의 경우 중소 건설사 20여 개가 할 일을 대형 건설사 1~2개가 다하기 때문이다. 이는 건축 설계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렇다 보니 관련 기술의 역량 축적 통로는 엷어질 수밖에 없다. 일본은 단독 주택 설계가 우리보다 훨씬 활발하다. 왜 우리는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일컫는 프리츠커상 수상자를 아직까지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흔히 ‘아파트는 죄가 없다’고 말한다. 아파트가 무슨 죄냐는 것이다. 좁은 면적에 다수의 사람이 주거에 필요한 시설을 공유하면서 누릴 수 있는 아파트를 짓는 건 잘못됐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로 인해 발생하는 부정적 영향을 놓고 볼 때 아파트는 죄가 없다라고 할 순 없다.
도시는 우리의 삶터고, 보금자리다. 그렇기에 우리의 미래다. 획일화되어 가는 도시를 가만히 내버려둘 순 없다. 도시가 아파트로 채워지는 것을 막는 것은 파괴된 생태계를 복원하는 것처럼 도시를 활성화하고, 우리의 삶의 기반을 회복하는 중요한 일이다.
차이와 다양성을 유지하고 그것이 섞일 때 도시의 활기와 역동성, 변화와 창조는 일어난다. 온갖 것이 뒤섞여 생동하고 그로 인해 끊임없이 새로운 활력을 낳는 도시. 그런 도시를 우린 만들어 나가야 한다.
2024-03-14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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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끊긴 뱃길, 발상의 전환으로 돌파하라
‘가슴이 답답해서 찾아왔네 마음이 울적해서 또다시 왔네/ 싱싱한 파도 소리 상큼한 바닷내음 여기가 부산항인가/ 갈매기 바라보며 아무리 생각해도/ 항구의 일번지는 부산이 아니냐/ 사랑의 일번지는 남포동이 아니더냐.’ 1980년대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그룹 강병철과 삼태기의 ‘항구의 일번지’라는 노래 가사 일부다.
노래 속 항구 일번지는 부산항을 가리킨다. 한데 요즘은 이 말이 좀 무색해진다. 부산~제주 여객선이 끊긴 지 1년을 훌쩍 넘기고 있어서다. 지난 2022년 12월부터 시작된 2만 톤급 여객선 뉴스타호 운항 종료 이후 새 사업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여객 수요는 조금씩 늘고 있지만 중고 선박 품귀, 저비용 항공사들의 시장 잠식, 고유가로 인한 채산성 악화 등 부정적 요인들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탓이다.
동북아 허브항만인 부산항의 위상이 말이 아니다. 혹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부산과 제주를 오갈 수 있는 시대에 여객선 단절이 무슨 대수냐고 한다. 이러다가 곧 새 여객 사업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낙관적 전망을 하는 이도 있다. 이 항로는 여러 차례 운항 중단과 재개를 반복해 왔기 때문이다.
부산~제주 여객선 뱃길은 1977년 4월 3000톤급 동양고속 카페리 1호, 6월에 카페리 2호가 취항해 전성기를 맞는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부산연안여객터미널은 한때 제주 노선 등 11척의 배가 운항하면서 한 해 100만 명이 넘는 이용객들로 북적였다. 그땐 ‘부산항은 항구의 일번지’라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시민들은 해양수도 부산, 항구도시 부산에서 제주행 여객선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말한다. 실제 부산에서 출발하는 유일한 연안 항로인 제주 뱃길이 장기간 끊기는 바람에 자신의 승용차나 오토바이를 타고 제주를 관광하려는 여행객들은 큰 불편을 겪고 있다. 무엇보다 제주행 뱃길이 오랫동안 끊어져 있는 것은 부산항 이미지에 타격이 크다. 부산을 찾는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관광 콘텐츠 제공 차원에서도 안타까운 일이다. 지역 관광업계도 부산~제주 항로는 우리나라 연안 항로 중 대표 격이라 할 만한데, 여객선이 1년 넘게 없는 건 말이 안 된다며 부산해양수산청이나 부산항만공사(BPA), 부산시가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저비용 항공, 고유가 시대에 적자를 보면서까지 여객선을 띄우겠다고 선뜻 나서는 선사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수도 없다. 하루빨리 부산~제주 뱃길을 되살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여객선 운항이 지속되려면 임시방편식 찔끔 처방이나 땜질식 지원만으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부산~제주 뱃길의 부침(浮沈)은 당분간 계속될 수밖에 없다. 관련 기관들은 대체 선사를 구하고, 부산시와 제주도는 또다시 운항이 끊어지는 일이 없도록 선사 측의 경영 압박을 줄여 줄 수 있는 다각적이고 구체적인 지원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그렇다고 여객선 재개를 꼭 고집할 필요는 없다. 발상의 전환을 통해 크루즈선을 띄우는 것도 한 방법이다. 부산~제주 간 여객선에서 벗어나 부산~통영~삼천포(남해)~여수~목포~제주를 잇는 남해안 연안 크루즈 상품을 선보이는 것이다. 남해안 연안 크루즈는 지역 관광과 경제에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할 수 있는 만큼 블루오션이 될 가능성이 높다. 대규모 투자와 비용이 들어가기에 국가나 지자체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이 당연히 뒤따라야 한다. 해양도시 부산은 필연적으로 바다를 지렛대로 산업을 키워나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부산시가 총대를 메고 한 발 더 앞서 나가는 지원과 정책을 통해 부산~제주 뱃길 활성화에 발 벗고 나서야 한다. 물론 부산시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관광도시의 위상 정립을 위해 부산국제여객터미널의 해외 노선 개척에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게 빠르게 진행된다. 관광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느림의 미학은 존재한다. 인스턴트식품이 대세지만 숙성된 김치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나름의 존재를 갖는다. 항공기를 이용한 여행도 좋지만, 느림의 미학을 찾고 뱃고동 소리를 들으며 여행을 즐기는 낭만도 필요하다. 그 한가운데 크루즈가 있다. 빠르게 둘러보고 오는 관광만이 여행의 전부는 아니다.
김순남 작곡의 ‘잘 있거라 부산항구야’의 노랫말 가사는 ‘안개 짙은 부산항에/ 연락선은 떠나려는데’로 시작된다. 부산~제주 뱃길 항로가 어떤 형태로든 부활하기를…. 제주행 항로의 뱃고동 소리가 그립다. 해양도시라는 부산의 정체성은 부산항이라는 장소를 통해서 구축돼 왔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한다.
2024-02-08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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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컨테이너의 변신, 부산의 미래다
한때 부산의 상징이었다. 부산의 역동성, 부산다움, 혹은 부산 산업을 상징하는 이미지이자 아이콘으로 통했다. 컨테이너 얘기다. 수출이나 항만, 물류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컨테이너였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부산항 북항은 온통 컨테이너로 빼곡했다. 이젠 북항 재개발로 자성대부두의 초대형 하역 장비와 빈 컨테이너가 조만간 신감만부두로 이전한다. 이미 지난달 26일 자성대부두의 빈 컨테이너 일부는 이전을 시작했다. 부산 앞바다에서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지켜온 컨테이너의 자리바꿈, 나아가 산업화 시대에 부산 산업의 주역이었던 컨테이너의 ‘도심 퇴장’이 시나브로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과거엔 컨테이너 활용이 산업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엔 물자 수송이라는 기능의 한정성을 벗어나 갤러리, 사무실, 음식점, 버스 정류장 등 일상 공간에서도 다양하게 활용된다. 설치가 쉽고 이동도 비교적 자유로운 게 장점이다. 부산도 일찍부터 컨테이너에 주목했다.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BIFF) 열 돌을 맞아 선보인 ‘비프 빌리지’(파빌리온)가 대표적이다. 해운대해수욕장 주변에 컨테이너를 층층이 쌓아 만든 비프 빌리지는 영화제를 찾는 시민들의 발길이 특히 잦은 곳 중의 하나였다. 2013년 개관한 복합문화공간 사상인디스테이션도 컨테이너의 활용이었다. 20여 개가 넘는 컨테이너로 이루어진 사상인디스테이션은 개관 이후, 서부산 지역민의 문화 향유 기회를 넓히는 데 기여해 왔다. 또 다른 복합문화공간이자 부산 컨테이너 공간의 상징이었던 ‘비콘 그라운드’는 특이하게도 수영구 망미동 고가도로 아래 설치돼 시작부터 주목받았다. 부산 사하구 장림포구, 일명 ‘부네치아’(부산의 베네치아)도 포구 주변을 컨테이너로 꾸며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 일부는 그 존재감마저 유명무실해졌고, 일부는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들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중대 갈림길에 선 컨테이너 공간들. 이들의 돌파구를 위해 전문가들은 “시민의 발걸음을 붙잡을 수 있는 콘텐츠 개발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말한다. 일각에선 컨테이너를 통해 좀 더 멋진 공간이 연출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의 목소리도 있다. 컨테이너가 만들어 낸 형태가 더 관심거리가 돼 사람들의 발걸음을 유도하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공공 예술 프로젝트 일환으로 만든 경기도 안양의 APAP(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오픈스쿨이 대표적이다. 이 역시 컨테이너 구조물이지만, 45도 각도로 기울어져 있거나 땅에서 3m 정도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건물 모양이 눈길을 끈다. 오픈스쿨은 샛노란 페인트칠까지 더해져 도시의 랜드마크가 됐다.
컨테이너의 쓰임과 용도는 상상력이 더해,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부산의 컨테이너 공간들이 세월의 흐름 속에 큰 부침을 겪고 있지만, 외면할 수 없는 이유다.
2022년 열린 카타르 월드컵에서 우리는 보았다. 1000개에 가까운 컨테이너를 활용해 축구 경기장을 일회용으로 만들어 월드컵 축구대회를 개최한 후, 대회가 끝나자 곧바로 해체해 재활용하는 것을 말이다. 이는 컨테이너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카타르 월드컵처럼 컨테이너 활용에 상상력을 더한다면 컨테이너는 향후에도 부산의 상징, 부산의 미래 자산으로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다.
컨테이너의 재발견은 그 가능성에 대한 대답이다. 심각한 기후 변화로 인해 겪게 될지 모르는 자연재해에 대비한 주민 피난처나 임시 주거지 등으로 컨테이너를 활용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산불이나 태풍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곳에서는 텐트가 아닌 컨테이너가 임시 거주 시설로 사용될 수 있다. 부산의 해양도시 건립에 컨테이너를 이용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IoT(사물인터넷) 장비를 활용한 컨테이너, 오래된 해상운송 냉동컨테이너를 개조해 스마트 팜으로 활용하는 도시 농사꾼의 이야기는 현실이다. 우리는 컨테이너의 이런 활용과 그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상상력과 고민이 더해진 컨테이너의 다변화는 ‘침체된 도시를 살리는 침술’이 될 수도 있다.
한 도시의 정체성은 그 도시가 갖고 있는 역사성과 고유한 문화적 특성에서 비롯된다. 그런 점에서 컨테이너는 여전히 부산의 상징이고 부산다움이다. 브라질 남부 파라나주의 주도 쿠리치바를 ‘세계가 주목하는 꿈의 생태도시’로 변화시킨 건축가 자이미 레르네르. 그의 말을 빌리자면 침체된 도시엔 건강한 변화를 만들어 내는 ‘도시 침술’이 필요하다. 부산에서 그 침술 하나를 찾는다면, 컨테이너가 될 수 있단 얘기다. 가능성을 품은 컨테이너의 변신이 기대된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2023-11-28 [1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