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정량 평가의 시대는 끝났다
최진철 국립한국해양대 항해융합학부 교수
얼마 전 편입학 서류를 검토할 기회가 있었다. 지원자들의 학점은 하나같이 4.5에 가까웠고, 지원 동기와 학업 계획서는 마치 같은 틀에서 찍어낸 듯 구성과 문체가 엇비슷했다. 어딘가 매끄럽지만, 어딘가 공허한 그 문장들 앞에서, 나는 우리가 사람을 평가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AI가 다듬어준 문서를 평가하고 있는 것인지 끝내 확신하지 못한 채 서류를 덮었다.
AI 기술이 일상과 업무 현장을 빠르게 재편하고 있다. 법률 문서 작성, 의학적 진단 보조, 코드 작성, 논문 초안까지 AI가 수행하는 시대에, 많은 직장인의 실질적인 업무는 AI가 생산한 결과물을 검토하고 판단하는 일로 옮겨가고 있다. 지적 노동의 무게중심이 ‘생산’에서 ‘판단’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 변화는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 우리가 사람을 평가하는 방식은 과연 사람을 평가하고 있는가.
대학 현장은 이 질문의 현실성을 잘 보여준다. 지난해 서울 소재 어느 대학에서는 600명 규모 중간고사에서 AI를 활용한 대규모 부정행위 정황이 적발됐고, 수강생 익명 투표에서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AI로 시험을 쳤다’고 답했다. 대학생 대상 설문에서도 10명 중 7명이 AI를 활용한다고 답했으며, 일부는 “AI 탐지에 걸리지 않게 만들어 달라”고 지시한 뒤 과제를 제출한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그 결과물에 매긴 점수가 과연 학생의 무엇을 측정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정량의 세계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다. 수능은 객관식 수치로 모든 것을 가르고, 취업 시장에서는 어학 성적과 학점이 서류 통과의 열쇠다. 교수의 역량은 논문 편수와 피인용 지수로, 교사의 역량은 학생 성취도 수치로 환산된다. 정성 평가를 도입했다는 대학기관평가나 교원업적평가조차 실상은 항목별 배점과 등급 기준표로 정교하게 수치화 된다. 형식은 바뀌었지만, 평가의 철학은 바뀌지 않은 셈이다.
그렇다면 정성 평가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는 오랫동안 하나의 준거가 되어 왔다. 단순히 주관식이라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학생이 하나의 철학적 명제 앞에서 스스로 사유하고 논증하는 과정 자체를 평가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최근 주목받는 포트폴리오 평가나 프로젝트 기반 학습도 같은 맥락이다. 정해진 답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찾아내는가가 아니라, 불확실한 문제 앞에서 어떻게 사고하고, 협력하고, 의미를 만들어내는가를 본다. 이것이야말로 AI가 대신할 수 없는, 그리고 AI 시대에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인간의 역량이다.
여기서 한 가지 역설이 생긴다. 정성 평가의 필요성을 가장 강하게 제기하는 것이 바로 AI라는 사실이다. AI가 점수를 만들어내는 시대에 점수는 더 이상 사람의 것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AI의 등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이제 인간을 인간답게 평가하라는 요청일 수 있다. AI가 흉내 낼 수 없는 것, 즉 맥락을 읽는 감각,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공감, 윤리적 판단의 무게를 감당하는 책임감, 그것을 평가의 중심에 놓아야 할 때가 왔다.
정성 평가가 뿌리내리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전문가 집단과 제도적 기관에 대한 신뢰, 즉 사회적 자본을 충분히 축적하지 못했다. 입시 비리, 채용 청탁, 논문 표절. 공정해야 할 평가의 자리에서 반복된 이 사건들은 “사람이 개입하면 부정이 생긴다”는 집단적 학습을 사회 깊숙이 새겨 놓았고, 그 불신이 우리를 정량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왔다. 수능이 바칼로레아식 논술 체제로 전환되지 못하는 것도 이 구조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정성 평가로의 전환은 평가 방식만의 문제가 아니라, 무너진 신뢰를 복원하는 사회적 과제와 맞닿아 있다. 그 첫걸음은 외부에서 강제될 수 없다. 교수, 교사, 의사, 법조인 등 전문가 집단 스스로가 엄격한 윤리 기준을 세우고 자정의 선례를 쌓아가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평가자가 신뢰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정성 평가는 공정성의 대안이 아니라 또 다른 특권의 통로로 전락할 뿐이다.
AI가 점수를 대신 만들어주는 시대에, 점수로 사람을 가르는 일은 이미 시효를 다했다. 정량 평가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우리가 묻지 않으면 안 될 질문은 단 하나다. 그 이후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