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호의 오픈 스페이스] 해석, 부산 미술 메세나의 불을 밝히다
독립 큐레이터
해석장학문화재단, 미술 장학생 선발
예술가 향한 꿈 응원하는 큰 울림 선사
진정한 후원, 가능성 믿고 기다려주는 것
“제1회 해석 미술 장학생 공모전 시상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최우수상 이가영 학생 축하합니다! 장학금 1000만 원이 수여되며 해석 정해영 선생 장학문화재단은 앞으로도 학생들이 작가로 성장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지난 11일 부산 서면의 작은 갤러리에 국내 주요 미술 관계자, 미술대학 교수들이 자리한 가운데 미술 장학생 선발 공모전 시상식과 수상자 8인의 전시가 마련됐다.
그렇다면 해석장학문화재단(이하 재단)이 어떤 일을 하는지 살펴보자. 재단은 2002년 해석 정해영 선생 장학회로 시작한다. 정해영 선생은 대동연탄을 창업하고 당시 19공탄을 개발해 부산 최고의 납세자로 ‘석탄 왕’이라 불렸던 입지적인 인물이다. 또 7선의 국회의원을 지내고 ‘대한민국 야당의 2인자’라 불리며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정치인이자 경제인이었다. 1955년 서울에 ‘동천학사’를 지어 울산, 부산에서 상경하는 유학생 500여 명의 생활을 뒷바라지했다. 그들 중 다수가 훗날 장차관, 국회의원, 대법관 등 주요 인물로 성장하는 데 후원한 것이다.
재단은 정해영 선생의 인재보국(人材報國) 정신을 이어받아 20여 년간 이공계, 상경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장학생을 선발해 왔다. 지금은 재단 설립자인 고 정재문 명예이사장에 이어 정연택 이사장이 교육을 통한 사회적 기여와 인재 양성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아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2024년부터 미술 분야 지원을 대폭 확대해 나가고 있다. 올해부터는 장학금 지급 대상자를 미술 분야로 한정해 상반기에 부울경 소재 5개 미술대학에서 각 2명씩 10명을 선발해 장학금을 수여하고 전시를 개최했다. 하반기에는 전국으로 대상자를 확대해 8명을 선정, 후원했다.
근래 부산의 청년들을 위한 미술 관련 공모나 시상제도는 26년간 이어진 공간화랑의 청년 작가상이 있었다. 그 상을 시상한 것도 2016년이 마지막이지 싶다. 특히 미술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학금과 전시를 마련한 제도는 이번이 처음이다. 학교 당국과 교수들은 지역 미술대학 소멸과 학과 통폐합, 급속도의 위기를 타개할 묘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획기적인 장학금 지원은 예술가의 꿈을 응원하는 큰 울림이며 샘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지속적인 지원을 통해 매년 성장한 작가들이 한국 화단에 당당히 이름 올리게 된다면 아름다운 역사가 될 것이다. 그 첫 행보를 보면서 미술인으로서 고마움을 느낀다.
예술가에게 지원은 생존의 조건이자 창작의 토대다. 예술가들은 공공기관의 공모 방식을 통해 지원받는다. 또 다른 지원의 이름이 ‘메세나’(Mecenat)다. 메세나는 기업의 문화예술활동을 지원하는 프랑스어이며 1967년 미국에서 기업예술후원회가 발족하며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는 메세나의 의미가 더 확장돼 예술·문화·과학·스포츠에 대한 지원뿐 아니라 사회적·인도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공익사업 지원 등을 포괄한다. 국내에서는 1994년 사단법인 한국메세나협회가 발족해 200여 개의 후원사와 함께 연간 3000여 개의 프로그램을 위한 예술단체와 예술가를 지원하고 있다.
KT&G는 서울 홍대, 대치, 춘천, 논산, 부산 등 복합문화공간 ‘상상마당’을 건립·운영하며 메세나 확산에 앞장서는 기업이다. 5개의 공간에 연간 3000여 개의 프로그램을 운용하며 특히 비주류 인디문화 확산에 큰 둥지 역할을 하고 있다.
늦은 감은 있지만 전국에서 다섯 번째로 창립한 부산메세나협회(회장 백정호 동성케미컬 회장)는 2021년 설립된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43개 회원사와 함께 예술지원 매칭펀드, 찾아가는 메세나 음악회, 부산예술이음센터 등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 부산에서 개최된 제106회 전국체육대회의 개회식 관람객을 위해 방석, 응원용 짝짝이, 음료수 등 편의 물품을 후원하기도 했다.
부산은행, DRB동일, 욱성화학 등 부산의 대표적인 기업에서 자체 공간과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례가 있다. 직원 수 20명 남짓의 중소기업 (주)정현전기물류는 사회복지와 미술 분야에 적극적인 후원을 하고 있다. 이 회사 대표는 현장의 갤러리와 작가 스튜디오를 찾아다니고 있으며, 조건과 기한도 없이 매월 200만 원씩 부산문화재단에 기부도 한다. 2023년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16개의 기관만 선정된 올해의 ‘문화예술후원 우수기관’에 부산 기업으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이처럼 크든 작든 후원하는 이들의 마음은 같다. 그들은 안다. “후원을 통해 내 삶의 가치가 더 깊어진다”는 사실을. 문득, 김장하 선생의 “줬으면 그만이지”라는 말이 떠오른다. 진정한 후원이란 거창한 이름이나 결과가 아니라, 누군가의 가능성을 믿고 기다려주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