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젠슨 황 선물의 딜레마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10월 31일 경북 경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최고경영자(CEO) 서밋 특별 세션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의 통 큰 선물이 화제다. 그는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 회의 기간에 방한해 지난달 31일 한국에 26만 장의 블랙웰(Blackwell) GPU(그래픽 처리 장치) 공급 계획을 밝혔다. 향후 5년간 한국 정부와 삼성전자·SK그룹·현대차그룹·네이버클라우드에 제공한다는 것이다. 젠슨 황의 GPU 선물은 한국이 글로벌 ‘AI 제조 기지’로 도약하는 변곡점이 될 수 있다는 평가가 많다. 반면, 이 선물이 남긴 과제도 만만찮다.
■ 젠슨 황, 왜 한국에 GPU 공세?
젠슨 황이 블랙웰을 집중 공급하는 이유는 한국이 소프트웨어·제조·AI 3가지 역량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젠슨 황은 AI 기술 발전을 4단계로 분류했다. 음성 인식, 의료 영상 분석이 가능한 1단계 ‘인식형 AI’, 새로운 콘텐츠와 디자인 창작이 가능한 2단계 ‘생성형 AI’, 자율적으로 의사 결정을 내리고 목표 지향적인 행동을 취하는 3단계 ‘에이젠틱 AI’, 로봇이나 자율주행차 등 현실 세계에서 인간처럼 시각과 언어를 이해하고 물리적인 행동을 수행하는 ‘피지컬 AI’로 나뉜다. 예를 들어 기존 자동화 로봇이 기계적으로 정해진 절차만 따랐다면, 피지컬 AI 로봇은 센서, AI 모델, 제어 기술을 결합해 실시간으로 최적의 조치를 실행할 수 있다. 젠슨 황은 반도체와 제조업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을 피지컬 AI를 처음 실현할 최적의 무대로 점찍은 것이다.
엔비디아가 한국에 공급하기로 한 GPU 26만 장은 주로 피지컬 AI 분야에 활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전자·SK·현대차그룹이 ‘AI 팩토리’ 구축을 통해 반도체·자동차 생산을 효율화하고 로봇 등을 개발하겠다는 게 대표적이다. AI 팩토리는 칩·시스템·소프트웨어·모델 구조를 모두 고려하는 설비로, 넓은 개념의 인공지능 인프라를 말한다. 현대차는 자율주행·로보틱스 등 직접 산업 응용을 준비 중이다. 네이버는 공공과 기업을 대상으로 한 AI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AI 허브 클라우드’를 구축할 계획이다.
아직 초기 단계인 피지컬 AI는 제조업과 밀접하게 맞닿아 한국이 강점을 발휘할 수 있다. 제조업 중심인 한국은 피지컬 AI에 필요한 데이터를 쌓을 수 있는 산업 현장이 많다. 엔비디아의 GPU 26만 장 공급도 이러한 한국의 제조 경험과 역량에 주목한 결과라는 것이다. 엔비디아가 한국을 ‘피지컬 AI 테스트베드’로 삼았다는 분석도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4일 내년도 예산안 설명을 위한 국회 시정연설에서 “AI 3대 강국 목표 달성을 위해 총 10조 1000억 원을 편성했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가장 집중 투자할 AI 분야로 피지컬 AI를 들었다. 반도체·조선·가전 등 제조업에 피지컬 AI가 활용되면 생산 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 있다.
11월 3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SK AI 서밋 2025’ 전시장에 SK하이닉스의 고대역폭 메모리 HBM3E가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
■ 이공계 인재의 ‘탈한국’ 조짐
젠슨 황이 GPU 26만 장을 공급하기로 하면서 한국은 AI 산업 발전을 위한 최소한의 실탄을 챙겼다는 평가다. ‘AI 3대 강국’으로의 도약도 가능하다는 장밋빛 기대감도 나온다. 하지만 국내 제조업의 ‘AI 대전환’을 이끌 인재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미국과 중국이 자본력을 앞세워 전 세계 AI 인재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상황이다.
AI 인재 확보가 시급한 상황에서 이공계 인재의 ‘한국 탈출’이 더 가팔라질 조짐을 보인다. 국내 이공계 인력 10명 중 4명은 외국으로 떠날 의향이 있거나 실제로 준비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20~30대는 10명 중 7명이 해외 이직을 원해 과학기술 인재 유출에 비상등이 켜졌다. 한국은행이 지난 3일 발표한 ‘이공계 인재 해외 유출 결정요인과 정책적 대응 방향’ 보고서를 보면, 석박사 학위를 소지하고 국내 대학·연구소·기업 등에서 근무하는 이공계 인력 1916명 중 42.9%가 “향후 3년 내 외국 이직을 고려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공계 인력이 해외 이직을 고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연봉 등 금전적 요인’(66.7%)이었다. ‘연구생태계·네트워크’(61.1%)와 ‘경력 기회 보장’(48.8%) 등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 원인은 열악한 처우와 부족한 일자리다. 실제로 이공계 연봉의 국내외 격차가 컸다. 해외 이공계 전문가는 13년차에 가장 많은 36만 6000달러를 받는데, 국내 이공계 전문가는 19년차에 가서야 최고점(12만 7000달러)을 찍었다.
한국의 이공계 인재 유출은 이미 진행 중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22년까지 해외로 떠난 이공계 인력은 총 34만 명이다. 이 중 석박사급 엘리트 인력만 9만 6000명에 달한다. 특히 AI 인재 품귀 현상이 지속되면 26만 장의 GPU를 손에 쥘 기업들도 비상에 걸릴 수밖에 없다. 고교 최상위권 인재 상당수가 의료 분야로 진학하고, 이공계 인재들 역시 더 나은 연구 환경과 경력 기회를 찾아 해외로 진출하는 게 현실이다. 젠슨 황의 선물을 받은 대한민국이 처한 딜레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10월 30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엔비디아의 그래픽카드(GPU) '지포스' 출시 25주년 행사에서 단상에 올라 있다. 연합뉴스
■ 인재 확보·독자적 기술 개발을
AI는 인재 자체가 핵심 자원이라고 한다. 미국의 구글, 메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테슬라 등은 세계 최고 수준의 AI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엄청난 연봉을 준다. 중국도 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 등을 중심으로 인재 확보 경쟁에 나서고 있다. 우리도 AI 분야에 최고 인재가 모일 수 있는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인재 유출을 막지 못한다면 ‘AI 3강 도약’은 신기루에 그칠 수 있다. 국내 과학자들의 처우와 사회적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 금전적 보상 체계 혁신, 연구개발 투자 실효성 강화, 기술창업 기반 확충, 혁신 생태계 확장 등을 위해 범국가적으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또 이공계 인재들이 창업에 실패하더라도 재도전이 용이한 사회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이미 해외로 떠난 인재들이 복귀할 수 있도록 파격적인 복귀 프로그램 마련도 필요하다.
GPU 26만 장은 한국의 제조업 혁신을 가속할 귀한 선물이지만, 우리의 AI 기술 주권과 경쟁력을 약화할 함정이 될 수도 있다. 엔비디아는 칩 공급만 하지 않고 디지털 공장을 구현하는 플랫폼 ‘옴니버스’, 피지컬 AI 기술 ‘코스모스’ 등을 한국 기업들에 적용한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엔비디아가 한국 기업의 제조 공정 데이터와 표준 등을 장악하고 지배하는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국이 엔비디아의 생태계에 묶이는 기술적 족쇄가 될 수 있다는 해외 IT업계의 경고도 지나치기 힘들다. 결국, 우리가 AI 분야에서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해 글로벌 기준을 선점할 필요가 있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