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영문 모르는 통역
“영문도 모르고 대학교 입학했다가 영문도 모르고 졸업했지요.”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한 CEO가 외국인 게스트와의 만찬 자리에서 이 같은 농담을 꺼내며 서먹한 분위기를 타개하려 한 적이 있었다. 게스트가 한국인이었다면 당장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말을 이어갔을 터이지만 그 만찬 자리는 썰렁하게 경직됐다. 통역이 저 말을 어떻게 옮겨야 좋을지 몰라 진땀만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영화 ‘전, 란’에서는 왜장을 따라다니며 통역을 맡은 졸개의 역할이 인상적으로 연출된다. 거의 동시통역에 가까울 정도로 실시간 통역을 하는 그 졸개는 칼싸움 와중에 내뱉어지는 말까지도 칼을 맞을 위험을 무릅쓰고 가까이 붙어 서서 통역을 하느라 분주하다. 심지어 칼을 맞고 죽어가는 와중에도 끝까지 통역을 하는 모습에서는 직업적 숭고함까지 느껴질 정도랄까.
언어가 다른 두 집단을 이어주는 가장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하는 통역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 온 직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교역에서부터 전쟁까지 두 집단이 어떤 형태로든 접촉을 하려면 통역의 힘을 빌지 않고서는 정확한 의사 전달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와의 무역과 외교가 나라를 지탱하는 두 기둥이 돼 온 대한민국에선 그래서 더더욱 통역에 대한 관심이 높은 편이다.
멀리 1990년대 걸프전 당시 텔레비전에서 CNN 보도를 실시간으로 전달했던 경이로운 동시통역에서부터 추석 직전 한국을 방문한 샘 올트먼 오픈AI CEO가 이재명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에 배석한 통역사에게까지 그 관심은 식을 줄을 모른다. 특히나 샘 올트먼 옆에 있던 여성 동시통역사는 전달력과 정확성에서 역대급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주목을 끌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통역사를 샘 올트먼이 직접 대동했다는 점이다.
한국 정부의 통역은 대부분 외교부 소속 공무원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뛰어난 실력의 인재들이지만 외교나 비즈니스 무대에서는 미묘한 뉘앙스 차이만으로 결과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달라질 수 있다. 당장 치열한 외교무대가 될 APEC 정상회담까지 코앞에 다가온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통역에는 더 많은 투자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영문도 모를 난해한 뉘앙스의 말이 나온다 해도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 정도라면 더욱 좋겠다.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