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정치인의 TPO
김한수 편집부장
추석 연휴 이어진 '냉부해' 논란
고소·고발에 국감에서도 이어질 듯
미디어, 정치인에겐 중요 소통 창구
시점·상황·메시지 일관성 갖춰야
대통령실, 철저한 메시지 관리 필요
이재명 대통령의 ‘냉장고를 부탁해’ 프로그램 출연에 대한 정치권의 논쟁이 뜨겁다. 길고 길었던 추석 연휴가 끝났지만, 정치권의 공방은 끝나지 않고 있다. 여야는 프로그램 방영 이후 상대 진영이 명예를 훼손했다며, 발언이 거짓말이라며 고소하고 고발했다. 이번 이슈는 오늘부터 시작되는 2025년 국정감사에서도 등장할 것이 뻔하다. 더 좋은 정치, 더 나은 민생을 부탁하며 표를 던진 상당수의 시민에게 정치권의 이번 논쟁이 마뜩하지 않다.
대통령 부부의 이번 예능 출연은 국민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대통령과 영부인이 동시에 출연한 경우는 한국 정치에서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하지만 프로그램 제작 시점이 국가 전산망 화재로 국가적 혼란이 극심한 시점이었던 것은 비판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대통령 부부가 출연 목적으로 밝힌 ‘K푸드 세계화’에 대한 관심을 온전히 국민들에게 전달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 대통령은 한국 역대 대통령 중 대중과의 소통에 능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여권에서는 이 대통령이 20여 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중친화적인 언어로 시민들과 소통하던 모습과 비슷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는 노 전 대통령 재임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로 성장한 온라인 SNS를 통해 국민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더불어민주당 당대표이자 국회의원이던 지난해 12월 3일 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언하자 국회로 향하는 차 안에서 SNS에 “국회로 모여달라”는 내용의 동영상을 올렸다. 이 대통령의 해당 게시물은 순식간에 온라인으로 퍼져나갔다. 최근 화제를 모은 경주 APEC 홍보 영상에서 이 대통령이 항공기 유도원으로 출연한 것 역시 그 연장선이다.
정치권에서 각종 SNS와 유튜브, 숏폼 영상 등은 정치인들의 중요한 의사소통 창구가 됐다. 정치인의 말과 행동은 온라인을 통해 짧은 시간에 시민들에게 퍼져나가며, 여러 해석이 덧붙여져 재가공된다. 메시지 전달력이 커진 만큼 의도하지 않은 파장도 그만큼 크다. 결국 정치인들의 미디어 노출은 소통인 동시에 위험 관리가 필요한 영역이다. 특히 국가 정책의 최고 결정권자인 대통령의 예능 프로그램을 비롯한 미디어 노출은 누구보다 철저한 메시지 관리가 필요하다. 대통령은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무대에서 친근함을 얻을 수 있지만, 한순간에 신뢰와 정책 추진 동력을 잃을 수도 있다.
달변가로 알려진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사례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현직 대통령 신분이던 2014년 TV 채널이 아닌 당시 미국 최고 인기 온라인 코미디 프로그램인 ‘Between Two Ferns’에 출연했다. 그는 풍자가 난무하는 해당 프로그램에서 ‘오바마 케어’로 불렸던 자신의 의료보험 개혁 정책을 홍보했다. 대중들은 현직 대통령이 풍자의 대상이 된 것에 열광했다. 출연 파장은 컸다. 출연 직후 미국 내 정부 의료보험 홈페이지 방문자 수는 프로그램 방영 전보다 40%나 증가했다.
파장은 컸지만 효과는 적었다. 달아올랐던 미국 국민들의 의료보험 개혁에 대한 관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그라졌다. 관심이 사그라들면서 개혁을 위한 추진 동력은 더 얻지 못했다. 오바마의 예능 출연은 국민들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가 얻고자 했던 신뢰를 기반으로 한 정책 추진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에는 정치의 품격이 희화화됐다는 비판과 국정 책임자로서의 권위가 훼손됐다는 부정적 평가가 뒤따랐다.
정치와 미디어의 연관성 연구로 잘 알려진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소속 매튜 바움 교수는 “(예능이나 토크쇼 같은)소프트 뉴스는 정치 무관심층을 정치로 끌어들이지만, 정보의 깊이를 얕게 만들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정치인들에게 예능이나 토크쇼가 소통의 통로이지만,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를 단순화시키는 위험이 뒤따른다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이 출연한 프로그램이 방영된 지 일주일밖에 안된 지금 ‘K푸드 세계화’라는 메시지는 온데간데 없고, 정치권의 싸움거리로 넘어간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정치인의 미디어 활용은 그 시점과 목적, 메시지의 일관성이 동시에 확보될 때만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확하다고 해도, 시점과 상황이 맞지 않다면 메시지는 왜곡된다. 이번 예능 출연 역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로 전국 곳곳에서 국민들의 생활에 피해가 발생한 상황이었으므로 메시지의 전달력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정치의 본질은 신뢰다. 대중들로부터 신뢰를 얻으려는 정치인들의 미디어 활용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대통령의 미디어 참여가 국민들의 신뢰와 정책 추진력을 얻는 기회로 활용되려면 소통의 진정성과 시점, 상황이 더욱 면밀하게 검토돼야만 한다.
김한수 기자 hanga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