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예민함, 차이를 아는 고통과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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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환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잎새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윤동주는 HSP(Highly Sensitive Person), 즉 매우 예민한 사람이었다. 흔히 ‘초민감자’라 명명하는 이들은 민감한 기질을 타고났기에 주변 자극이나 타인의 감정에 깊이 반응한다. 초민감자의 비율은 열에 한둘 정도라고 알려져 있으나, 꼭 초민감자가 아니어도 우리 주변에 예민한 사람이 많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잠 깨고, 식당에서 다른 이들이 시끄럽게 떠들면 소화가 되지 않을 만큼 힘들어하며,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를 보면 즐거움보다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 이들은 모임을 꺼리고 어쩌다 모임에 참석해도 침대에서 상대와 자신의 언행을 곱씹으며 뒤척인다.

이들에게 돌아오는 말,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라는 반응은 핀잔에 가까워, 자연스레 사회생활을 하며 스스로 부정적인 인식을 지니게 된다. 특히 치열한 생존 경쟁과 성과 압박에 시달리는 직장인에게 예민함은 사회적 약점이다. 직장 상사의 쓴소리나 까탈스러운 고객의 갑질 정도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툴툴 털고, 다시 출근길에 나서야 생존할 수 있는 세상이다. 한때 일본에서 ‘둔감력’이라는 단어가 올해의 유행어로 선정될 만큼 인기를 끌었던 이유다.

예민함은 사회적 약점으로 인식

'둔감력'이 유행어로 선정되기도

각자 결 존중하며 공존하길 기대

예민함, 자신과 타인 향한 배려

〈둔감력〉은 일본 소설가이자 의사인 와타나베 준이치의 책으로, 국내에는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실낙원〉이라는 소설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와타나베 준이치는 여성 인물의 탁월한 심리묘사에서 알 수 있듯, 무척 예민한 사람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어쩌면 작가 자신을 위해 쓴 책이 아닐까 싶었다. 너무 예민해서 둔감해지려 애쓰는, 그래서 저자는 둔감한 마음이 신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너무 작은 것에 연연하지 말라는 저자의 조언에 끄덕이다, 그것이 잘 된다면 예민한 사람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청각이 예민하여 케이블 하나 교체하고도, 작은 소리의 변화에 기뻐하며 좋아하는 음반을 늘어놓고 음악 감상에 빠지곤 한다. 곡의 음역과 악기 위치를 귀로 그리고, 소리의 해상도, 보컬의 들숨과 날숨을 느끼는 음악 감상은 내게 큰 기쁨이었다. 소설을 읽으면 인물에 공감하여 즐겁게 몰입하고, 타인의 감정에 깊이 닿을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예민해서 사람을 잘 만나지 못하고, 소음에 민감하여 휴대전화는 종일 무음이며, 식당이나 카페 등 사람이 많은 장소를 힘들어한다. 예민함은 나에게 작은 차이를 느끼는 기쁨과 고통을 함께 주었다.

세상 만물에는 저마다 결이 있다. 물은 물결이 나무는 나뭇결이 있듯 사람에게도 저마다 결이 있다. 예민한 사람일수록 사람에게 쉽게 상처받는다. 둔감한 사람은 악의 없이 예민한 이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이 상대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며, 혹시 알아도 그저 상대를 유별나다고 여긴다. 학교, 직장, 모임 등에서 둔감과 예민함이 만나면, 그 경계에 관계의 상처가 가시처럼 돋는다. 공간의 결이 길이고, 말의 결은 이야기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그곳에 길이 난다. 그 길 따라 서로 결을 존중하며 공존했으면 한다.

예민함이 너무 힘들어 무디어지려 애쓴 적이 있다. 슬픔의 범람을 둔감의 둑으로 막아보고자 한 적도, 모임에 자주 나가 관계의 상처에 굳은살이 박이길 기대한 적도 있다. 하지만 맞지 않는 신을 종일 신은 것처럼 불편했다. 생애 어느 순간, 결대로 살자 결심한 이후 마음이 편했다. 작은 것도 놓치지 않는 예민함이 나를 너무 괴롭히지 않고, 타인을 향한 세심함, 차이를 아는 섬세함으로 승화되고자 노력했다. 예민하여 작은 차이를 감지하는 것은, 때론 고통이고 때론 기쁨이다. 남은 생도 내 결을 거스르지 않고, 예민함, 차이를 아는 고통과 기쁨을 모두 누리며 살아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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