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선으로] 눈을 보고 말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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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 공동연구원

한때 온 힘을 다해 세상의 변화를 위해 싸운 다음, 내 뜻대로 크게 바람직한 세상이 오는 경우는 드물다. 그나마 조금 덜 나쁘거나 되레 나빠지거나, 여전히 성에 안 차는 세상이 나를 맞는다. 싸우는 동안 한껏 부푼 기대가 꺼지고 나면, 새로 대처해야 할 일들이 눈앞에 아득하다. 세상의 변화는 내가 낸 힘과 걸어온 기대에 비해 대체로 불충분하다.

세상이 당장 내 식대로 변할 가망이 없어 보일 때 사람은 쉽게 토라진다. 인터넷 공간의 댓글과 대세는 그러한 낙담에 불을 끼얹는다. 그곳에서 말은 쉽게 부풀고, 감정은 쉽게 옮겨 붙는다. 대화와 토론을 빙자한 확증 편향의 말 잔치가 양쪽 모두에 쌓이면, 마침내 저자들은 영영 변하지 않겠고 저것들과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상종할 수 없다는 생각이 굳어진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흔한 말에도 불구하고, 모든 교양과 교육은 사람이 바뀔 수 있음을 전제로 삼는다. 물론 그 바꿈의 기술이 지난날의 구타와 폭력과 ‘계몽령’의 방식은 아니어야 한다면, 한 사람의 변화를 이끄는 계기는 의외로 평범한 것들이다. 여느 부모가 자식을, 스승이 제자를 손절하지 않듯이, 알아듣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눈높이에 맞춘 대화를 건네고,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공감해주고, 외부의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기다려주는 일이 그것이다.

생각이 같아서 즐거운 일은 인생에 잠깐이고, 생각이 달라도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헤아리며 눈앞의 사람과 관계 맺는 일은 인생의 기나긴 숙제다. 생각이 같아서가 아니라 생각이 다르더라도 함께 사는 기술을 배우는 데엔 대체로 온라인보다 오프라인이 미덥다. 때로 세상이 돌이킬 수 없이 분열된 것 같고, 개선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 그 때는 언젠가 내게 말을 건네며 내 반응을 가만히 기다리던 이들의 눈을 떠올린다. 사람이 한 사람과 눈을 보며 관계 맺는 일에는 인간의 짐작을 능히 벗어나는 바가 있다.

얼굴을 보고 눈을 맞추고, 내 말에 상대의 눈빛이 실시간으로 빛나거나 사그라드는 것을 보고, 상대의 마음을 다치게 한 말에 사과할 기회를 얻고, 상대방의 눈치를 읽으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고르는 일의 소중함을 생각한다. 그 행위들이 소중한 이유는, 상대가 그 자리에 영원토록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내 눈빛을 통해 그가 아무쪼록 다르게 말하고 반응하리라는 희망이 거기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실시간으로 느끼고 감각할 수 있는 것은 인생의 작은 행복이고 기적이다. 세상의 변화를 믿는 일은, 그렇게 내 눈빛을 받은 한 사람이 바뀔 수 있음을 믿는 일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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