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의 생각의 빛] 버려야 할 때 버리지 않으면 찾아오는 것
문학평론가
한국 보수·진보 논리 허술 궤변 많아
증명 안 된 나쁜 습성 못 버리면 자멸
공동체 모든 일원에 좋은 이념 추구를
올해부터 마음먹은 게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책에 관한 것이다. 진작에 사서 읽지 않고 쌓아둔 책을 한 권씩 꺼내어 완독하고자 결심했다. 그래서 책장에 꽂혀 있거나 쌓여 있는 책의 목록을 훑어볼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러한 결심은 물거품이 될 공산이 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책은 드물었고, 기껏해야 필요한 부분만 골라 읽거나 앞부분만 읽다가 그만둔 책들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짬이 날 때마다 앞으로 읽거나 들춰볼 일이 없을 것 같은 책부터 정리를 하자, 마음먹지만 매번 생각에만 그친다. 사방을 가득 채운 서재를 꿈꾸었던 젊은 날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그런 로망이 부질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책이란 것도 알고 보면 공간만 차지하는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물건과 다른 점이 있다면 두고두고 소비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는 사실뿐이다. ‘기억저장소’라 할만치 내가 기억하고 떠올린 사실을 대차 대조할 수 있는 요긴한 물건임과 동시에, 평생 마음에 담아두고 살아야 할 정보와 지혜의 화수분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는 책이 사람에게 안기는 선(善) 기능이다. ‘4차산업혁명 시대’라는 요즘 종이책보다는 전자문서나 스마트폰을 비롯한 인터넷 활용도가 높아서 독서 같은 아날로그 형의 지식 공유가 시들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책의 유용성과 상징성은 무시할 수 없다. 젊은 날 지적 호기심에 여기저기 사다 모았던 책들이 몇 번의 이사로 그 부피가 줄어들다가도 어느새 차곡히 공간을 메운다. 책장에 꽂힌 책을 하릴없이 뽑아 든 채 낱장을 스르륵 넘기면 오래 묵은 종이 냄새가 밀봉된 병뚜껑을 따면 흘러나오는 향처럼 코끝을 간지럽힌다.
하지만 언젠가는 작정하고 버려야 할 책이다. 언제까지 데리고 다닐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애지중지하는 물건이지만 버려야 할 때 버리지 않으면 결국 화살이 되어 나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이치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간 쌓아둔 책을 정리하면서 버리는 일은 단순한 물건 정리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하는 행위다. 그러므로 좀 더 나은 자신을 가꾸기 위한 단장(丹粧)이자 준비 작업이기도 한 것이다.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기존의 지식과 이론 및 정보가 일종의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되어 녹슬고 이끼가 낄 때 사람은 낡아 간다.
낡은 세계는 늙은 세계이고, 이 늙은 세계는 우리를 우매하고 병들고 시들게 한다. 이 세계에 오랫동안 빠져 있는 사람은 기존의 인식에 갇혀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흔히 보수(保守)를 진보와 대립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데, 따지고 보면 보수의 가치를 지키는 자만이 진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현실에서 한 발짝 나아가려는 진보의 의식은 지금까지 쌓인 전통의 순기능이 지니는 가치를 진지하게 되씹는 자리에서 생겨난다.
‘보수주의의 아버지’란 칭호를 받는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1729~1797)는 계몽주의 시대 여느 철학자들이 주창한 개인의 이성과 자유의 중요성보다는 공동체의 전통과 역사의 가치를 중요하게 바라보면서 기존의 질서를 옹호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그는 귀족계급의 환심을 샀는데, 상류층은 자신이 지닌 기득권을 빼앗기는 사상의 물결을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보수’는 300년 전의 영국 사회에 들이닥쳤던 거대한 사회변동과 무관하게 기득권의 이익과 주장에 찬성하는 무리나 목소리로 전락했다. 그 기득권의 이익이나 주장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가치를 둘러싼 의미보다는 몰상식과 몰이해에 바탕을 둔 엉뚱한 궤변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논리가 허술할뿐더러 자기주장을 자신의 논리로 깨뜨리거나 뒤집는 역설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도 이런 맥락에서라면 비껴가지 못한다. 새로운 사회현상이나 구조를 앞당기자고 외치면서도 정작 구태에 젖어 있는 인식과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수든 진보든 스스로 자신의 이념이나 사상을 굳이 옭매거나 규정지어 세계를 바라볼 필요가 없다. 자신에게 좋은 것이 모든 공동체의 일원에게도 좋으면 추구해야 한다. 여기에 보수나 진보가 끼어들 틈이 없다. 책을 버리지 못하고 주저하는 마음은 책을 더 쌓아두기 위해 벽면 하나를 허무는 일만큼이나 어처구니가 없을 수가 있다. 역사적으로 증명이 된 안 좋은 습성이나 인식을 버리지 못해 찾아오는 것은 비단 자멸뿐만은 아니다. 자멸한 자리에 세워야 하는 땀과 노력이 뒤따르게 되는 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