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이번 장마가 끝나면 그나마 깨끗한 세상이 올까?
곧 닥칠 장마를 소리 없이 내리는 비를 보며 기다린다. 겨우내 불협을 만든 불온한 공기와 올봄 내내 아귀 벌이던 다툼을 이 장마가 쓸고 갔으면 하는 부질없는 마음이 들어서이다. 굵은 장맛비가 만든 풍경을 그린 그림으로는 우타가와 히로시게(1797~1858)의 ‘오하시 아타케의 저녁 소나기’가 으뜸이다.
히로시게는 몰라도 반 고흐가 따라 그린 일본목판화인 우키요에(浮世繪)라고 하면 “아~” 할 것이다. 에도 말기에 활약했던 그는 당시 일상과 풍경을 운치 있게 표현한 최고의 화가로 꼽힌다. 후지산보다 큰 파도를 그린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와 함께 자포니즘을 유럽에 퍼트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1603년 쇼군이 막부를 에도에 설치하고 상업이 발달하자 부를 축적한 죠닌(상공인)이 등장한다. 이들은 계급제에 막혀 신분 상승을 꿈꾸는 대신에 말초적인 오락 거리인 가부키와 통속소설을 문화로 발전시키고, 심지어 유곽도 번창케 한다. 이런 현상에 우키요에도 있었다. ‘우키요’는 불교에서 덧없는 세상을 뜻하고, 지금 순간의 쾌락을 표현한 그림이 ‘우키요에’이다. 에도에 목판으로 찍은 책이 유행하자 삽화라는 그림 수요도 급증한다. 그러더니 아예 그림만으로도 즐기는 책이 출판되면서 우키요에는 독립적인 장르로 발전한다. 이윽고 큰돈이 벌리는 산업으로 성장하자, 목판과 종이 제작술이 발전하고 서적 유통과 기획까지 분업화된다. 결국 우키요에는 국제적인 산업으로 확대되고 유럽에까지 퍼져 화가와 미술 애호가의 수집품이 된다. 히로시게는 2만 점이나 되는 작품을 남겼으니, 얼마나 큰 시장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히로시게가 제작한 ‘동도명소’(1831)가 처음으로 성공하자, 또 다른 직업이었던 정화소(에도의 소방서) 말단 관리직을 바로 사퇴한다. 곧이어 발표한 ‘동해도53차’(1833)가 일본에 여행 붐을 일으킬 정도로 대성공하자 많은 문하생도 생겼다. 1856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가 가장 애착했던 것은 ‘명소에도 100경’이다. 그중에 52경이 ‘오하시 아타케의 저녁 소나기’이다.
이 그림은 짙은 습기에 희미하게 보이는 건너편 아타케(배를 정박시키는 군영지)와 화면 오른쪽에서 만나는 오하시(대교) 위에 굵은 비를 맞으며 서둘러 건너는 남녀를 그리고 있다. 옷도 신발도 비를 피하려 머리에 쓴 것도 행동도 제각각이다. 다리 위 빗줄기를 슬쩍 생략한 배려에 사람들 모습이 생생하다. 가깝게는 검은색, 멀리는 회색으로 소낙비 내리는 공간을 만들어 스미다강 건너 습기에 갇힌 군영지를 아스라이 그려낸다. 비싼 수입 물품인 감색으로 칠한 다리 아래에 푸른 강물은 감상자에게 청량감을 부여해 습한 우울감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