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기의 미술 미학 이야기] 망각과 지배 서사에 저항하는 기억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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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 '화엄광주' 연작 가운데 하나. ⓒ제주의소리 이준석 '화엄광주' 연작 가운데 하나. ⓒ제주의소리

현대사에서 비상계엄은 ‘비상시 국가권력의 조치’가 아니라, 시민의 자유와 생명을 유린해 온 반복된 국가 폭력의 서사였다. 1948년 10월 21일 여순사건(10·19) 진압, 한국전쟁, 5·16 군사쿠데타, 1972년 10월 18일 유신체제 수립, 1979년 박정희 사망 다음날 10월 27일과 1980년 5월 17일 신군부의 비상계엄 전국 확대까지 ‘계엄’은 늘 국민의 저항을 짓누르는 장치였다. 이 모든 것이 많은 희생과 비극으로 점철된 사건이라면,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 이후 국민이 보여준 전국적 저항과 연대는 민주화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장면 중 하나로 남을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은 신군부의 계엄령 확대와 헌정질서 파괴에 저항했다. 오늘날 되새겨야 할, 5·18 민주화운동의 보편적 가치이자 핵심은 ‘민주주의 보루로서의 국민 저항권’ ‘국가 폭력에 대한 시민들의 연대와 윤리의식’ ‘왜곡된 역사 정의와 진실 규명’이라 할 것이다. 5·18 광주를 다룬 많은 미술가 가운데, 1958년생 광주 출신 화가 이준석의 작품을 언급해 보자. 대표적인 오월 화가 홍성담처럼 이준석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직접 전남도청에서 시위대에 참여해 계엄군을 향해 돌을 던졌고, 총탄이 날아다니던 살육 현장을 목도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붓과 조각칼로 현장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현대 미술 역사에서 1980년대 민중미술은 실제로 5·18 광주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 할 수 있다. 이 민중미술은 단지 시대적 양식이 아니라, 삶과 현장에서 분출된 예술의 실천 그 자체였다. 순수미술의 울타리를 넘어 현실에 개입하고, 사회의 감각 구조를 뒤흔드는 새로운 예술운동이었다. 또한 민중미술은 페터 뷔르거의 관점에서 삶과 예술을 결합하고 예술의 공공성을 실현하는 ‘아방가르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민중미술은 민주화 이후 1990년대 초반부터 과거의 투쟁 현장 중심의 미술을 벗어나 다양한 장르적 실험과 도시, 환경, 젠더, 이주민 등 다양한 주제로 확장해 나가고 있다. 이준석은 그 가운데 우리의 역사 문화를 되돌아보면서 그 속에서 광주의 정신을 찾아내 접목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불탑을 만들면 새 세상이 온다는 전남 화순 운주사의 전설을 바탕으로 ‘화엄광주’ 연작을 제작한 바 있다. 그는 운주사의 불상과 불탑을 마치 사진 액자 모양의 프레임으로 그려 넣고, 그 속에 제주 4·3을 상징하는 한라산 봉우리 위에 5·18 민주화운동과 6월 민주항쟁까지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사에 등장하는 투쟁과 저항 장면을 콜라주적 방식으로 병렬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그 이미지들은 또한 4·19혁명과 부마민주항쟁으로도 겹쳐진다.

이준석의 캔버스는 말한다. ‘기억’이란 바로 망각과 지배 서사에 저항하는 ‘투쟁’이라는 것을. 미술평론가·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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