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의 생각의 빛] 비 내리는 봄날의 편지
문학평론가
정치에 지친 국민들 희망 꿈꾸며 '연명'
타인 해코지 않고 살아가는 일이 기적
상식 가진 평범한 시민들의 힘 알아야
어제는 지인과 함께 부산 자갈치 시장 어귀 양곱창 가게에서 소주를 마셨습니다. 남해가 고향이라던 주인은 요새 손님이 없다며 누굴 향해서인지 모를 지청구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비단 최근만의 일일까요. 술집에 앉아 한산한 골목을 우두커니 바라보니 십여 분 간격으로 사람 한둘 지나갈까, 오래전 북적이던 골목이 아니었습니다. 어디선가 공기를 가르며 쇳소리의 고함소리가 나서 유심히 지켜보니 중년의 취객이 누구한테 퍼붓는지 모를 험한 소리를 내뱉으면서 비틀거리며 지나갔습니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는 4월의 한복판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1990년대 중후반까지 이곳 남포동과 광복동을 비롯한 원도심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유명한 햄버거 프랜차이즈 가게는 원도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약속 장소 중 하나였습니다. 워낙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며 물결처럼 지나다 보니 약속 장소에 각자 도착했으면서도 서로를 찾지 못해 두리번거렸던 때가 종종 있었겠지요. 지금 비프광장 일대입니다.
코로나19를 겪으며 상권의 극심한 침체로 울상을 지었던 원도심도 점점 회복이 되어가나 싶다가도 더러 한숨을 내쉬는 상인을 보곤 합니다. 요즘 부평깡통시장이나 비프광장에는 외국인 관광객들로 붐비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인구가 줄어들고, 청년 일자리 해소는 오랫동안 나아질 낌새가 보이지 않고, 이런 현상과 맞물려 비혼, 비자녀와 독거세대가 급증하는 오늘날 ‘인간답게’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인지 종종 생각하게 됩니다. 상인들은 입만 열면 경기가 안 좋다고 말합니다. 소비자는 비싸서 먹을 곳이나 살 거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1990년대 부산 원도심 장면을 유튜브로 보면 그때가 그립다는 댓글이 많이 달립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수구지심(首丘之心)이 있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인데, 행복했든 그렇지 못했든 지난 시간의 단면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보면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물큰 생기지요. 물론 마음이 그렇다는 얘기지, 막상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는 장치가 있다면 섣불리 탑승하려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해를 넘기면서 수상한 시절을 겪다 보니 저뿐만 아니라 사람들 대부분이 어딘가 뒤숭숭한 느낌 가시지 않습니다. 정국이 비상계엄으로 요동을 치다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요즘 저마다 묵혀두거나 미뤄두었던 일과 계획을 차근차근히 정리하면서 착수하기도 합니다.
벚꽃도 만개하여 이제 땅바닥을 어지럽게 할 때가 되었나 봅니다. 인터넷이나 유튜브에서 끊임없이 쏟아지고 지껄이는 말을 가만히 듣노라면 이 세상이 참으로 복잡하고 어렵다는 생각, 아니 사는 일이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빠집니다.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그러는 중에 안타까운 사건·사고 소식에 한동안 멍한 날도 찾아오곤 합니다. 누구처럼 돈주머니나 낯짝이 두꺼워서 나라야 어찌 되건 자신과 식솔만 평안하면 된다는 철학을 지닌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 같은 서민들은 평생 일해도 만져보지도 못할 액수의 재산을 신고하고 출마하면서 가난하고 어려운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고 입버릇처럼 외칩니다.
대통령이 탄핵되고 대선일이 지정되었습니다. 지난 몇 달 동안 국민은 급격하게 떨어진 경제 지표뿐만 아니라 ‘내일’에 대한 고민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먼 데 있는 듯한 희망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퇴근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복권을 사는 사람도, 취직이 어려워 한숨을 내쉬는 청년도, 장사가 안돼 멍하니 골목만 바라보는 가게 주인도, 비록 이룬 것 하나 없이 ‘연명’ 수준에 가까운 나날을 보내는 모든 사람에게도 오늘은 지나고 내일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우리가 이렇게라도 이 땅에서 무언가를 하면서 다른 사람 해코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일 자체가 기적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톰 소여의 모험’을 쓴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는 무언가를 이루는 사람과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사람, 이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 그룹이 훨씬 적다.”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숱한 유명인을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으로 보면서 스스로를 되짚으며 박탈감에 빠질 때가 더러 있습니다.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사람이 ‘간증’처럼 말하는 장면을 보면서 그의 삶과 인격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세상은 몇몇 엘리트들이 이끌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 같은 상식 정도만 지니면서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들이 천천히 이룩해 나갑니다. 봄날이 지나고 무더위가 기습하면서 향기를 뿜었던 꽃은 모조리 떨어지겠지만, 여름 내내 가을 겨울이 지난 동토에서 새근새근 움트는 소리가 새로운 땅을 일군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