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투명해야 '산다'

김마선 기자 ms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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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 어원 디우르나(diurna)
매일매일 기록한다는 뜻 라틴어

시민들 SNS 글·영상… AI 등장
직업 기자들의 ‘차별화’ 급선무

독자에게 근거 제시하는 투명성
정직 통해 정보 신뢰 높이는 길

지난해 11월 18일 국회에서 열린 박장범 KBS 사장 후보자 인사청문회. MBC 기자 출신인 민주당 정동영 국회의원이 박 후보자에게 저널리즘(Journalism)의 어원을 물었다. 16년 선배의 질문에 박 후보자는 답을 못했다.

디우르나(diurna). 매일매일 기록한다는 뜻의 라틴어다. 정 의원은 기록의 기본은 정확성이라고 지적하며 박 후보자가 지난해 초 진행한 윤석열 대통령 인터뷰를 꼬집었다. 김건희 여사가 받은 디올백을 박 후보자는 ‘쪼만한 파우치’라고 말했다. 그때 인터뷰를 제대로 했더라면 윤 대통령이 지금과 같은 처지일까?

저널리즘은 태생적으로 민주주의 편이다. 뉴스를 취재해 대중에게 전달하는 이 활동은 17세기 계몽운동의 영향으로 싹을 틔웠다. 왕과 귀족 등 지배층이 독점하던 정보를 대중과 공유하면서 공론장으로 자리 잡았다.

대중과 함께했던 기자라는 직업이 요즘 여러 도전에 직면했다. 먼저 디지털 쓰나미의 영향이 크다. SNS에 글과 방송이 넘쳐난다. 더 이상 기록이 기자의 전유물이 아닌 세상이다. ‘기레기’라는 조롱이 상징하듯 기자에 대한 인식은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여기에 그 능력을 가늠할 수 없는 기계까지 등장했다. AI(인공지능)는 웬만한 글과 이미지, 그래픽을 척척 만들어낸다. 과연 기자는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기자들은 매일 기사 쓰고, 편집 하고, 사진 찍느라 바쁘다. 하지만 냉정히 봤을 때 다른 누군가가 자기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면 그곳은 ‘레드오션’이다. 또 종이신문은 디지털에 비해 느리다. 따라서 정보가 이미 노출됐다는 가정 아래 깊이와 폭을 달리해야 한다. 무엇을 추구하느냐만큼 중요한 게 무엇을 버리느냐다.

어원이 말해주듯 저널리즘은 아주 단순한 일이다. 기자(記者)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아무 꾸밈도 없이 무덤덤하게 ‘적는 자’라는 뜻이니. 그러나 그 단순함에 심오함이 있다. 매일매일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것은 정확성 외에도 판단력, 통찰력, 성실, 용기, 봉사정신 등 진실을 다루는 자의 자기 규율을 요구한다.

필자가 ‘투명성’(Transparancy) 개념을 처음 접한 것은 2014년 미국 미주리대 저널리즘스쿨 연수 때다. 기사가 생산되는 과정과 근거를 뉴스 소비자에게 투명하게 제공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객관성’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전직 기자인 빌 코바치와 톰 로젠스틸이 쓴 〈저널리즘 기본 원칙〉에서도 취재 경위, 취재원, 편견 가능성, 충돌하는 증언, 기자가 모르는 것 등을 밝혀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직’해야 독자가 정보의 타당성을 판단할 수 있다는 뜻. 역으로 팩트와 논리가 부족하면 투명할 수 없다.

만약 주변에 신문이나 스마트폰이 있다면 아무 기사나 한번 보자. 과연 실명 취재원이 얼마나 있는가. A 씨, B 사, C 관계자라는 표현이 수두룩할 것이다. 취재원 보호의 필요성이 없는데도 익명을 남발한다. 길게 보면 투명해야 신뢰를 얻을 수 있음은 물론이고 취재원의 실수나 속임수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투명성은 다른 책에서도 발견된다. 칩 히스·댄 히스의 〈스틱〉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사람들 뇌에 쏙쏙 박히게 하는 노하우를 모았다. 그 방법 중 하나로 제시한 것이 ‘검증 가능성’이다. 검증하려면 당연히 근거가 제시돼야 한다. 믿을지 말지는 상대방이 결정하겠지만 검증 가능성 자체가 신뢰를 준다는 것이다.

그동안 기자들은 ‘객관성’(Objectivity)을 굉장히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다. 주관을 배제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사안에 접근해야 한다는 의미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객관성은 종종 변질된다. 기계적 중립성이나 양비양시론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논란’ 보도, 기계적 균형, 형식적 요건 흉내 내기 등이 대표적이다.

객관성 원칙은 인간이 본래 객관적일 수 ‘없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한계를 인정하고 최소한 ‘방법적 객관성’이라도 추구하자는 것. 그 방법이 여러 가지인데 비판기사를 쓸 때 당사자로부터 반론을 듣는 것이 단적인 예다. 하지만 이마저도 잘 안 지켜진다. 언론보도 피해와 관련한 언론중재위 신청을 보면 이유야 어떻든 반론권 보장이 안 된 게 다툼의 주원인이다.

좋은 저널리즘은 좋은 비즈니스일까. 한때 좋은 기사는 돈이 되었다. 그 돈은 다시 좋은 기사를 생산하는 데 쓰였다. 탐사보도 황금기가 경제적 풍요 시기와 겹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 종이신문은 자체로 신뢰를 보증했다. 그러나 ‘광고모델’은 예전 같지 않고, 디지털 환경에서는 좋은 저널리즘이 발붙이기 힘들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한 방법은 ‘근본’을 돌아보는 것이다. 매일매일 기록하겠다는 정신, 그 속에 정보와 맥락과 재미를 담아내려는 노력은 저널리즘의 ‘오래된 미래’다. 그게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길일지 모른다. 종이든 디지털이든, 플랫폼이 본질은 아니다.

김마선 페이퍼랩 본부장 msk@busan.com


김마선 기자 ms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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