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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바르샤바에서 만난 안나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23세 여성 안나 코시악을 만났다. 안나의 고향은 우크라이나 중남부의 중공업 도시 드니프로다. 그는 우크라이나 난민으로, 바르샤바 SWPS대학 동아시아학부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있다. 처음부터 난민은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유학생이었다. 4년 전에 폴란드로 유학 온 안나는 대학을 졸업하면 우크라이나로 돌아가서 중국과 거래하는 모국 기업에서 일하면서 고국에 어떻게든 보탬이 되고자 했다고 한다.
폴란드식 만두인 피에로기와 생맥주 한 잔을 시켜놓고, 백야에 물든 바르샤바 구시가지의 노천카페에 그와 나란히 앉았다. 우크라이나에 있을 때 고려인 청년 이웃 덕에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봤다는 안나는 “한국 영화에서는 부산이 범죄 도시로 많이 소개되던데, 지금도 부산에 깡패가 많아요?”라고 묻기도 했다. 안나의 소박한 꿈은 유학 온 지 2년 뒤에 전쟁이 터지고 그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산산조각 났다. 조국 발전에 도움 되기는커녕 돌아갈 집마저 폭격으로 없어진 상태다. 폴란드는 대학 학제가 3년제여서 곧 실습을 마치고 논문을 내면 계속해서 대학에 적을 둘 수도 없다.
폴란드 정부가 우크라이나 난민을 잘 대해주고 사회적으로도 별다른 차별이 없기는 하다. 그러나 남의 땅은 결국 남의 땅이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 생활고가 만만하지 않다. 우크라이나에 아직 남아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삼촌의 안부도 걱정이다. “제 고향은 돈바스나 자포리자 원전에서 제법 떨어져 있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피해가 덜했어요. 그랬는데 지금은 달라요. 전국 어디에나 러시아의 미사일과 드론 폭탄이 떨어져요.”
안나는 바르샤바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 어머니는 밤새워 여기저기 병원을 돌며 의료 폐기물을 수거한다. 하도 험한 일이라 폴란드인들이 꺼려해서 그동안은 그럭저럭 버텼지만 언어소통 문제 등으로 언제 잘릴지 모른다. 이렇게 어머니가 잠도 못 자고 버는 약간의 돈과 안나가 중국어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고 가끔 받아오는 사례금이 이들 모녀의 수입 전부다. 이 돈으로 숙소 임대료와 전기세 등 공과금을 내고 한 달짜리 정기 교통권을 사면 남는 게 없다. “왜 서유럽처럼 형편이 좋은 다른 나라로 가지 않느냐”는 질문에 안나는 “많은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좀 더 나은 일자리와 보금자리를 찾아 독일로 떠났어요. 그래도 저같이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여기 폴란드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아마도 100만 명은 넘을 걸요?”라고 말했다.
이른바 약소국 정권이 ‘줄타기’ 외교를 잘못하면 나라가 순식간에 거덜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금처럼 장기화하는 데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일단 내부 요인을 먼저 꼽지 않을 수 없다. 우크라이나의 젤린스키 정부는 2019년 5월 정권을 잡자마자 친서방 편중 외교로 급격하게 돌아섰다. 1991년 8월 독립 이후 지난 30여 년간 이전 정부가 어렵사리 유지해 왔던 ‘균형 외교’를 일시에 버린 것이다. 결국엔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군대를 안방까지 끌어들여 러시아에 침략의 빌미를 제공했고, 그 결과 지금 이렇게 수년째 나라를 나락으로 몰아넣고 있다.
책임 있는 정부라면 적어도 지난해 ‘6월 대공세’ 실패와 오늘날 상황에 결과적인 책임이라도 지면서 평화협상에 나서는 게 옳다고 본다. 그런데도 젤렌스키는 정권을 내놓지 않겠다며 대통령 임기가 끝났는데도 계속 세계를 돌며 ‘구걸 외교’를 벌이고 있고, 러시아의 내륙 영토로 쳐들어가는 모험을 감행하면서 항전 의지를 꺾지 않겠다는 태세를 보인다. 그새 민생고 등 우크라이나 내부 사정은 하루가 다르게 악화하고 있다. 방위세를 1.5%에서 5%로 올리고 징수 대상을 확대하면서 올해 112조 원이나 되는 세수 확보를 위해 이리저리 발버둥 친다. 하지만 국가재정은 이미 파탄이 났다. 러시아 쪽도 마찬가지지만, 전쟁 피로감으로 애국주의 물결도 시들해지면서 탈영병이 속출하고, 일부 국민은 병무청 앞에 몰려가 불법 징집 중단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다른 데도 아닌 우크라이나 극우 ‘반데라주의’의 본고장인 서부지역 볼린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윤석열 정부가 젤렌스키 정부를 닮아가는 건 아닌지 아주 많이 걱정된다. 서울 지하철역에서 독도 조형물이 없어지고, 극우 성향의 인사들이 정부 요직과 학술기관에 전진 배치되고, 지나치게 미일 해양 편중 외교가 벌어진다. 그러나 대륙과 등지지 말아야 우리가 살 수 있다. 1990년대 초의 북방정책 이후 지난 30여 년간 축적된 북방 유라시아 대륙과의 모든 관계망과 자산을 버리고 어디를 향해 가겠다는 건가. 균형 외교만이 살 길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우크라이나의 안나 코시악처럼 훗날 미래를 잃고 눈물짓는 일이 없도록 지혜롭게 미리 대비해야 할 것이다.
2024-09-11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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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8·15와 한일 관계의 새 출발점
지난 8월 15일 광복 79주년 기념 경축식은 독립기념관장 인선을 둘러싼 갈등 속에 둘로 쪼개져 치러지는 사상 초유의 일이 펼쳐졌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 지도부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행정안전부가 주관한 행사에, 광복회를 비롯한 상당수 독립운동단체와 더불어민주당은 효창공원 내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행사에 참여했다.
경축식이 이렇게 양분된 근저에는 일제 식인지 지배에 대한 평가와 대한민국 건국일을 둘러싼 진영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
광복절은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주권을 되찾은 기쁨을 함께 나누면서 미래를 생각하는 국민통합의 날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번 광복절은 한국이 두 개로 분열되고 여기에 북한을 더해 한반도가 3개 나라가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오는 날이 돼버렸다.
광복절, 미래 생각하는 국민통합의 날
행사 둘로 쪼개져… 진영 논리 벗어나야
일본은 종전일로 칭하고 피해자인 척
식민지 시기 조선인 차별 반성 필요
자신들이 가해자였음을 인정해야
양국 간 ‘역사 청산’ 비로소 이루어져
한편, 한반도를 식민지배하고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8월 15일을 패전일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날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종전일로 칭한다. 그리고 1963년부터 매년 일본 정부는 동경무도관에서 전몰자 310만 명을 대상으로 ‘전국전몰자추도식’을 실시해오고 있다. 변함없이 올해 추도식도 천황 부부, 총리와 정부 관계자, 그리고 유가족 대표 등 6000여 명의 참석하에 엄중하게 진행되었으며, 이는 일본 전역에 생중계됐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모습으로 국민통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대한제국을 병합한 이후 1945년 8월 15일까지 대일본제국이라는 하나의 국가 틀 안에서 식민지 조선을 철저히 짓밟고 차별했다. 일본은 조선인에게 일본 국적을 부여했다. 그러나 일본 관점에서 내지인은 ‘일본 호적’, 외지인은 ‘조선 호적’으로 구분하고, 이에 대한 변경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1등 신민 일본인, 2등 신민 조선인이라는 차별 정책을 법제화한 것이다.
중일전쟁이 전면화되자 신사참배, 한글사용 금지, 창씨개명 등 조선민족 말살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에 근거해 조선인 남자는 징용과 징병으로, 조선인 여자는 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했다. 그리고 사망자와 부상자 통계가 알려주듯이, 조선인을 일본인보다 위험한 환경에 배치하고, 한층 가혹하게 다루었다.
차별정책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지속됐다. 일본 정부는 귀환 정책에서 조선인을 완전히 제외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대표적 비극이 지난 7일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방한에 앞서 일본 정부가 조선인 승선자 명단의 일부를 공개한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이다. 또 1947년 5월에는 외국인 등록령을 선포해 일본 거주 조선인을 외국인으로 변경시켜 관리했으며, 1953년부터 제정된 일련의 전쟁 희생자 지원 관련 법에 일본인이라는 국적 조항을 달아 조선인 희생자를 배제했다. 그리고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시 한국에 독립 축하금 명목으로 지불한 유상·무상 5억 달러로, 조선인의 개인 청구권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런 일본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미국 정부는 약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을 안보위협으로 간주하고 서부 내륙의 수용소에 강제 억류했다. 그러나 1944년 12월 미국에 충성하는 시민에 대한 구금을 지속할 수 없다는 ‘엔도사건’의 판결이 나오자, 일본과의 전쟁이 한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석방하고 수용소를 폐쇄했다. 그리고 40여 년 뒤인 1988년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차별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생존자에게 각각 2만 달러의 보상을 지급했다. 그런데도 8월 15일이 되면 일본의 방송사는 강제 격리를 당한 일본계 미국인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다.
대다수 한일 양국 국민은 한일 협력의 필요성에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의 지도력에 기댄 관계 개선에는 한계를 느낀다. 정상 교체와 상관없이 앞으로 양국 간 협력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한국은 일본 식민지 지배 평가를 둘러싼 분열적 정쟁을 그쳐야 하며, 대통령은 적어도 일본에 식민지 시기 조선인 차별에 대해 인권 회복의 차원에서 당당히 반성을 요구해야 한다. 일본은 자신들이 가해자였음을 인정하고, 최소한 일제강점기 일본의 신민이었던 조선인에게 행한 차별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역사 청산이라는 물컵은 유린된 조선인들의 인권 회복을 한일 양국이 함께 추진할 때 비로소 가득차게 될 것이다.
2024-09-0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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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디지털 자산 업계, 미 정치권 변화 주시할 때
지난 4월 총선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당분간 국민적 관심을 끌 선거는 없어 보인다. 경기침체 우려와 함께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기준금리 인하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면서 국민의 관심은 해외로 옮겨가고 있다. 특히 미국의 경기 흐름과 대통령 선거 결과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차기 미국 대통령이 누구일지에 대한 다양한 전망과 예측이 오간다. 미국 대선 결과는 우리나라 경제 정책, 외교·군사 정책과 맞물려 있어, 선거를 2개월 앞둔 시점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는 디지털 자산 업계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더 높은 관심을 보인다. 미국 공화당의 트럼프 후보가 일찌감치 디지털 자산에 우호적인 친 크립토 정책으로 방향을 선회함에 따라 그동안 반 크립토 성향을 보여 왔던 민주당에서도 긍정적인 변화가 감지되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을 대신해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해리스는 타협점을 찾으려 하고 있다. 트럼프처럼 명시적으로 친 크립토 정책으로 선회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민주당의 반기업적 이미지를 변화시키기 위해 디지털 자산 업계와의 접촉을 강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면, 해리스가 적어도 디지털 자산에 대한 정책 변화에 대해 고민하는 건 분명해 보인다.
‘반 크립토’ 정책 견지해 온 미국 민주당
최근 대선 앞두고 긍정적 움직임 감지
관련 업계, 규제 파악해 해결 모색 주효
금융 중심 도시 부산, 발전 원한다면
지역 기업인·정치인 서로 만나 대화를
디지털 촉진 위한 시 차원 역할도 기대
이렇게 디지털 자산이 미국 정치권에 변화를 불러온 원인은 다양하다. 먼저 미국의 디지털 자산 업계가 자신들을 얽매는 규제와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이해한 것이다. 공무원들이 자신의 커리어를 고려할 때, 위험을 감수하며 정책을 변화시키기는 어렵다. 반면 정치인이 의제를 설정하고 법률을 제정하거나, 혹은 정권이 설정한 목표라는 명분이 있다면 공무원들도 훨씬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다. 이에 디지털 자산 업계는 복지부동의 공무원을 붙잡고 설득하기보다는 톱다운 방식의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정치인을 공략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와 소송 중인 코인베이스와 리플이 상당한 정치 자금을 기부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런 점에서 미국이나 우리나라 모두 종국적인 민원 해결 방법은 유사해 보인다.
다음으로, 디지털 자산 업계는 해결하고자 하는 이슈를 명확히 하고, 이들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점과 발생할 비용을 비교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게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에는 규제가 모호하거나 발전을 저해한다는 식의 막연한 민원이 주를 이루었고, 세계적인 콘퍼런스에서 진행되는 패널 토론도 불평과 불만의 반복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각 업체가 사업이나 프로젝트 진행에 장애가 되는 구체적인 규제나 정책을 파악해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전체 산업에 대한 규제 완화보다는 특정 사업을 위한 허가나 승인을 얻기 위해 관련 기관과의 대응에 더 큰 비용을 지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디지털 자산 업계는 이제 소수의 개인이 코인 상장을 통해 행운의 자본을 축적하던 시기를 지나 산업 차원에서 거대한 자본이 형성된 상태다. 과거에는 코인이나 토큰을 거래소에 상장시켜 일확천금을 노리는 시기가 있었고, 이로 인해 블록체인과 디지털 자산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이 자리 잡았다. 이러한 오명을 벗기 위해 실물 자산에 기반한 토큰이나 증권 성격을 갖춘 디지털 자산이 등장했다. 이는 디지털 자산이 규제의 범위에 편입되기 위한 거대한 혁신을 의미하며, 이러한 혁신은 파편화된 프로젝트들을 하나의 산업으로 통합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디지털 자산은 각종 실물 자산과 직접 연계되며, 인터넷상에서 무형으로 존재하던 블록체인 정보를 금융 자본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즉, 디지털 자산이 경제적 힘을 갖게 된 것이다.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실물 연계 자산(RWA)과 토큰형 증권(STO)에 자금이 몰리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 정치권은 디지털 자산에 대한 논의에 소극적이다. 디지털 자산이 앞으로 금융 혁신의 중요한 요소로 여겨지고 있음에도 ‘김남국 의원의 코인 사태’ 이후로 오히려 후퇴해 버린 느낌이다. 부산이 블록체인 특구를 발판으로 금융 중심 도시로 발전하고자 한다면, 지역의 정치인들이 먼저 업계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반대로, 기업인들도 규제 기관에 대한 불만만을 토로할 게 아니라, 유권자이자 민원인으로서 정치인들과 만나 적극적으로 의견을 전달하고 그들의 공감을 끌어내야 할 책임이 있다. 나아가, 부산시가 이 둘의 교류를 중개해 디지털 자산 산업의 발전을 촉진할 수 있는 혁신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면 한다.
2024-09-04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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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딥페이크 성범죄’라는 오래된 미래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한 성범죄로 전국이 발칵 뒤집혔다. 인공지능(AI) 기술을 이용해 딥페이크 성 착취 영상물을 공유하는 국내 텔레그램 채널 가입자 규모는 22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 보안 서비스 업체는 ‘2023 딥페이크 현황 보고서’에서 한국 국적의 피해자가 가장 많은 것으로 드러나 한국이 딥페이크 성 착취물에 가장 취약한 국가라고 밝혔다. 정부와 여야가 한목소리로 심각한 범죄에 대한 대책 마련을 다짐했다. 그런데 어쩐지 똑같은 뉴스를 되풀이해서 보는 것만 같다. 불과 5년 전인 2019년, ‘N번방’으로 알려진 텔레그램 성 착취방 참가자 규모가 26만 명이었다.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은 그때에도 우리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각종 대책이 쏟아져 나왔었다. 도대체 이 기시감은 무엇인가.
2021년 전국 최대 규모의 성매매 포털사이트 운영자가 필리핀에서 검거되었다. 사이트 회원 수는 약 70만 명, 후기 글은 98만 개에 달했다. 해당 사이트에서 광고했던 성매매 업소만 2613개로 전국의 고등학교 숫자보다 많다고 알려져 있었다. 업소별 게시판에서는 성 구매 후기가 올라왔고, 각종 성범죄와 불법 촬영을 통해 어떤 식으로 여성을 능욕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낼수록 환호를 받았다. 심지어 조건 만남의 대상이 된 성 착취 피해 아동·청소년과 여성을 다른 남성에게 거래하는 ‘분양’ 게시판도 있었다. 성범죄 후기를 쓰면 오히려 포인트를 적립 받고 업소에서 성 구매 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불법 합성 성 착취물을 만들어 공유하면 환호받고 오히려 크레딧이 적립되어 또 다른 성 착취물에 접근하는 데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는 지금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2016년이 되어서야 폐쇄된 소라넷도 마찬가지였다. 오프라인에서 벌어진 성범죄가 온라인에서는 남성들의 놀이 문화로 당연시되었다. 마치 평행 우주처럼 똑같은 일들이 매번 반복된다. 그 때문에 여성계와 교육계는 각종 성명서와 기자회견을 통해 여성과 아동을 성적 대상화하는 온라인 남성문화를 ‘딥페이크 성범죄’ 사태의 핵심으로 지적하고 있다. 여성을 모멸하고 지인을 능욕하는 폭력을 쾌락이라고 여기고, 이를 집단으로 공유하는 데서 더 큰 쾌락을 얻는 남성문화가 주범이라는 것이다.
남성들만의 커뮤니티에서, 대화방에서, 채널에서 여성과 아동의 신체를 성적 대상화하고 조롱하는 범죄가 놀이처럼 일어난다. 이러한 남성문화는 폭력과 착취를 상업적 행위로 둔갑시켜 돈벌이가 가능하도록 만든다. 수익을 얻는 업자들이 생겨난다. 엄청난 수익이 창출되고, 또다시 범죄를 조장하는 판이 만들어진다. 첨단 AI 기술을 재료 삼고 세계 최고 수준의 보안 플랫폼을 방패 삼은 폭력은 또다시 세계 최대 규모의 성범죄로 드러나고야 만다. 이러한 온라인 남성문화는 어느 날 달나라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온라인 성범죄는 오프라인을 기반으로 한 성범죄다. 폭력적 온라인 남성문화는 우리 사회에서 아주 오랫동안 뿌리내려 상업적 성 착취를 가능하게 했던 남성문화의 온라인 버전인 셈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박찬욱 감독은 한때 자신의 영화사 이름을 ‘NRS(NO 룸살롱)’라 지으려 했다고 한다. 룸살롱 문화는 영화계에만 있었던 관행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처음 성매매방지법이 만들어졌을 때, 성 구매 행위를 강력히 처벌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것이 법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당시 남성 정치인으로부터 “대한민국 남성을 전부 범죄자로 만들 셈이냐”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한다. 성 구매 범죄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남성문화, 여성을 유흥과 소비 거리로 취급하고, 모욕하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남성문화, 그토록 관대한 성매매 문화는 대한민국 사회의 거대한 성 산업을 낳았고, 온라인 환경에서 폭력적 남성문화로 이어졌다.
9월 성매매방지법이 시행된 지 20주년을 맞았다. 은폐된 룸살롱 방 안, 성매매 업소 정보와 성 착취 영상을 공유하는 커뮤니티 게시판, SNS 대화방과 텔레그램 채널에서까지 누군가의 딸이나 여자 형제일 수도 있는 존재에 대한 성적 모욕과 폭력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그 행태는 바뀐 적이 없다. 성매매 문화에 관대한 사회, 유독 이러한 성범죄에만 솜방망이 처벌을 내린 사법부, 성범죄 형량 감경으로 수임료를 올리는 법조인에 이르기까지 국가와 사회의 책임이 더없이 크다. 무엇보다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러한 폭력을 마음대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다는, 이 사회에 만연한 야만적 갑질 사고 패턴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 비극은 계속될 것이다. AI가 기존 데이터를 학습하듯, 딥페이크 성범죄 역시 이 사회를 학습한 결과물이다.
2024-09-02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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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AI시대, 대한민국 관광수도 부산을 향하여!
초등학교 시절, 부산 남천동 광남국민학교에서 서울 서초국민학교로 전학 간 기억이 떠오른다. 서울 아이들이 부산 촌에서 왔다고 놀리는 통에 오기가 나서 “부산도 옛날에는 대한민국 임시수도였고, 바다도 있고…”라면서 언쟁을 벌였다. 갑자기 옛 추억을 소환한 것은 얼마 전 글로컬 교육 테크 세미나 참여를 위해 서울 강남구 선릉역 인근 아마존 웹서비스(AWS) 한국지사를 방문하면서다. 요즘 뜨고 있는 AI 이슈 관련 클라우드 사업의 주요 건물 시스템에 내심 놀라고 말았다. 건물로 들어서니 복도 인테리어나 1층 안내 데스크가 부산에서는 흔치 않은 느낌의 디자인이었다.
온라인으로 세미나 신청을 한 뒤 교육 1일 전 문자로 일정과 출입용 QR코드 주소를 받았다. 대학 입시 업무로, 별로 신경을 못 쓰고 있었는데 이 QR코드에는 모든 환대서비스 절차가 포함되어 있었다. 건물 입구에서 출입증 교환을 위해 신분증을 꺼냈지만, QR코드로 바로 내부 출입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의 코드를 게이트에 들이대는 순간 숫자가 하나 뜨는데 그것은 나를 태우고 교육장으로 올라갈 승강기 번호였다. 출입문을 열고 승강기 근처로 접근하는 동안 승강기는 나를 태우기 위해 내려오고 있었다. 별다른 기다림 없이 바로 고층에 위치한 테크 세미나 교육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철역부터 교육장에 도착할 때까지 그 어떠한 번거로움이나, 나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경험은 AI 관련 교육을 받으러 온 나에게 AI가 우리 실생활에 미친 영향을 그대로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세미나를 주관했던 회사는 미국 기업이었고,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인 방문객들의 첨단기술에 대한 인식 수준이 어느 정도 될 것인가를 유추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있었다. 초연결 시대 기술의 변화는 우리의 생활을 이렇게나 변화시키고 있는데 이런 흐름을 타고 있는 외국인 방문객들을 위해 부산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까를 자문하게 되었다. 지난 7월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대통령실 시민사회 비서관,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서울시장, 교황대사, 교황청 평신도 가정생명부차관 등 주요 인사들과 함께 ‘2027 서울세계청년대회’ 발대식을 개최했다. 2027년 전 세계에서 청년 신자 80만 명이 대한민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이 기회를 잡기 위해 부산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답은 모든 관광인프라는 온라인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AI의 도움을 받아 관광객들의 여정에 걸림돌이 없는 여행을 선사할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이 이 시대의 새로운 관광인프라이기 때문이다. 항공, 호텔, 내국 교통 및 전국 방방곡곡 숨어있는 한식 맛집들과 대한민국, 혹은 특정 지역에서만 가능한 체험 상품을 제대로 진열해 놓아야 한다. 온라인에 익숙한 젊은이들은 서울을 방문하기 훨씬 이전에 대한민국 전역을 살펴보고 자신이 원하는 체류 도시를 찜해 놓고 입국할 것이다. 방문객들은 어디에 머물든 찜해 놓은 지역에서 새로운 알림이 갈 때마다 얼른 그 지역을 방문하고 싶어서 맘이 설렐지도 모른다. 마치 우리가 즐거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잠을 못 이루는 것처럼….
혹시라도 부산시는 2027년인데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거나, 종교 행사이니 종교단체에서 부산시에 협조 요청이 와야 움직이겠다고 생각한다면 큰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종교단체는 자신들의 시스템에 맞추어 종교 행사에 집중하면 그들의 역할과 임무는 끝이다. 굳이 행사에 참석한 청년들이 부산을 구경하든, 경주를 구경하든 괘념할 일이 아니다. 종교단체가 그들의 행사를 통해 모은 청년들을 어떻게 자기 지역에서 남은 시간을 보내게 할지는 각 지역의 문제이다.
온라인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영역의 구분이 없다는 점이다. 벌써 발대식을 한 서울시가 먼저 대대적인 온라인 플랫폼을 만들거나, 이미 교황이 방문했던 해미국제성지가 있는 충청남도가 이런 플랫폼을 만든다면, 부산은 기회를 놓치게 되는 셈이다. 플랫폼을 통한 거대한 수익 창출의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오는 80여만 명 청년들이 지역을 돌며 여행할 경우 지역마다 엄청난 경제적 수익을 거둘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한 무료 도시 홍보까지 생각하면 효과는 대단하다.
이것이 온라인 관광인프라의 힘이다. 온라인 콘텐츠는 ‘누가 먼저 만드는가’가 제일 중요하고, 다음은 ‘어떤 콘텐츠를 싣는가’이다. 지금까지 온라인에서 돌아다니지 않았던 콘텐츠, 부산시가 만든 플랫폼에서만 예약할 수 있는 콘텐츠가 이 관광플랫폼의 승부를 좌우하게 된다. 이제 ‘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이란 말을 더 이상 쓰지 말자. 왜 우리는 늘 제2 도시여야 하는가. 초연결 시대 AI를 활용한 관광플랫폼을 통해 ‘대한민국 제1의 관광도시’ ‘대한민국 관광수도 부산’이 되어보자.
2024-08-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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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MZ세대도 장기근속하고 싶다
1년 미만으로 근무하고 퇴사하는 청년층이 31.8%에 이른다는 통계청 발표가 공개되자마자 MZ세대의 노동문화를 분석하는 기사들이 쏟아졌다. 대부분 경직된 조직 문화에 적응하지 않는 청년들이 많고, 회사 생활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생활 수익을 얻는 청년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등의 분석들이었다.
이같은 MZ세대 기업 이탈 현상은 다만 사기업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닌 듯 보인다. 올해는 매년 늘어났던 공무원 숫자가 줄었다고 한다. 재직 기간 5년 미만 공무원 퇴사자가 2019년 6663명이었는데 지난해 1만 3500명으로 늘었다. 공직은 평생직장과 다름없다던 통념은 이제 옛말에 불과하다. 입사 시험을 통과해 어렵게 들어간 회사라도 자신과 맞지 않으면 과감히 퇴사를 선택하는 것이 요즘 MZ세대다.
MZ세대는 왜 이렇게 끈기가 없을까? 만약 이런 생각이 든다면, 이번엔 MZ를 이해하기 위해 생각의 틀을 과감히 깨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MZ세대가 끈기가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MZ세대가 근속하고 싶어 하는 회사 환경이 그만큼 없다는 뜻일 수 있다. 청년층의 퇴사율에 주목하기 전에 청년들이 어떤 가치관으로 일에 임하는지 그리고 일로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를 살펴봐 주었으면 한다.
사실 MZ세대는 ‘프로이직러’가 아닌 ‘장기근속러’가 되고 싶어 한다. ‘캐치’라는 채용 플랫폼에서 Z세대 취준생 1713명에게 물어본 결과, ‘한 직장 오래 다니기’를 선택한 응답자가 53%를 차지했다. 장기근속러가 되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안정된 직장생활이 가능해서’로 68%를 차지했고, 그 뒤를 이어 ‘이직하면 새롭게 적응해야 해서’가 13%를 차지했다. 퇴사와 이직은 세대를 불문하고 모든 노동자들에게 부담이다. 기존에 하던 일을 정리하고,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일을 가외 시간에 해야 한다.
그럼에도 MZ세대가 이직과 퇴직 과정에 과감히 뛰어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에게 맞는 조직 문화와 일을 찾기 위해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시간을 지불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기 때문이다. 적성이 맞지 않고 조직 문화가 맞지 않아도 한 번 얻은 직장을 계속해서 다니면서 우직한 충성도를 보여주던 과거의 문화와는 달리, 일이나 문화가 자신과 맞지 않으면 그 시간을 견디기보다는 자신과 맞는 곳을 향해 떠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MZ세대의 가치관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회사들은 이런 MZ세대 직원이 원하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을까? 같은 설문조사에서 Z세대에게 장기근속을 가능케 하는 요인을 물었다. 그러자 대답으로 ‘연봉’을 꼽은 이들이 66.0%(복수 응답)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는 ‘워라밸’(40.0%), ‘커리어 발전’(33.0%), ‘상사·동료와의 관계’(29.0%), ‘조직 문화’(18.0%), ‘담당 업무’(18.0%) 순이었다.
통계에서도 알 수 있듯, 사실은 이 회사 저 회사 옮겨 다니는 것보다 한 회사에서 오래 경험을 쌓고 싶어 하는 MZ 사원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느끼면 과감하게 떠나는 세대 역시 MZ세대다. MZ세대의 입맛대로 회사의 모든 규칙과 문화를 재정비하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회사 발전에 청년층 인적 자원이 필수적이므로 청년 사원들이 원하는 요건을 갖추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심층 인터뷰 진행도 좋은 방법이다. 이 회사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인터뷰하고 그 이유에 걸맞은 보상을 지원해 주어 근속률을 높이는 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득이다. 이와 같은 인사개혁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나라보다 일본이 훨씬 앞서 있는데, 일본은 현재 직장 상사를 직접 고를 수 있는 조직 문화를 도입하는 추세라고 한다. 원하지 않는 부서나 지방 근무지로 발령받은 직원들 중 자신을 괴롭히는 동료를 만나 어려움을 겪고 퇴사와 이직을 하는 사례가 발생하자 회사가 그 대처 방안으로 직원이 선호하는 상사의 부서로 옮길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상사를 직접 고를 수 있는 문화를 도입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 노동환경 개혁은 너무나 더디며 그 사이에 많은 인적 자원들이 노동시장을 빠져나가고 있기에, 이 정도의 파격적인 방안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청년층 비경제활동인구가 44만 3000명에 육박하고 구직 의사가 있지만 노동시장의 불합리함으로 일을 하지 않는 인원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MZ세대를 다시 노동시장으로 유인하기 위해서는 개혁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K회사’가 죽었다 깨나도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은 특별한 결단 말이다.
2024-08-26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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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모룡 칼럼] 여름의 낭만이 사라지고 있다
여름이 편한 시절이 끝난 것일까? 지난해에 이어서 폭주하는 더위가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기후 전문가 가운데 앞으로 해를 거듭할수록 30도를 훌쩍 넘는 여름 더위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고 진단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이전과 다른 여름의 장기 지속을 예고한다. 두루 알고 있듯이 더위는 갑자기 찾아오는 현상이 아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서서히 기온을 높이면서 사회를 바꾸어 놓는다. 우선 휴가철이면 북새통을 이루던 해수욕장과 계곡의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산으로 바다로 향하던 피서 행렬도 크게 줄었다. 나무 그늘을 찾고 계곡과 바다의 물을 찾기보다 에어컨이 있는 실내에 머무르는 경향이 커졌다. 집에서 가까운 송정, 해운대, 광안리 등의 해수욕장을 가보더라도 낮보다 밤에 그 주변을 배회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마치 밤이 되어야 활동하는 흡혈귀처럼 어둠이 내릴 즈음에 바닷가를 향하는 행렬이 놀라울 정도이다.
폭주하는 더위 이젠 멈출 기세 안 보여
해 거듭할수록 피할 수 없는 현실 돼
산불에 전염병까지 지구 열탕화 심각
탄소 배출 줄여야 하는 일 인류 직면
기후 변화 염려해도 생활 쉽게 못 바꿔
자기 합리화 속 서서히 생태계는 파멸
확실히 이제 여름은 나들이하기 좋은 계절이 아니다. 낭만을 구가하던 시대가 끝난 듯하다. 하는 수 없이 견디고 이겨 내어야 하는 기후가 되었다. 머잖아 일상과 극한의 구별이 사라지는 일을 맞을 수도 있겠다. 폭염은 홍수와 가뭄, 해수의 상승을 동반하기도 한다. 재난을 일으키고 생태계 전반의 변화를 불러올 수도 있다. 양식장의 고기가 떼죽음하고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병을 얻거나 죽는 사람도 적지 않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폭염은 그저 지나갈 한때의 자연현상에 그치지 않으며 중대한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다. 더 뜨거워지는 바다와 도시를 어떻게 생명유지시스템으로 가꾸어가야 하는가? 단지 더 많은 전력을 끌어다 쓰는 일로 가능한 사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폭염은 우리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40, 50도를 오르내린 세계의 도시도 허다하다. 이런 도시에서 사람들은 여름이 아니라 죽음의 지옥을 맞닥뜨리고 있다. 제프 구델의 보고서 〈폭염 살인〉을 보라. 지난해만 하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폭염 사망자가 50만 명을 넘었고 전력난과 물가 폭등에 시달린 나라나 도시가 한두 곳이 아니다. 슈퍼 산불에서 전염병까지 지구 열탕화의 참상이 매우 심각하며, 좀 과장해 어떤 이는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에 견주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 사회보다 훨씬 심각한 사례가 적지 않은데 결코 강 건너 불구경 거리로 그칠 일은 아닌 듯하다. 지구가 더 더워지고 바다 열기가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빈번한 폭염과 홍수 등이 단순한 예외적 현상으로 그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알고자 하는 마음은 턱없이 부족하다. 오히려 당장 먹고살기 급한 마당에 기후 문제를 고민할 겨를이 없다. 더군다나 설사 이게 탄소 배출이 원인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도 나 한 사람이 이를 해결할 방도가 없다는 당착에 빠지고 만다.
더 뜨거운 지구의 원인 가운데 그 첫째는 말할 필요도 없이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높아진 데 있다. 온실 효과가 더 커지니 전반적인 기온이 상승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로 엘니뇨 현상을 들 수 있다. 이게 나타나면 적도 부근 바다는 평소보다 훨씬 따뜻해지고 심각한 무더위를 유발한다. 세 번째로 지구 온도와 마찬가지로 상승하는 바다가 있다. 바다가 뜨거워지면 빙하가 녹고 해류 흐름이 바뀌어 많은 지역의 기후 변동을 초래한다. 무엇보다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하는 일은 인류가 직면한 급선무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뚜렷한 대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 지식인들조차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망하기 전에 인간 세상이 먼저 끝장날 것이라고 탄식을 늘어놓기도 한다.
사실 알면서도 행하기 어렵고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작동하는 영역이 적지 않다. 습관과 사회적 관행을 따라서 자동으로 움직이고 실행하는 일상화된 행동 양식이 그렇다. 우리가 기후 변화를 염려하는 생각을 품고 있으나 기후 파괴적인 생활 양식을 바꾸기는 어렵다. 당장 에어컨을 끄기가 쉽지 않다. 소비 선택에서 생각과 행동 사이의 괴리와 모순을 피할 수 없다.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이동 수단을 바꾸고 비행기 여행을 줄이거나 육식을 금하고 채식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그만큼 기후 위기 앞에서 진실과 용기를 갖기 어렵다. 자연과학과 기술이 문제를 해결하기를 기대하는 한편, 근본 원인인 경제와 사회 시스템을 어찌할 수 없다고 체념한다. 또한 당장 눈앞에 할 일을 두고 미래를 걱정할 겨를이 없다고 생각한다. 쓰레기 문제를 분리수거 정도의 타협점에서 자기 합리화 기제를 찾는 것처럼 선량한 기후 파괴자가 된다. 이러한 가운데 일상의 몰락과 지구 생태계의 파멸이 서서히 뜨거워지는 더위처럼 다가올 수 있다. 더 이상 여름의 낭만은 없다.
2024-08-21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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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곱버스도 국장이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하루였다. 2024년 8월 5일, 코스피가 8.77% 떨어지면서 역대 최대 하락률을 기록했다. 포인트로는 234.64포인트. 대학 시절 글로벌 금융위기도 겪어봤지만 그때도 전 거래일 대비 200포인트 넘게 떨어진 건 본 적이 없었다. 더 혼란스러운 건 미국 주식이었다. 미국 증시는 한국·일본 증시에 비해 선방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종목들의 하락 폭은 제법 컸다. 그중에는 뭇 ‘서학개미’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엔비디아도 있었다. 고점에서 샀던 까닭에 피해는 더 컸다. 남들은 엔비디아 주식 투자로 몇 배를 벌었다는데 나는 30%를 잃는구나. 참담함에 넋을 놓고 있는데 주식에 정통한 친구가 조언을 해줬다. “어차피 미국 주식은 갖고 있으면 오를 거니까 그냥 놔둬.”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미국 증시도, 엔비디아도 ‘검은 월요일’의 충격을 금방 만회했다. 반면 우리 증시의 회복은 지지부진했다. 올해 초 세계 증시가 급등할 땐 홀로 제자리걸음이더니 떨어질 땐 남들보다 많이 떨어졌다. “이쯤 되면 국장(한국 증시) 투자한 내가 바보”라는 ‘동료 개미’들의 하소연이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코스피와 코스닥이 모두 폭락한 그날, 2030세대에서는 “곱버스도 국장이다”라는 말이 화제가 됐다. 이 말은 최근 국내 주식 투자자들이 곱버스에 많은 투자를 한 걸 두고 한 경제 유튜브 채널의 출연자가 “주식시장은 선함이나 애국심보다는 (자신의) 생존이 먼저”라며 “곱버스도 엄연히 한국 코스피에 등록돼 있는 종목”이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곱버스(KODEX200선물인버스2X)는 ETF(상장지수펀드)의 한 종류다. 코스피200 선물지수인 F-KOSPI200을 -2배로 추종한다. 주가가 1% 하락할 때마다 2%의 수익을 낸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 두 배로 돈을 잃는다. 비유하자면 ‘한국 증시가 망하는 데에 손모가지를 거는’ 격이다.
5일 국내 증시가 대폭락하자 2030 투자자들은 “곱버스도 국장”이라던 그녀에게 열광했다. 누군가에게는 우리나라 증시가 망할 거라는 데 베팅하고 그게 실현되자 열광하는 2030세대의 모습이 낯설기만 할 것이다. “돈 때문에 우리나라 주식시장이 망하길 바라는 거냐”고 혀를 찰 수도 있다. 하지만 청년들이 “곱버스도 국장”이라는 말에 열광했던 사실에는 돈보다 더욱 엄중한 의미가 담겨 있다. 바로 국내 증시를 향한 불신과 분노다.
수출 경기가 역대급 호황이네, 한국 제품이 세계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차지했네 하는 뉴스들은 우리나라 ‘개미’들에게 ‘먼 나라 이웃 나라’ 이야기다. 이상하게 우리나라에선 기업의 온기가 주주에게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자사주 소각 같은 건 하는 건지 마는 건지 모르겠고 배당은 쥐꼬리다. 유럽처럼 산업 전체가 침체되었다면 모를까, 우리 기업들은 세계에서 괄목할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데 주가는 제자리를 맴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속담만큼 우리나라 주식시장을 잘 표현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올해 상반기 국내 개인 투자자의 해외 증시 거래액은 약 284조 원(약 2058억 달러), 국내 증시 거래액(약 3698조 원)의 7.7% 수준이다. 2017년 전까진 이 비율이 1%에도 미치지 못했다. 해외 주식 투자의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해외로 눈을 돌리는 국내 투자자는 계속 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폐지 논란이 뜨겁다. 그들은 연 5000만 원 이상의 금융 투자 소득에 부과되는 금투세의 존폐가 국내 증시에 큰 영향을 끼칠 듯이 말한다. 물론 어느 정도의 영향은 있겠지만, 이런 유의 세제 지원은 부차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청년들이 미국 주식에 열광하는 건 단지 미국 기업의 실적이 좋아서가 아니다. 미국 주식에는 지금 당장은 주가가 하락하더라도 회사가 건실하다면 언젠가 다시 오를 거라는 믿음이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어떤가. 회사가 클만하면 잘나가는 계열사를 떼어 내 새로 상장하고, 멀쩡한 회사 지분을 돌연 부실한 계열사 지분과 엿 바꿔 먹는다. 무기력한 이사회는 대주주가 이런 불합리한 결정을 해도 반발하지 않는다.
정부는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를 해소하기 위해 밸류업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투자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근본적인 원인에는 눈 감으면서 곁가지에 집착하고 있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두산밥캣·두산로보틱스 합병에서 나타났듯, 저평가 우량주에 투자하더라도 언젠가 ‘호구’가 될지 모른다는 불신이 여전히 국내 주식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이 불신을 해소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기업이 밸류업 프로그램에 참여한다고 한들 의미가 없다.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지 않는 한, “한국 증시가 망하는 데에 투자하겠다”는 청년들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2024-08-19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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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부산, 비트코인 자산 축적 앞장서길
트럼프 미국 대선 후보는 ‘비트코인 2024 콘퍼런스’에 참석하여 “비트코인을 미국 정부 차원의 전략적 비축자산으로 선정하고 비축하겠다”라고 말했다. 전략자산이란 부족할 경우 국가의 경제 안보를 위협할 만큼 중요한 자산이라는 뜻이다. 트럼프의 발언은 미국이 향후 비트코인이 원유처럼 국가 운영에 반드시 필요한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전략자산으로서 비축하겠다는 뜻이다.
올해 초 미국증권위원회(SEC)는 미국을 대표하는 금융기관들이 신청한 비트코인 현물상장지수펀드(ETF)의 거래소 상장과 거래를 승인했다. 전 세계 ETF의 20%가 미국에 상장되어 있고, ETF 거래량 80%는 미국에서 발생한다. 이렇게 영향력이 막강한 미국에서 비트코인 ETF를 승인했기 때문에 비트코인 현물 ETF는 사실상 글로벌 승인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로써 비트코인을 향한 미국 정부의 견해가 익명성을 기반으로 범죄에 이용된다고 규제하던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주류 금융시스템에 완벽하게 진입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국 정부는 전체 비트코인 발행량의 1%, 21만 개를 보유하고 있다. 정부는 보유한 물량 대부분을 처분하지 않고 보유하고 있다. 미국 정부의 보유 물량은 2021년 대비하여 3배 이상 증가했다. 이를 볼 때 미국 정부가 비트코인을 국가 전략자산으로 보고, 비축하기 시작했다는 일각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미국에 이어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비트코인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중국 정부의 비트코인 보유량은 약 19만 개이며, 중국 정부의 비트코인 보유량은 매년 꾸준히 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러시아는 푸틴 대통령이 암호화폐 채굴 합법화 법안에 서명하고, 러시아의 블록체인 업체들의 비트코인 채굴을 합법화함으로써 자국의 비트코인 보유량을 늘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이처럼 비트코인을 향한 각국 정부의 보유 경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우리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우리 정부는 미국 정부 및 금융기관과는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다. 국내 규제당국은 비트코인 ETF가 자본시장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국내 자산운용사의 비트코인 현물 ETF 발행을 막고 있다. 관련 법규가 명확하지 않은 탓에 국내 금융기관은 비트코인 관련 금융상품 기획도 관련 시장 진입도 할 수 없다.
보수적인 투자자들은 거래소를 통해서 비트코인을 구매하고 보관하는 것에 부정적이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기관에서 출시한 비트코인 현물 ETF를 통해 안전하게 비트코인에 투자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전 세계의 비트코인 투자 자금은 미국으로 향하고 있다. 비트코인 투자에는 국경이 없다. 우리나라 규제당국에서 막더라도 비트코인에 관심이 있는 국내의 투자자들은 디지털플랫폼을 통해 미국 주식을 사는 것처럼, 미국 금융기관이 출시한 비트코인 현물 ETF 상품에 투자할 수 있다. 국내에서 국내 금융기관의 비트코인 현물 ETF 출시를 막으면 막을수록 국내 투자자들은 미국의 자산운용사에 수수료를 내면서 뉴욕 증시에 상장된 비트코인 현물 ETF에 투자할 수밖에 없다. 국부 유출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금융당국의 상황은 이해한다. 비트코인 현물 ETF는 기존 금융시스템과 비트코인 간의 접점을 뜻한다. 이것은 비트코인의 급격한 가격 변동성이 기존 금융시스템에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의미이다. 금융당국은 기존 금융시스템에 비트코인 현물 ETF가 연결되는 것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비트코인을 전략적 자산으로 준비하는 글로벌 흐름에 역행하며 관련 규제를 지속하는 것은 대한민국 자본시장의 발전을 가로막는 ‘갈라파고스 규제’가 될 소지가 있다. 그런 면에서, 부산 블록체인 특구가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부산 블록체인 특구는 이렇게 기존 금융체계에서 시도하기 어려운 ‘비트코인 현물 ETF’와 같은 블록체인 기반의 혁신적인 디지털 금융상품을 출시하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부산 블록체인 특구에서 국내 자산운용사가 국내의 블록체인 기업과 협력하여 비트코인 현물 ETF 금융상품을 발행하고, 이 금융상품을 부산 디지털자산거래소에 상장하여 국내 투자자들이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도록 한다면, 해외로 빠져나가는 국내의 비트코인 투자자들의 발걸음을 부산으로 돌릴 수 있다. 또한, 국내 디지털 금융시장과 블록체인 생태계의 건전한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국민은 비트코인에 대한 투자 접근성이 크게 개선됨으로써 자연스레 대한민국 국민에 의한 미래의 전략자산 ‘비트코인’ 축적이 시작될 것이다. 부산 디지털자산거래소가 대한민국 전략적 자산 축적의 선봉장 역할을 맡는 셈이다. 대한민국 자산시장과 블록체인 생태계의 발전 그리고 국가 전략자산의 축적을 위해 부산 디지털자산거래소의 ‘비트코인 현물 ETF’ 상장을 촉구한다.
2024-08-1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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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활 잘 쏜다고 ‘전투 민족?’
정말 뜨거운 여름이다. 파리올림픽은 이런 여름을 더 뜨겁게 달궈 놓았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출전한 여러 경기를 새벽까지 보았는데, 압권은 역시 양궁이었다. 한 종목에 걸린 금메달을 싹쓸이하는 일은 전혀 쉽지 않다. 그런데 양궁만이 아니라 펜싱과 사격에서도 낭보가 이어지자, 우리가 원래 활 총 칼과 같은 무기를 잘 다루는 ‘전투 민족’이었나 하는 추측이 나돌았다. 과연 그럴까, 적어도 활은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활을 잘 쏜 인물로는 우선 고구려의 시조 주몽을 들 수 있다. ‘주몽’이라는 말이 활을 잘 쏜다는 뜻이라고 전한다. 한편 직접 활을 잘 쏘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라에 쇠뇌를 만드는 장인이 있었다. 서기 669년, 신라에 온 당나라 사신이 쇠뇌 기술자인 구진천을 본국으로 데리고 가서 나무 쇠뇌를 만들게 하였다. 그런데 30보밖에 날아가지 않았다. 당나라 천자는 신라의 쇠뇌가 1000보를 날아간다고 들었는데 왜 30보밖에 날아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구진천은 재질이 신라의 나무가 아니라서 그렇다고 했고, 천자는 신라의 나무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런데 신라의 나무로 만든 쇠뇌도 신통치 않았다. 60보밖에 나가지 않은 것이다. 구진천은 오는 길에 나무가 습기에 젖어 그런 것 같다고 하자, 천자는 일부러 기술을 숨기려 한다고 여겨 중벌로 위협했다. 그래도 구진천은 끝내 ‘1000보의 쇠뇌’를 만들지 않았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일화이다. 그러나 쇠뇌는 기계식 활이어서 개인 능력이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의외로 우리 역사상 활쏘기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다름 아닌 조선 태조 이성계다. 그의 활 솜씨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듯한데, 조선왕조실록과 용비어천가에는 활과 관련된 일화가 적지 않다. 태조실록 총서를 보면 이성계가 화살 하나로 까마귀 5마리부터 담비 멧돼지 범 등을 잡았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더 극적인 이야기는 왜구와 관련된 것이다. 고려 말, 이성계가 우리나라를 침략한 왜구들과 지리산 아래에서 200보 거리를 두고 대치 중이었다. 왜구 한 명이 등을 돌려 몸을 숙인 채 손으로 엉덩이를 두드리며 욕설을 했다. 이때 태조가 편전(애기살) 단 한 발로 고려군을 조롱하는 그를 쓰러뜨린 것이다. 200보는 지금 기준으로 360m 정도인데, 현재 양궁의 사거리가 70m인 점에 비하면 5배가 넘는다. 왜구들은 화살이 올 수 없는 거리라고 생각해 조롱했을 테지만 이성계의 화살은 어김이 없었다. 당시 왜구의 두목은 아기발도였는데 갑옷과 투구로 온몸을 감싸고 있어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가 퉁두란에게 말하기를 “내가 투구의 정수리를 쏘아 투구를 벗길 것이니, 그대가 즉시 쏘라”고 한 뒤 투구의 정수리를 두 차례나 맞춰 투구를 벗겨 버렸다. 이때 퉁두란이 두목을 쏘아 죽이니 비로소 적군의 기세가 꺾였다고 한다.
이 두 가지 일화는 모두 용비어천가에도 등장한다. 제47장은 “편전(片箭) 한 날에 도이(島夷·섬 도적)가 놀라 자바니, 어늬 구더 병불쇄(兵不碎)하리오”라고 노래하고 있다. 바로 엉덩이를 드러내고 고려 병사들을 조롱한 왜구를 화살 한 발로 제압한 얘기다. 뒷부분은 “어떤 적이 굳건하여 분쇄되지 않겠는가”라는 뜻이다.
52장 역시 이성계가 왜장의 투구를 벗긴 상황을 “투구 아니 밧기시면 나랏 소민(小民)을 사라시리잇가”라고 노래하고 있다. 지리산 아래에서 벌어진 이 사건을 우리는 황산대첩으로 기억하고 있다. 적장 아기발도는 15~16세의 젊은 나이였는데도 왜구의 우두머리였다. ‘발도’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붉은 영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영웅’이라는 뜻이다. 온몸을 갑옷으로 두른 적장에게 활은 소용이 없는 듯했지만 이성계는 적장의 투구 위에 장식으로 달린 뭉뚝한 부분을 두 번이나 명중시켜 결국 투구를 벗겨냈고, 이성계와 의형제이자 탁월한 궁사인 퉁두란이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적장을 죽일 수 있었다.
지금도 그 전투의 현장 근처에 황산대첩비가 있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뒤 이 비석을 조각조각 부수어 땅에 묻어버렸다. 왜구를 진압한 이성계가 바로 자기들이 식민지로 만든 조선의 시조였던 사실이 불편했기 때문일 것이다. 광복 이후 비석을 새로 세우고 일제가 부숴버린 원래 비석도 한쪽에 모아두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결코 전투 민족이 아니다. 국토를 침략한 적들을 막기 위해서 무기를 들었을 뿐이다. 지금 다시 동아시아는 격동의 시기를 맞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온 국민이 활쏘기를 사회체육으로 생활화해 우리의 국토를 지키려는 의욕에 불타고 있다는 사실을 주변 나라에 보여주면 어떨까. 뜨거운 여름에 떠오른 생각이다.
2024-08-12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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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AI, 인간 변호사를 대체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AI)의 발달로 사라지는 직업에 변호사가 상위권에 꼽히고 있다. ‘제 살 깎아 먹기’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시대를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인지, 변호사업계에서도 요즘 AI 개발에 분주하다. 밥줄을 위협하는 AI를 애써 외면하고 싶었지만, 혼자 도태될 수 없어서 변호사 무료 체험으로 제공되는 AI 프로그램을 이용해 봤다. 사례를 넣고 유사한 판례를 요청하니, 놀라운 속도로 사안을 요약하고 하급심 관련 판례와 법리를 찾아주었다. 확실히 리서치하는 시간을 현저히 줄여 줘서 고맙긴 한데, 향후 몇 년 뒤 모습은 어떨지 아찔해진다. 아직은 데이터 학습이 덜 된 탓인지 AI는 실제 질문과는 관련 없는 판례를 찾기도 하고, 잘못 해석하는 사례도 있어 그대로 믿고 활용할 수는 없는 단계였다.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 이후 10년도 되지 않아 법조계까지 파고들었다. 법원 행정처는 재판 지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판 지연 도우미 AI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경찰청도 시민이 AI로 고소장을 쉽게 작성할 수 있는 시스템을 검토 중이다. 법조계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일부 대형 로펌은 벌써 ‘AI 변호사’를 출시하고 일반인에게 AI로 무료 법률 상담을 제공하자, 대한변호사협회는 변호사법 위반으로 징계 절차에 착수했다.
변호사법에는 ‘변호사가 아닌 자는 변호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업무를 통하여 보수나 그 밖의 이익을 분배받아서는 안 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변호사가 아닌 AI가 변호사의 일을 해서 어떤 형태로든 수익을 얻는 것은 위법이라는 취지다. 또한 AI를 훈련하는 과정에서 과거 로펌이 처리했던 사건들이 사용되어 의뢰인의 민감한 개인정보가 유출될 우려가 있다고 보고 있다. 해당 로펌에서는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했고, 광고를 통한 이익도 없다면서 즉각 반발에 나섰는데, 직역을 수호하려는 변협과의 갈등이 제2의 ‘로톡’ 사태로 번질 분위기다.
AI를 적극 활용하고 있는 해외 법조계에서도 인간 변호사와 AI 간의 갈등은 첨예하다. 최근 미국에서는 변호사가 챗GPT를 활용해 허위 판례를 바탕으로 한 의견서를 법원에 제출해 1년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다. AI가 실제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허위로 답변하는 환각 현상(Hallucination)은 대다수 생성형 AI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로 꼽힌다.
파리 변호사회도 AI가 없는 법 조항을 만들어 인용하고 있어, 그 위험성에 비 변호사의 법률 상담은 불법이라며 서비스 중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한편, 일본에서는 AI 서비스 제공자가 돈을 받으면 위법이지만, 변호사를 상대로는 유료 서비스를 제공해도 된다며 법무성이 직접 가이드라인을 내놓으며 AI 법률 서비스에 적극 대응하는 분위기다.
생활 곳곳에 퍼져 있는 AI 발달 속도를 보면, 법조계도 더 이상 변호사법 규정만으로 이를 제지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변호사 생활을 돌이켜 보면, 판례를 검색하고 서류를 작성하는 일보다는 의뢰인과 마주 앉아 소통하고 공감하고, 같이 욕도 하면서 듣는 의뢰인의 말 한마디가 사건의 해결 실마리가 되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의뢰인과 신뢰를 구축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변호사 업무였다.
앞으로는 반복적이고 시간이 소요되는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AI 서비스는 적극적으로 활용하되, 인간 변호사로서 할 수 있는 영역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AI 기술이 고도화되어 리걸테크의 다양한 서비스가 나올수록 현행 변호사법 저촉의 문제가 있다 보니, 그동안 AI 개발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의 흐름에 맞게 국내의 입법적인 보완이 절실한 상황이다.
얼마 전 유럽연합(EU)은 세계 최초로 제정한 포괄적 AI 규제법을 발효했다. EU AI 법의 제반 규정은 부정적 영향을 줄 위험이 높을수록 더 엄격한 규제가 적용되도록 구성됐는데, AI 시스템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돕기 위한 것임을 전제하고 있고,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AI 기술 활용은 금지됨을 골자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오랫동안 고민해 온 만큼 관련 법률의 제정을 미룰 게 아니라, EU의 포괄적 AI 규제 법의 내용을 참조하여, 개인정보 보호 등 제반 문제를 보완하고 IT 강국으로서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나아가야 한다.
AI가 사람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고, ‘AI를 장착한 인간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대체할 것’이라는 지적처럼, 변호사 업무에 AI를 활용하여 효율성을 높이되, AI 답변에는 허위 정보도 많은 만큼, 결과물을 검증할 수 있는 법적 지식과 능력은 필수로 갖추어야 할 것이다. 도구는 내 입맛에 맞게 도구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2024-08-0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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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공간이 금이 되는 시대
‘시간이 금’이라는 말은 친숙하다. 그렇다면 공간도 금일까. 근대에 이르러 인간은 자신의 시간을 소중한 금처럼 소유하고 처분할 수 있는 재화 같은 성격으로 인식하게 된 것 같다. 이는 개인의 자유와 유관하며 시간이 공간보다 사적임을 보여준다.
공간이 보다 정태적인 존재에 가깝다면 시간은 보다 동태적인 경험에 가깝다. 인터넷에서 마주하는 공간과 시간을 떠올려보면 좀 더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유튜브에서 영상 한 편을 본다고 상상해 보자. 우리는 공통적으로 유튜브라는 플랫폼에 접속하여, 즉 모두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원하는 콘텐츠를 시청하며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여기서 우리는 공간이 보다 공적이고 시간이 보다 사적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동시에 공간은 하나의 형식(폼)이고 시간은 하나의 구성(콘텐츠)과 연결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예컨대 보통 사람이라고 하면 어떠한 외형을 가지고 있다는 대다수 사람들 간 공유하는 일정한 형상을 떠올림과 동시에 구체적인 구성은 개개인마다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닌다. 또한 그러한 내외부적 개성을 알아내는 일에는 경험, 즉 시간이 소요된다.
공공성은 건축의 필연적 속성
만들어지는 공간 완성도만큼
체험하는 시간적 구성도 중요
세계적 도시로 도약하기 위한
부산 특별건축구역 시범사업
공동체 위한 성과로 이어져야
이제 2×2 행렬을 하나 그릴 수 있다. 공적인 공간과 시간,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시간,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시간, 사적인 공간과 시간. 범위를 하나의 물리적 도시로 상정한다면 공간과 시간을 모두 공적으로 지배하는 대표적인 곳에는 학교, 경찰서, 군부대와 같이 공권력이 관리하는 장소들이 놓인다. 반면 사적인 공간에 사적인 시간은 주택이나 호텔과 같은 가장 개인적인 장소다. 공적인 공간에 사적인 시간은 공원, 도서관, 미술관, 박물관, 기차역, 체육시설 등이 자리하고 진입장벽 없거나 낮은 공간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쇼핑몰과 같은 상업시설도 포함될 수 있다. 함께 모이지만 그 시간 경험이 강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한편 사적인 공간에 공적인 시간은 회사나 일터처럼 자유로운 공간에 지시된 시간이 주어진다.
일반적으로 도시는 네 카테고리를 모두 포괄하는 복합적인 지역으로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 하지만 정치 혹은 지방행정의 역할을 고려하면 우선순위를 고민해 볼 수는 있다. 공공성을 갖는 공적인 공간들이 사적인 공간보다 우선할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적인 시간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방향이다. 아마도 이 조합이 헌법 1조가 명시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조문처럼 공간의 공화주의와 시간의 민주주의가 결합한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건축은 공간을 만드는 일이기에 필연적으로 공공성을 지닌다. 공유하는 공간에 들어선 건축물은 도시의 공공적인 ‘풍경’을 구성하기 때문에 경제학에서 말하는 외부효과가 본래적이다. 예컨대 세계적인 건축가가 디자인해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인정받는 아파트단지가 있다면 아파트를 쳐다보며 느끼는 아름다움만으로도 긍정적 외부효과를 불러온다. 그러나 아파트 안에서의 경험, 즉 사적인 시간은 공유되지 않기 때문에 외부효과는 짧고 제한적이다.
부산시가 발표한 특별건축구역 시범사업 추진이 건축예술을 통한 공공성이라는 큰 비전을 가진 것처럼 보임과 동시에 비판받는 부분은 지자체가 아파트 재개발 사업에만 힘을 쏟냐는 것이다. 세계적인 도시로 도약하기 위해 내딛는 큰 발걸음이라고 하지만 향후에는 보다 많은 시민들이 실제 도시를 경험하는 현장에서 아름다움을 오래 마주할 수 있는 공간들도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예컨대 일본 도쿄 시부야구에서 자국의 유명 건축가 16명을 초청해 각자 개성이 담긴 건축디자인으로 진행한 공공화장실 프로젝트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물론 공간이라는 외형이 다가 아니다. 예컨대 미래 랜드마크로 기대되는 부산 북항의 오페라하우스 역시 그저 감탄하고 사진 한번 찍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가치가 지속되려면 공간의 완성만큼이나 체험하고 머무는 시간의 구성이 중요하다. 얼마나 자주 찾고 머무를 것인지의 콘텐츠는 내부의 공연이기도 하지만 외부에 아름답게 조성되어야 할 산책로나 공원과 같은 공공 공간이 될 수 있다.
공간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에 있다. 이는 어쩌면 아인슈타인이 이미 상대성 이론을 통해 시간과 공간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통합된 시공간 연속체임을 밝혀낸 것과도 연결해 볼 수 있다. 사회와 개인, 나아가 공익과 사익이 마치 시간과 공간이 서로 얽힌 연속체처럼 상호 결합한 관계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기후변화의 위기 속 지구라는 행성을 공유하고 코로나 시기에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고 날로 전쟁과 테러가 빈번해지는 환경에서 시간만큼 공간이 ‘금’이 되어가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024-08-0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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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동유럽 마이크로 전공 이야기
대학교육을 혁신하자는 목소리가 교육계 안팎에서 최근 몇 년 사이에 유난히 높아졌다. 특히 지방 대학이 문제다. 1970~80년대의 고도성장기에 무분별하게 설립허가를 내준 탓에 지방마다 대학이 너무 많은 데다, 6~17세의 학령인구는 갈수록 줄어든다. 사람, 산업, 기술의 수도권 집중은 심해져만 가고, 신산업을 중심으로 사회와 교육 사이의 울타리도 없어져 간다. 이런 시대에 전통적인 학과 단위의 교육과정만으로 대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여러 고민과 대안이 필요해졌다. 그중의 하나가 마이크로 전공이다. 전공과 전공 사이의 벽을 허물고 시대 요구에 맞게 프로젝트식의 융합 교육을 하자는 주장이다. 대학교육이라고 대학에만 맡겨두지 말고 지자체와 지역 사회가 대학교육의 주체로 같이 나서자는 제안이다. 교육과정을 유연화하여 학교의 특성에 맞는 6~12학점의 모듈식 전공을 교육과정에 여럿 집어넣고, 융복합 교육과 함께 특정 분야의 전공능력을 고도화하자는 시도이다. 이런 실험은 덕성여대, 고려대, 한양대 등 서울에서 오히려 먼저 시작하여 점차 지방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위기 처한 대학교육 극복 위해
전공 유연화·지역 사회 동참 등
마이크로 전공 유력하게 부상
부산외대 ‘동유럽’ 과정 첫 개설
물류·문화 협력 가능성 등 모색
지역 사회 국제경쟁력에도 도움
부산외대도 올 1학기에 ‘부산-동유럽 물류 및 문화 전공’이라는 새로운 마이크로 전공 과정을 개설하였다. 교과목 개발과 수업 진행도 대학 내부에 맡기지 않고, 해당 분야의 외부 전문기관에 주었다. 2학년 이상 학생이면 제1 전공이 무엇이든지 누구나 등록할 수 있었는데, 올해 첫 모집에는 국제마케팅, 튀르키예 중앙아시아전공, 외교 국제개발, 사회체육, 상담심리, 스페인어, 경영학과 등에서 19명의 학생이 모였다. 수업은 강의식이 아니라 대부분 프로젝트 수행식으로 진행된다. 학생들은 우크라이나 정부 자료와 부산·경남의 기업 능력 등을 분석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난 뒤 흑해의 오데사항 재건사업 등에 부산 기업이 어떻게 참여하면 좋을지 등을 고민하였다. 그리고 전쟁으로 달라진 동유럽의 새로운 정세와 여러 현안을 조사하고 토론하며 지역 사정을 심도 있게 공부하였다. 동유럽 마이크로 전공은 현장 수업을 필수로 한다. 한 학기 동안 프로젝트 수업을 통하여 체득한 지식은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반드시 동유럽 현지에서 확인하고 보완하도록 교육과정이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올해 1학기 동유럽 마이크로 전공 과정에서 8명을 선발, 이번 여름 방학 때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10일간 다녀왔다. 마이크로 과정 개설 이후 첫 ‘동유럽 원정’이어서 오데사 등 우크라이나 본토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거기가 아직 전쟁 중이라서 우크라이나 영내로 직접 들어가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폴란드, 헝가리,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벨라루스, 러시아 등 6개국 가운데 면밀한 조사를 거쳐 바르샤바 SWPS(사회심리 및 인문학)대학을 협력 대학으로 선택하였다. 우선, 폴란드에 우크라이나 난민이 가장 많이 들어와 있고, 폴란드 정부가 우크라이나 문제 해결에 동유럽에서 가장 적극적인 데다, 사전 소통 과정에서 SWPS대학 아시아학부 교수와 학생들이 우리의 의도에 가장 적극적으로 임했기 때문이다.
우리 학생들은 ‘동유럽 현지 체험 및 해외 봉사’라는 마이크로 전공과목의 성격과 목적에 맞게 오전에는 SWPS대학 312호 강의실에서 폴란드 학생들에게 한국 청년들의 언어와 문화를 놀이와 퀴즈, 각종 체험 등의 방식으로 가르치고, 오후에는 폴란드 학생들과 1 대 1로 짝을 이루어 팀 과제를 수행하러 나갔다. 올해의 조사 과제는 ‘폴란드와 한국의 전통의상 착용 문화 비교’ ‘동유럽과 한국 청년들의 SNS 선호도 차이’ ‘한국 전통주의 동유럽 마케팅 가능성’ ‘폴란드에서 인기 있는 스포츠 종목과 스포츠 스타’ 등 네 개인데, 이들 또한 한국에서의 1학기 교실 수업 중에 학생들 스스로 투표를 거쳐 뽑은 과제였다. 학생들은 이외에 현지에서 우크라이나 난민 문제,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달라져 가는 대(對) 우크라이나 인식 변화 등을 조사하고, 결과물을 학교의 융합교육센터에 보고서와 영상물로 보고하였다. 이 자료들은 다음 학기의 동유럽 마이크로 전공 수강생들에게 참고자료로 환원된다.
SWPS대학 도미니크 교수의 말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동유럽에 관심이 쏠리면서 최근 폴란드 지방 도시에 공장이나 회사를 세우는 한국 기업들이 부쩍 늘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국내외에서 프로젝트 수업, 교육 봉사, 현장체험 등을 통해서 길러진 청년들의 동유럽 대처 능력은 앞으로 부산 기업의 동유럽 진출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지금의 시대를 가리켜 지-산-학 협력 시대라고 한다. 지방 대학을 살리고 교육혁신도 이루며 지역 사회의 국제경쟁력도 보강하는 ‘꿩 먹고 알 먹기’ 식 시도에 지자체, 기업, 대학의 관심이 지금보다 더 모였으면 좋겠다.
2024-07-3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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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미국 대선과 북한의 '상대적 무관심'
현직 대통령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와 전직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 간 대결로 시작된 미국 대선이 사실상 카멀라 해리스와 트럼프의 맞대결로 확정됐다. “해리스는 좌파 미치광이”, “트럼프 같은 극단주의자”라는 발언들이 상징하듯, 두 후보는 내전과도 같은 대결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누가 승리하든 오는 11월 5일 탄생할 미국의 제47대 대통령은 초강대국 수장으로서 국제사회에서 막강한 존재감을 발휘할 것이며, 외교 정책은 변함없이 한반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국은 물론 북한도 미국 대선에 초미의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나 북한은 지난 7월 23일 조선중앙통신 논평을 통해 미국 대선 결과에 상관없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는 미 대통령 후보와 어떠한 연결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북한 나름의 ‘체면’ 지키기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전쟁 이래 70여 년간 미 제국주의 타도를 끊임없이 외쳐왔으며, 지난 30여 년 동안은 핵무기를 수단으로 미국에 관계 개선을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한은 해리스보다는 트럼프의 당선을 선호할 가능성이 높다. 해리스는 바이든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역임하며 바이든의 대북 확장 억제 정책을 계승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트럼프는 미국 최초로 2018년과 2019년에 연달아 김정은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개최한 바 있으며, 공화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는 백악관으로 복귀하면 북한과의 실질적인 진전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내심 북한은 재선에 성공한 트럼프가 ‘과감한 빅딜 협상’을 통해 핵보유국의 지위를 인정해 주길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미국 대통령이 누구이든, 북한에 있어 미국과의 관계 개선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절박함은 점차 감소하고 있다. 첫 번째 이유는 반복된 미국과의 협상 실패이다. 1994년 북한은 핵 개발을 포기하고, 미국은 경수로 2기를 제공한다는 ‘제네바 합의’를 체결했으나, 미 대통령이 민주당 빌 클린턴에서 공화당 조지 W 부시로 바뀌면서 파기됐다. 또 2019년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과의 이른바 ‘세기의 담판’은 황망한 결과로 끝났다. 이후 북한은 ‘새로운 길’을 천명한다. 안보는 핵으로, 경제는 자력 갱생으로, 외교는 중국과 러시아 중심으로 나가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를 배경으로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에도 성공하고 있다. 이는 북미 수교의 절박함을 감소시키는 두 번째 이유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옛 소련은 1948년 북한 정권 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한국전쟁을 지원하는 등 후견인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소련은 1990년 9월 북한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국교를 수립했다. 북한 입장에서는 배신이었다. 이후 악화 일로를 걷던 양국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한 계기는 그로부터 10년 뒤인 2000년 7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이었다. 양국은 세기적 혼란과 경제적 질곡을 경험한 동병상련 관계였다.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 북러 관계는 긴밀해졌다.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두 달 후인 2019년 4월 김정은 위원장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이 한 풀 꺾인 2023년 9월에는 러시아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제2차 정상회담을 행했다. 또 올해 6월에는 푸틴이 러시아 최고지도자로서 처음 북한을 방문해 제3차 정상회담을 행하고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에 서명했다. 북한과 러시아가 정치, 경제, 군사, 외교면에서 매우 강력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김정은과 푸틴은 세 차례 정상회담을 통해 정상 간 유대를 탄탄히 했으며, 북러 고위급 전략대화를 개최하는 등 군사적 협력에 필요한 채널도 마련했다. 또 북한은 러시아에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사용할 탄약, 로켓, 미사일을 제공하고, 러시아는 이에 대한 대가로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금액을 현금뿐만 아니라 북한 경제에 필요한 정유, 가스, 식량 등으로 지급하고 있다. 한마디로 경제 관계가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러시아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동결해 온 북한 자산 중 약 900만 달러를 해제해 북한에 넘겨주었고, 유엔 상임이사국으로서의 거부권을 행사해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 이행을 감시하는 유엔 전문가 패널 활동을 종료시켰다. 이렇듯 러시아는 직간접적으로 북한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북한은 러시아를 지렛대로 미국과의 관계가 개선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온 핵무기와 경제 재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손에 넣고자 한다. 대선이 끝난 후 미국이 마주할 북한은 이전보다 담대해지고 힘을 얻은 북한일 것이다. 한국 외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24-07-2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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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가상자산 투자자 위한 법·인프라 필요하다
지난 19일 비로소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이 시행됐다. 수년간의 입법 심의, 1년간의 유예 기간을 거쳐 드디어 가상자산에 관한 별도의 법률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상자산거래소에 예치한 고객의 돈을 보호하기 위해 거래소는 별도로 신탁해 관리하고 그 예치금에 대한 이용료, 즉 이자도 지급해야 한다. 거래소가 파산하더라도 거래소에 예치해 둔 돈은 보호받게 된다. 거래소에서 횡행하던 시세조종, 내부자거래 등 각종 불공정거래 행위도 처벌 대상이 되어 보다 투명하고 공정한 가상자산 거래가 기대된다.
그러나 이 법의 보호는 여기까지이다. 가상자산거래소에서 가장 중요한 가상자산은 보호 대상에서 빠져 있다. 거래소가 투자자의 가상자산을 분리 보관하도록 하고 있을 뿐 그 외 다른 보호 장치는 없다. 주식이나 개인 간 금융(P2P) 투자자 보호 관련 법과 비교해도 보호 수준은 미흡하다. 그래서인지 법률의 명칭도 가상자산‘투자자’보호법이 아니라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이다. 정부는 아직 가상자산을 투자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있다. 가상자산이 이미 투자의 대상이 되어 있는 현실과 괴리된 상황이다. 적극적인 입법과 규율을 통한 체계화보다는 가상자산 투자와 관련한 위험과 책임은 국민이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 돼버린 셈이다. 도박처럼 금지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규제권 내로 편입시키지도 않고 있다. 그래서 투자자를 투자자로 부르지 못하고 이용자로 부를 수밖에 없는 ‘홍길동’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한편, 해외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는가. 2022년 글로벌 5대 거래소였던 FTX가 파산하면서 고객들의 가상자산이 보호받지 못하게 되자, 거래소의 막강한 기능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자리 잡게 됐다. 그래서 거래소가 예치하고 있는 투자자들의 가상자산을 제3기관에 신탁해 보관하는 것이 글로벌 트렌드가 됐다. 특히, 보유 단위가 큰 기관투자자나 자산관리인 등 법인 고객들은 거래소에 자산을 맡기지 않고 제삼자 위탁기관인 커스터디에 보관하는 것이 원칙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이런 흐름과는 동떨어져 있다. 대표적인 투자 대상인 주식은 투자자-증권사(중개)-거래소(시장)-예탁원(보관)-지급(은행) 순으로 분권화돼 기능별 전문화가 이루어져 있다. 가상자산의 경우, 이런 모든 기능이 거래소에 집중돼 있는 실정이고, 이번에 시행된 법은 거래소의 시장 기능에만 규제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왜 이런 미흡한 법률이 시행되게 되었는지 아쉬움이 크다. 한두 개 대형 거래소가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한 현 상황은 이 법에 의해 독과점이 보장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다. 자유경쟁을 촉진해 독과점의 폐해를 없애야 할 정부가 관리 편의를 위해 작금의 독과점 상황을 묵인 내지 방관하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 금융당국 입장에서는 입법권자인 국회에 책임을 돌릴지 모르겠지만, 정부의 입법제안권에 비춰 보면 금융당국의 소극적인 태도가 오히려 가상자산 시장을 더욱 왜곡시키지 않을지 심히 우려된다.
지금 한국에는 가상자산 투자자를 위한 법과 인프라가 없다. 법은 경제, 사회 현상에 후행할 수밖에 없다. 여야 간 극심한 대치 정국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가상자산 투자자를 위한 법률이 제때 마련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블록체인 기술이 적용되는 토큰증권 관련 입법이 불발되면서 수많은 업체가 유탄을 맞았던 사례를 보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법이나 규제의 제정보다 인프라 구축이 시급하고 현실적인 대안으로 보인다. 그러한 차원에서 필자는 블록체인 핵심 도시인 부산에서 가상자산 관련 인프라 구축을 진행하면 관련 산업을 선도해 나갈 기회가 될 것으로 본다. 부산시는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돼 있다. 부산시는 매년 규제 특례 대상이 될 만한 사업을 선정해 중앙 정부에 규제 특례 심사 신청을 진행하고 있다. 다만, 부산시에 규제 특례 부여에 대한 승인 권한이 없어 제도상 한계가 있다.
부산시가 반드시 가상자산과 관련해서 규제 특례 제도를 활용할 필요는 없다. 부산디지털자산거래소(BDX)를 통해 가상자산 시장의 모범이 되는 인프라 구조를 구현해 보이면 된다. 민간사업인 BDX가 중심이 돼 여러 인프라 기업과 손을 맞잡고 기존 거래소가 갖는 독점적 기능을 분권화, 전문화한 생태계를 선보인다면 정부 규제가 그에 맞춰 성문화될 수 있고, 규제자유특구로서 새로운 규율 체계를 만들어 나가는 길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 과정에서 부산시는 주도자는 아니지만 촉진자로서 역할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가상자산이 블록체인의 전부는 아니지만 블록체인에 관한 관심과 자본을 집중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임에는 틀림이 없다.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이 아니라 가상자산투자자보호법 제정의 밀알이 되는 사례가 부산에서 시작되기를 기대해 본다.
2024-07-24 [17: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