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기의 미술 미학 이야기] 이루지 못한 사랑, 천상의 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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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홀리데이의 '단테와 베아트리체'

헨리 홀리데이 '단테와 베아트리체', 1883, 워커 미술관. 리버풀 국립박물관 제공 헨리 홀리데이 '단테와 베아트리체', 1883, 워커 미술관. 리버풀 국립박물관 제공

녹색 망토에 붉은 모자를 쓴 젊은 남자는 자신 쪽으로 걸어오는 여인 중에 가운데 여인을 응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인은 시선을 돌린 채 그를 지나친다. 오른쪽 여인은 고개를 돌려 남자를 쳐다보며 뒤따르는 여인은 안타까운 눈길을 보낸다. 이 짧은 순간의 응시와 외면, 이 단절의 순간이 한 편의 시가 되고 한 권의 책이 되고, 마침내 천상의 서사로 승화된다. 이것은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이야기이며, 헨리 홀리데이의 1883년 작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포착한 결정적 순간이다.

이 그림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가 보이는 곳에서 단테가 베아트리체와 스치듯 마주치는 장면을 묘사한다. 베아트리체는 그를 본체만체 지나가고, 단테는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는다. 단 한 번의 응시, 단 한 번의 침묵이 평생의 사랑을 결정짓는다. 단테는 이 짧은 만남을 바탕으로 〈신생〉과 〈신곡〉이라는 거대한 서사를 창조한다. 단절은 종말이 아니라 출발이었다.

현실의 베아트리체는 2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단테는 정치적 동맹을 위해 제마 도마티라는 여성과 결혼했지만, 마음속에서 베아트리체는 단 한 번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시인이 되는 이유였고,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존재였다. 그에게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었고, 그리움은 결핍이 아니라 영적 비상(飛翔)의 바탕이 되었다.

홀리데이는 이 장면을 라파엘 전파의 감수성으로 섬세하게 풀어낸다. 베아트리체는 황금빛 옷을 입고, 두 명의 여인과 함께 고요하게 걷는다. 단테는 붉은 신발과 어두운 망토를 걸치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그녀를 바라본다. 두 사람의 거리는 불과 몇 걸음이지만, 침묵의 깊이는 우주의 거리만큼 멀다. 이 거리를 넘어 둘을 연결한 것은 사랑의 사후적 형상, 즉 문학과 예술이다.

예술이란 소유할 수 없는 것, 가닿지 못하는 것에 대한 가장 섬세한 응답이지 않을까? 단테는 사랑하는 이와 하나 되고자 하는 욕망, 현실에서 이룰 수 없었던 욕망, 그 사랑을 언어로, 구조로, 신학적 질서로 재현했다. 사랑은 영혼의 지형을 변화시키고, 예술은 그 지형의 지도를 그린다. 그래서 단테의 베아트리체는 한 여인의 초상을 넘어, 잃어버린 것들을 견디고 기억하는 방식, 즉 예술의 존재 이유 그 자체가 된다.

홀리데이의 이 그림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다. 이것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어떻게 미학적 승화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시각적 철학이다. 그리움이 없었다면 단테는 시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술은 상실로부터 탄생한다. 그리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상실이야말로, 인간을 각성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미술평론가·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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