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선으로] 대접받고 싶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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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 연세대학교 글로벌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어떤 폭력은 아주 사소한 마음, 대접받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한다. 누군가 내 성욕을 잘 대접해줬으면 하는 마음. 누군가 나를 무시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페미니스트들은 그것을 남성성으로 정의해 부르지만, 그것이 유독 남성에게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이미 벌어진 사건들 가운데 남성이 남성성에 매료될 확률이 유달리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여성과 퀴어라고 해서 유독한 남성성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 그들도 때로는 남들에게 부당한 대접을 원한다.

대접받고자 하는 마음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내가 생각하는 대접이 남에게 하나도 안 당연함을 깨닫는 것이다. 대접은 누구에게 맡겨놓은 것이 아니고, 대접받을 큰 이유가 없으면 대접을 받지 않으면 된다. 대접을 원하는 사람은 종종 마음 둘 곳 없고, 그 사실을 내가 함부로 정한 각본에 따라 남들이 눈치껏 어루만져주길 원한다. 그에 대한 해답도 실은 간단하다. 마음 둘 곳이 없으면, 아무 데도 두지 말고 그것을 들고 있으면 된다. 문제는 사람이 그런 명징한 해답과 논리만으로는 마음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접받고 싶은 마음도 마음이다. 다만 그 마음은 남보다 나와 대화를 먼저 나누는 편이 좋다. 만물에게 한번도 바람 쏘여본 적 없는 마음일수록 극단으로 치닫기 쉽다. 그런 마음에 한번 사로잡히면 온갖 섭섭함이 내 몸을 휘감는다. 나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을 남에게 내보였을 때, 사람은 그 사실이 부끄러워 이 모든 걸 ‘잘못 건드린’ 남에게, 실은 나에게 거듭 화를 낸다.

그럴 때는 그 감정을 SNS 대신 아무도 보지 않는 노트에 손글씨로 한번 눌러써보는 것이 좋다. 내 노트에 한번 쓴 감정은 어떻게든 이전과는 다른 결을 갖게 되고, 글자로 표현된 그것이 내가 보기에 얼마나 예쁘고 추한지 가늠하기 쉬워진다. 어떤 마음이든지 그럴 만한 일리는 있고, 그 일리와 더불어 하나도 일리가 없는 마음을 서로 구별해보는 것도 조금은 쉬워진다. 내 안의 억울함이 무한정 부풀지 않고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그 자리에 합당한 크기로 줄어들게끔 하는 일은 중요하다.

나와 대화해본 적 없는 감정을 품고 남과 대화하는 것이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대접을 원하는 마음을 어디에 쉽게 두지 말고 내 몸 안에 고이 들고 있다보면, 필시 내 마음을 누일 보다 합당하고 마른 자리를 만날 수 있다. 본디 남에게 무슨 마음을 알아달라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 마음을 어느 정도는 알아두어야 한다. 그건 한때 누군가에게 대접을 바라던 마음만큼이나, 내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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