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다시, 이순신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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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서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


이진서,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 2024.10.08 부산일보DB 이진서,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 2024.10.08 부산일보DB

우리 시대 정치 담론의 진짜 전장은 이제 정책도, 이념도 아니다. 기억과 감정이다. ‘기억정치’와 ‘감정정치’는 한국 사회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현재를 어떻게 살아내며, 미래를 어떻게 상상할지를 결정짓는 싸움의 분수령이다.

기억정치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집단의 기억을 조직하는 권력의 문제다. 제주 4·3, 광주 5·18을 떠올려보라. 이들에 대한 해석은 ‘누구의 고통이 기억될 자격이 있는가?’라는 윤리적 질문과 직결된다. 감정정치는 집단 감정을 선별하고 조율하는 또 다른 권력이다. 슬픔은 어디까지 허용되고, 분노는 누구를 향하며, 자긍심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되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힘이다. 한국 사회는 이 두 정치가 고도로 결합된 구조 속에 놓여 있다. 특히 12·3 계엄 이후, 특정 인물과 사건은 영웅적으로 부각되는 반면, 공동체의 또다른 기억과 감정은 더욱 배제되었다. '세월호'와 '이태원'으로 불리우는 사회적 약자의 기억은 제도와 권력에 의해 가려져 통제 가능한 ‘소환의 도구’가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시류의 중심에 이순신이 있다. 위기 때마다 반복적으로 호출되는 이순신은 이제 정치적 상징으로 기능한다. ‘이순신 정신’, ‘12척의 리더십’ 같은 구호는 정치 프레임의 언어가 되었고, 이순신을 이순신이게 했던 윤리적 고뇌와 인간적인 리더십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점 사라져간다. 이순신을 가리키는 익숙한 이름들, 이를테면 전쟁 영웅, 우리 민족의 구원자, 절대적 리더십의 상징 따위는 이순신의 전부를 대변하지도, 지금의 우리에게 바람직하지도 않은 명명들이다. 무엇보다 이순신을 불러내는 시대적 상황이 언제나 이순신을 공동체 성숙의 밑거름이 되게 하기보다는 특정 집단의 통치 도구나 단순한 정치 연출로 소비하기를 부추긴다. 반복되는 호출에도 이순신이라는 이름이 공허한 구호가 되어 떠도는 이유이다.

이제부터라도 이순신을 과거의 영웅으로 ‘기념’하는 데 머물지 않고 민주시민교육의 자양분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은 그의 삶과 정신을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시민적 과제에 맞춰 재해석하고 재맥락화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이기도 하다. 이순신 정신을 선양하고 그를 기리는 사업들이 이순신 우상화라는 오명을 씻으려면 역사적 인물의 삶을 비판적으로 복원하여 오늘날 시민의 덕목으로 전환하는 창의적인 교육실천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이럴 때, 이순신 리더십은 시민적 리더십의 원형으로 다시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왜 이토록 자주 이순신을 소환하는가? 그 호출은 누구의 목소리이며, 누구의 침묵 위에 서 있는가? 이순신 리더십이 이렇듯 마케팅 슬로건처럼 소비되는 지금, 우리가 다시 이순신을 말해야 하는 까닭은 누차 얘기하듯 단순한 기념이나 이순신이 지닌 상징성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삶이 우리 시대에 던지는 질문 때문이다. 기억과 감정의 전쟁터에서, 그의 내면에 깃든 인간성과 윤리적 고뇌를 우리 자리에서 다시 묻는 것이야말로 그를 제대로 소환하는 방법임을 잊어선 안된다. 지금 우리가 ‘이순신’을 말해야 하는 이유는 오로지 우리가 함께,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해 묻기 위함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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