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금아의 그림책방] 비움과 채움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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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 아야노 작가의 그림책 <채운다는 것> 한 장면. 파스텔하우스 제공 다다 아야노 작가의 그림책 <채운다는 것> 한 장면. 파스텔하우스 제공

그림책이 질문한다. ‘비어 있는 건 이상한가요?’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와 곽영권 작가가 만든 <비움>(고래뱃속)은 제목 그대로 비움의 의미를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비어 있다’라는 말에서 부정적 감정을 먼저 느낀다. 비어 있으면 왠지 허전해서 이것저것을 채워 넣으려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채워도 채워도 부족하다. 밑 빠진 독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채움에 지쳤다면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비어 있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비어 있어야 진짜 좋아하는 것을 넣을 수 있다. ‘마음도 비어 있어야 좋아하는 사람이 들어올 수 있고, 비어 있어야 다른 사람의 마음도 담을 수 있다’라는 말이 좋다.

눈앞에 놓인 맛있는 음식을 담기 위해서 필요한 것도 빈 그릇이다. 최은영이 쓰고 이경국이 그린 <나는 그릇이에요>(이론과실천 꼬마이실)는 평범한 한 줌에 그쳤을 흙이 물과 손과 불을 만나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릇은 갈증을 해소할 시원한 물부터 건강한 식생활에 도움이 되는 음식을 담고 보관한다. 또 작지만, 쓸모 있는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돕는다. 때론 한 개인의 추억과 시대의 기억을 후대에 전하는 기능도 가진다. 비어 있는 그릇은 무엇이든 담고 새로움을 채울 가능성을 품는다.

그림책이 다시 질문한다. ‘무엇을 채우고 싶은가요?’

다다 아야노 작가는 <채운다는 것>(파스텔하우스)으로 세상이 부여한 것과 다른 방식의 채움이 있음을 보여준다. 어엿한 찻잔이 되는 꿈을 이룬 잔이 있다. 할머니와 오후 티타임을 즐기던 잔에게 세상이 뒤집어지는 일이 생겼다. 새에게 잡혀 풀숲에 떨어진 잔은 ‘텅 빈’ 신세가 됐다. 찻잔으로 살 수 없게 된 잔은 ‘더는 자신이 아닌 것 같아’ 서글펐다. 한참 뒤 잔은 차 대신 다른 것을 품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느 날은 꽃잎, 어느 날은 아기 오리, 어느 날은 빗물을 품었다. ‘꼭 차를 담지 않아도 괜찮을지 몰라.’ 아름다운 풍경으로 자신을 채운 잔의 멋진 변신에 독자의 마음도 따뜻해진다.

비움과 채움은 연결되어 있다. 채우기 위해서는 비워야 한다. 연말에 내가 아닌 것을 비워내는 시간을 가져봐도 좋겠다. 진짜 나와 나의 것으로 새해를 채울 수 있도록 말이다.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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