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산책] 환상·현실 괴리에 감당 힘든 고통 오기도…

윤여진 기자 onlype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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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로부터 두 번 버림받은 삶

어린 시절 보육시설 맡겨진 뒤
다시 찾지도 않고 돈까지 가져가
환상 깨지고 인생 무너지는 듯
절망과 분노·배신감 등 큰 상처
심신 잃지 않아야 남은 생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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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 불안, 스트레스를 호소하며 정신과와 심리상담센터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말 못할 고민에 마음 아픈 이들이 기댈 곳은 실상 그리 많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마음산책>은 이들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내적 고통에서 벗어날 길을 보여줍니다. 올해 초 동아대병원에서 정년퇴임한 정신과 전문의이자 정신분석가인 김철권 박사는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회복에 전념하기 위해 개인병원을 개원했습니다. 이메일(gomin119@busan.com)을 통해 접수된 사연 중 한 건을 선정해 매월 한차례 고민을 풀어볼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편집자주)



Q. 저는 어렸을 적 아버지 손에 이끌려 보육시설에 맡겨졌습니다. “곧 찾으러 오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희망 삼아 하루하루를 이겨냈습니다. 보육시설을 떠날 무렵 그토록 기다리던 아버지가 찾아왔습니다. 기쁨도 잠시. 자립 지원금을 가져간 아버지는 그 길로 소식이 끊겼습니다. 깊은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저보다 더한 역경도 이겨내고 성공한 사람들을 보며 잊으란 말에 더 분노가 치밉니다. 학업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고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두렵습니다. 저를 두 번이나 버린 아버지가 증오스럽습니다. 아버지에게 보란 듯이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며 복수하고 싶지만 몸과 마음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돈이라도 돌려받으면 회복할 수 있을까요. 자포자기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도 큽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A. 이번 사례는 표면적으로는 아버지의 배신에 관한 내용이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의 삶과 환상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환상이 깨어졌을 때 인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혹은 인간의 삶에서 환상이 어느 정도 큰 힘을 발휘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 글에서 환상은 희망과 동의어입니다.

사례 주인공은 아버지로부터 이중의 배신을 당했습니다. ‘곧 찾으러 오겠다’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것과 자립 지원금을 가져간 후에 소식이 끊겨버린 것, 두 가지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두 번이나 버린 아버지가 증오스럽다고 말합니다. 증오를 안겨준 특정 대상이 사라져 버리면 그 증오는 자신과 불특정 다수를 향하게 됩니다. 자신을 향하면 심한 우울증에 빠지게 되고 밖으로 향하면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불신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그녀)가 절망감에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아버지’에 대한 환상이 깨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동안 ‘아버지’라는 단어가 주는 환상에 기대어 살아왔을 것입니다. “곧 찾으러 오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은 환상을 심어주는 씨앗이 되었을 겁니다. ‘어린 나를 시설에 맡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틀림없이 있었을 거야.’ ‘내가 괴로운 만큼 아버지도 매일 괴로울 거야.’ ‘어떻게 하던 나를 다시 데려가려고 엄청 노력하고 계실거야.’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만큼 아버지도 나를 사랑하실 거야.’ 이런 환상이 없었다면 힘든 삶을 버텨내기 어려웠을 겁니다.

환상에는 언제나 욕망이 개입됩니다. 욕망은 환상을 통해 발현되고 환상은 욕망을 위장하는 옷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사례 주인공의 욕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버지를 다시 만나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으며 함께 오손도손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환상과 욕망은 고통스러운 삶을 견뎌내게 만든 절대적인 힘이 되었을 겁니다. 그(그녀) 스스로도 아버지의 약속을 희망 삼아 하루하루를 이겨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환상의 탑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시설에서 나오는 자신을 아버지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두 팔 벌려 맞아줄 거라는 환상이 산산조각 나 버렸습니다. 욕망도 함께 물거품이 되어버렸습니다. 환상과 욕망을 충족시켜 줄 ‘아버지’는 사라지고 대신 자립 지원금을 가져가서 소식이 끊겨버린 ‘괴물’이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글 곳곳에서 고통스러운 감정이 전해집니다. 배신감, 분노, 증오, 복수, 자포자기 등…. 아버지로부터 두 번이나 버림받았다는 상처는 글쓴 이가 아니고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비극의 강도가 자신이 방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설 때, 그리하여 마음속이 온통 흙탕물로 가득 차 있을 때는 위로의 말이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흙탕물 속의 흙이 밑으로 가라앉아 어느 정도 맑은 물이 되어야 사람들의 위로나 조언이 귀에 들어옵니다.

삶을 지탱하는 3개의 기둥이 있습니다. 하나는 건강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 힘이고, 다른 하나는 지지해 주는 사람입니다. 그 3개의 기둥이 삼각대처럼 삶을 받쳐주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라도 잃게 되면 삶을 지탱하기가 어렵습니다. 역으로 3개의 기둥 중에 하나라도 있으면 나머지 2개의 기둥을 다시 복원할 수 있습니다. 이번 사례는 지지해 주는 사람과 돈을 잃은 경우입니다. 하나 남아있는 건강도 많이 손상된 상태로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제일 시급하게 복원해야 할, 또는 복원 가능한 기둥은 건강입니다.

신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만 회복하면 나머지 잃어버린 두 개의 기둥도 복원할 수 있습니다. 위 사례처럼 극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크고 작은 고통을 앓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원칙은 적용됩니다.


윤여진 기자 onlype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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