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학수의 문화풍경] 갤러리에 가야 할 이유
동서철학 아카데미 숲길 대표
전시회에 왜 가야 하는가? 이것은 회화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따지는 물음이다. 사람들은 문화적 소양을 쌓기 위해서, 또는 미학적 감동을 얻기 위해서라고 응답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걸 쌓거나 얻어서 어디다 쓸 것인가? 화가에게는 그림을 만들 이유가 나름대로 확실히 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유명해지기 위해서, 아니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어쨌든 작품을 창작하는 이유는 예술가에게 이익이 된다는 점이다. 작품을 보는 감상자에게도 어떤 혜택이 있어야 한다. 전시장을 들르면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는지, 휴 갤러리(남구 용호동)에서 지금 열리고 있는 유진구의 전시회를 둘러보며 곰곰이 생각해 본다.
보통 회화 작품은 붓으로 물감을 화지나 캔버스에 그려서 만든다. 반면 유진구는 캔버스에 자개를 잘라 붙여서 작품을 만든다. 그의 작품은 그림은 아니지만 정교하게 자개 조각을 연결하여 마치 붓으로 그린 것처럼 보인다. 예전에는 캔버스에 잉어 같은 그림을 그리고 나서 그 위에 자개를 붙였는데, 이번 전시회의 작품은 모두 오로지 자개 작업으로만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형태가 어떤 사물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 추상화이다. 이런 작품을 보면, 감상자에게 어떤 이익이 있을까?
작품이 암시하는 의미 상상할 때
감상자의 인식적 지평 확대되고
능동적 존재로서의 자신 느껴져
작품에는 표층과 심층, 층위가 두 개 있다. 표층은 작가가 묘사하여 감상자에게 직접 제시하는 시각적 내용이다. 고흐의 신발 그림은 농부의 낡은 작업화를 묘사한다. 이것이 작품의 표층이다. 여기에는 작품이 감상자에게 주는 가치가 없다. 과일과 꽃을 그린 정물화는 감상자에게 아름다움의 쾌감을 주지만, 이것은 우리가 갤러리를 방문하기에는 너무나 시시한 혜택이다. 유진구 작품의 자개 조각은 실내의 빛을 무지개 빛 섬광으로 회절시켜 머리를 기울일 때마다 여러 가지 빛깔로 변화하는 초현실적 경험을 감상자에게 준다. 색채들이 공중에 떠서 날아다니는 듯한 경험은 신비스럽지만, 이것이 작품의 가치라고 하기에 너무 사소하다.
감상자에게 작품의 가치는 표층이 아니라 심층에 있다. 심층은 묘사를 통하여 작품이 표출하는 것인데, 표층이 암시하는 의미라고 해도 좋다. 고흐가 묘사하는 농부의 신발 한 켤레는 작품의 표층이고, 이것은 그 신발을 신고 살아가는 농부의 세계, 즉 고난과 환희, 희망과 두려움을 암시한다. 이것이 작품의 심층이다. 심층은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고, 마음의 눈에 들어온다. 하이데거는 작품의 두 층위를 구별하여, 표층을 작품의 대지, 심층을 작품의 세계라고 부른다. 그의 용어를 사용하면, 작품의 세계는 대지 위에 건립되어 있다.
작품의 표층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그림을 운반하는 택배사 직원, 그림을 분석하는 비평가, 숙제하러 갤러리에 들른 초등학생, 모두에게 고흐의 그림은 동일하게 보인다. 그러나 심층은 다르다. 어떤 사람은 아예 심층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에게 고흐의 작품은 단순히 신발을 묘사한 물체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이 표출하는 농부의 세계는 은폐되어 있다. 심층은 감상자의 눈에 수동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의 상상력이 능동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동일한 작품을 보더라도 감상자는 지식, 배경, 삶의 태도에 따라 작품의 심층을 서로 다르게 투사한다. 동일한 악보를 연주자마다 서로 다르게 해석하듯이, 동일한 작품의 심층을 감상자가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유진구 작품의 심층은 처음에는 필자에게 드러나지 않았다. 10여 점의 전시를 다 둘러볼 즈음, 자개 조각의 연결이 만들어내는 수평의 선들이 마치 호수의 물결처럼 보이면서, 어린 시절 연못에 돌을 던지며 파장이 일어나는 것을 즐기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 추억은 필자에게 고요한 보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세상의 조건에 휘둘리는 피동적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 파문을 일으킬 수 있는 능동적 행위자라는 점을 깨닫게 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작품의 표면에 묘사되어 있는 물결은 자유와 주체성을 건립하는데, 이것이 심층이다. 필자는 심층을 상상으로 투사하며 내가 능동적 존재임을 확인한다.
심층은 작가가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가 각자의 상상력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개의 물결이 구불구불한 선과 다양한 색채로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점에서, “만물은 유전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통찰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에게 작품의 심층은 존재의 무상성이다.
작가의 의도는 작품의 감상과 무관하다. 에코는 텍스트(또는 예술 작품)에 작가가 부여한 고정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단호히 거부한다. 대신, 모든 작품은 해석이 열려 있으며, 그 의미는 독자나 시청자에 의해 창조된다. 이것이 감상자의 인식적 지평을 확대할 때, 그에게 작품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작품은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감상자를 부르고, 거기에 감상자는 응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