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손’ 시대정신, 현재 한국영화에 필요한 메시지 [부일영화상 2025]
심사평
송경원 씨네21 편집장
어둠이 짙을수록 별 하나하나가 더 빛이 난다. 한국영화 역대 관객 수는 전성기의 절반에 미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될 정도로 한국영화 시장 전반이 위축되어 있다. 하지만 때로 위기는 본질을 마주할 중요한 기회가 되기도 한다. 올해 부일영화상 최종 심사는 이를 증명하는 자리였다. 올해 심사에는 대중, 장르 영화부터 독립, 작가영화까지 다양한 방향의 영화들이 한 테이블 위에서 모인 자리에서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심사위원들의 논의를 거쳤다.
최우수 작품상은 <장손>이 선정되었다. 오정민 감독의 <장손>은 핏줄과 밥줄로 얽혀 3대째 가업을 이어온 대가족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수작이다. 신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을 과감히 최우수 작품상으로 뽑은 건 이 작품이 품고 있는 명료한 시대정신 때문이다. <장손>보다 규모와 프로덕션 면에서 더 앞선 작품, 검증된 거장의 왕성한 에너지를 확인할 수 있는 신작, 관객들의 사랑을 받은 흥행작 등 쟁쟁한 경쟁작들 속에서도 이 비범한 데뷔작의 독보적인 존재감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 한국영화에 필요한 메시지와 방향성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신호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최우수 감독상은 <야당>의 황병국 감독에게 돌아갔다. <야당>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은 올해 상반기 최고의 흥행작이었을 뿐 아니라 충무로에서 한 발 한 발 자신의 영역을 다져온 황병국 감독의 저력을 증명하는 영화다. 고른 완성도와 완급 조절은 물론 전반적인 밸런스가 돋보이는 이 영화는 중심을 잡는 연출자의 무게가 작품 전체를 어디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적확한 사례라 할 만하다.
남우 주연상은 <승부>의 이병헌 배우다. 거의 모든 부문에서 치열한 토론과 각축이 이어졌던 것과 달리 남우 주연상만큼은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였다. 여우 주연상은 <대도시의 사랑법>의 김고은 배우가 차지했다. 여러 배우들에게 지지가 고르게 흩어졌지만 결국 김고은 배우가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는 점이 높은 점수를 얻었다. 남우 조연상은 <전,란>의 박정민, 여주 조연상은 <아침바다 갈매기는>의 양희경 배우가 선정됐다. 두 배우 모두 작품 전반을 지탱하는 대체 불가한 존재감이라는 점에서 고른 지지를 받았다.
올해는 거의 모든 부문에서 다른 영화들이 고르게 수상했다. 당연히 의도한 분배가 아니다. 그만큼 다양한 색깔의 영화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빛난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2관왕을 차지한 영화가 세 편 있는데, <아침바다 갈매기는>, <여름이 지나가면>, <하얼빈>이다.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여우 조연상과 함께 각본상(박이웅 감독)을 수상하며 2관왕을 차지했다. 시골 어촌에서 벌어진 사건을 배경으로 한국사회의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한 깊이가 돋보인다.
또 다른 2관왕의 주인공 <여름이 지나가면>는 신인감독상 장병기 감독, 신인 남자 연기상 최현진 배우가 뽑혔다. <여름이 지나가면>은 어린 남자아이들 사이에 조성된 긴장과 흠모, 갈등을 섬세하게 포착한 영화에 심사위원들의 찬사가 모였다. 무엇보다 익숙한 성장영화와는 또 다른 독자적인 시선이 돋보이는, 새로운 개성의 탄생에 박수를 보낸다. 신인 여자 연기상은 <빅토리>의 이혜리 배우는 기존의 발랄한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살리되 배우로서도 대체할 수 없는 안정감을 증명했다는 평을 얻었다.
규모가 큰 대중 상업영화들에 대한 기술적 완성도 역시 올해 빼놓을 수 없는 성취다. 안중근 의사를 다룬 대작 <하얼빈>은 촬영상(홍경표)과 미술, 기술상(박정우)을 받았다. 역사를 바탕으로 한 대작에 어울리는 완성도와 기술적 성취는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다는 평이다. 마찬가지로 기발한 한국형 히어로물 <하이파이브>는 강형철 감독 특유의 음악이 중심이 된 시퀀스가 눈길을 끈만큼 음악상이 돌아갔다. 2025년 부일영화상은 한 마디로 다양한 개성과 방향, 색깔과 가능성의 지도를 펼쳐 놓았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한국영화의 단면을 한눈에 보여주는 이 영화들을 이정표 삼아 앞으로의 한국영화가 나아갈 길들을 제대로 응원할 수 있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