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정책은 현장에서 자란다…어촌이 수산의 미래다
김태호 전남대학교 해양생산관리학과 교수
김태호 전남대학교 해양생산관리학과 교수
한국 수산업은 더 이상 섬처럼 고립된 1차산업의 틀에 머물 수 없다. 기술은 일정 수준 개발되었고, 제도와 예산도 어느 정도 마련되고 있다. 그럼에도 산업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속도보다 방향, 성과보다 구조의 문제이다. 기술과 제도, 현장이 따로 움직이는 방식으로는 변화의 파고를 넘기 어렵다. 지금 필요한 것은 수산업 운영 체계의 전면 재설계이다. 실험실에서 완성된 기술이 현장으로 옮겨오지 못하고, 현장에서 드러난 문제는 정책에 반영되지 않는다. 기술은 바다에서 뿌리를 내려야 하고, 제도는 성과를 되돌아보며 진화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해양수산부와 산하 공공기관의 부산 이전은 단순한 행정 주소 변경이 아니다. 중앙 집중 체계를 풀고 지역 중심 거버넌스로 전환하는 제도 실험이자 정책 전환의 기회이다. 부산에는 국립수산과학원, 한국해양수산개발원, 한국수산자원공단 등이 자리하고 있다. 정책 수립과 집행, 기술 개발과 실증이 한 생활권 안에서 맞물릴 때 실행력은 배가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어디에 있느냐’보다 ‘어떻게 연결해 움직이느냐’이다. 정책은 중앙에서 설계되더라도 성과는 현장에서 만들어진다. 우리 수산업에서 그 현장은 바로 어촌과 섬이다. 이곳은 단순한 지원 대상이 아니라, 정책을 시험하고 검증하는 살아 있는 곳이다. 실험실이 아니라 바다에서, 회의실이 아니라 어업 현장에서 구현된 정책만이 현장에 반응하며 변화의 동력이 된다.
전남 신안, 경북 포항, 강원 양양 등에서 조성 중인 스마트양식 클러스터는 첨단기술을 실증하고 표준화하는 거점이 될 수 있다. 반면 욕지도, 거문도 같은 섬은 정책 실험의 효과와 파급력을 세밀하게 확인할 수 있는 최적의 현장이다. 거점과 도서의 기능을 나누면서도 전략적으로 연결하면 기술 확산성과 정책 효과를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첫째, 정책·연구·실증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긴밀히 연결하는 운영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지금은 기관 간 기능이 겹치고 협업이 원활하지 않아 현장 중심 행정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해양환경, 수산자원, 양식기술 등 데이터가 분산돼 있어 통합 의사결정이 어렵다. 설계부터 집행, 평가, 환류까지 하나로 이어지는 정책 플랫폼 구축이 요구된다.
둘째, 데이터 기반 정책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수온, 해양오염, 자원량, 어류 폐사율 같은 주요 지표를 실시간 분석해 기후위기에 따른 피해를 미리 예측하고 대응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정보 축적이 아니라 현장에서 작동하는 실증–분석–설계–평가의 선순환 구조이다.
셋째, 제도는 지역의 특성과 변화를 품을 수 있어야 한다. 전국에 하나의 잣대만 들이대는 방식으로는 어촌 현실을 반영할 수 없다. 시범지구, 규제 특례, 단계적 제도 적용 등 유연한 접근을 통해 지역 맞춤형 정책 실험이 가능해져야 한다.
넷째, 실행력을 높일 인재와 조직이 뒷받침돼야 한다. 기술은 제도를 만나야 현실이 되고, 제도는 사람을 통해 움직인다. 실무 역량, 데이터 분석능력, 정책 추진력, 지역과의 소통 역량을 갖춘 인재가 현장에 있어야 한다. 특히 청년 인재 유입과 지역 조직의 강화는 수산행정의 지속성을 좌우한다.
수산업은 이제 단순한 생산 산업이 아니다. 식량안보, 기후위기 대응, 해양바이오, 스마트양식, 지역 공동체, 정책 실험이 어우러진 복합 산업으로 변해야 한다. 바다의 작은 변화들이 지역 전체의 산업구조를 뒤흔드는 시대인 만큼, 더욱 섬세한 정책 감각이 요구된다. 결국,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와 현장 흐름을 아우르는 구조적 설계가 있어야 미래를 열 수 있다.
정책은 현장에서 자란다. 진정한 수산강국은 바다의 실험과 어촌의 경험에서 시작된다. 종이에만 머무는 정책은 변화를 만들지 못한다. 수산의 미래는 ‘어디로 갈 것인가’보다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