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산책] 상사가 이유 없이 폭언 퍼붓는다면
폭언하는 상사 내면에는 불안
기억 속 인물에 대한 공격일 수도
상처 입기보다 헤아려 볼 필요
우울, 불안, 스트레스를 호소하며 정신과와 심리상담센터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말 못할 고민에 마음 아픈 이들이 기댈 곳은 실상 그리 많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마음산책>은 이들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내적 고통에서 벗어날 길을 보여줍니다. 글을 쓴 정신과 전문의이자 정신분석가인 김철권 박사는 올해 초 동아대병원에서 정년퇴임한 후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회복에 전념하기 위해 개인병원을 개원했습니다. 이메일(gomin119@busan.com)을 통해 접수된 사연 중 한 건을 선정해 매월 한차례 고민을 풀어볼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편집자주)
Q. 직장 상사와 트러블로 고민 중인 40대 직장인입니다. 앞선 직장 상사들과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새로 부임한 직장 상사는 달랐습니다. 다른 팀에 비해 실적이 그리 낮은 편이 아닌데도 실적이 저조하다는 이유를 들어 화를 내고 폭언을 퍼붓습니다. 실적 관련한 발표 자리에서도 다른 팀장에겐 별 말 안하던 상사가 제 발표 순서가 되자 말도 안 되는 질문을 쏟아내며 공격했습니다. 회식 자리에선 몰아붙여 미안하다고 해놓고는 다음날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무턱대고 화를 내기 일쑤여서 상사를 만나는 게 고역입니다. 상사 전화만 와도 가슴이 뛰고 숨이 막힙니다. 한바탕 욕을 퍼붓고 회사를 그만두는 상상도 하지만 실행할 만큼의 용기는 나지 않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요?
A. 상사와의 갈등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사례의 사연을 보면서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은 이번 사례와 정반대의 이유로 내원하셨는데 어쩌면 이번 사례의 그 상사가 아닐까하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본인이 담당하고 있는 부서에 여러 명의 팀장이 있는데 그중 한 팀장이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거슬려서 그가 무슨 말만 하면 사소한 일에도 꼬투리를 잡고 비판하고 화를 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행동 후에는 자신이 상사답지 못하게 보일 것 같아서 신경 쓰이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답답함을 호소했습니다.
이 분에게는 동생이 있는데 그녀는 어릴 때부터 똑똑하고 말을 잘해서 부모님을 비롯해 주위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고 합니다. 그 동생과 같이 있을 때 본인은 항상 후순위였고 그래서 늘 동생이 미웠다고 합니다. 거슬리는 팀장과 여동생이 닮은 점이 있는지 묻자 즉각적으로 팀장은 남자인데 어떻게 여동생과 서로 비교하느냐며 반문하다가 “그 팀장이 말을 할 때 입모양이 동생과 닮았다”면서 웃었습니다. 본인으로서는 ‘설마 그런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그 팀장에게 그럴까?’하는 의문의 웃음이겠지만, 심리적으로는 팀장의 말하는 입모양이 본인에게 여동생과의 불편했던 어린 시절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 용어 중에 ‘전이(transference)’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부모나 자신에게 중요했던 다른 인물들에게 느꼈던 감정이 현재의 어떤 사람에게 옮겨지는 것을 말합니다.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됩니다. 과거의 인물과 현재 인물 간에 우리가 의식할 수조차 없는 아주 사소한 유사점만 있어도 이러한 전이가 유발될 수 있습니다. 무언가가 어른거리기만 해도 센서등에 불이 들어오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이에는 긍정적 전이와 부정적 전이가 있는데 전자는 이유 없이 그냥 상대방이 좋고, 후자는 그럴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그냥 밉게 보이는 것입니다.
당신이 맡은 일을 잘 해나가고 있는데도 직장 상사가 유독 당신과의 관계에서만 갈등을 일으킨다면, 당신의 어떤 한 부분이 상사를 자극해 그의 기억 속에 내재되어 있는 불편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당신으로서는 무척 억울하겠지만 상사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 중요했던 누군가에 대한 감정으로 당신을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당신이 취할 태도에 대한 실마리가 있습니다. 상사는 당신을 공격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 내면의 기억 속 어떤 사람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마음에서 그러는지 알게 되면 상사의 행동에 상처 입기보다는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상사의 공격적인 태도에 대한 당신의 분노는 어느 정도 누그러질 것입니다.
당신이 마음의 여유가 조금 있다면 상사가 비난의 돌을 던질 때 당신은 흙이 돼 그 돌을 품는다는 마음 자세로 이번 일을 잘 겪어나가 보십시오. 그런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는 그의 행동은 당신과는 상관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맡은 일을 묵묵히 하며 견뎌 나가십시오.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지 당신을 힘들게 하는 그 상사는 당신의 내적 성장과 성숙을 돕는 촉진제가 될 것입니다.
윤여진 기자 onlypen@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