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5월 장미보다 더 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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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1592년 5월 임진왜란 시작된 부산
'정발, 침공 모른 채 허둥대다 패전'
'박홍, 화살 하나 쏘지 않고 성 버려'

공적 평가는커녕 억울한 누명 예사
일본군 기록 등 대조해 명예 회복
선조들이 흘린 피, 선연히 기억돼야

1592년 5월 임진왜란이라 부르는 긴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이 처음 상륙한 곳도 부산이었고, 첫 전투가 벌어진 곳도 부산이었다. 5월 25일에는 충렬사에서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 부산진 첨사 정발, 다대진 첨사 윤흥신에 대하여 제향을 올린다. 그러나 전쟁 직후에는 그 공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우선 정발 장군의 경우는, 〈선조실록〉에서 “적선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 첨사 정발은 마침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고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으며, 미처 진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정발은 어지러이 교전하는 중에 전사했다”고 기록하였다. 〈기재잡기〉라는 책에서도 “왜선이 차차 가까이 오면서 총을 연달아 쏘자, 정발이 비로소 당황하여 진영으로 돌아왔으나 적은 벌써 해안에 상륙하여 포위하고 있었다. 정발은 화살 하나 쏘지 못하고 죽고 성안 사람은 노소 없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일본군이 침입한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허둥대다가 죽임을 당했다는 식이다.

부산진 전투의 실상이 밝혀지게 된 것은, 부인 임씨가 정발 장군의 공적을 밝혀 달라고 청원하였기 때문이다. 부산진 전투가 끝난 후에 시신 더미 속에서 살아남은 가은산이라는 병사가 정발 장군의 행적을 생생하게 증언하였다. 영도에서 일본군 선박을 목격하고 성으로 돌아온 정발 장군은 성 밖의 백성들도 모두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고, 다음날 새벽에 일본군이 쳐들어왔으며, 마지막에는 서쪽 성문을 지키다가 전사하였다고 하였다.

당시에 일본에서 예수회 선교를 담당하고 있었던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에서도 “(부산진성의) 조선군들은 매우 용감하게 저항하였으며, 전투는 3시간 가까이 계속되었다. 해자에는 마름쇠가 뿌려져 있거나, 사람 키 높이로 물이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들은 마름쇠에 찔리지 않도록 해자 위에 널판을 놓고 건너갔다. 조선군은 거의 모두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웠고, 단지 소수만이 살아남아 포로가 되었다”고 하였다.

송상현·정발 등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로 종종 당시 경상좌수사였던 박홍이 거론된다.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1592년 6월 28일자로 올린 치계에서 “좌수사 박홍은 화살 한 개도 쏘지 않고 먼저 성을 버렸고, 좌병사 이각은 뒤이어 동래로 도망쳤다”고 하였다. 이각보다 먼저 성을 버렸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박홍은 이각·박진과 함께 소산역에 있다가 동래성이 함락되자 언양으로 퇴각하였고, 병사들을 이끌고 다시 경주로 갔다. 경주에서 이각이 울산으로 돌아가자, 박홍도 군사들을 해산시키고 일본군이 통과할 것으로 예상한 죽령 쪽으로 이동하였다. 예상과 달리 조령이 뚫리자, 선조가 있는 행재소로 가던 도중, 원수(元帥) 김명원을 만나 좌위대장에 임명되었고 임진강 방어전에 참전하였다.

박홍은 일본군의 임진강 진출을 막기 위하여 파주 지역에서 싸웠는데 다른 장수들은 모두 패하여 전사하였으나, 박홍만은 병력을 유지하여 돌아왔다. 박홍은 다시 김명원을 따라 북상하여 대동강 방어에 참여하였고, 이후에도 세자 광해군을 따라 종군하는 등 여러 전투에 참여하다가,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배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병들어 더 이상 싸울 수 없을 때까지 전장을 떠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공적이 인정되어 〈국조인물고〉에 임진왜란 당시 적을 물리친 인물 28명 중 한 명으로 이름이 올라가 있다.

그렇지만 당시 사헌부에서는 “수사 박홍은 적이 나타난 관할 구역에서 한 차례도 싸우지 않고 천리 밖으로 물러나니, 남쪽 지방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의 살점을 씹고자 합니다. 형벌의 집행이 이러하니 어찌 나라 꼴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박홍이 전에 지은 죄를 소급하여 법률에 의하여 처단하십시오”라고 지독한 말로 탄핵하였다. 거듭되는 탄핵 때문에 박홍은 세 차례나 자신이 맡았던 직책에서 쫓겨나 백의종군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적이 쳐들어오면 맞서 싸워서 장렬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순국사관을 선호한다. 그러나 당시 지휘관으로서는 자신이 농성(籠城)을 결정하는 순간 백성들도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라면 모르겠지만, 백성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동래성전투에서는 어린아이도 머리에 총을 맞았고, 여성도 앉은 채로 머리가 잘렸다. 박홍처럼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가져갈 것은 다 가져가게 하고 나머지는 불태워 후일을 기약한 선택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부산은 이처럼 참혹한 전란이 시작된 곳이었고, 7년 동안 일본군의 억압 아래에 있었다. 선조들이 흘린 피는 여전히 5월의 장미보다 더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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