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선택적 신속함
김소연 법무법인 예주 대표변호사
작년 대법원 새로운 판단 3.4% 불과
긴 기다림에도 결과 바뀔 가능성 희박
이재명 후보 회부 9일 만에 판결 선고
일반 국민 수년간 계류 권리 구제 지연
법 앞의 평등은 '속도의 형평'도 포함
처리 기준 투명 공개 등 방안 제시를
2025년 5월 1일, 대법원 선고를 받았다. 2021년에 맡은 사건이 1심과 2심의 판단이 엇갈렸고, 3년 전 상고한 민사소송에 대해 대법원이 마침내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같은 날, 전국의 이목을 끈 이재명 대선 후보에 대한 대법원 판결도 함께 선고되었다. 상고장 제출 후 약 35일, 전원 합의체 회부 후 단 9일 만에 나온 이례적인 속도의 선고였다.
언론은 수십 쪽에 달하는 판결문을 분석하며 정치적 의미를 해석하느라 분주했지만, 내 의뢰인이 3년을 기다려 받은 것은 두 장 남짓한 판결문뿐이었다. 같은 법정에서, 같은 날, 다른 속도로 정의가 도착한 것이다.
의뢰인은 상고심이 진행되는 동안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미루며 긴 기다림을 견뎌야 했다. 나는 매달 재판 경과를 묻는 질문에 뭐라 답하지 못하고 무력한 변호사일 수밖에 없었다. 이 기다림은 단순한 인내의 문제가 아니라, 당사자의 생계와 권리, 인생 계획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시간이었다. 반면, 정치인이 연루된 형사사건은 ‘공공의 이익’과 ‘정국의 안정’이라는 명분 아래 신속하게 처리된다. 이재명 후보의 사건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법원까지 이례적으로 빠르게 회부되었고, 정치 일정을 고려한 듯 절묘한 시점에 판결이 선고되었다.
물론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에 대해 신속한 판단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사법부가 특정 사건에만 ‘선택적 신속함’을 보일 때, 정치와 사법의 경계가 흐려졌다는 의혹을 피하기 어렵다. 이번 판결 역시 그 결과보다 ‘그 시기’와 ‘그 방식’이 더 많은 의문을 남겼다. 아무리 법리가 정교하더라도, 이례적인 절차와 속도로 진행된 정치적 사건에서 법원이 오롯이 법리에 따라 판단했다고 국민의 신뢰를 얻기는 쉽지 않다. 비슷한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윤미향 전 의원은 검찰 기소 4년 만에 대법원 유죄 판결이 확정되어 임기를 마친 후에야 의원직을 상실했고, 조국 전 장관은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유독 정치적 사건에서 재판의 ‘속도’가 논란이 되는 것은 사법부의 신뢰를 저해한다. 대법원 판결이 정치적 해석과 연결될 때마다, 사법의 중립성은 시험대에 오르는 것이다.
2024년 대법원에 접수된 민사사건의 72.3%는 심리불속행으로 기각되었다. 같은 해 사법연감에 따르면, 민사소송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대법원이 새로운 판단을 한 비율은 3.4%에 불과했다. 즉, 상고심에서 실질적인 판단을 받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긴 시간을 기다려도 결과가 바뀔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뜻이다. 이쯤 되면 한국의 사법제도는 실질적으로 ‘2.1심제’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상고심은 법률심으로 실체적 다툼이 제한되고, 대법원이 심리 개시 여부에 재량권을 갖고 있어 일반 국민이 실질적 판단을 받기는 더욱 어렵다. 결국 민생 사건은 오랜 기간 계류되고, 절박한 권리 구제는 늦어진다. 심지어 판결이 내려졌을 즈음에는 손해를 복구할 방법조차 사라지는 경우도 많다. 상고를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않은 변호사 입장에선 죄송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상고심 제도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형사소송에서 피고인의 생존권과 직결된 사안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듯, 민사소송에서도 국민의 재산권은 생계와 직결된 중대한 권리다. 그러나 현재의 시스템은 이 권리를 수년간 유보하게 만든다. 지나치게 늦어진 정의는 더 이상 정의가 아니다.
물론 대법원이 모든 사건을 동등한 우선순위로 다룰 수 없다는 현실도 이해한다. 그러나 그 기준이 불투명할수록 국민의 불신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사법부에 필요한 것은 모든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공정한 신속함’이다. 특정 계층에게만 예외적으로 빠른 재판을 제공하고, 나머지 국민에게는 ‘사건 적체’를 이유로 수년을 기다리게 하는 이중적 태도는 사법 불신을 심화시킬 뿐이다.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자원을 일관된 기준으로 배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선택적 정의’라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법은 공정해야 한다. 그 공정은 속도의 형평, 관심의 균형, 정치적 중립성에서 비롯된다. 이제 대법원은 명확히 답해야 한다. 상고심 처리 기준의 투명한 공개, 우선순위 결정의 객관화,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대우받을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무너진 사법 신뢰를 회복하는 첫걸음일 것이다. 정의는 단지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속도’로 도달하느냐도 중요하다. 법은 모두에게 평등해야 한다. 단, 그 평등은 ‘속도’에서도 증명되어야 한다. 3년을 기다려 받은 두 장의 판결문과, 한 달여 만에 선고된 수십 장의 정치 판결문 사이에는 우리 사법부가 직면한 깊은 모순이 숨어 있다. ‘법 앞의 평등’이 더는 헌법 조문의 한 문장으로만 남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