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윤의 세상톡톡] 로마 황제가 재산을 경매로 처분한 까닭

이상윤 기자 nuru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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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상습 재정 고갈 시달리던 제정 로마
큰 위기에도 속주세 인상 끝내 안 해
더 큰 방위비 부메랑 무서웠기 때문
위기 넘기려 동맹 관세 올린 트럼프
로마가 두려워한 비용 치러야 할 것
美 우산 밑 한국 지평만 더 위태로워

서기 170년 어느날 우리에겐 〈명상록〉의 저자로 유명한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비서에 해당하는 해방노예를 불러 계면쩍은 지시를 내린다.


“지금 황실에 가서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족장들이 보내온 술잔과 기념품, 아르메니아 왕이 보내온 황금관 같은 걸 모아서 광장으로 내보내게나. 그것들을 급히 경매에 좀 붙여줘야겠어. 국고로 들어온 거라 내가 처분하면 원로원의 반발이 좀 있겠지만 그래도 이해는 해 줄 테지.”

황제의 지시를 받은 해방노예는 로마에서 가장 넓은 광장인 트라야누스 포룸으로 황제가 언급한 물품을 대거 실어날랐다. 두 달에 걸쳐 진행된 황제 주관 경매의 소문이 제국 곳곳에 퍼지자 황실 물건에 호기심이 발동한 로마 유력자들은 물론 인근 갈리아 지역 유력자들까지 몰려와 너도나도 경매에 참가했다.

유럽의 모태가 된 거대제국 로마를 지배한 황제는 왜 이런 뜬금없는 경매까지 벌여야 했을까.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지중해 일대를 장악하게 된 로마의 황제쯤이면 속주국가를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군정일치 국가였던 로마는 속주국가마다 몇 개 군단씩을 상주시키며 총독을 파견해 지배했다. 실제로 피를 흘려야 하는 혈세인 군복무 외에 거의 세금이 없었던 로마와 달리 속주국가는 속주세라는 명목으로 수입의 10%에 해당하는 세금을 내야 했다.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국가의 정체가 바뀐 다음 로마가 맞닥뜨린 가장 큰 난제는 늘 재정 문제였다. 비대해진 군대에서 쏟아져 나오는 퇴직자에게 줄 퇴직금과 도로와 수도, 각종 구조물 등의 신축, 보수 등에 들어가는 자금 등은 천문학적이어서 잠시 경계를 늦추노라면 국가 재정은 늘 바닥을 보이곤 했다.

그런 상황이라면 황제는 속주세를 대폭 올려 세금을 왕창 걷으면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로마의 황제들은 동양인인 우리의 시각에선 이게 정말 황제가 맞나 싶으리만치 속주세를 올리는 데에는 엄청난 거부감을 표시했다. 아우렐리우스 같은 황제도 전쟁으로 재정이 위태롭자 황실 물품을 팔아 벌어들인 수입으로 겨우 버티면서도 끝내 속주세는 일절 건드리지 않았다.

팍스 로마나(로마에 의해 유지되는 평화) 시대에 로마 황제가 속주세를 올릴 줄 몰라서 건드리지 않은 게 아니다. 속주세를 올린 뒤 일어날 파장이 두려웠던 것이다.

로마가 마구잡이로 속주세를 올릴 경우 로마의 지배를 인정하던 속주국가가 거센 저항에 돌입할 가능성이 커진다. 군사력으로 진압하는 것도 일시적 방편일 뿐. 장기적으로 더 큰 군사력에 의하지 않고서는 사회를 안정시킬 방법이 없다.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로마는 더 큰 재정 투입이 불가피하고 바닥난 재정은 악화일로 상태가 될 것이다. 로마 황제들이 옆에서 보기에 딱할 정도로 속주세 인상만큼은 하지 않으려 버틴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고대에 팍스 로마나가 있었다면 현대엔 팍스 아메리카나가 있다. 미국의 주도력에 기대 국제 평화 질서가 이어지는 상황을 뜻하는 말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 세계는 약육강식의 제국주의가 판을 쳤다. 소위 선발 강대국이라는 국가들은 곳곳에 식민지를 만들어 국부를 창출하는 데 여념이 없었기에 수탈과 약탈은 강대국을 상징하는 단어로 여겨졌다. 그러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세계가 미국이라는 초일류 강대국의 주도권 아래 재편되며 팍스 아메리카나가 자리를 잡았다.

팍스 아메리카나는 미국의 군사력만으로 지탱해 온 것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와 기회 균등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매력은 동맹국으로 하여금 팍스 아메리카나의 우산 밑에 머무르기를 기꺼워하도록 만들었다. 중국이 아무리 초강대국이 되더라도 세계를 주도하는 국가가 되기 어렵다고 보는 전문가들이 많은 것도 이 같은 미국의 매력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미국이 관세를 무기로 동맹국을 쥐어짜고 나서기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로마 황제에 비유한다면 자국의 어려움 해소책으로 속주세를 마구 올리기로 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로마 황제들이 할 줄 몰라서 안 한 것이 아닌 방법을 취한 것이다.

역사의 거울에 비춰본다면 미국은 결국 로마 황제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추가 비용을 엄청나게 지불해야 할 것이다. 로마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촘촘하게 연결된 고밀도 지구촌의 현 상황을 고려하면 그 시점은 더 빨라질 공산이 크다.

팍스 아메리카나 우산 밑에 머무르며 국가 안보까지 기대고 있는 대한민국의 지평은 그래서 더 위태로워 보인다.


이상윤 기자 nuru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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