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일의 곰곰 생각] 트럼프 관세 전쟁, 공황의 그림자
논설위원
미국 내 생산 기지 요구하며 통상 압박
제조업 붕괴 사라진 일자리 회복 목적
EU·캐나다 등 동맹국까지 반격 시작
전면전 확전 글로벌 경기 침체 불가피
1930년대 세계 경제 붕괴 상황 유사
한국 시계제로 최악 시나리오 각오를
“미국인들은 느려 터져서 생산성이 떨어져요.”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턴의 제너럴모터스(GM) 공장이 문을 닫자 대규모 실직 사태가 발생한다. 다행히 중국 푸바오그룹이 공장을 인수해 재고용하자 지역 사회는 활기를 되찾는다. 한데, 중국 관리자들은 미국인의 굼뜬 일머리에 속이 터진다. 반면 미국인들은 중국식 근면과 규율, 업무 강도, 그 결과인 높은 생산성에 충격을 받는다. 급기야 미국 직원들은 노조를 결성해 대항하려 한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아메리칸 팩토리’(American Factory·2019년)는 미국에 진출한 중국계 기업이 겪는 문화 충돌이 주제다. 이 다큐를 본 기업인이라면 미국 투자를 주저할 수밖에 없게 된다. 돈으로 건물을 짓고 장비는 들일 수 있으나 일하는 문화까지 살 수는 없다.
‘무역 전쟁은 좋은 것이고, 이기기 쉽다.’(Trade wars are good, and easy to win.) 2018년 3월 2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트윗은 관세 폭탄의 예고편이었다. 트럼프 1기 때는 중국만 두들겨 팼지만 2기에는 동맹국도 가차없다.
우아한 외교 수사는 사라지고 무쇠 주먹만 휘두르는 낯선 미국의 이면에는 제조업 붕괴가 있다. 1960년대 제조업은 국내 총생산(GDP)의 25%였는데 최근 11%로 떨어졌다. 생산력이 몰락하고 기생적 금융자본주의만 번성하는 이상한 나라가 됐다. 제조업 일자리 하나는 비제조업 분야에 3.4개의 일자리를 창출한다. 2000년 이후 제조업 일자리가 500만 개 이상 사라졌고 후방 효과로 비제조업 실업자까지 쏟아져 미국 사회가 입은 내상은 심각하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는 ‘미국인 다시 취업하기’ 캠페인인 셈이다.
트럼프 관세 전쟁의 본질은 ‘일자리 빼앗기’다. 밥그릇 앞에 이념도, 동맹도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5일 의회에서 인도, 중국, 한국을 부당 관세 국가로 콕 집어 지목한 뒤 “우방이든 적국이든 똑같다”고 선언한 배경이다. 이날 연설의 핵심은 “미국으로 생산 기지를 옮기지 않으면 더 높은 관세를 매기겠다”였다.
반도체는 상징적인 사례다. 트럼프 대통령은 7일 대만과 한국이 반도체를 ‘훔쳐갔다’는 표현까지 썼다. 미국에서 탄생한 반도체가 일본을 거쳐 한국과 대만으로 옮아간 과정은 자연스럽다. 한국과 대만은 적정 임금에 24시간 공정을 지탱하는 노동력 공급이 가능했다. 미국에서 불가능해졌기에 아시아로 넘어온 것이다. 하지만 반도체가 전략 물자로 부상하자 ‘미국에서 태어난 기술이니 도로 내놔라’는 억지가 시작됐다. 실제 한국의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대만의 TSMC의 팔을 비틀어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게 해 놓고 정권이 바뀌자 약속했던 보조금은 안면몰수할 기색이다.
트럼프의 목표는 제조업 회생, 즉 일자리 창출이다. 그 수단이 관세다. 관세는 제품 가격에 흡수되어 미국 소비자에 전가된다. 캐나다가 미국의 25% 관세에 맞서 미국에 수출하는 전기에 25% 수출세를 부과한다고 엄포를 놓았는데, 이는 가구당 월 100달러(우리 돈 15만 원)의 생활비를 증가시킨다. 물가 앙등이 촉발한 경기 침체의 위기 경고가 미국 내에서도 나오는 이유다.
미국이 상호 관세를 부과하고 세계 각국이 맞대응하면 물가 앙등, 무역 감소, 경기 침체는 필연적이다. 전문가들은 경기 침체를 넘어 대공황까지 우려한다. 1930년대 세계 경제를 붕괴시킨 대공황과 유사하게 진행되고 있어서다. 당시 미국은 자국 산업 보호를 명목으로 스무트-홀리 관세법을 제정해 최고 60% 관세를 매겼다. 다른 국가들이 보복 관세로 맞선 결과 세계 무역은 65% 감소했다.
10일 미국 주식 시장이 폭락했는데 이유는 전날 트럼프 대통령이 경기 침체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우리가 엄청난 일을 하는 중인데, 과도기가 있을 것”이라고 한 것이 발단이었다. 경기 침체를 감수하겠다는 의지 표명이 불안 심리에 불을 질렀다. 트럼프의 관세 전쟁을 ‘거래의 기술’로만 이해하는 건 금물이다. 트럼프에 있어 ‘엄청난 일’은 산업 구조의 근본적 개혁이고 이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것이어서 관세 폭탄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세계 각국은 트럼프 1기 때와 달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임기 4년의 트럼프가 무서워 미국에 공장을 지을 턱이 없다. 12일 유럽연합이 최대 50%의 보복 관세로 반격한 것은 준비된 선전 포고다. 글로벌 경기 침체는 불가피하고 벌써 대공황의 그림자까지 어른거린다. 내수 비중이 높으면 그나마 버티겠지만 수출 의존도가 높은 데다 대미 흑자가 큰 한국은 시계제로다. 트럼프의 호언장담과 달리 ‘무역 전쟁은 나쁘고 이기기도 쉽지 않다.’ 승자 없이 모두가 패자가 될 뿐인 이 무역 전쟁을 피할 길이 없는 처지가 참담하다. 한국은 최악 시나리오를 각오해야 한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