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자화상
신호철 소설가
대수롭지 않은 것이 갑자기 와닿을 때가 있다. 그것은 느닷없고 엉뚱하다. 이를테면, 퇴근길에 마주친 어느 가게의 소음이 그랬다. 한창 인테리어 작업 중인 그 가게에선 인부가 망치로 합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꽝꽝대는 소리가 길 건너의 높은 건물 벽과 부딪혀 다시 이쪽 건물에 반사되어 메아리쳤다.
나는 이쪽 건물과 저쪽 건물의 유리창을 번갈아 올려보며 생각했다. 여기서도 소리가 메아리치네. 그래. 뭐든 반사되는 법이지, 소리든, 빛이든… 아니, 통과되는 것도 있으려나? 2차선 건널목을 건너는 동안 그 거리만큼이나 짤막한 결론을 얻었다. 세상을 받아들이는 감각도 결국 두 가지 방법이겠구나. 발원(發源)으로부터 직접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반사된 것을 받아들이거나.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눈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귀
제 얼굴 거울에 많이 비춰도
자신을 알기는 정말 어려워
눈과 귀마저 의심스러운 요즘
뭔가를 보고 듣는다는 것. ‘제대로’라는 조건을 붙이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에도 얼마나 많은 오류를 경험했었던가. 백내장을 앓아본 적 있는 나는 사물의 윤곽을 뚜렷이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했었다. 더구나, 하나의 사물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본다는 것도 경험했었다. 어찌 보면, 한 개의 사과를 열 명의 사람이 보는 순간, 열 개의 다른 사과가 생성되는 셈이다. 결국, 세상엔 똑같은 사물이 없고, 똑같은 소리도 없다.
직접 보는 것에 이런 차이가 있을진대, 반사된 것을 보고 듣는 경우엔 얼마나 왜곡되고 비틀어질지 상상도 할 수 없다. 한데, 요즘에는 상상이 아니라 현실로 볼 수 있다. 똑같은 사건에 어떤 사람들은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 반응을 보인다. 같은 사건을 보고도 어찌 저리 다른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철학자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라는 것이 있다. 이 비유는 평생을 동굴 속에 갇힌 죄수들이 있다는 가정으로 시작된다. 죄수들은 오직 동굴 벽에 비치는 그림자만을 볼 수 있도록 묶여 있다. 그래서 동굴 벽에 비치는 그림자만 보고 바깥 상황을 이해했다. 그러다가 한 죄수가 풀려나 동굴 바깥으로 나가게 된다. 그 죄수는 비로소 바깥에 태양이 있으며, 나무와 새가 있는 ‘진짜’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다시 동굴로 돌아와 죄수들에게 알려준다. 벽에 비친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라 단순한 ‘반영’에 불과하며 진짜 세계는 따로 있다. 그러나 죄수들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태어나서 오직 벽에 비친 그림자만을 본 그들은 그림자가 ‘진짜’라고 믿는다. 오히려 그를 조롱하고 위협한다. 죄수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우리 눈으로 직접 봤어! 넌 밖에 나가서 대체 무슨 헛것을 본 거야?
나는 과연 동굴 속 죄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본 것이 진짜라는 것을 무엇으로 확신할 수 있을까? 세상은 아니라고 하는데, 나 혼자 저 바깥의 태양과 새 소리를 보고 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눈과 귀를 가졌을까?
집에 도착해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가 발을 씻었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새삼스레 살펴봤다. 삶에 닳아 늘어진 눈매와, 늘어진 만큼 아래로 꺼진 입매가 볼썽사납다. 눈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눈이며, 뒤로 말려 주름진 귀는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는 귀다.
못생긴 귀를 잡아당기다 보니 문뜩 빈센트 반 고흐가 생각났다. 그도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을 살펴봤을 테지. 어쩌면 그는 진실처럼 떠들어대는 환청을 막으려 귀를 잘라냈을지 모른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정말 어렵다.” 고흐는 이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그는 수십 번이나 자화상을 그렸다. 그것을 위해 제 얼굴을 얼마나 많이 비춰봤을까? 나는 공연히 우울해져 얼굴의 물기를 닦아냈다. 나 자신의 눈과 귀마저 의심스러워지는 오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