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철의 사리 분별] 비정규직의 눈물, 조선 도공의 탄식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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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대기업 비정규직 역대 최고치 기록
1만 명 이상 사업장선 46.2% 달해
인간을 ‘비용’으로 여기는 풍조 만연

푸대접에 세계 초일류 기술 못 살린
조선 도공 참담한 역사 되풀이하나
인간 중심 가치관 기반한 정책 펴야

경제 상황이 암울하다. 다양한 통계뿐만 아니라 경제 현장을 뒤덮은 짙은 먹구름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불황의 늪에 빠진 한국의 현실을 보여준다. 비상계엄으로 촉발된 불안감과 불확실성 확산까지 겹치면서 기업, 자영업자, 임금 생활자 등 거의 모든 경제 주체들이 비명을 내지른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러야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쉽게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우세하다. 근본적 이유는 무엇일까.


고용 형태 차별에 따른 저임금의 악순환이 경제 현장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우리 사회 곳곳에서 심각한 갈등과 부작용을 유발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로 촉발된 고용 불안과 임금 절벽, 노후 불안, 경쟁 심화, 좋은 일자리 감소 등이 기나긴 경기 침체와 맞물리면서 인간을 ‘비용’으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다. 이를 입증하는 가장 명확한 지표는 비정규직 고용이 급증한 것이다. 과거 정규직 업무의 상당 부분을 아르바이트 직원, 파견직(소속 외 노동자), 계약직, 무기 계약직 등 ‘광의의 비정규직’으로 분류되는 이른바 최저임금 노동자들이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고물가 시대에 최저임금 또는 그 이하의 급여로 생활하는 노동자들이 사명감을 갖고 신명나게 일할 수 있을까. 경제 현장의 고착화된 ‘계급주의’는 일터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기업 미래마저 불투명하게 한다. 기업이 도산하는 표면적 이유는 매출 감소 또는 사양산업화이지만 실제 원인은 인적자원 운용 실패에 기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섭섭하게 대하면 망한다는 격언이 생겨난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즉, 기업 비용 절감을 위해 도입된 근시안적인 인력 정책은 후일 기업 존속과 경제 성장, 국가 경쟁력을 저해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인간 중심의 정책과 가치관 실종이 초래한 재앙에 직면한 셈이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대기업 비정규직 규모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300인 이상 고용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비정규직 인원(소속 외 노동자 포함)은 약 238만 명으로 집계됐다. 전체의 41.2%에 달한다. 고용형태공시제를 시작한 2014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라고 한다. 1만 명 이상 대기업의 비정규직 비율은 46.2%에 달한 것으로 분석됐다. 이 보고서를 두고 고용노동부는 실제 대기업 소속 비정규직의 비중은 16%라고 해명하고 있으나 이 역시도 좁은 안목에 불과하다. 대기업을 위해 노동을 제공하는 소속 외 노동자 등 ‘광의의 비정규직’이 늘어났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더욱이 대기업은 한국 경제를 이끄는 초석이자 미래 경쟁력을 창출하는 역할을 한다. 대기업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의 비율이 50%에 육박한다는 것은 우리 경제에 ‘경고등’이 켜진 것이다.

임금 절벽에 절규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는 조선 도공들이 겪은 끔찍한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1697년 음력 3월 6일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내용은 참담하다. ‘(광주 관요에서) 굶어 죽은 자가 39명, 힘이 없어 문밖 거동을 못하는 자가 63명, 가족이 흩어진 집은 24가구였다.’ 이에 앞서 조선왕조실록은 1421년 4월 당시 공조에서 올린 상소를 기록했다. ‘진상된 그릇이 오래잖아 파손되니 밑바닥에 장인의 이름을 써 넣어 공들여 만들지 않은 자에게 물어내게 하소서.’ 조선 도공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당시 도공은 천민 대우를 받았다. 장인으로서의 긍지를 느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적합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오죽하면 국가가 운영하는 관요 종사자가 굶어 죽는 일이 발생했을까.

조선은 당시 유럽에서 최첨단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각광받은 자기 생산 기술을 가진 나라였다. 요즘으로 치면 ‘반도체 기술’을 보유한 셈이다. 당시 자기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조선, 임진왜란 때 끌고 간 조선 도공들 덕분에 자기 문화를 꽃피운 일본 등에 불과했다. 하지만 조선은 초일류 기술을 보유한 도공들을 푸대접했다. 그 결과로 기술은 무뎌지고 제대로 전승되지 못했다. 결국 조선은 ‘삼성전자’를 스스로 도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조선 자기 산업이 몰락한 것은 정부의 무능,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신분제, 장기 비전의 실종, 세계 정세 무지에 따른 것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인간 중심의 가치관, 장기적 안목이 결여된 것이었다.

현재 정부와 기업들이 조선 도공들의 설움을 외면한 조선의 국가 경영자들을 답습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스럽다. 조선 도공들은 지금의 한국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조선 도공들의 절규는 우리 사회 비정규직의 절규이기도 하다. 무분별한 비정규직 채용을 막고 고용 제도를 재정비하자. 긴 안목으로 인간 중심의 정책을 펴야 한다는 뒤늦은 자각만이 유일한 ‘희망의 씨앗’일 것이다.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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