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모든 살아 있는 것
서정아 소설가
'죽어가는 것'?
여전히 살아 있다는 역설
비겁하고 무심한 나태 버리고
생명 지닌 존재 끝까지 사랑할 때
여리고도 굳센 생명의 힘 발아할 것
사탕을 사러 편의점에 갔을 때였다. 진열대를 둘러보고 있는데 할아버지 손님 한 분이 들어왔다. 그는 생수 한 병을 사면서 편의점 주인에게 작은 상자를 하나만 달라고 부탁했다. 요 앞 나무 위에서 새들끼리 싸우다가 한 마리가 다쳐서 떨어졌는데, 물이라도 좀 먹여야 할 것 같다고 말이다. 나이가 지긋한 편의점 주인은 작은 과자 상자를 하나 꺼내서 건네주더니 손님이 가져온 생수를 보며 말했다. “새 먹일 거라면서 뭐 그리 좋은 물을 삽니까. 하필 제일 비싼 걸 가져왔네. 그거 말고 싼 거 사 가소.” 그러자 그는 비싸다는 생수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으며 대답했다. “그냥 이걸로 주소.” “새 먹인다 안 했습니까?” “새도 먹고… 나도 먹고….” “그리 해도 어차피 죽습니다. 다쳐서 못 날면 금방 죽어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그 전까지의 온화한 말투를 거두고 약간 화가 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안 죽어요! 어차피 죽는 게 어딨습니까. 지금 살아 있는데.” 나는 한참 동안 사탕을 고르지 못하고 진열대 앞에 서 있었다. 언젠가 죽을 운명이라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생명의 존엄 앞에, 자본이 매긴 물의 가격표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탕을 사서 밖으로 나갔더니 편의점 앞 널찍한 반석에 그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편의점에서 얻은 과자 상자에 다친 새를 넣어두고 생수 뚜껑에 물을 따라 새의 부리 앞에 대주는 중이었다. 옅은 회색빛의 깃털에, 몸체가 작고 꽁지가 긴, 드물게 예쁜 새였다. 나는 그 앞에 멈춰서서 새와 할아버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새는 상자 안에서 몸을 뒤척이며 날갯짓을 해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는 것 같았고, 할아버지는 그런 새를 안쓰럽게 쳐다보며 계속해서 부리에 물을 대주고 있었다. 이거라도 먹어야 산다고 중얼거리면서. 그러다 내 눈길을 느꼈는지, 할아버지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뭐라고 입을 열었다. 나는 무슨 말인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낯선 이의 시선에 기분이 상하신 건가 싶어 조심스럽게 “네?”하고 되물었다. 할아버지는 다시 또박또박 내게 말했다. “새에 대해 조예가 좀 있으십니까?” 그건 질문이라기보다 도움을 청하는 말 같았다. 그렇지 않다고, 잘 모른다고 고개를 젓자 할아버지는 낙담한 눈치였다. 그 순간 나 자신이 무력하게만 느껴졌고, 돌아서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베란다 구석에 놓여진 화분을 보았다. 거기엔 빼꼼히 고개를 내민 작은 싹이 있었다. 작년 봄에 동네 꽃집에서 샀던 조그만 튤립 화분이었는데, 꽃이 진 후 줄기를 잘라 구근만 남은 화분을 베란다 귀퉁이에 방치해 두었었다. 두 계절이 지나도록 물도 주지 않고 구근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그 메마르고 차가운 흙에서 연둣빛 싹이 고개를 내민 것이다. 문득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했던 윤동주의 시구절이 떠올랐다. ‘죽어가는 것’은 역설적으로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므로, 그 말은 비극적이거나 염세적인 의미가 아니라 생명을 지닌 존재들을 끝까지 사랑하겠다는 의지의 피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죽어가는 것들을 끝까지 사랑했던가. 죽음 이후가 두려워 지레 뒷걸음질 치거나, 어차피 죽을 거라고 체념하고 일찌감치 정성을 거두어들이지는 않았었나. 혹은, 아직 남아 있는 생명의 숨결을 보지 못한 채 이미 죽었다고 여기며 그저 방치해 두었던 것은 아닐까. 다친 새에게 끝까지 물 한 모금을 먹여보려던 그 할아버지의 간절한 손길을 떠올리면, 아직 죽지 않은 튤립 구근을 무심히 방치했던 나의 나태가 부끄럽다. 그렇지만 한겨울의 추위와 나의 무심함을 뚫고 새싹은 올라왔다. ‘모든 죽어가는 것’, 아니,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여리고도 굳센 힘으로, 마침내 봄은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