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달식의 일필일침] 설계 지침서 없이 국제공모 하려 했나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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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1부두 창고 ‘글로벌 창업허브 부산’
설계 지침서 미비로 공모 일시 중지
“국제적으로 너무나 부끄러운 일”
연면적 확대로 증축 등 범위 명기 필요
관련 전문가 등과 사전 논의했어야
도시설계에 대한 부산시 고민 요구돼

모든 운동 경기에는 규칙(rule)이 있다. 그걸 지키지 않으면 경기가 진행될 수 없고 승부를 가릴 수도 없다. 규칙이 없는 경기는 있을 수 없지만, 설령 규칙 없는 경기가 있다 해도 그 경기는 난장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건축에서는 어떨까? 설계 지침서가 규칙 역할을 한다. 설계 지침서는 건물을 설계할 때 지켜야 할 사항을 명시한 지침서다. 이게 있어야 여기에 준해 관련 건물을 지을 수 있다. 흔히 건축 설계공모나 설계용역 등에 사용한다.

부산시와 부산창조경제혁신센터는 지난달 13일 부산항 북항 제1부두 내 물류창고 등을 대상으로 ‘글로벌 창업허브 부산’ 건립을 위한 국제설계공모를 시작했다. 2026년 상반기 개소를 목표로 북항 1부두 내 창고를 리모델링해 프랑스 파리의 ‘스테이션 F’처럼 세계적인 창업 공간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이 공모는 1단계 지명 신청과 2단계 제안 공모를 거쳐 최종 설계안을 선정하기로 했다. 이에 지난달 24일까지 지명 신청서를 받아 2월 3일 지명 건축가를 선정하고, 5일부터 이들이 낸 설계안을 대상으로 심사를 해 3월 말에 최종 당선자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37개 팀의 지명 신청을 받아 지난 3일 제안 공모에 참여할 5개 팀을 선정한 뒤 2단계에서 사실상 멈춰 있는 상태다. 1단계 지침서는 공모 이전에 마련됐지만 정작 2단계 제안 공모에 적용될 설계 지침서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지역의 한 건축가는 “2단계 설계 지침서가 준비되지 않아 공모 일정이 지연된 것은 국제적으로 우사”라고 지적했다. 여러 국제설계공모를 보더라도 설계 지침서 미비를 이유로 당초 일정이 늦춰지는 일은 거의 없다. 사업 주관사인 부산시로서는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다.

공모 대상지인 부산항 북항 1부두와 물류창고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1912년 준공된 1부두는 부산과 외부 세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또한 이곳은 과거의 아픔과 희망이 공존하는 장소로 부산시문화유산으로 주목받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준비 중이다. 이런 공간인 만큼 국제설계공모에 앞서 보존과 리모델링의 범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설계 지침서에 구체적으로 명기할 필요가 있다.

또한 1단계 지명 신청 공모에서 밝혀진 대로 물류창고의 연면적을 기존 4213㎡에서 9128㎡로 확장하는 계획이라면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안내도 2단계 설계 지침서에 명확히 포함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건물 증축(복층)과 구조 보강이 필요한데 이는 간단하지 않은 작업이다. 또한 문화유산을 다뤄본 경험이 없는 업체가 선정되었을 경우 협업체를 둘 것인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부산시와 발주처는 이러한 사항들이 충분히 정리된 상태에서 국제설계공모를 진행해야 했다. 하지만 2단계 제안 공모 전에 설계 지침서를 마련하지 못한 것은 관련 부서 간 협의나 전문가들과의 심도 깊은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부산시와 창조경제혁신센터는 뒤늦게 이런 문제점을 인지하고 제안 공모에 참여할 5개 팀에 양해를 구하고 공모 진행을 일시 중지시켜 놓았다. 애초 부산시나 센터는 1단계 공모 후에 논의해도 충분할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판단이었다. 단순한 대지에 건물을 세우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 결과다. 결국 경기 규칙도 제대로 만들지 않고 팀만 먼저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 셈이다.

1부두 창고에 글로벌 창업허브가 굳이 들어가야 할 당위성도 여전히 부족하다. 과거 도시들은 외적 성장에 집중했으나 현재는 문화예술을 바탕으로 창조적 콘텐츠를 만들어 고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일본 요코하마 아카렌가 창고 사례는 부산이 참고할 만하다. 원래 선박 세관 검사장이었던 이 창고는 도시 재개발을 통해 역사성을 살리며 문화와 상업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이제는 요코하마에서 꼭 가봐야 할 명소로 자리 잡았다. 도시가 사랑받기 위해선 시민과 방문자가 공감할 수 있는 요소가 필요하다. 요코하마는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아카렌가 창고를 활용해 사람을 모이게 하고 공간을 변화시키며 도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부산항 1부두 창고가 아카렌가 창고를 뛰어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러려면 부산시의 고민이 좀 더 필요하다.

21세기 도시는 창조성 안에서 변화와 혁신을 거듭하며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도시의 정체성을 잘 담은 도시 브랜드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사람의 성격 유형을 나타내는 MBTI처럼 도시에도 고유한 정체성이 있다. 도시 정체성을 찾아야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 부산시의 도시 정책, 그리고 행정의 약점은 이런 도시설계를 가볍게 여긴다는 점이다.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더 고민하고 숙고해야 한다. 도시설계에 대한 부산시의 고민이 더 세밀하고 깊었으면 한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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