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아버지의 아비투스
이국환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설 연휴, 아버지는 자식들과 손주들을 반기며 두둑이 쌓인 신문 앞으로 모이게 했다. 평소 중앙과 지역 일간지 두 종을 구독하는 아버지는 매일 꼼꼼하게 신문을 읽고 밑줄을 그으며 여백에 필기한다. 가끔 자식들에게 보여줄 기사나 칼럼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기도 하는데, 명절은 보내지 못한 신문을 직접 읽게 하는 날이다. 덕분에 어린 손주들은 내가 쓴 칼럼까지 읽어야 했으니, 그 원망의 눈길을 피하고자 나는 얼른 주방 쪽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일을 시작한 까닭에, 제대로 교육받을 기회가 없었다. 아버지에게 신문은 교과서였다. 신문을 읽으며 독학으로 한자와 영어를 익혔고, 아들이 모르는 한자가 있다며 물으면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책이 귀했던 시절, 나는 국한문 혼용 신문을 읽으며 문해력을 길렀고, 덕분에 꽤 어려운 도서관 책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읽는 인간인 호모 부커스로서의 나는 존재할 수 없었다.
필요한 만큼 소비하는 아버지
매일 신문 읽으며 공부
상류층 자본 안 물려줬어도
읽는 인간으로서 아비투스
소중한 문화자본 전해 줘
20세기를 대표하는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가족이 계급 재생산이 이뤄지는 가장 중요한 단위이고, 부모의 아비투스가 자녀에게 세습된다고 하였다. 아비투스는 우리말로 습관 혹은 취향에 가까우나 적확하게 대체할 용어를 찾기 어렵다. 아비투스는 개인의 몸속에 체화되며, 그가 속한 사회적 위상이나 계급을 반영한다.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를 다룬 책 〈구별짓기〉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주는 자본을 네 가지로 정리한다. 자산을 뜻하는 경제자본과 취향, 학력, 교양 등을 아우르는 문화자본, 인맥을 좌우하는 사회자본, 명성과 명예에 해당하는 상징자본 등이 세습된다. 〈구별짓기〉는 1960년대 프랑스 사회를 대상으로 했기에 현재 우리 사회와 거리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 책이 고전으로 읽히는 이유는 부르디외의 문제의식과 통찰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경제자본인 부의 대물림은 어느 사회에서나 흔한 일이다. 부르디외는 계급 불평등을 고착하고 재생산하는 기제로 단순히 부만 아니라 여러 자본이 함께 작용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으며, 그가 특히 주목한 것은 문화자본인 취향이다. 부르디외는 〈구별짓기〉에서 “취향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모든 것, 즉 인간과 사물 그리고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할 수 있는 모든 것의 기준”이라 말한다.
돌이켜보니, 아버지가 물려준 아비투스는 읽기 취향이었다. 기업에 근무하는 동생과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읽고, 성과주체로서 자신을 착취하며 사는 우리가 어떻게 자유롭고 행복해질 수 있는지, 고민을 나눌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가 물려준 취향의 문화자본, 즉 아비투스 덕분이었다.
학력은 제도화된 문화자본이다. 계급 불평등의 세습을 우려했던 부르디외 역시 계급 세습의 주된 통로가 교육이라 말한다. 상류층은 경제자본을 바탕으로 차별화된 교육을 제공함으로써 자녀에게 문화자본을 전승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교육을 통한 사회적 상승 이동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양극화로 사회 불평등은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사회의 계급은 소비의 구별짓기로 표상한다. 옷이 없어 옷을 사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필요가치가 아니라,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기호가치를 소비하며 살아간다. 상류층은 구별짓고자 과시소비로 달아나고 중산층은 눈치껏 이를 뒤쫓으며 하류층은 체념한다.
아버지는 기호소비나 과시소비를 하지 않는 검약한 분이었다. 필요한 만큼만 소비하는 아버지, 매일 신문을 읽으며 공부하는 아버지는 상류층의 자본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았으나, 읽는 인간으로서의 아비투스를 소중한 문화자본으로 전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