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의 인사이트] 아픈 국민은 더 서럽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논설위원

4개 대학병원 갖춘 부산도 위기 심각
구급차 분만, 응급실 뺑뺑이 비일비재

국민, 난데없는 전쟁터 난민 체험 중
부산대병원 위·폐·간·대장암 진료 차질

정부·의협 등 국민 위한 결단 내리길
국민에게 희망 주는 측이 진정한 승자

‘아프지 말자. 다치지 말자!’ 2025년 새해 다짐이다. 매년 하는 신년 결심이지만, 올해는 조금 처절하다. 지난해 망년회에서 만난 부산의 한 대학병원 의사 K 교수 때문이다. K 교수는 “혹시 크게 다치더라도, 우리 병원에서 치료 못 해 드립니다. 칼 잡을 의사가 없어요. 의료 파업 끝날 때까지는 절대 다치지도, 아프지도 마세요”라고 간곡하게 말했다. 수북한 소주병 너머로 목소리마저 흐릿했지만, “다치면 죽을 수 있다”라는 위기감에 술이 다 깰 정도였다. 실제로 최근에 간 파열로 복강에 피가 가득 차 부산의 한 중형병원 야간 응급실에 입원한 60대 남성을 지역 대학병원에서 수술하지 못해, 119구급헬기로 서울로 긴급 이송했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대학병원 영상의학과 전문의가 혈관 촬영을 통해 출혈 부분을 막는 처치로 위기를 넘길 수 있는 어렵지 않은 수술이었다. 부산의 모든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고,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 겨우 연락이 돼 환자를 살릴 수 있었다.

‘야간 긴급 수혈→영상의학과 교수 호출 및 시술→중환자실 사후 처치’를 담당할 전공의가 의료 파업 이후 사라졌기 때문이다. 응급실을 찾지 못해 구급차 안에서 분만하는 뉴스는 새롭지도 않을 정도다. 전쟁터에서나 상상할 수 있는 일이 대한민국 제2 도시 부산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2025년 대한민국에서 전 국민이 난민 체험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1년간 전공의 없는 병원에서 수술 준비부터 처치, 진통제 처방까지 업무를 도맡았던 대학병원 교수들은 이제는 지쳐서 더 이상 환자를 보지 못하겠다고 손사래 치는 형편이다. 4개의 대학병원을 가진 부산에서 간단한 처치로 치료가 가능한 병으로도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누군가는 심각한 산업재해나 교통사고, 강력범죄의 피해로 대학병원을 찾을 수밖에 없지만, 이젠 안심할 수가 없다. 국민의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이다.

이런 현상은 올해 더욱 심해질 양상이다. 영남권 최대 거점 병원인 부산대병원에서 위암, 폐암, 간암, 대장암을 진료하는 혈액종양내과 의료진 5명 중에서 퇴사와 병가로 2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지역 최고의 부산대병원이 이런 중증 치료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른 대학병원, 다른 과도 간당간당한 실정이다. 시스템이 아닌 버티기로는 한계점에 이르렀다. 그동안 대학병원에서 진료하지 못하는 환자들을 담당했던 지역 중형병원의 경우 의사 부족으로 신장내과 등 몇몇 과는 수술에 두달 이상 기다리기 일쑤다. 의사들의 피로 누적으로 일부 과는 야간 당직을 중단하는 상황까지 이르고 있다. 이 와중에 맹추위로 인한 독감 환자들이 한겨울밤 병원 응급실 앞에서 ‘호흡기내과 전문의가 없다’는 이유로 진료를 거부당하고 동동거리는 신세다.

문제는 의료 대란이 발생한 지 벌써 1년이 가까워지지만, 비상계엄 사태와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의 고성에 묻혀 환자들의 고통은 관심조차 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정국 혼란으로 환자와 보호자의 간절함을 해결할 주체도, 의지도, 동력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태 촉발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가물거릴 정도이다. 병원에서 자기 차례만 마냥 기다리는 환자들만 애를 태우고 있다. 하소연할 곳도, 분노할 시간조차도 없이 허둥지둥할 뿐이다. 암 환자들은 수술이 지연될수록 암세포가 커져 안절부절한다. 김영란법 이후 공공병원 예약 청탁은 법으로 금지됐지만, 환자와 보호자들은 학연·지연·혈연 등 ‘빽과 네트워크’를 모두 동원해서 외래 진료와 입원 예약을 잡는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결국 난리통에 힘없고 ‘빽’ 없는 서민만 더 힘들게 생겼다. “아픈 놈만 서럽다”는 어른들 말씀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

설 연휴가 다가오고 있다. 눈 내리고, 추운 계절에 민족 대이동으로 누군가는 불행한 사고를 당할 수 있다. ‘아프고, 다치면 응급실 가면 되지’라는 그 당연한 사실이 이렇게 힘든 일이 되었다. 아무리 나라가 어수선하지만, 이제는 정치권과 정부, 의료인, 대학이 모두 머리를 맞대고 당면한 의료 대란을 해결하길 간절히 바란다. 마침 8일 대한의사협회 제43대 신임 회장이 선출된다. 국민은 의사가 이겨도 되고, 정부가 이겨도 된다. 이기고 지는 ‘명분 싸움’이 아니라, 살고 죽느냐의 ‘생존 게임’이기 때문이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중환자들이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측이 진실로 이긴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패배자다. 신임 의협회장과 전공의 단체, 정부, 정치권, 대학까지 모두가 테이블에 앉아서 어떻게 국민을 살릴 것인지만 이야기해야 한다. 새해 결심을 되뇌어 본다. “아프지 말자. 다치지 말자.”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