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비틀어진 확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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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 소설가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다
타인의 희생을 강요한다
거창한 깃발을 휘두르지만
사욕을 위한 확신일 뿐이다
자신을 내건 '희생'이 빠졌다

1970년대,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하고 끔찍한 비극 중에 하나로 불리는 사건이 있었다. 소위 ‘킬링필드’라 불리는 이 참극은 캄보디아의 폴 포트가 주도하던 크메르루주가 자국민에게 행한 대량 학살을 일컫는다. 정권을 잡은 폴 포트는 이제까지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앙코르 왕국보다 더 멋진 미래라는 깃발을 세웠다. 미래를 향한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두 없애야 하며 ‘불완전한 인간 1명이 있느니 아무도 없는 게 더 낫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확신의 결과로 폴 포트가 집권했던 3년 6개월 동안 750만 명이었던 캄보디아의 인구가 672만 명으로 줄었다. 최소 130만 명 이상에 달하는 자국민들을 학살한 폴 포트는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이자 학살자로 꼽힌다.

폴 포트가 몰락한 후 연금 상태에서도 그는 확신에 찬 말을 남겼다. “내 양심은 깨끗하다. 통치 중에 우리의 운동이 실수를 저지르긴 했어도 캄보디아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이었고, 베트남 침공으로부터 이들을 구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었으며 나는 투쟁을 수행한 것이다.”

나는 폴 포트를 ‘비틀어진 확신자’라고 이름 지었다. 캄보디아에는 아직도 폴 포트를 옹호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폴 포트가 베트남으로부터 캄보디아를 지키려 했던 국가적 영웅이라 주장한다. 폴 포트가 저지른 자국민 학살도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고 생각한다. 이들 또한 확신자에 속한다.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독재자는 또 있다. 히틀러와 스탈린. 3대를 세습한 김정은 정권,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적도기니 공화국의 마시아스 응게마, 우간다의 이디 아민 등은 독재자 명단에서도 앞줄을 차지하고 있는 자들이다. 이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로 그들은 언제나 화려한 깃발을 내걸고 확신에 찬 구호를 외쳤다. 억압받는 국민을 위해 나섰다고 주장했고, 풍요롭고 평등한 사회를 위한 투쟁이라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어떤 짓을 벌였고 또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두 번째는 자신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자를 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확신자에게 제기된 다른 주장은 전진을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이다. 그래서 권력을 쟁취한 그들의 최우선 순위는 바로 반대 세력의 척결이었다. 이러쿵저러쿵 쓴소리를 내뱉는 정치인, 언론과 지식인들을 제거했다. 이런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 혼란과 경제의 몰락은 모두 반대 세력 탓이라 몰아세운다.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비틀어진 확신자’는 결코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의 희생을 강요한다. ‘확신’의 주체가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거창한 깃발을 휘두르지만, 결국 사욕을 위한 확신일 뿐이다. 사실, 확신하는 자라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장의 계기가 되고, 변혁과 창조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구국의 영웅을 탄생시킬 신념이 되기도 한다. 이들은 비틀어진 확신자들이 결코 해내지 못할 것을 해낸다. 그건 바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건 ‘희생’이다. 그래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누군가의 희생을 안타까워한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확신하지 못하는 부류이다. 그래서 권력의 전당에서 아우성치고 있는 수많은 확신하는 자들을 살펴볼 뿐이다. 그들이 화려한 깃발만 휘두르는 건지. 결연히 반대하는 자들을 어떻게 상대하는지, 그리고 어떤 순간에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는지 두려운 마음으로 살펴본다. 비틀어진 확신자는 우리 주위에 늘 있었으며, 나는 불확실한 미래를 선택할 단 하나의 표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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