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맥주와 정치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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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는 맥주가 종종 정치적 성향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맥주는 와인이나 위스키와 달리 일종의 연대감을 형성하는 음료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2023년 미국의 맥주 버드라이트 제조회사는 한 트랜스젠더 인플루언서에게 맥주를 협찬한 게 논란이 됐다. 이를 알게 된 미국 내 보수 성향 정치인들과 인플루언서들이 강한 반감을 표하며 버드라이트를 보이콧했다. 이들은 성소수자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신들이 즐겨 마시던 맥주에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그 결과 버드라이트의 매출과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이 사건은 맥주가 단순한 음료 이상의 정치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맥주는 때때로 정당 이름으로도 등장하는데, 유럽에서는 이미 30여 년 전부터 ‘맥주당’이 존재해 왔다.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의 맥주당이 1990년대 소련 공산주의가 몰락한 시기에 창당했다는 것이다. 그 시작은 1990년 12월 창당한 폴란드 맥주애호가당이다. 이듬해 총선에서 16석을 차지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후 총선에서 의석을 얻지 못하고 사라졌다. 비슷한 시기에 체코,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노르웨이 등에서 맥주를 내건 정당이 등장한다. 이들 정당은 불안정한 민주주의와 기성 정당에 대한 대안으로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정치적 확장성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후에는 2014년 창당한 오스트리아의 맥주당이 주목받았다. 2022년 10월 치러진 대선에서 득표율 3위에 오른 30대 젊은 청년 도미닉 블라즈니가 속한 당이 오스트리아 맥주당이기 때문이다. 이 당은 정치 무력증에 빠진 기존 유권자를 선거로 불러 모으는 계기를 만들었다.

최근 러시아에서는 1990년대 잠깐 활동했다가 사라졌던 맥주애호가당이 다시 등장했다. 러시아 일간지 코메르산트에 따르면 지난 5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맥주애호가당 재창당 총회가 열렸다. 부활한 이 정당은 현 정부에 진보적인 대안을 제시하겠단 포부도 밝혔다. 앞서 이 당은 1994년 러시아 법무부에 등록돼 1998년까지 존재했지만,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러한 흐름에서 보면, 이 당이 향후 선거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얻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오늘날 맥주는 대중에게 정치적 낭만을 제공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술 소비량이 많은 우리나라에도 맥주당이 생긴다면 어떤 정치를 보여줄지 사뭇 궁금하다. 어쩌면 맥주당보다는 소주당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답답한 속을 푸는 데는 소주가 제격이다. 국내 정치를 바라보면 속이 터질 지경이니 말이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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