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생태학살은 범죄"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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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환경운동가 레이첼 카슨의 책 〈침묵의 봄〉은 무분별한 살충제 사용으로 인해 지구 생태계가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나아가 생태계 파괴가 토양과 물, 야생동물, 그리고 인간에게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도 깊이 있는 논의를 펼친다. 이처럼 지구 생태계에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악영향을 불러오는 파괴 행위를 흔히 에코사이드(ecocide)라고 한다. 이는 환경을 뜻하는 에코(eco)와 집단학살을 의미하는 제노사이드(genocide)를 합쳐서 만든 단어다. 제노사이드는 인간 집단학살, 에코사이드는 생태학살을 뜻한다.

에코사이드의 대표적 사례로는 베트남전쟁 당시 일어난 고엽제 사건을 꼽을 수 있다. 미군은 베트콩의 은신처를 없애고, 유리한 전투환경을 조성할 목적으로 고엽제를 대량 살포했다. 이로 인해 베트남 전체 산림의 5분의 1 이상이 파괴된다. 수백만 명이 고엽제에 노출돼 40만 명이 사망하고, 15만 명의 기형아가 태어나기도 했다.

무엇보다 전쟁에서는 제노사이드와 에코사이드가 동시에 일어나 인간과 지구 생태계를 파괴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2월 우크라이나 환경부는 이 전쟁이 막대한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심각한 에코사이드를 일으킨 환경 범죄라는 분석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베트남전 이후, 에코사이드를 국제법상 범죄로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베트남을 시작으로 10여 개 국가가 자국 법에서 에코사이드를 범죄로 규정하는 법을 제정했다. 유럽연합(EU)에서도 에코사이드 법제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일부 환경단체와 국가는 에코사이드를 국제형사재판소(ICC)에서 처벌할 수 있는 국제범죄로 규정하자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최근 바누아투, 피지, 사모아 등 태평양 세 도서국은 ICC에 에코사이드를 범죄로 인정하자는 규정 변경 제안서를 제출했다. 심각한 환경파괴를 일으킨 개인을 법정에 세우자는 것이다. 이들 국가의 주장은 자국의 탄소 배출량은 미미하지만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침수 위기 등 기후변화에 따른 피해가 심각하다는 현실적인 위기감에서 비롯된다.

세계 곳곳에서는 여전히 에코사이드가 자행되고 있다. 심지어 전쟁이 없는 곳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브라질의 무분별한 아마존 산림 벌채, 일본의 원전 오염수 방류도 같은 맥락이다. 환경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피해를 주는 에코사이드를 이제 국제범죄에 포함시킬 때가 됐다. 그래야 지구가 산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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